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 그늘
로뎀이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왕상19:4~5)
그러나 로뎀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특별한 계기로 요르단의 암만에서 살게 되면서, 비로소 로뎀나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로뎀나무는 낮은 광야 혹은 모래언덕이나 산비탈에서 자란다. 시내광야, 아라바광야, 이스라엘의 남쪽 광야지대, 요르단의 와디람(Wadi Rum)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로뎀나무는 조각목과 함께 중동의 남부지역 광야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나무다.
아르논 골짜기를 방문할 때면, 디반(Dhiban)에서 아르논 전망대로 가는 길목의 양쪽으로 로뎀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자라는 곳을 지나간다. 안내자가 설명하면 보겠지만, 그냥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유가 있다면 하차하여 만져보거나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로뎀을 영어 성경에서는 a bloom tree(NIV), a juniper tree(KJV)로 번역했으며 아랍어 성경에는 ‘라탐’으로 기록되었다. 현대인의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싸리나무’ 혹은 ‘싸리나무 덤불’로 번역했다. 실체를 못 본 상태에서 소나무나 다른 상록수를 상상하다가 실제로 로뎀나무를 보았을 때 첫 느낌은 묘했다. 실망할 만큼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 가지나 잎의 모양은 마치 우리나라의 '댑(대)싸리 나무'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싸리나무나 댑싸리와는 모양새와 잎이 전혀 ‘다른 나무’였다. 5월경이면 흰색의 작은 꽃을 피운다. 그런 나무가 광야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쉴 자리를 내어 주다니!
한때는 성지순례객들을 안내하는 특혜를 누리기도 하면서 로뎀나무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어느날, 단체로 찾아온 시각장애인(약시)들을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모세 기념교회가 있는 느보산(Mt. Nebo)을 방문하고 돌아서려는데 어느 분이 질문을 했다.
“로뎀나무를 볼 수 있나요? 어떻게 생겼나요?”
“갑자기 로뎀나무가 왜 보고 싶으시지요?”
“우리 교회 이름이 ‘로뎀교회’입니다.”
급히, 근처 야산에 뛰어올라가 로뎀나무 가지 몇 개를 꺾어 버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직접 만져보게 했던 추억이 서린 나무다. 한국에는 교회뿐 아니라 식당, 펜션, 광고기획사, 의류판매점, 꽃집이나 여행사에도 로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먼 훗날 귀국해서야 알게 되었다. ‘땡볕 아래 쉴만한 그늘’ 이것이 로뎀을 선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요르단 와디람(Wadi Rum)의 황량한 넓은 모래밭에서 듬성듬성 자라는 로뎀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 로뎀나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엘리야의 시대로 시간여행을 한다.
*** 다리에 힘이 풀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앞이 캄캄하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기손 강에 끌어다 없앨 만큼 기세등등(氣勢登登)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자기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지만, 이세벨의 체포령 앞에 기가 팍 죽은 것이다. 생명의 위협 앞에 평정을 유지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나. 실망과 불안과 좌절이 그를 브엘세바 광야로 몰아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둔다는 사실을 몰랐다. 피곤하고 지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죽고 싶다고 하소연한다. <왕상19:4> 훌륭한 신앙인이라도 위기를 만나면 흔들릴 수 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힘들 때가 있다. 슈퍼맨인 듯 동분서주하며 많은 신자를 돌봐야 하는 목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행하지만, 인성을 초월한 선지자는 아니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탄식하다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령한 양식을 먹고 나서야 새 힘을 얻고, 40주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갔다. ***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는 누구나 쉼터가 필요하다. 오늘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로뎀나무 그늘은 어디에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마11:28~ 30)
암만 서북부 ‘칼다’라는 마을에 방을 얻고, 우선 Modern American School에 재학 중인 쌍둥이 손자와 함께 셋이 독립했다. 여유로운 방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누구나 와서 쉬면서 새 힘을 충전하는 숙소로 활용되기를 바랐다. 현관에 ‘로뎀그늘’이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레바논에서 가져온 컴퓨터 모니터만 한, 나뭇결이 곱고 무늬가 아름다운 타원형의 백향목 판자에 조각칼로 음각(陰刻)하고 색칠을 했다. 언어와 종교와 풍습이 생소한 요르단에서 ‘날마다 포기하고, 날마다 새로 시작’하던 내게도 ‘로뎀나무 그늘’이 절실히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하다!” -觀-
이관수: 청주서문교회 명예목사, 활천문학 회원, 대한기독문학 회원, 괴산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