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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25일 연중 제21주일
[수원] 다른이의 마음안으로 들어 가는 법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이사 66, 18 - 21
† 제2독서 : 히브 12, 5 - 7
† 복음 : 루카 13, 22 - 30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하루가 낮과 밤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는 낮처럼 빛이 날 때가 있는가 하면, 밤처럼
어둠의 시기를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어둠의 시기에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인내입니다. 구원의 잔치에 나아가는 길에는
이처럼 기쁜 순간도 있고, 인내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8월의
마지막 주일 미사를 봉헌하며 온갖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청합시다.
★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곧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다른 나라에 흩어진
동포들까지도 모아들이신다는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시련을 어떠한 자세로 이겨 내야 하는지 권고한다.
곧 시련을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위하여 내린 훈육으로 여기고 인내하며
바른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러할 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하였다고 자부하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태도를
버리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번은 동창 신부가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 하였는데, 그분은 공직자로서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비근한 예로,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과일 등의 선물을 보내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곧바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단돈 만 원
한 장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아들
신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원칙 하나가 있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단다.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선택하기 싫은 것, 바로 그것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될 거야.”
덜 원하는 것, 덜 편한 것, 덜 쉬운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복음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불편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그려야 합니다. 그 반면, 넓은 문은
대접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편하고 쾌적합니다. 이 두 개의 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도록 합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최선에 최선을 다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25일 연중 제21주일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 루카 13,22-30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
개미ㆍ꿀벌의 세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 *** *** ***
사사건건 따지는 한 젊은이에게 한 어르신이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 이라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좁은 문으로 떳덧하게 들어갈 수 있는
종종 자신의 신앙 체험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야기하시고, 또한 이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굳은 믿음을 내세우십니다. 솔직히 이렇게
내세우는 신앙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개신교에서 많이 말하는 소위
신앙 간증이라는 것, 이는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도 치유를 해주신 다음, 치유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며 자신의 은혜 받음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그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바로
당신의 뜻이 잘못된 뜻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하나 하나를 다 사랑하셨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대중성은 사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에도 그 자리를 물러나
숨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즉,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대중심리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들의 생각 중에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등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과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답습하려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한 행동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통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나오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려하는 넓은 문으로 가려고 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좁은 문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벗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좁은 문’으로 표현하신 것이지요.
많은 물질을 갖기 위한 노력보다는 많은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9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과 하나가 없어서
열 개를 채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나눌 수 있는 사과를 9개나 가지고
있다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과를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이를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는지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소유욕에 집착을 보인다고 하지요. 지금 내
자신은 무엇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소유욕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면 그만큼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는 절대로 주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신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좁은 문으로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를 꿈꿔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햇볕과 그늘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김재진).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벤쯔 쎄단
어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주일 새벽, 여러분에게도
전해드립니다. 이 이야기 보시고 크게 웃으시고, 기쁘고 행복한
주님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식 자랑 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할머니께서는 노인정에서 친구 분에게 아들 자랑을
하십니다.
“에구! 우리 아들이 최고급 ‘벤쯔 쎄단’을 샀는데 얼마나 좋은 지 몰라.”
그런데 친구 할머니의 귀가 상당히 어두운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휴! 저 할망구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맨날 자랑질이야? 이제는
하다하다 안 되니까 ‘배추 세 단’ 산 거 가지고도 자랑하구 자빠졌네.”
그렇습니다. 귀가 어두워서 ‘벤쯔 쎄단’을 ‘배추 세 단’으로 잘못
들으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할머니는 친구가 부러워하지 않고
핀잔만 주니까 다시 힘주어서 말합니다.
“좋으니까 자랑을 하지. 그 벤쯔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에 친구 할머니도 지지 않고 말합니다.
“아이고! 그까짓 배추가 좋아봤자 그게 배추지 뭐. 배추에 금테라도
둘렀남?”
이런 식으로 둘이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고 있었던, 노인정 최고
어르신인 왕 할아버지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세요.
“야! 시끄러! 이 할마시들이 그냥~~ 왜 아까부터 ‘빤스 세 장’ 가지고
난리들이야? 그냥 쳐 입어!”
서로가 자기가 듣고 싶은 데로 듣고, 들리는 데로 말한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역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그래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욕심만을 내세워서 주님의 뜻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 앞에 준비해 놓으신 좁은 구원의
문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참된 지혜는 늘 마지막을 보게 되어있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8월25일 연중 제21주일 복음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13,24)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13,30)
---
나이가 들수록 예수님의 이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잘 살기가 정말로 쉽지 않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분께서 제시하신 길은 단순 명료한 길이다.
복음 전체가 말하는 길,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길’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문제는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해를 했음에도 실천하기 어렵게 만드는가?
단순히 생각해본다.
사랑의 길은 세상의 잣대로는 바보가 되는 길이다.
정의의 길은 자기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길이다.
바로 이것이 옳고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여기에 참된 지혜가 요구된다.
결국 우리에게 행복한 길이 무엇인지를,
결국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결국 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국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지혜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좁은 문이라는 것은 문이 작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문전쇄도로 비좁아 보인다는 뜻도 아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적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과 정의의 길만을 고집하려 한다면, 늘 우리는
자연스럽게 꼴찌 신세를 면하지 못할 수 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행복은 복음적
바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정권은 역시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
바보스러워도 행복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결국은 다 잃어버릴 진짜
바보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 말이다.
오늘의 말씀을 절대로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무의식에라도 새겨놓아야 할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다른 이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법
2013년 다해 8월25일 연중 제21주일
<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
복음 : 루카 13,22-30
< 다른 이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법 >
요즘 많이 보는 영화 중 ‘숨바꼭질’이란 약간 공포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한 부잣집에 입양되어 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얼굴이 흉측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 집의
아들자리를 꿰차고 싶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형이 성추행 혐의자로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형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증언을 해 버립니다. 이 형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부모는 이 아이에게 전 재산을 물려줍니다.
드디어 고아였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누구도 간섭받지 않는
커다란 아파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얻은 그 큰 집에 사는 마음이 편할까요? 이 남자는 결벽증에
시달립니다. 한 사람을 밀어내고 합당하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
양심이 자신을 짓누르기 때문에 외적인 것이라도 깨끗하게 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도 하도 열심히 닦아서 피가
날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꿈에는 형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 약점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마치 감옥에서 출소한 형이
그러는 것처럼 가장하여 그 집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자신의 집을 빼앗으려는 사람의 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딸은 주인공 핸드폰에 달려있는 작은 인형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딸이 선물한 것이라 안 된다고 했더니,
아이는 무섭게 “내 꺼야~”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소리 지릅니다.
깜짝 놀란 주인공은 그냥 그것을 떼어 그 아이에게 줍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그 아이의 모습에서 양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 아들을 몰아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뻐꾸기는 붉은머리 오목눈이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알은 오목눈이의 알들이 부화하기 며칠 전에 먼저 부화하게 됩니다.
눈도 뜨지 못하는 그 뻐꾸기 새끼는 자신의 몸에 닿는 오목눈이의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버립니다. 자신 혼자 살기에도
너무 비좁기 때문입니다. 영화 숨바꼭질은 바로 자신의 공간을 더
차지하려는 이런 사람들의 공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많을 것이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그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지막 날 많은 이들이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겠지만
집주인은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성찬례를 의미할 것이고, 가르침을 주는 것은
말씀의 전례를 의미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은 세례를 받았고
미사에도 참례했던 사람들이라고 항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악을 일삼는 그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미사에까지 참례하여 성체까지 영한 이들을 마지막 날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은 편하고 좁은 문은 불편합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사람과 관계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편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에 혼자 살다가 결혼하면 그 집에 둘이 살아야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집에 여럿이 살아야합니다. 넓게 살기를 원하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즉 좁은 문이란 내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싫어도 선택해야 하는 희생의 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관계하면서도 내 삶에 변화가 없다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고 그분의 원하는 삶,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분을 나 몰라라 한 것입니다.
KonTV '순간포착'에서 ‘아들 구하러 불길 속으로 뛰어든 아버지’란
동영상을 유투브에서 보았습니다.
장소는 제주시 노형동 A아파트 화재 현장이고, 화면엔 연기가
솟구치는 아파트 베란다에 4명의 가족이 구조를 요청하며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기와 불길은 가족들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가족들은 “뜨겁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다행히 구조대원들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까지 무사하게
구조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들 1명이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애타는 아버지는 혼자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119 대원들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아파트로 뛰어드는 아버지. 다른 소방대원이 집 전체를 다 뒤졌는데
사람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소방대원과
함께 아무 장비도 없이 보조 공기통에 의존한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듭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찬 아파트를 빠져나옵니다. 가족들 모두 울음을 터뜨립니다.
불보다 뜨거운 부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동영상입니다.
불 앞에 선 아버지, 그의 선택은 그냥 밖에 남아있던가 아니면
불속으로 뛰어들던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냥 밖에 있다면
스스로 아들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일 것이고, 불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나 몰라라 했다면 아들도 아버지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 밖에 쫓겨난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사 때 가르침도 받고 성체도 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희생으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희생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좁은 문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 순간 그분의 뜻과 내 뜻 앞에 서서 어떤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 마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
마음에 들어가는 방법은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님이
당신들의 불편함으로 우리 마음에 사시게 되는 것처럼, 그분 마음에도
우리 이름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해 그분 마음에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이게 좁은 문이지요.
2013년 다해 8월25일 연중 제21주일
세상은 삶의 훈련장으로서 인생을 성숙시켜야 하는 때라 봅니다.
배움의 시기를 앞당기고 더 늘리면 사회생활 든든할 것 같지만,
실은 사회생활에서부터 삶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게 이게 문젭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긴 세월을 배움에 바쳐야 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돈 잘 벌고 명예나 지위, 고작 이런 세상살이 준비였을 뿐입니다.
착한 마음 진리 이웃사랑 공부는 전혀 안했으니 이게 좁은 문이지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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