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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 권은경씨는 '좋으니가 한다'는 초심을 생각하며 연습에 여념이 없다. | “제가 처음 대명고수부에 나갔을 때였어요. 추첨을 하는데 어느 남자 고수가 그래요. ‘당신도 대명고수부냐?’고. 웃으며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한편으로 기분이 언짢았어요.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지난 6일 오전 중구 대흥동의 한 건물 내 5층. 입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마주한 고수 권은경(35)씨는 국악계에서 여류 고수가 갖는 한계부터 말을 꺼냈다.
고수는 소리 또는 악기를 연주할 때 옆에서 소리북 또는 장구로 반주하는 사람이다. ‘숫고수 암명창’이라고 ‘소리는 여자, 북은 남자’라는 그릇된 도식이 뿌리 깊게 각인된 대한민국 국악계에서 그는 그런 편견에 맞서 ‘고수하면 권은경’을 떠올리기 위해 기나긴 마라톤을 벌이고 있다. 드러나지도 않은 위치에서 몇 시간씩 소리꾼의 반주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그런 고행에 어떤 이유로 입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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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 권은경씨가 '고수=권은경'을 떠올리기 위해 중구 대흥동 자신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있다. (사진=박종명 기자) | 고향이 부산인 그는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림이 당연히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있던 13살 때 특기적성 교육으로 시작한 농악은 그의 인생을 바꾼 복선(伏線)이었다. 취미생활로 시작한 것이 15살이 되면서 그림만큼 소중한 일과가 돼 버렸다. 미술 전공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동아리를 만들어 공연도 하고, 대회에 출전하면서 학교에선 이미 ‘장구걸’로 통했다.
18살 입시생이 되면서 4시간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 그림 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입시 압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국악은 큰 위안이었다. 자연스레 관심이 국악으로 기울면서 농악대를 찾아다니다 춤꾼 오영숙 선생을 만나 장구장단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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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경씨의 연주 장면 | 대학 국악과에 진학하면서 음악 인생에 운명적인 스승을 맞이했다. 소리북 전공 선생님으로 박근영 대전국악협회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소리꾼이 여자인데, 고수까지 여자를 쓰려고 하질 않거든요. 그런 여자 고수에 대한 편견을 깨 주신 분이 스승님이세요. 스승님은 ‘고수는 힘으로 하는 음악이 아니다. 여자는 모성 본능이 있고, 상대방을 보비위(판소리 창자의 속도와 강약을 맞추어 받쳐주고 이끌어가는 고수의 연주 기법)할 수 있어 남자보다 북을 더 잘 칠 수 있다’고 하세요.”
고수 권은경은 20살 때 그렇게 대전과 인연을 맺었다. 쉽게 싫증내는 그가 그런 스승 밑에서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용맹정진한 덕분인지 북채를 잡은 지 3년 여 만에 그는 대형사고를 냈다. 제11회 전국국악대전 고법부문에서 대상을 받아 출전 자격을 얻은 전국고수대회 명고수부에서 2등상인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왜소한 체구에 이제 20살을 갓 넘긴 여자 고수였으니 “당신도 대명고수부냐?”는 빈정거림을 받을 만도 했다. “대명고수부에 나오는 사람들 하면 적어도 10년 이상 북을 친 사람들인데 이제 23살에 불과한 여자가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놀랄 만도 했겠죠.”
그 뒤로 10여 년의 세월이 더 흘러 고수로서 원숙해졌으련만 그는 더 어려워졌다고 실토한다. “그 때 당시에는 뭣 모르고 쳤던 것 같아요. 젊음 하나로. 소리가 나오면 반응하는 기술이 좋았다면 이제는 상황이나 소리꾼의 컨디션이나 기량을 맞춰야 돼 적용해야 할 조건이 더 많아졌거든요. 그 때보다 손이 더 안 돌아가요.(웃음) 악기 연주와 다르게 장단을 치는 소리북과 장구는 악기가 내는 타점의 소리와 리듬 밖에 없어 연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때가 많아요. 그 때마다 스승님께서 확신과 기다림, 끈기를 가르쳐주셨어요. 부모님께서 5년 정도 하면 고수가 되는 줄 아셨는데 그게 아니니 걱정도 하셔요. 언제쯤 마라톤 완주가 끝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좋으니까 한다’는 생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어요. 국악은 숙성되면 될수록 약효가 느는 술처럼 기다림의 예술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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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경씨는 "국악은 숙성되면 될수록 약효가 느는 술처럼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 고수 권은경은 올해 대전문화재단의 아티스타에 선정됐다. 그가 이번에 아티스타에 뽑힐 수 있었던 것은 색다른 시도를 선보겠다고 제안한 점 때문이다. 장단이 남을 돋보이게 하는 반주음악이 아니라 연주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장단은 잘해야 본전이에요. 표시도 나지 않고요. 서울의 작은 소극장에서 장단이 돋보이게 ‘장구시나위’를 한 적이 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잘 수정하고 보완해서 장단도 보조가 아닌 메인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독주회를 올 가을에 갖고 싶어요.”
고수 권은경은 올해 10여 년 만에 최우수상을 안겨준 그 전국고수대회 명고수부에 다시 출전할 생각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고수대회에서 아직 여류 고수가 대통령상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만큼 여류 고수 비중도 낮고, 인식도 낮은 편이에요. 탈락하더라도 여류 고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요. 예전 사람들이 판소리는 몰라도 ‘명창 박동진’은 알았던 것처럼, ‘안숙선=판소리’하는 것처럼 ‘고수=권은경’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기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할 거예요. 그렇게 걷다 보면 원하는 것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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