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 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은 '혼적','표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위치'를 뜻하는 '토폰'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역시 추측일 뿐이다.
[요 20: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지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요 20: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예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고전 6:6;14:22과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 이럴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요 20: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차하다고 할 수 있다.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되신 분이다.
[요 20: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룻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욘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요 20: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 그 만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륵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를 소개할 때,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 그리고 예수 자신이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헌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생명을 얻음'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