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6)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褒表老儒
나이 많은 유자(儒者)를 기리고 표양하십시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더니 이른바 영수회담(領袖會談)을 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서 국정에 관하여 회담한 것이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면서 진행됐지만, 끝나고 나서 합의한 내용도 없이 양쪽이 서로 자기들이 잘했다는 발표만 있었다.
사실 지난 총선 시기에 여야의 각 정당이 내세운 것은 심판(審判)과 민생(民生)이었다. 야당에서는 정권(政權)을 심판하자고 하였고, 여당에서는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출마한 야당 대표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태여 구별하자면 한쪽은 정치를 잘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죄를 짓고도 처벌을 면하려는 사람을 걸러내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선거라면 당연히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내세워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으려 해야 했는데, 상대방의 흠집을 드러내어 그 흠집이 없는 나를 뽑아 달라고 했으니 여야를 막론하고 자기들이 내세울 만큼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유권자에게 다가온 것은 민생이었다. 그래서 여야가 똑같이 민생(民生)을 내세웠지만, 역시 구체적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온 정책은 없는 듯하였으니 그냥 구호(口號)였다. 그리고 이 민생은 이른바 영수 회담에서도 주된 과제였다. 그런데 정작 회담이 끝나고 나서 발표한 내용 속에는 민생(民生)에 관계된 사항은 별로 없고 주된 관심은 정치의 주도권 잡기였다. 정작 하나라도 민생에 관한 합의 가 있을 것을 기대하였던 소시민은 허탈하였다.
이를 보면서 인심을 잔뜩 잃었던 남송(南宋) 말의 권력자인 재상 사미원(史彌遠)이 생각났다. 사미원은 한탁주(韓侂胄)의 목을 베어 금(金)에 보내어 송금(宋金)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게 하여 출세를 시작한 사람이다. 영종(寧宗) 시절에 재상 한탁주(韓侂胄)는 송(宋)을 짓눌렀던 금(金)이 약해지는 조짐을 보고 북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송에서는 금과 다시 화의하고 싶었지만, 금(金)에서는 북벌을 주장한 한탁주의 목을 가져오면 화의하겠다고 하자 사미원이 이 일을 주도하였다. 그 덕에 영종 가정(嘉定) 원년(1208)에 사미원은 44세의 나이로 재상이 되어 줄곧 정치적 실권자로 발호하며 군림했던 인물이다.
그 20여 년 뒤에 황제 영종이 후사가 없어서 그 뒤를 잇도록 조횡(趙竑)을 황자로 삼았다. 권력자 사미원은 조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 황제가 이처럼 자기 후계자를 선택하였으면 아무리 황제를 무시하는 권력자라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미원은 권력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게 마음에 들지 않는 후계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는 음모를 진행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조횡을 대신하여 세울 인물을 암암리에 뽑아 준비하였다. 그 사람이 나중에 이종(理宗)이 되는 조윤(趙昀)이다.
사미원은 다른 한편으로 조횡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래서 원래 조횡이 탄금(彈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탄금을 잘하는 미인(美人)을 매수하여 조횡에게 들여보내어 조횡의 행동 하나하나 다 보고받았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황제의 후계자 조횡이 직접 “사미원은 마땅히 8천 리 밖으로 귀양보내야 한다.”라고 궤연(几筵) 위에 적어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조횡은 사미원이 오래도록 권력을 장악하고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번곤(藩閫) 같은 높은 관직은 모두 그가 천거하였던바 권세(權勢)가 불꽃 같은 사실을 보면서 마음을 평정할 수 없어서 이러한 속 마음을 내뱉은 것이다.
이 사실은 조횡의 곁에 가 있던 탄금하는 미인을 통해 사미원에게 전달되었고 사미원은 조횡의 이 말을 듣고 실권(失權)하게 될 위험을 느꼈다, 그리고 영종이 죽자, 사미원은 유조(遺詔)를 바꾸어 조홍 대신 자기가 점찍어 준비해 둔 조윤을 황제로 세웠다. 신하가 황제를 바꾼 것이다. 이일은 아무리 비밀로 한다고 하여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은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알았다. 다만 겉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제가 곧 국가인 시절에 황제를 신하가 바꾸었다는 것은 반역이었던 시대였다. 사미원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하여도 황제를 바꿔치기한 사미원의 짓거리를 옳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사미원도 기울어진 인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기가 세운 새 황제인 이종(理宗)에게 건의하여 억울하게 황제 자리를 빼앗긴 조횡을 제왕(濟王)으로 진봉(進封)하여 호주(湖州, 浙江省 湖州市)에 거처하게 하였다. 우선은 급한 대로 억울하게 황제 자리를 빼앗긴 조호를 대우하는 척하였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망(衆望)을 거두어들이고자 하여 황제에게 노유(老儒)를 장려하고 표창하도록 이종에게 권고하였다. 그동안 학식 있고 인품 있으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관직에 자리 잡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보면 이 정책은 획기적이었다.
이에 따라서 이종은 조서를 내려서 부백성(傅伯成, 1143~1226)을 발탁하여 현모각학사(顯謨學士閣)로 하고, 양간(楊簡)을 보모각학사(寶謨閣學士)로 하더니, 얼마 뒤에는 부백성과 양간은 전 조정에서 대우받던 기덕(耆德)이라고 하여 황제가 있는 행재소로 오라고 초청하였다. 이는 사미원의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이 정치적 제스처가 당시에 얼마나 인심을 달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안하무인의 권력자 사미원도 정치적 제스처를 써 가며 인심을 달래려 한 셈이다. 그만큼 인심을 두려워한 것이다.
듣건대, 21대 국회에 계류 중인 민생법안이 산더미같이 쌓였다고 한다. 보도로는 ‘국회 계류 중인 민생·경제법안 대부분 폐기 수순이라.’고 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민생법안은 전체 1만 6,353건이고 법사위에 계류 중인 것만 1,691건이라고 한다. 이 중에는 여야의 의견 차이가 없는 것도 상당수라고 한다. 이른바 영수 회담에서 1만 6천여 건의 법안 가운데 여야 이견 없는 단 몇 개의 목록이라도 같이 이야기하면서 타협했더라면, 국민은 그래도 정치에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왜 못 했을까?
교육이 문제이다. 문학,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법조문이나 달달 외우는 것만이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두 사람이 여야 영수로 만났다. 그러니 비록 두 사람이 현재 이순(耳順)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이순하여 달관(達觀)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얼마나 가졌을까?
두 사람은 사미원 같은 잡놈도 사용한 기덕(耆德)을 모시는 제스처도 못 쓴 것이다. 정치, 경제, 언론, 사회, 문화의 정책은 인간(人間)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인문학이 죽어가니 인간을 모르면서 무슨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겠는가?
첫댓글 현실을 역사와 관련 지어 평한 사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회의원에게 직무 유기로 고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국민들이 국회의원의 활동을 감시하거나 확인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의 현실 정치와 대비하여 포표노유를 거론한 사론을 잘 읽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민심이 천심 임을 깨닫지 못 하고 있음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