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환대다!(룻2:14-16)
2026.1.1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환대의 하나님이시다. 환대는 단지 기독교 윤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십자가는 우리(나)를 향한 하나님의 환대의 절정이다. 이것을 우리는 보통 ‘은혜’라고 표현한다(엡2:8-9). 이 땅에서 하나님의 환대를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이다. 만약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환대가 훈련되지 않고, 무장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구제 또는 전도는 어느 순간에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의무와 부담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환대가 사랑이다!”라고 할 때,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중에 이 시간에 함께 묵상하면서 나누고 싶은 것이 ‘배려’에 관한 것이다. 배려와 유사하게 관용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다. 보통 배려와 관용은 친절이라는 옷을 입고 표현되어지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배려와 관용은 있는데, 그것을 불친절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흔히 “본심은 그것이 아니다”, “난 원래 성격이 그렇다”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본심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친절한 배려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또한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거친 말이나 말투, 불친절한 행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워야 하고, 매일 말씀과 기도라는 끌과 정으로 우리의 입과 마음을 다듬어 가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친절의 옷을 입은 배려와 관용은 자신의 거친 성질과 자존심까지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 같지만 사실은 위대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토크쑈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는 이런 말을 했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If you have more than others, it’s not a blessing but a mission)”
배려와 관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배려와 관용은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배려와 관용은 상대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가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다)이다. 하나님께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우리(나)를 친절하게 배려해 주셨고, 관용을 베풀어 주셨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와 관용이 우리를 살려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영적인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이것이 환대이다.
구약 룻기에 나오미(Naomi)의 가족이야기가 나온다. 나오미는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나오미 자신과 모압 여인인 두 자부(오르바, 룻)뿐이었다. 가뭄기간이 끝나고 나오미가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오르바는 자기 민족에게 돌아갔지만, 룻(Ruth)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랐다. 이들이 이런 선택을 했던 곳이 바로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이라고 불리는 ‘아르논 골짜기(Arnon Valley)’이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가 마침 보리 추수철이었다. 룻은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보아스(Boaz)의 밭에 가서 추수하다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것을 알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배려했다.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룻 2:15-16)
이러한 보아스의 친절한 배려와 관용이 바로 환대이다. 보아스같은 사람을 신사(젠틀맨, Gentleman) 또는 숙녀(레이디, Lady)라고 한다. 친절한 배려와 관용은 단순히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사람의 품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여기서 쓰인 관용(에피에이케스)은 ‘양보하다’, ‘배려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베풀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에게”이다.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나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이처럼 관용해야 하는가 하면,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이다(재림의 날, 주님을 만날 날). 사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관용하려 할 때, 때로는 손해 보는 것 같고, 바보가 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유명한 권면의 말씀을 했다.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는 성경구절이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5-7)
지난 코로나19시기에 불황으로 직장을 잃었던 어느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홀로 일곱 살 난 딸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딸의 생일이 되었지만, 그의 통장에는 571원이 전부였다. 그런데 딸은 “아빠, 생일엔 피자랑 케이크 먹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빠는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하나뿐인 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서 망설이다가 평소 몇 번 주문했던 동네 피자집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제가 7살 딸을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딸의 생일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 부탁드리는데요, 제가 직장을 구해서 일하면 드릴 테니 피자 한 판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거절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버지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해본 부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화를 받은 젊은 사장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걱정하지 마세요. 곧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배달원이 피자를 들고 도착했다. 영수증에는 ‘결제 완료’라 적혀 있었고, 피자 상자 위에는 큼지막한 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따님이 또 피자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 글에 아버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딸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피자를 먹으며 행복해 했다. 그날의 피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이 사연이 인터넷을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피자집 사장의 배려에 감동한 사람들은 그 가게에 주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낮선 사람이나 약자를 대할 때 또는 성도 사이나 가족을 대할 때 그리고 동료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떠한가? 친절한 배려와 관용이 곧 환대이다. 참 이상한 것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더 불친절한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가족, 성도, 목회자, 친구, 부모 등). 통탄할 모습이다.
다시 본문을 생각해 보자. 보아스는 이방여인 룻을 배려하며 친절하게 환대해 주었다. 결국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하였는데, 하나님은 그 집안에서 다윗 왕이 태어나게 하셨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과 친절하게 환대했던 보아스를 잊지 않으셨다. 이것이 환대가 가져오는 열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배려가 환대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배려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배려도 있고, 사람을 향한 관계의 배려도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친절함으로 서로 배려하고 관용을 베풀자. 영적인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환대가 사랑이고, 배려와 관용이 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