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거리에서/靑石 전성훈
봄은 여인의 옷자락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틀림없는 듯하다. 그토록 매섭고 암울했던 겨울이 눈을 살짝 흘기며 북쪽 얼음 나라로 물러간다. 재 너머 산골짜기에서 오는 봄이 이제는 길거리로 들어선 게 확연히 눈에 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기운을 느끼는 초봄이다. 세월을 짊어진 중년 여성은 두툼한 옷을 껴입고, 가벼운 옷차림의 아가씨는 봄을 반기듯이 발걸음이 경쾌하다. 분홍색 마스크를 벗어 손에 들고 새빨간 하이힐에 검정 미니스커트와 샛노란 니트를 받쳐입은 봄 처녀를 보는 순간, 아아, 봄은 저렇게 찾아오는가 보다 하고 저절로 감탄한다.
3월 첫 토요일, 모처럼 친구들 따라서 시내를 걷는다. 낙원상가 부근 ‘이차돌’이라는 음식점에서 멋진 점심을 대접해준 친구 덕분에 포만감을 느끼며 미로 같은 익선동 골목을 누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익선동 골목길을 처음 가본다. 아무리 못 잡아도 50년은 넘게 그 모양 그대로 유지해왔을 것 같은 비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점포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유럽의 작은 도시의 옛 골목을 연상하면 좋을 듯하다. 골목을 걸으며 느낀 첫 번째 소감은, 만약 이곳에 불이 난다면 소방도로조차 없기에 그냥 활활 불에 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두 번째는 수많은 젊은이가 찾는 골목이라서 활기가 넘쳐 흐른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70대 나잇살 먹은 늙은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옷가게, 커피숍, 빵 가게, 음식점 등 수없이 많은 가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름이 알려진 커피숍이나 빵집 또는 음식점 앞에는 순서를 기다리며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가 상당하다. 젊음이 활짝 피어나 봄의 생기가 폴폴 넘쳐흐르는 젊음의 거리이다. 지성미를 갖추고 멋진 풍모를 풍기는 여주인이 손님을 맞이한다는 어느 찻집을 찾아서 헤매다가 끝내는 포기하고 큰길로 나선다. 나처럼 길눈이 밝지 못하는 사람은 한 번 갔던 집을 다음번에 제대로 찾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일제 침략 시절 청계천 이남에 살던 왜인들이 조선인이 모여 살던 북촌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그 시도를 막기 위하여 몰락한 양반들의 땅과 한옥을 사들인 장사꾼이자 자본가이며 건축가인 ‘정세권’,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세권’이란 분이, 서민용 한옥을 지은 것이 오늘날 익선동 한옥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조선일보 2023년 3월 11일자 기사 참조)
익선동 골목을 빠져나와 재동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운현궁雲峴宮이 보인다. 일부러 운현궁을 찾을 일은 거의 없기에 소화도 시킬 겸 입장료가 무료인 운현궁 안으로 들어간다. 운현궁은 아들인 고종 황제와 며느리 명성황후를 상대로 정권 싸움을 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권세를 떨치던 곳으로, 우리나라 근세 역사에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대원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어 간 주역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게 각인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 해설사의 열성적인 설명을 잠시 듣다가 이로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 노안당老安堂을 품고 있는 운현궁 경내를 걷는다. 궁궐처럼 웅장한 운현궁을 걸으며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김동인 선생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떠올려본다.
운현궁을 벗어나 종로경찰서 건너편 안국동 네거리에 있는 어느 빵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커피 향이 진하게 스며드는 빵집에는 의외로 손님이 북적거린다. 오래된 한옥 내부를 고쳐서 장사하는데, 이곳 빵이 맛있다는 소문이 낫다고 한 친구가 귀띔한다. 길가에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볼 때는 조금 답답하게 보였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상당히 널찍한 2층이 있어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하기에는 그만이다. 커피값은 시내 커피숍이 그러하듯이 비싼 편이다. 커피점을 나와서 ‘열린송현광장’으로 향한다. 송현松峴이라는 명칭은 소나무고개라는 뜻으로 조선왕조 건국 초기부터 지어진 이름이다. 40년 넘게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되다가, 미국대사관 숙소가 이전하고 땅 소유주가 몇 번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곳이다. 서울시에서 공원 용지로 결정하고,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가에 헌납한 수많은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할 박물관을 짓는다고 발표한 땅이다. 송현광장 입구에서 젊은 마술사가 불꽃 쇼를 하기도 하고, 쌍칼과 사과 한 알을 위로 던지고 손을 번갈아 놀리며 멋지게 받는 모습을 보여주자, 길을 걷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구경하며 손뼉을 친다. 미세먼지 탓에 저 멀리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겨울의 끝자락에 모처럼 집을 나서 길거리를 걸으며 그동안 잊고 지내던 주변 경치를 바라보니 기분이 좋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이 개운해지는 듯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다가오는 봄의 모습을 그려보니 잠시나마 나이를 잊은 듯하다.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서 나이가 온다고 하는데, 봄이 오는 길목에서 등허리가 굽은 듯이 구부정하여 초췌한 듯 보이지 않게 똑바로 가슴을 펴고 걸어야겠다. (202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