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스리움레드를 보며
임병식
안스리움레드와 자주 눈이 마주친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붉은 잎 하나가 시선을 붙잡기 때문이다.
우리 집 화초 가운데 거실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안스리움레드뿐이다. 다른 화분들은 모두 베란다에 놓여 있다. 왜 그것만 거실에 들여놓았는지는 나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날부터 그 붉은빛이 집 안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붉은 부분을 꽃으로 안다. 하지만 그것은 꽃잎이 아니다. 꽃차례를 감싸고 있는 잎이다. 꽃을 보호하면서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잎이면서 꽃의 자리까지 넘나드는 셈이다.
나는 그 붉은 잎을 볼 때마다 식물의 묘한 생존 방식을 생각한다. 하나의 것에 한 가지 쓰임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경계를 조금 허물어 다른 역할까지 품는다.
사람의 물건도 그렇다.
얼마 전 식당 앞에서 배달을 기다리는 오토바이 기사를 보았다. 그의 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마스크 아래로 천이 길게 내려와 목을 감싸고 있었다.
“특이하네요.”
내가 말하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목까지 가려주니까 편합니다.”
그제야 그것이 마스크이면서 목도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물건이 두 가지 쓰임을 품고 있었다.
안스리움레드가 다시 떠올랐다.
식물은 잎으로 꽃을 감싸고, 사람은 마스크로 목까지 가린다. 서로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지만, 하나의 것에 새로운 쓰임을 더하는 모습은 닮아 있다.
그런데 자연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더하는 것과는 다른 지혜도 보인다.
열대의 큰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식물 가운데는 잎에 구멍을 내거나 깊은 틈을 만드는 것들이 있다. 잎을 온전히 펼쳐 햇빛을 독차지하는 대신, 그 빈자리로 빛이 아래까지 스며들게 한다.
채우는 것만이 생존의 방법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꾸 무엇인가를 더하려 한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인정받는 것도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때로 더하는 능력이 아니라 덜어내는 능력일 것이다.
조금 비워야 누군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조금 낮추어야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차지한 자리에 작은 틈 하나를 내어주면, 그 틈으로 다른 사람에게 빛이 갈 수도 있다.
다시 안스리움레드를 바라본다.
붉은 잎은 꽃이 아니면서 꽃처럼 보인다. 잎이라는 제 자리에 머물면서도 다른 역할을 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붉은 잎에서 다른 것을 본다.
무언가를 더 품는 것만큼, 비워둘 줄 아는 것도 지혜라는 것.
거실 한쪽의 작은 화분이 오늘도 붉은 잎 하나를 펼치고 있다.
그 잎의 빈자리에서
나는 함께 살아갈 자리를 생각한다.
(2026)
첫댓글 "살아남는 법(경쟁과 효율)"만 강조되는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양보와 상생)"을
안스리움의 붉은 잎을 통해 담담하게 들려주는 완성도 높은 치유의 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을 남기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거실에 놓아둔 안스리움레드를 보면서 한참 사색에 잠겨보았습니다.
안스리움레드의 잎이 빨갛게 된 사연을 생각하다 포안세티아의 붉은 잎을 떠올려봅니다 잎이 꽃의 노래를 부르는 곳에 한 줄기 햇살이 오고 갔음을 감지합니다
안스리움레드를 보고 있으면 화초도 극단적으로 에너지를 아끼고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잎으로 꽃을 대신하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게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