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문 후 100일 만에 집에 돌아오니 쥐, 뱀, 도마뱀이 아니라 바퀴벌레 세상이 되어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살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의 가족처럼 서랍 속 커피믹스도 뜯어 잔치를 벌이며 매일 왕노릇한 것이다. 녀석들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어딜까 싶어, 무언가를 만지거나 거실을 걷는 것조차도 께름칙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변기통이다. 마실 물이 필요했는지, 수영장이 필요했는지 몰라도 그 주변에서 지내며 배설한 흔적들이 진하게 남아있다. 역겨움을 참아내며 변기솔로 북북 씻어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씻겨 내려갔다. 내 눈에는 더러운 변기통이었으나 녀석들의 눈에는 맑은 샘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샘도 누군가의 눈에는 변기통으로 보일 수 있고, 누군가의 눈에는 변기통도 누군가의 눈에는 샘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바퀴벌레라면 샘이겠지만 사람이라면 변기통이다. 관점은 내가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슬프고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릇된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샘이고, 무엇이 변기통인가? 지혜는 이것을 분별하게 해 준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소유했던 지식은 네로 통치 당시 유대총독인 베스도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운 바울은 아마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자신의 정체성이 달라지면서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지식, 물질, 명예, 권력 등 세상에서 보물로 여기는 것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높은 곳에 있어서 따 먹을 수 없자 ‘저건 신포도’라고 말한 여우의 입장이어서가 아니다. 그것들이 대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이전처럼 큰 가치를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 유익하던 것들이 판단을 흐리는 일을 해서다.
2023년 대학수학능력시험(11월 16일)이 13일 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에게 명문대는 대단한 것이 맞지만, 졸업 후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숨어 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졸업 후에도 여전히 명문대를 내세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존경보다는 조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누군가의 성공은 대단해 보인다. 각고의 노력의 결과이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매스컴은 앞다투어 대단하지 않으냐고 선동하고 칭송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그 화려한 찬사는 묘비 앞의 꽃처럼 누렇게 시들어버린다. 한 때는 대단한 아름다움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한 때’를 추억하고 붙잡아두려고 하는 한 쓸쓸해진다. 계절이 변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다.
관점은 정체성에서 나온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나의 정체성인 줄로 알았던 나의 자주성이나 독립성은 깨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만 있다. 진리의 관을 가진 내가 있게 된다. 그의 정체성은 작은 예수다. 우리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