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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Hoi An) & 다낭(Da Nang)을 찾은 참전용사들
성명: 조우현(60세)
해병기수: 해병 178기
고엽제 유무: 경도 판정
주 참전지역: 다낭(Da Nang), 쭈라이(Chu Lai)
참전일: 67년 1월~68년 1월
작전: 참전기간중 10여개의 작전에 참가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13박 15일을 한숨도 못자고 밤 낮을 계속해서 교전이 있었다고 한다.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여단본부에 귀대하였으나, 본부에서는 한국에서 온 가수(김세레나, 조미미, 하니온, 등)와 코미디언들의 위문공연이 있었다고 한다.
성명: 조영열(61세)
해병기수: 해병 159기
고엽제 유무: 등외 판정
주 참전지역: 투이호아(Tuy Hoa), 쭈라이(Chu Lai)
참전일: 65년 10월~66년 12월
작전: 다른 전우들에 비해 운이 좋아 참전기간중 격렬한 전투 참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가 겪었던 작전은 투이호아 추수 보호작전이었으며, 저녁 12시부터 아침 9시까지 밤새 전투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성명: 최민화(59세)
해병기수: 해병 202기
고엽제 유무: 경도 판정
주 참전지역: 호이안(Hoi An)
참전일: 70년 4월~71년 4월
작전: 참전기간중 대대본부에 배치되어 비교적 안전하고 편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70년 대홍수가 지나고, 71년 구정공세때 대대본부 진지에 불과 수 분사이에 8발의 로켓포탄이 날라와 터져 많이 놀랐다고 한다. 주로 대민지원과 민간인 소계작전을 펼쳤으며, 포탄 박스를 민가에 땔감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2~3회씩 미군 헬기에서 고엽제를 살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성명: 홍길선(59세)
해병기수: 해병 212기
고엽제 유무: 무
주 참전지역: 호이안(Hoi An), 디엠반(Diem Van)
참전일: 70년 6월~71년 8월
작전: 케산(Khe Xanh)전투, 청룡 7호~13호 전투에 참가하여 화랑무공훈장 수상.
참전기간중 부대 최전방에서 배치되어, 매일저녁 오후 5~6시경에 매복작전을 시작해서 새벽에 작전이 끝났다고 한다. 수색작전중에 적의 부비츄랩에 걸려 소대장과 분대장 전사하였고, 호이안 구방석(진지)에서 신방석(진지)로 부대 이전시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다고 한다. 신방석 진지 작업중에 수 차례의 60mm포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명: 진명후(60세)
해병기수: 해병 181기
고엽제 유무: 중도 판정
주 참전지역: 호이안(Hoi An), 쭈라이(Chu Lai)
참전일: 67년 4월~68년 9월
작전: 참전기간중 용화작전을 비롯한 6개의 작전에 참가 했으며, 68년 신, 구정 공세때 많은 전우들이 전사하는 참혹한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쭈라이(Chu Lai)에서 호이안으로 부대이전을 마친 후, 주로 대민지원에 참가했다고 한다. 대민지원은 탄피를 이용하여 도로 구축(간선도로, 마을 진입로)작업에 주로 참가하였으며, 주민들의 공동주택 건설 작업에도 참가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씨레이션을 비롯한 소모성군수품들을 전쟁 희생자 가족에 지원하였다고 한다.
성명: 김인식(61세)
해병기수: 해병 194기
고엽제 유무: 경도 판정
주 참전지역: 호이안(Hoi An)
참전일: 68년 5월~69년 5월
작전: 참전기간중 2개의 작전에 참가했으며, 첫 전투인 꼬노이(Co Noi) 전투에서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전우들이 전사하는 광경을 보면서 전쟁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첨병으로 최전방에서 배치되었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한미 합동작전인 베리아(Be Ria) 전투(라오스 접경지역)라고 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만 60여명의 전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성명: 장만복(61세)
해병기수: 해병 183기
고엽제 유무: 등외 판정
주 참전지역: 호이안(Hoi An)
참전일: 67년 3월~69년 10월
작전: 승룡, 황룡작전.
참전기간중의 정확한 주둔지를 기억 못하고 있었다. 증언을 바탕으로 추측한 결과 작전지역은 호이안의 투본강 삼각주지역으로 생각된다. 1969년 구정공세때 1개소대가 전멸하고 혼자 생존하였다. 그는 이 전투로 국가로부터 인헌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시간에 해병여단본부 방어선이 무너질 정도로 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여행을 떠나기 20여일 전으로 생각된다. 한국여행사로는 유일하게 Saigontourist travel service Co., Ltd와 협력업체 계약을 맺은 굿모닝베트남의 김근태(베트남 사무소 소장)씨에게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해병대 청룡부대 용사 10여명이, 그들의 주둔지였던 다낭과 호이안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굿모닝베트남은 한국에 본사를 둔 베트남 전문 여행사로서, 오래전부터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작전지역 방문 프로그램을 기획 추진한 건실한 여행사이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1973년 한국군 철군---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 종전---. 일련의 연표들이 빠르게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60대의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참전용사들---. 그것도 세계에서 용감하기로 이름높은 해병 청룡부대 용사들이, 민간인의 신분으로 30여년만에 참전지역인 베트남을 찾아 움직이는 행보가 매우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굿모닝베트남을 통해 함께 여행을 하면서 취재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주일여를 대답을 유보했다. 제도권의 현직 기자는 아니지만,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굿모닝베트남의 설득으로 어렵게 참전용사들과의 동행취재가 허락되었다.
본격적인 우기로 접어든 의 초두인 4월말의오후 3시경, 베트남 호치민시 탄손녓 공항은 숨이 막히도록 뜨거웠다. 화로처럼 뜨거운 열기를 옆에두고 첫 대면한 청룡부대 참전용사들은 허리가 약간 구부러진 할아버지부터, 아직은 건장한 체구를 간직한 노신사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련의 의례적인 인사를 한 후, 저녁식사 약속을 하고 바쁜 회사 업무를 핑계로 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다. 적대적인 감정은 아니지만, 해병대라는 선입관이 작용한 탓이다. 취재를 위해선 그들과 거리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 그시간 만큼은 약간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들 또한 필자를 대하는 태도도 조심스럽게 보였다.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참전용사들의 30여년만의 방문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청년시절에 그것도 군인으로서 1년이라는 시간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낸 베트남. 그들은 베트남에 대해 어떻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보아도 그들과 동등한 경험이 없이, 그들의 입장에서 심리를 추리하기엔 무리였다.
필자는 대학시절에 주위사람들로부터 소위 ‘운동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필자로선 운동권이라는 지칭이 부담스러웠고, 내 자신의 실체와는 많이 달랐다. 그 이유는 필자 자신이 추구하는 사진세계는 원대한 철학이나 이데올로기(Ideolgy)적 입장보다는, 단순한 사진적 욕심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보도사진을 전공하면서 ‘부르주아(bourgeoisie)’들의 전유물인 사진을, 강력한 문화운동의 매체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의 한국적 상황에선 사회적 성향의 다큐멘터리(Social Documentary Photography)가 거의 전무하던 시기였다. 몇몇의 선배들과 아마추어 사진가가 도시빈민을 촬영하다,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필자 역시 사진촬영을 하면서 수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오인받고, 필름을 빼앗기고 매를 맞은 경험이 있다.
사진학과 내에 다큐멘터리그룹(Documentary group) 인 사진집단 ‘현장’을 조직하여, 단체차원으로 도시 빈민과 시위대 촬영을 하였다. 한달에 한번씩 개최하는 사진전을 통해 부도덕한 정권의 폭력성과 심각한 빈부의 격차를 보여줌으로서, 학생들에게 군사독재정권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폭로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선배들에게 평가를 받으며, '자의반 타의반' 기성인들의 문화운동에 동참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배들과 함께 신촌에 ‘사회사진연구소’를 개소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지위에 대하여 심층 촬영을 시작하였다.
대학 졸업후, 한국유명잡지사의 사진기자를 거쳐 대학강사 등의 직업을 가지면서, 잠시도 사진과 멀어진 적이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진과 관계없는 직업을 선택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필자의 삶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그대로 살려서, 세상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부럽다는 덕담이다.
일부는 필자도 동감을 하고,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풍요롭지 못한 금전 부분을 떼어 놓으면 매우 행복하다. 하지만 만족감 뒤에서 항상 느끼는 압박감이 있다. 첫 번째는 가족들에게 충실하지 못한 미안한 감정이다. 두 번째는 다큐멘터리 사진를 전공한 자로서 국가와 사회 도움이 되는 조그마한 족적조차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후세에 남겨 교훈이 나 명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진작품이 아직까지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쉽다.
단순하고 쉽게 생각했던 참전용사들과의 동거와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해변가 늪지에서 서식하는 맹그로브(Mangrove) 나무 뿌리처럼, 황토빛의 수면위에서는 물 속의 실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정리가 어려웠다.
거칠고 폭력적일것으로 생각했던 참전용사들은, 우리 이웃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상한 할아버지들이었다. 또한 베트남에서 총을 들고 전투를 하면서, 전우를 잃은 그들로선 베트남에 대한 적대감이 클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들이야 말로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보다 더욱 더 베트남을 사랑하는 친베트남파였다.
발걸음 조차 움직이기 어려운 열대밀림. 이름모를 독충들. 끝임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부비츄랩.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알. 그리고 로켓포---.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이 베트남을 사랑하고 있다는 부분이 경이로웠다.
“양민학살요---. 언어선택이 잘못된거 아닙니까? 학살은 절대로 없었구요, 민간인 희생자라고 표현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민간인 희생자가 결코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6.25를 전후하여 우리나라는 어땠습니까? 지리산 공비토벌, 4.3 제주사건, 여수순천 사건때 민간인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특히 신, 구정공세때에는 심각할 정도로 아군의 피해가 컷습니다. 구정공세가 끝나고 미국의 작전지시에 따라, 주민과 해방전선과의 협력을 막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소계시키는 작전을 주둔지 곳곳에서 전개했습니다. 그때 작전에 불응하거나 적으로 오인 수 있는 행동을 하였을 경우엔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지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아군은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미군들과는 달리 주둔지 주민들에게 대민봉사를 많이 펼쳤습니다. 때문에 주민들도 우리 한국군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미군들은 전투와 관련한 것 외에는 절대로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전투와 관련이 없는 노동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들은 지휘관이 사역을 시키면 코웃음을 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지휘관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한국군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도로건설, 주택보수, 마을 진입로 건설 등의 대민지원을 많이 펼쳤습니다. 지금 이라크(Iraq)에 파견된 한국의 ‘자이툰(Zaytun) 부대’가 미군과는 달리 현지 주민들에게 환영을 받는 이유는, 저희가 베트남에서 실시했던 대민지원 때문입니다. 이라크에서 미군에게는 적대감을 표시하는 주민들이, 한국군에게는 환대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라크주둔 미군 사령관이 ‘자이툰부대’를 방문하고, 한국군의 활동을 벤치마킹을 시도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전때도 미군들은 벙커 안에서 맥주를 마시며 팝송을 부를 때, 한국군은 포탄탄피를 길에 박아 마을의 입로를 만들고 부서진 집을 보수했습니다. 포탄의 재질이 황금빛 심주라, ‘황금도로’라고 불렸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대립.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입장에 처한 국가안보. 국제적 원조없이는 자력으로 일어서기 힘든 한국경제. 미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약소국으로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한국은 파병을 거부할 수 있는 일체의 권리나 힘이 없었다. 또한 이미 결정된 파병은 그들이 아니면, 가족이나 친지 혹은 친구들 누군가가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국가적 어려움 속에 파병되어 만난 베트남 민간인들. 그들은 한국과 너무도 유사한 역사와 아픔을 겪으며 인내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 복판에서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민간인들이, 그들의 눈에는 ‘남의 일’로 치부하기엔 그들 자신이 어릴적 경험했던 국가적 혼돈기(6.25 전쟁 전후)와 너무 흡사했다.
부대주변엔 연합군(미군을 포함한 사이공정부군, 한국군과 기타의 다국적군)과 인민해방전선(NFL)에게 피해 본 가족들이 많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국의 6.25전쟁 때에도 민간인들의 희생이 많았다. 때문에 그들로선 전쟁의 한 복판에 노출된 채 피해를 입는 민간인들을 그대로 방치하기엔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청룡부대원들은 부식(C레이션/army meal)을 아껴 분대나 중대단위로 모아, 전쟁피해자 가족에게 전달하고 시간나는대로 전쟁피해자 가족들을 방문하여 도왔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집단’으로 지칭 받으며,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외면 받아 정신적 페닉 상태에 빠지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병상에서 고통을 받는 3중고를 받고 있다.
전투에서 수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습니다. 특히, 인민해방전선의 구정공세는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군의 피해가 매우 심했어요. 민족통일과 외세추방이라는 국가적 사명감으로 무장된 인민해방전선(NFL)의 전사들의 구정공세는 ‘무적 해병, 신화를 만드는 해병’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중대들이 방석(진지)이 뚤리고, 우리 중대에서는 저를 포함해서 세 사람만이 생존했습니다.”
베트남전쟁 참전 해병대원들의 증언이다. 구정 공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에게, 국가에서는 무공훈장 수여와 함께 특별 휴가로 한국행 비행기를 태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기다리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임의 동행되어,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이름 모를 건물에 감금되었다. 캄캄한 지하실에 억류된채, A4 크기의 수십장의 원고를 주고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전혀 잠을 재우지 않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는 차라리 고문이 나았다. 세뇌교육 내용은 월남전에서 한국군 전사자는 한 명도 없으며, 청룡부대 용사들은 용감히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원고 암기를 마치고 수시로 반공교육 강연장에 끌려 다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몇 일뿐이었다고 한다.
전우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은 것이 미안한 그는, 지금도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소주를 따른다고 한다.
하느님은 잔인했다. 하필이면 잘 사는 평화로운 나라도 아니고, 전쟁과 배고픔이 일상의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약소국의 국민으로 태어나게 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던 유년시기에 6.25라는 겪어서는 안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국가 기간산업이 파괴된 건물의 한 모퉁이에서, 허기진 배를 주려 잡고 물로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성장 했던 어린이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조국의 그늘에서 편안할 수 없었다. 베트남이라는 이억 만리 떨어진 전쟁터에,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과 조국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야만 했다.
"총 소리. 밤이 되면 부대주변으로 날아와 터지는 포탄의 굉음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두려워 온 몸이 떨려 잠을 이룰수 없었어요. 아니, 잠을 잘 수가 없었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의 파병은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대한민국은 파병을 거부하거나 결정을 유보할 자유조차 없었던 약소국.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면서 ‘힘의 논리’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거대국가 미국의 압력. 유엔(미국)의 ‘6.25 참전’에 대한 보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 기타의 여러가지 상황으로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몇 푼의 달러를 대신해서, 낮 선 이국 땅에 피를 뿌리며 산화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으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제 고향은 전라도 순천입니다. 똥 구멍이 찟어질 정도로 가난한 여섯 형제의 맏아들입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해병대에 입대해서, 고참들에게 무진장 맞았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를 맞았어요. 매 맞는 것이 두려워 여러 번 탈영을 했어요. 그때마다 부대에서 기가 막히게 찾아오데요. 마지막엔 집 지붕 위에 숨어있다 선임하사에게 붙잡혔습니다.
선임하사에게 붙잡혀 부대로 귀대하면서 ‘이대로 가면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베트남전 지원이었습니다. 고참들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 차라리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하여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에게 몇 푼의 돈이라도 드리고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70년대 초 대부분의 동네에는 티브이(TV)가 한 두 대 밖에 없었다. 저녁이면 동네사람들은 티브이가 있는 집을 찾아 한 두 사람씩 모여들었고, 당시에 있기를 누리던 ‘쇼쇼쇼’ 프로그램에서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월남의 달밤’ 등의 베트남 관련 노래를 항상 시청할 수 있었다.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는 항상 ’대한뉴스’가 방영되었다. 뉴스의 주된 내용은 베트남에서 청룡, 맹호부대 용사들이 용감하게 싸우며, 연전연승(連戰連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베트남 파병을 마치고 귀국하는 장병들은, ‘귀국상자’라는 나무로 만든 선물 상자를 하나씩 가져올 수 있었다.
가전제품이 귀하던 그 시절엔 TV 하나만 있어도 부자로 불리던 때였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TV, 라디오, 카메라 등의 가전제품과 생필품들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누구네 집은 아버지가 월남전에 다녀와서 부자가 되었다.’
‘아무게 집은 아들덕에, 이제 먹고사는 데 지장없겠다---.’
바로 ‘귀국상자’를 보고 이웃집들이 부러워하며 하는 말이었다. 필자 역시 카메라를 처음 손에 잡아본 것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외삼촌이 가지고 온 일제 야시카(YASHICA) 카메라였다.
박정희 정권의 예상대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경제적 부흥과 군장비의 현대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정치 사회 경제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일본이,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의 군수물자 생산기지역할과 보급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안정을 찾은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박정희 정권은 참전용사들을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시키면서, 미국병사들 월급의 4분의 1(같은 시기에 참전했던 필리핀 군인들보다도 적었음)에 해당하는 헐값에 대한민국 청년들의 목숨의 팔았다.
“해병대 훈련소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파병교육을 받았습니다.” 훈련 교관에게 “살아서 돌아가는 방법은 오직 이기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병대는 분대 혹은 중대단위로 최전방에서 작전을 펼칩니다. 미군과는 달리 한국군에게는 후속지원, 중화기 지원, 야포지원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들을 보면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죽어서 시체로 돌아간다면 슬퍼해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사회에서 알아준다고 해도, 곧 잊혀지고 말겠지요---. “
첨병 소총수로 배속돼 정글속에서만 일년을 있다 귀국하여, 베트남에 대한 특별한 추억과 기억이 없다는 한 참전용사의 증언이다. 그는 또 이렇게 증언했다.
“미국놈들! 참 더러운 놈들입니다. 해병대는 적은 인원으로 넓은 지역을 커버하는 특수부대입니다. 주로 소대나 중대 단위로 움직이고, 작전지역이 호이안에서 라오스 국경까지입니다. 때문에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 자동차를 이용한 이동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유명한 ‘케산(Khe Xanh) 전투’도 한미 합동으로 작전을 치룬곳입니다.
대부분의 작전 투입과 철수는 미군헬기로 움직입니다. 작전에 투입될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작전을 마치고 병력을 철수할때에는 문제가 자주 발생합니다. 약소국가의 비애지요. 철수 장소를 베트콩(인민해방전선)에 노출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때 미군 잔여병력이 있으면, 그들은 죽기살기로 자기 병력을 철수시키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철수 대상이 한국군이면, 총소리만 들려도 헬기를 철수시킵니다.
싸구려 용병을 구하기위해 값비싼 헬기와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기 싫다는 것이지요. 적지에서 포로가 되거나 전사할 전우들을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헬기조종사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피를 흘리는데----.”
대부분의 참전용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도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어떨 때는 인민해방전사(NFL)들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 참전용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였다.
“게네들은(인민해방전선) 자기 민족을 위해 싸웠습니다. 일부의 병사들은 포로가 되어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병사나 장교들은 달랐습니다. 아주 떳떳했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영웅이 아니면 죽음 앞에서 의연하기는 어렵습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겠지요. 그들을 바라보며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 차라리 미군들 보다 인간적인 친근감도 생깁디다”
그는 베트남인이나 참전용사나 다 같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참전용사들의 대부분은 정신적(전쟁후유증), 육체적(고엽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국가로부터는 명예도 얻지 못하고. 한때는(전두환 정권시기) ‘참전용사 전우회’가 해체되는 수모를 받았다고 한다. 고엽제를 제조한 미국회사를 상대로 한 고엽제 보상 소송에서는 국가로부터 하나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역사는 바뀌었고,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양대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사회주의)는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받아들이고 있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원수도 없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화해와 용서’는 필요 불가결한 명제이다. 참전용사는 말한다
“이제는 다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양민희생’의 논란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용서가 필요합니다. 한국정부와 베트남정부가 저희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존중하고 관심의 대상으로 보아준다면 진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베트남 국민이나 저희 참전용사들 양쪽 모두가 세계사와 미국에 의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의 파병, 그리고 그 책임성에 대하여---.
제3세계와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베트남은 ‘민족해방혁명’을 이룩한 ‘성공적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베트남은 세계의 군사강대국들이 잇달아 저지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세계의 군사대국들’를 패퇴시킨 동남아시아의 군사강대국이다.
더불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미국의 예속관계에 있는 ‘미국의 식민지적 지위’의 국가로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한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전세계인들이 다 알고 있듯이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시작한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전세계의 지식인들에 의하여 ‘반전운동(反戰運動)’이 전개된 베트남전쟁은,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의 기록’들을 갱신할 정도로 인적, 물적으로 피해가 매우 컷다.
1.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인들은 이미 전쟁의 황폐함과 비인륜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한국의 6.25 전쟁은, 다시 한번 전쟁의 파괴성을 각인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미국에 의해 전개된 베트남전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그럴싸하게 잘 포장되었지만, 시작의 원인과 내용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한국(조선)을 중국, 러시아, 일본과 미국의 강대국들이 자기 마음대로 주고 받고, 먼저 시비를 걸다가 다치면 보상비를 요구하거나 국가적 이권을 강제로 빼앗던 것과 똑같았다.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마피아 집단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힘으로 쉽게 무너질 것 같았던 베트남은, 생각과는 달리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힘’을 과시하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장군이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같은 영웅은 더 이상 미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베트남에는 호치민(Ho Chi Minh)이라는 영웅이 존재했다. 사이공정부의 부패한 정치인들과는 달리, 호치민은 ‘박호(Bac Ho / 호아저씨)’라 불리며 베트남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민중들을 강력한 하나로 결속시켜 ‘민족통일’이라는 ‘절대명제’를 향해, 외세에 강력한 저항을 하였다. 전쟁이 끝을 모르는 장기전 양상을 보이며, 미국정부는 국내외적 상황(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황야의 대결’과는 전혀 달랐다. 동물들도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험한 밀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황토 빛 늪지. 이름을 알 수 없는 해충과 벌레들---. 기존의 전쟁방식과는 전혀 다른 ‘게릴라식 전쟁’은, 환경과 동양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 입장에서 대응하기가 매우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그것은 미국인들에게는 하나의 문화적 충동으로 느껴졌고, 어쩌면 ‘영영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노루사냥처럼 재미있고 스릴 있는 전투를 기대하면서 ‘애국 참전의 줄서기’에 참가했던 수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은,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피를 뿌리며 산화하거나 불구자로 살아 남았다. 지옥 같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쟁의 공포라는 정신적 공황에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이 정신적 공황은 참전상이용사들만이 아닌, 가족과 이웃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던 흑사병처럼 전염이 빨랐다. 그들 참전용사들은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의 짐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에 소요된 막대한 전비는 미국사회의 경제개발 계획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정치, 경제적 예속관계에 있던 한국을 이용하여 미국의 반전여론을 잠재우고, 국제적인 문제로 상황을 희석시키려 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되던 시기는 대한민국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5. 16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 ‘잘 보여야’하는 특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재 쿠테타나 암살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한국이 베트남전 파병에 응하지 않을 경우엔, 한반도 주둔 미군병력이 베트남으로 철군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평화는 ‘물’ 건너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6.25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된 산업시설이 아직 복구가 덜 된 상태였고, 복구에 필요한 민족자본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무상경제원조’를 ‘借款’으로 변경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졌던 유럽경제가 정상적인 가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주도의 경제적 독주 체제가 약화되어 무역적자가 불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과도한 군사력 팽창으로 군사비 과다지출, 그리고 점령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미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립경제를 이룩해야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기간산업 설비투자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자조달에 눈을 돌려야 했다. 월남 파병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추진했던 ‘남미농업이민’ ‘독일에의 광부와 간호사 파견’은 일련의 달러벌이의 자구책중의 하나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군 파병’은 명백히 잘못된 결정이지만, 위의 사례를 통하여 본다면 당시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입장에서 파병은 어쩔 수 없는 국가와 민족적 상황이었다.
일부의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파병 반대’는 의무감은 모르고 권리만을 주장하는 ‘죽은 양심’과 같았다. 마치 ‘남의 집 밥상에 잣 놓아라 감 놓아라’ 라는 책임감도 없고, 국가가 처한 위험에는 관심이 없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갈 사람들이었다. 예로부터 위험에 처한 조국을 지킨 것은 귀족이나 양반들보다는 배우지 못하고 힘 없는 민초들이었다.
최근 한국에서, 일부의 단체들이 주장하는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양민 학살’의 문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년 전, 2000년 6월 베트남참전용사로 추정되는 군복 차림 사람들의 ‘한계레 신문사 난입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기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기자가 아닌, 베트남 학생신분의 통신원이 제보한 기사를 정확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도한 결과였다. 또한 이 신문사에서는 베트남에 관련한 ‘국민모금’ 운동을 하면서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신문사는 국민모금을 통하여 자본을 출자한 ‘국민주 신문사’로, 박정희 정권 시기에 독재정권에 대항하다 해직되었던 언론인(조선, 동아투위 출신)들이 주도하는 진보성향의 신문사이다. 한때는 투옥되어 고통을 겪기도 했던 이 신문사의 언론인들은 ‘촌지거절’과 ‘펜의 자유’를 주장하여 일부 부패한 기자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정권에 유착하며 발전을 도모했던 기업과 부도덕한 정치인들에게 가차없이 기사로 공격을 가했던 이 신문사는 한때는 기업으로부터 ‘광고 수주’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전직대톨령 김대중과 노무현도 이 신문사의 주주이자 강력한 후원인이다.
재야 및 야권 정치인, 학생,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의 후원과 지지로 성장한 이 신문사는, 막강한 자본력과 조직을 가진 기존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이하 조중동으로 표기)의 아성을 넘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랜 역사와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조중동 신문사들은 세계 주요지역에 유능한 기자(특파원)들을 직접 파견하여 심도 있는 기사들을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이 신문사에서는 조중동과 같이 많은 국가에 특파원을 파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해서 고안한 것이 통신원제도로 보인다.
통신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신문사에서 월급 및 취재비에 대한 지급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이다. 기사가 채택이 될 경우에는 사진 및 원고의 양을 기준으로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하면 되기 때문에, 신문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고기 먹고 알 먹는’ 제도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증오심을 가진 이 신문사로서는, 베트남 통신원의 발굴기사는 ‘두 눈이 번쩍 떠지는’ 특종감 기사이리라. 이 통신원을 만나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는 필자로선,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사가 작성됐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문지상에 나온 기사로 보아서는 사실성에 기초하였다고 보기 힘들다. 기사의 내용이 주민들의 일방적 증언이고, 구체적 물증은 확보를 하지 못한 채 기자의 일방적 역사 인식에 기인하였다.
이러한 부분은 통신원이 코디네이터(coordinator)한 한국의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 남미에 이어 베트남에서의 한국남성들의 성 매매를 고발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용은 매우 논리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세상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해결 방향성을 제시하기엔 너무도 미흡했다.
일반적으로 기자에 대해 평가하기를 ‘넓게는 알지만, 깊게는 모른다’라고 평가 한다. 필자는 이 말에 대해 약간은 긍정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매우 잘못된 말이라고 반박하고 싶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전문가를 압도하는 지식과 세상을 폭넓게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레신문사에서는 이러한 실수(?)를 하였을까? 그 이유는 바로 박정희 정권에 의한 강제해직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불어 조중동이라는 거대 신문사들을 제치고 ‘특종’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든 결과로 보이다.
단순 보도만이 저널리즘이 갖는 역할이 아니다. 저널리즘은 ‘역사성’ ‘진실성’ ‘공간성’ ‘책임성’을 고루 갖춰야 한다.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은 ‘계도(啓導)성’이다. 기사의 완벽성을 기하기 위해선 위의 5성에 ‘정(正), 반(反), 합(合)의 논리가 뒷바침 되어야 하며, 특정 그룹이나 사람에 대한 선입관과 증오감을 철저히 배제하여야 한다.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 모두가 언론인이 될 수는 없다. 올바른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는 몇 달에서 수 년에 걸쳐 언론인의 덕목과 자질, 교양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당시의 기사는 일파만파로 한국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며, 베트남으로 기사가 역수입되어 베트남 소재 공관과 교민들의 많은 우려와 걱정을 주기도 했다. 다행히 한국정부의 노력과 베트남 정부의 정책과 배려에 어려워질 수 있었던 상황이 조기에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베트남 교민사회에서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한 게릴라전에서 ‘양민피해’가 발생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엔 구체적인 물증이 없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참전한 군인들을 배려하는 부분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양민피해’ 가 발생했다면, 심증 보다는 법의학자, 군사전문가, 인류학자, 범죄전문가 등이 함께 공동조사를 거쳐 발표했어야 했다. 물론 사실로 밝혀질 경우에는 국가적 차원의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자 보상을 촉구하고, 만일 국가가 책임을 회피할 경우엔 범 국민적 운동으로 국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소수의 소설가들이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들은 한국사회에 베트남전의 재평가와 반성의 물고를 터트렸다. 하지만 독자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소설 전개의 대부분은 픽션일 뿐이다. 참고는 하되, 소설을 현실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와 픽션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피의자를 법에 의해 구속시키기 위해서는, 체포과정에서부터 수사 및 재판 과정까지 민주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심문과정에서 일체의 가혹행위가 있어서도 안 된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가혹행위를 통해 밝혀진 불리한 증언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물증이나 과학적인 테이터가 확보되지 않은 일방적인 증언만으로는 죄를 인정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민간인 희생’은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박정희 정권의 참전(월남 파병) 결정은, 약소국 대한민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국민이라면 누구나가 흘려야만 했던 피를, 참전군인들이 대신한 것뿐이었다. 책임을 지어야 한다면 1차적 책임은 전쟁의 종주국 미국이며, 대한민국도 2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 참전군인들만이 지어야 할 책임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은 피해자일 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32만. 참전군인들 대부분이 1년씩 파병기간을 거쳐, 운 좋게 살아남은 용사 중에서 고엽제 피해자로 고통 받는 등록환자 9만 명. 이들 참전용사 중에는 일찍부터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뒤늦게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2~3세에 대물림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학생시절인 80년 중반에, 고엽제 환자 다큐멘터리 사진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충청남도 천안에서 만난 한 참전용사는, 고엽제 피해로 온 가족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결혼 후 시름시름 않던 참전 용사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걷지도 못하고 병상에서 시름하고 있었다. 또한 그 증상이 2세들에게 유전되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착하기만 하던 큰 아들은 부모의 병수발을 하면서도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대학을 입학하자 마자 코피를 쏟더니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않고 있었다. 둘째 아들도 언제 증세가 나타날지 몰라 심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는 국가의 지원도 없었고, 치료방법도 없었다. 이미 오랜 기간을 병상에서 고통을 경험했던 그는 아들과 나이가 비슷한 필자에게 ‘차라리 빨리 죽어, 자식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며 탄식했다. 부모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청룡부대 베트남전 참전일지
알림: 아래의 참전 기록은 베트남 참전용사 홈페이지 자료의 일부를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원문의 내용에서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는 정확한 단어로 교체하였습니다.
1964년 12월,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에서는 미국과 사이공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한국군 월남파병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65년 2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주월한국군사지원단)를 창설하여 파월, 그 해 10월초 병력 증파결정에 따라 청룡부대(해병제2연단)가 전투부대로는 최초로 파병하였다. 뒤이어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차례로 파월되어 약 6년 간에 걸쳐 군사지원작전과 촌락의 평정 및 재건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전투부대 및 교체병력의 수송을 위해 해군에서는 십자성부대를 편성하여 수송작전에 참가했다.
국회의 결정에 따라 파병을 위한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1965년 9월, 청룡부대 결단식을 마치고 청룡부대 장병들은 특수전 교육을 받았다. 그해 10월 3일 부산항을 출발한 청룡부대 장병들은 6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9일 칸화성의 동남단 중부월남의 미항 캄랑(Cam Rang)만에 상륙했다.
해병대가 상륙했던 캄랑만은 19세기 중엽 불란서 군대가 베트남을 침략할 때 상륙을 했던 곳으로, 일·로 전쟁때는 러시아의 발트 함대가 경유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이 이곳을 거쳐 당시의 안남국을 통치 했을뿐 아니라, 프랑스군이 패전한 뒤 미군이 월남전에 개입할 때에도 역시 상륙기지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항만이었다.
아침 8시경, 상륙에 앞서 청룡부대장은 미 해군수송선 카이저호의 함내 스피커를 통해 역사적인 상륙을 앞두고 짤막한 격려문을 방송했다. 그날 그 부두에는 주월 한·미 외교사절단과 월남군 당국자 등 수십 명의 환영인사들이 태극기와 청룡기를 앞세우고 상륙하는 장병들을 환영해 주었다.
상륙 후, 캄랑(Cam Rang)만 북방 4킬로 지점의 미군기지로 이동한 청룡부대원들은, 그곳에서 미 제101 공수사단, 제502 공수보병대대 등과 임무를 교대했다. 이로부터 약 6년간 캄랑(Cam Rang)지구에서 투이호아(Tuy Hoa), 쭈라이(Chu Lai) 및 호이안(Hoi An)으로 북상 전진하며 지옥전선과도 같은 열사와 밀림지에서 청룡부대 해병대원들의 베트남에서의 임무가 시작되었다.
캄랑지구 전투
청룡부대의 첫 번째 작전은 캄랑지구에서 수행한 까투산(△318) 공략전이었다. 백경작전으로 명명이 된 그 까두산 작전은 1965년 10월 하순경 청룡 제2대대가 판랑(Phan Rang)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건설중인 비행장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비행장을 위협하는 까두산의 인민해방전선(LFL)과의 첫 전투였다.
꼬박 하루에 걸친 치열한 전투결과 피아간에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청룡부대는 결국 고지 탈환 작전을 완수하였다. 이곳은 과거(1953년) 프랑스군의 대규모 부대가 8차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 수차에 걸친 월남군의 공격 역시 무위로 돌아감으로써 지난 18년간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의 난공불락의 고지였다.
성공적인 첫 전투를 마치고 11월 초순부터 12월 하순경까지, 냐짱(Nha Trang) 서북방 일대를 평정하는 [번개 1-2호]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전투는 지역에 주둔하는 한국군 및 미군부대의 군사시설과 비행장 및 철도와 촌락을 보호하는 작전이었다.
투이호아(Tuy Hoa)지구 전투
청룡부대는 1965년 12월 22일부터 그 이듬해 1월 중순경까지 투이호아(Tuy Hoa)지구에서 파월 이래 최초의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다. 청룡1호 작전으로 명명된 이 대규모의 작전은, 인민해방전선의 해상보급기지와 지하 야전병원, 군사시설이 밀집한 붕로만(Voung Lo)만과 다비아(Da Bia)산 일대를 평정하여, 냐짱(Nha Trang)과 퀴년(Qui Nhan)을 연결하는 1번 도로를 개척하는 작전이었다.
1단계에서 3단계로 나뉜 작전으로, 약 18년간 폐쇄상태에 있었던 1번 도로의 남과 북을 개통시켰다.
작전이 끝나고 청룡부대원들은 약 5개월간을 투이호아(Tuy Hoa) 서남부의 평야에서 주민들과 피난민들의 추수보호를 위한 청룡2호 작전을 수행하면서, 양민보호, 촌락재건 등을 위한 재건작전을 실시하였다.
쭈라이(Chu Lai)지구 전투
꽝냐이(Quang Ngai)성의 쭈라이(Chu Lai)지구는 청룡부대가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작전을 수행한 곳이다. 투이호아(Tuy Hoa)에서 평정작전을 마치고 추라이(Chu Lai)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비봉작전,안호아촌 재건작전, 미·월 양국군과 합동으로 전개한 용안작전, 투망작전, 강구작전, 짜빈동(Tra Vinh Dong)기습방어전, 뇌룡작전, 노룡작전, 용머리2호작전, 태로이 매복작전, 용화작전 등 수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
이 가운데 특히 1967년 2월 14일 밤부터 15일 아침 사이에 벌어졌던 짜빈동기습방어전은 베트남전 사상 중대단위 방어전으로서는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던 전투였다.
호이안(Hoi An)지구 전투
1966년 9월 19일 쭈라이(Chu Lai)지구로 이동한 이래 1967년 12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친 대대 및 여단급 규모의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청룡부대는, 1967년 하순부터 1968년1월 하순에 이르는 기간 중 새로운 작전지역인 호이안(Hoi An)으로 이동했다.
청룡부대가 호이안(Hoi An)지구로 이동한 이유는 월남의 제2전략 도시인 다낭(Da Nang)과 호이안(Hoi An)시를 연결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청룡부대의 호이안(Hoi An)에서의 최초 작전은 괴룡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30일 새벽 2시 30분을 기해 월남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아군이 펼친 반격작전이었다. 약 1개월 반에 걸쳐 전개된 이 반격작전에서 청룡부대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측도 23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 밖에도 용진작전을 비롯한 승룡작전(1호~20호)과 황룡작전(1호~17호) 등을 전개하였다.
파리평화협상과 연합군의 철수
1968년 5월 3일, 이 날은 월남전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기 위한 참전당사국(미국과 월맹)간의 첫 회담이 열린 날이었다. 회담을 먼저 제의한 쪽은 미국이었고, 미국이 협상에 의한 타결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막강한 화력, 수 십만의 병력을 보유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은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서 쉽게 승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둘째, 승산도 없는 전쟁에 막대한 전비(戰費)와 희생을 무릅쓰고 계속하느냐 하는 미국 국민들의 거센 반전여론과 목전에 다가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집권당(민주당)의 입장.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파리평화협상은 그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막후교섭이 부단하게 이루어진 끝에, 1971년 4월경부터 미군의 철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등 다른 연합국도 철군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한국정부도 그 해 11월 6일 제1차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1971년 12월 4일을 기해 청룡부대를 포함한 제1진의 철수가 단행되고, 그 뒤를 이어 종합적인 철군계획에 따른 후속부대의 철군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월남전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휴전협정)이 조인된 일자는 닉슨 대통령이 재선된 지1주일 후인 1973년 1월 27일이었고, 그 협정이 발효되어 월남 전역에 걸쳐 전투행위가 중지된 시각은 그 다음날 28일 오전 8시였다. 미군이 월남전에 투입된 지 꼭 10년 만에 끝난 셈이었다. 10년 간에 걸친 전투에서 미군은 45,000명의 전사자와 30만명 이상의 전상자를 내었다. 확전으로 치닫고 있던 1965년부터 1971년 사이에 소모된 전비는 무려 1,400억 달러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군을 비롯한 다른 참전 연합군의 전사자만도 5,000명 이상으로 집계되었고, 베트남 인민해방전선은 30만명의 전사자와 5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남북 월남의 민간인 피해자수는 무려 300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데이터 상으로 볼 때, 실로 역사상 유례없는 대전쟁의 종결이었다.
그 후,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Saigon)이 함락됨으로써 오늘날의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자료출처: 글, 사진:류기남(CREATION AD., INC 대표이사, CREATION 발행인)
베트남전 자료사진: 해병전우회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