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왜 낙안군 동초면을 갈기갈기 해체하였는가>
우리 역사에서 낙안군은 1908년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읍내, 내서, 외서, 동상, 동하, 초상, 초하면은 순천군으로, 고상, 고하, 남상, 남하면은 보성군에 편입되었다. 일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1914년에 읍내, 내서면을 낙안면으로, 동상,동하,초상,초하면을 동초면으로 또다시 통합해버렸다.
이렇게 낙안군을 해체한 이유에는 을사늑약 직후 정미의병 때 활약한 담살이 안규홍 의병장 때문이다. 안규홍 의병장은 보성읍 출신이지만, 의병활동은 낙안군을 중심으로 순천, 광양까지 진출했다.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수십 차례의 투쟁을 전개하여 26차례나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묘지는 조성면 은곡리에 있다.
이 의병부대의 중심세력은 낙안군 농민들이었다. 그랬으니 일제가 낙안군을 그대로 두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에서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놓은 지역은 일찌기 없었다. 일제는 낙안군을 해체하고 기름진 낙안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벌교를 매립하여 도시를 만들고 일본인을 점령군으로 진주시켰다.
1919년 4월에 동초면 신기리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3차례나 독립만세 시위를 펼쳤다. 두번은 장좌리 좌촌시장에서, 한번은 낙안읍성 입구에서 였다. 이제는 동초면을 해체하였다.
일제는 1929년 신기리가 소속된 동초면을 세갈래로 쪼개서 구룡리·금치리·대룡리·두고리·송기리·죽산리는 순천군 별량면으로, 신기리·용능리·이곡리는 순천군 낙안면으로, 연산리·호동리·봉림리·회정리·장양리는 보성군 벌교면으로 각각 편입시켜 동초면 자체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동초면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