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詩選>(15). 詠庭梅寄人 唐.劉禹錫 (772-842)
-뜰매를 읊어 사람들에게 주다.-
早花常犯寒, (조화상범한) -일찍 피는 매화가 항상 추위를 무릅쓰고서,
繁實常苦酸. (번실상고산) -많은 열매 맺고도 항상 신맛으로 괴로워하는데,
何事上春日, (하사상춘일) -어찌하여 이른 봄철 날씨라는
坐令芳意闌? (좌령방의란?)-말 때문에 화창한 봄의 정취가 저 지경이 돼야 하나요?
夭桃定相笑, (요도정상소) -얼굴 예쁜 소녀를 만나면 반드시 웃음으로 상대하고,
遊妓肯回看! (유기긍회간!) -妓女를 만나도 곧잘 눈길을 돌리는군요!
君問調金鼎, (군문조금정) -여러분의 물음이 丹藥을 조제해 쓰면 어떨까 하는 것인데,
方知正味難. (방지정미난) -方術 秘法의 정확한 의미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오.
闌-2.[형용사][문어] 곧 다하다. 마지막에 가깝다. 끝나가다.
定-8.[부사][문어] 반드시. 필히. 꼭. 확실히. 定会成功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肯-4.[동사][방언] 자주 …하다. 곧잘 …하다. 春天人肯感冒。 (봄철엔 사람들이 곧잘 감기에 걸린다.)
方-10.[명사] 방술(方術). 炼丹方 (단약을 조제하는 방술.)
知-6. 古語에서 ‘智(지혜)’와 같음.
<註釋>
犯寒-(1).禦寒 (추위를 녹이다.)
(2).冒著寒冷
何事-2.[대명사] 어째서. 왜. 春风不相识,何事入罗帷? (봄바람은 나와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나의 비단 휘장에 스며들어오는가?)
上春-孟春 (이른 봄철)
坐令-猶言致使 (오직 말 때문에)
芳意-(1).指春意。(화창한 봄날의 정취, 봄 경치)
夭桃-(2).喻少女容顏美麗 (소녀얼굴이 예쁜 것을 비유함)
遊妓-여자 놀이 배우.
金鼎-(4).借指煉丹或煉丹之術。(단약 혹은 단약의 제조 술을 들어 차용한 말)
●劉禹錫(772年-842年)
蘇州嘉興 (지금의 浙江省) 사람이다, 字는 夢得,조상 선조들이 북방에서 왔는데 스스로 하는 말로는
中山(今 河北省 定州市)에서 나왔다고 한다. 唐朝의 著名한 詩人이고,中唐 文學의 代表的 人物중에
하나다.
일찍이 태자의 빈객을 맡은 것 때문에, “劉賓客”이라고 칭하고. 晚年에 檢校禮部尚書와 秘書監 등의
虛銜(허함:이름뿐인 관직)을 얻은 것 때문에 “秘書劉尚書”라고도 칭한다.
家門의 계통은 劉禹錫이 어렸을 때의 선조들은 匈奴人 행세를 하였고, 七世祖 劉亮은 北魏의 冀州刺史로 있었다.
隨나라 때 北魏의 孝文帝가 洛陽으로 옮겨와 漢나라 백성이 되는데, 그래서 스스로 말하기를 中山 계통 출신이라고 한다. (다스린 곳은 지금의 河北省 定州市). 父親 劉緒는 安史之亂을 당하여 嘉興에서 잠시 기거하였고, 그 때에 劉禹錫이 태어났다 (當時는 蘇州에 속했음), 劉禹錫은 어려서부터 시 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19세 전까지는 江南에서 떠난 일이 없다.
德宗 貞元9년(793) 개혁정책으로 출사할 수 있어서,劉禹錫은 柳宗元과 함께 進士科에 등과하였고,
또 博學宏詞科도 급제하여,太子校書로 제수되어 監察御史에 승차하였다. 이때만 해도 劉禹錫은
벼슬살이에 전념하면서 遠大한 政治的 抱負를 품었다. 柳宗元등과 더불어 革新的 정치를 주장하는
王叔文 政治集團에 참가하였다. 貞元 21년(805년)에 唐 德宗이 病死하여 順宗이 즉위한 후, 皇帝의
支持下에 있는 王叔文集團은 당시 여러 가지 사회적인 흐름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단의 정치개혁운동을 외치고 나섰다. 劉禹錫은 王叔文이 재능을 알아주는데 힘입어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서 그 당시의 朝廷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唐 憲宗이 即位한 후에 藩鎮(節度使)과 宦官들의 集團的 壓力 때문에 王叔文 改革宣告는 失敗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두 번에 걸친 좌천을 당하였다. 王叔文이 被殺되고, 劉禹錫은 좌천되어 連州刺史가 되어 荊南까지 가다가 다시 朗州司馬로 가게 되었다. (지금의 湖南 常德). 劉禹錫과 함께 좌천되어 간
8인을 역사에서는 “八司馬”라 부른다.
湖南 常德의 歷史學者인 동시에 收藏家인 週新國 先生의 考證에 의하면 劉禹錫은 朗州司馬로
좌천돼 있는 동안에 유명한 “漢壽城春望”을 옮겨 썼다고 한다. 또 그 기간에 劉禹錫은 民間의 風俗을
접촉하여 다시 지은<竹枝辭> 10여 편과,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깊이 느낀 創作物로 <問大鈞>과
<謫九年> 등 詩賦 수편도 썼다.
元和 9年(815) 劉禹錫은 柳宗元 등과 함께 한꺼번에 부름을 받고 長安으로 돌아오니, 南省郎에 임명하려하였다. 그러나 劉禹錫은 玄都를 유람하면서 <元和十年自朗州承召至京戲贈看花諸君子>詩를 지었다.
이를 일명<玄都觀桃花>라 하는데, 不滿을 일으키는 時代의 政治를 풍자하였다 하여 오래되지 않아 또 播州刺史로 좌천되었다.
후에 御史 中丞(벼슬이름) 裴度가 왔을 때에 자신의 모친 나이가 많다는 사정을 말하여 連州刺史를 다시 제수 받았다. 思想的으로 苦悶하던 劉禹錫은 불교에 自己의 精神을 依託하기 시작하여, 스님들과 많이 왕래 하였으나 심취하지는 않아 소극적인 정신 상태만을 유지하였다. 元和14년에 母親이 별세하여
드디어 낙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唐 穆宗 長慶 元年(821)에는 夔州刺史를 제수 받았고, 長慶 4년에는 和州刺史로 변경 임명되어, 唐 敬宗 寶曆2년(826) 겨울에 부임 하였다가 다음해에 洛陽으로 다시 돌아와 재차 玄都유람을 하면서 <再遊玄都觀>詩를 써서 귀족권세가들의 멸시에 대한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었다.
晚年의 劉禹錫은 唐 文宗 大和2년(828)에 入朝하여, 東都尚書省主客郎中에 임명되어 裴度의 추천으로 集賢殿學士도 겸임하였다. 大和 3年 集賢殿學士를 겸임한 것이 연유가 되어 禮部郎中으로 자리를
옮겼다. 大和 5년(831) 裴度가 政事를 구만 두게 되니, 劉禹錫도 외지로 쫓겨나 蘇州刺史에 임명되었고, 大和8년에는 汝州刺史에 임명되었다가 大和 9년에 다시 同州刺史로 고쳐 임명되었다. 開成元年(836)
가을 劉禹錫은 발(足)에 생긴 질병으로 太子賓客으로 임명되어, 東宮의 經筵에 白居易 裴度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후에 檢校禮部尚書와 秘書監 등의 虛銜(허함:이름뿐인 벼슬)을 하였다. 晚年多病하여 會昌 2년(842) 가을에 逝世하니 享年71歲였다. 臨終前에 쓴 文章이 <子劉子自傳>이다.
-출처 維基百科- (구글 劉禹錫으로 검색, 번역 봉명동)
<寸評>
이 詩는, 위 劉禹錫의 소개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 자신이 왕숙문과 함께 추진하던 개혁정치가 藩鎮(節度使)과 宦官들의 집단적 압력 때문에
실패하게 되어 겪은 일을 소재로 하여 지은 것으로, 唐 憲宗을 원망하는 諷刺詩로 볼 수 있다.
詩題에서 ‘뜰매(庭梅)’는 작자 자신이고, ‘人’은 바로 憲宗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진다.
7句의 뜻은 憲宗이 王叔文과 劉禹錫 등이 추진하는 改革政治의 완화를 요구 한 것이고,
8句는 그에 대한 거부의 답이라 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劉禹錫은 被貶되고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첫댓글 자세한 해설과 뜻풀이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_()
전당시 卷357_45 【咏庭梅寄人(一作庭梅咏寄人)】刘禹锡
早花常犯寒,繁实常苦酸。何事上春日,坐令芳意阑。
夭桃定相笑,游妓肯回看。君问调金鼎,方知正味难。
咏庭梅寄人과 庭梅咏寄人는 어떤 뉘앙스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