책상 머리에 당시唐詩를 두고 수시로 읽다보니 이백이나 두보의 시에는 안록산의 난이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안록산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하여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았다
안록산은 알려지다시피 한족漢族, 그러니까 정통 중국인이 아니고 아버지는 소그드인, 어머니는 돌궐족이었다고 한다
소그드人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그 중에서 <부하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安이라는 성姓을 썼단다
그 조상들이 난리를 피하여 중국, 그러니 당시의 唐으로 들어왔다
돌궐은 오늘날 터키다. 돌궐족은 원래 중국 북방에 살다가 중국인들에 쫓겨 오늘의 터키까지 이주하였다
안록산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버지와 터키 출신 어머니를 둔 국제인이었고 중국인들이 보면 잡호雜胡(잡종 오랑캐)였다
안록산은 6개 국어를 구사한데다 호선무胡旋舞라는 춤을 잘 추었는데 이는 커다란 공 위에서 추는 춤이라니 운동신경이 매우 발달한 것으로 보여진다
넉살이 좋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는 중국의 동쪽인 오늘의 요령성에 살면서 젊어서는 장수규라는 사람을 섬겼는데 차츰 두각을 나타내어 나이 40무렵에는 평로(오늘의 朝陽)절도사가 되었다
절도사는 당의 변방을 지키는 군사책임자인데 휘하에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으므로 한인이 아닌 오랑캐에게 맡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전방 사단장을 외국인에게 맡기는 꼴이니..)
그러나 당시 당은 평화가 오래 지속된데다 재상인 이임보가 한인들이 군대를 거느리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랑캐에게 맡겼다고 한다. 오랑캐가 감히 한인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겠느냐는 자만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안록산은 중앙에서 환관이나 감독관이 오면 막대한 뇌물을 안겨주어 차츰 현종의 귀에도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현종에게 불려가 신임을 받은 후에는 범양(오늘의 북경)과 하동(오늘의 태원)절도사를 겸하게 되었다
당의 군사 1/3이 안록산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장안에서는 이임보가 죽고 양귀비의 집안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는데 이 친구도 수준미달이었던 모양이다
양국충은 현종의 총애를 받는 안록산을 미워하여 그와 반목하게 되었는데 안록산은 양국충이 현종을 충동하여 자신을 해직할 것을 두려워하여 755. 결국 난을 일으킨다
오랜 평화로 당의 군대는 오합지졸인 반면 안록산의 군대는 변방에서 거란 등 오랑캐와 싸워 본 경험이 많은 강군이라 파죽지세로 낙양까지 밀고 내려갔다
기고만장한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칭하고(원래 그 이전에 산동 지방에 연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황제로 등극하였다
다음해에는 장안까지 함락시켰고 이에 현종은 멀리 도망을 갔다
도망가던 중 난을 일으킨 원인이 된 양국충은 현종의 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며 군사들은 내친 김에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양귀비까지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록산은 애첩 소생을 편애하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아들 안경서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견훤도, 이성계도 애첩 소생을 편애하다가 본처 소생 아들에게 허무한 꼴을 당하였는데 사람사는 꼴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안록산의 친구였던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였으나 사사명도 다른 아들을 편애하여 버거운 아들 사조의를 죽이려다 도리어 사조의에게 살해당하였고 나중에 사조의는 사세 불리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네..) 763년에 난이 끝나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도, 백제 부흥군도 지휘부 내에서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다 거꾸러졌으니 역사는 돌고도는 것.
이 난리로 당의 가구家口가 70%나 줄어 들어(30%만 남았다는 말. 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으니 나라꼴이..) 당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백의 나이 54세 때, 두보의 나이 43세 때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니 두 시인의 시에 이 난리가 수시로 언급되었던 것이다
國破山河在, 곧 나라는 망하였지만 山河는 그대로구나..
라는 두보의 푸념도 이 난리를 읊은 것이네
은행나무(이인구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