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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15일 목요일 [(백) 한가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없음 요엘 예언자는 시온의 자손들에게, 주님께서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게 해 주시리니 기뻐하며 찬양하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은 안식을 누릴 것이니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고, 구름 위에 계신 분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을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재물에 달려 있지 않으니 탐욕을 경계하라며,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리라.>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리라.>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한가위는 음력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며 달빛이 가장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가을에 지내는 큰 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송편과 토란국, 운이 좋으면 송이로 만든 전과 산채 나물을 먹는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표현이 나왔나 봅니다. |
돈이면 다? 지상의 재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날카롭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의 부(재물)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부(영원한 생명)을 비교 대조시키면서 영원한 생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한국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부익부빈익빈 현상 앞에서 ‘엄청난 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연스럽게 눈이 쏠립니다. 그들의 능력 정말 대단합니다. 얼마나 죽기살기로 노력했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부를 축척했을까요? 또 얼마나 아끼고 신경을 썼으면 그렇게 대단한 자금을 모으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해도 남을 부를 일부분이나마 사회로 환원한다거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내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런 나눔도 몸에 익숙하지 않으면 시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보니 오로지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아까운 것들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한 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때, 평생 벌 줄만 알았지 쓸 줄 몰랐던 자린고비로 기억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때 중요한 것은 ‘지상의 재물’이 아니라 ‘천상의 재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실 것은 지상에 남겨두고 온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 살 때 또 다른 하느님이었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눈 ‘천상의 재물’인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지상의 재물도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흘러가고, 천상에서는 빈털터리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니 인생 참 서글프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내게 넘치는 부분이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 넘치는 부분을 가난한 이웃과 기쁘게 나누는 그 행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스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탐욕스런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려는 사람입니다. 뭔가 쌓아두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쌓아놓은 것들에 마음이 쏠립니다. 그래서 탐욕스런 사람은 더 큰 것, 더 본질적인 것, 더 중요한 것,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부자들의 결정적으로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돈이면 다’라는 허황된 사고방식입니다. 돈이란 것, 돌고 도는 것,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돈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것이고 영원히 소유하지 못할 대상이 돈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자들은 믿지 못할 돈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을 잊어버립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그 잘난 돈으로 인해 인생 망쳐버립니다. 재물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수도자이기에 오늘 복음 말씀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재물 대신 대치될 대상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의외로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일중심주의, 자기중심주의, 교만, 아집,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런 또 다른 대상들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집할 때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
-전삼용신부-
2005년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란 영화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컴퓨터 그래픽의 힘으로 볼만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영화감독 ‘칼 덴햄(잭 블랙)’은 거리에서 우연히 발굴한 매력적인 여인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와 시나리오 작가 ‘잭 드리스콜(애드리안 브로디)’과 함께 영화 촬영을 위해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인 해골 섬을 찾아 떠납니다.
해골섬의 원주민들은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바치려고 그들 중 아름다운 앤을 잡아갑니다. 킹콩은 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앤은 도망치려 하고 그 때 거대한 공룡이 그녀를 잡으려 할 때 킹콩이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고 구해줍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감독 ‘덴햄’은 ‘킹콩’이 ‘앤’에게 마음을 빼앗긴 틈을 타 ‘킹콩’을 뉴욕으로 생포해옵니다. 가짜 앤을 만들어 놓고 쇼를 버리는 동안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킹콩’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야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뉴욕 도심을 휩쓸기 시작합니다.
이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킹콩이 사랑하는 진짜 앤, 앤은 그 앞에 나타나고 군대들은 킹콩에게 빗발치는 공격을 퍼붓습니다. 킹콩은 공격을 피해 ‘앤’을 데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올라가고 결국 앤을 보호하다가 비행기들의 총탄을 맞고 서로의 사랑하는 눈빛을 교환하며 떨어져 죽게 됩니다.
앤은 처음에 킹콩에게 바쳐지는 제물이었습니다. 킹콩은 마지막에 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관계엔 제물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가장 기다려지던 날은 아무래도 제삿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가게도 없었고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았지만 제삿날만큼은 먹을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매일 돈 없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돈이 어디서 나셔서 그 많은 고기와 과일과 과자를 차려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킹콩에게 바쳐진 앤도 이런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킹콩은 그 제물을 받으며 그 제물보다도 자신에게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의 정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 줍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혹은 사람을 재물로 바쳤던 수많은 문화권 안에서, 또 우리나라 이무기 시리즈와 같은 것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어떤 동화에서도 엄마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떡을 호랑이에게 줍니다. 호랑이는 떡을 먹으면 엄마를 놓아주지만 결국 엄마가 바칠 것이 없을 때는 엄마를 해치게 됩니다.
저는 신학을 하며 바로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를 위해 주시는 ‘제물’이란 사실이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증명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제물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자신을 성령을 통해 상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 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가보인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한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 옵니다. 이것이 서로를 위한 제물입니다. 제물은 관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제물이란 것은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게 되었을 때, 특별히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상대를 위해 주게 되었을 때 그 제물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당신 생명을 받습니다. 성체,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제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제물로 봉헌을 하고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더러 부모의 유산을 자기에게도 나누어 주기를 청해 달라고 합니다.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분명 형이 잘못하는데도 예수님은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이 많이 생기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 사라져가는 지푸라기에 불과하고 또 재물이 많아질수록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재물을 모을 줄 알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제물을 바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물이 없으면 어떤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모으는 사람은 하느님께나 이웃에게나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도 관계이고 십자가도 예수님께서 관계를 위해 당신을 봉헌한 것이며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미사에 나와 하느님의 제물인 성체를 받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당신의 사랑을 적게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쳐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만큼 바쳐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는 오고가는 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삼위일체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라는 관계를 위한 제물들입니다. 부정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유일한 가치인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그리고 이웃들 앞에서 항상 부유한 사람이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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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의 聖女 가타리나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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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코포 피에쉬(Giacopo Fieschi)와 프란체스카 디 네그로(Francesca di Negro)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Juliano Adorno)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생활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카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Cattaneo Marabotto) 신부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영성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1510년 9월 15일 제노바에서 선종한 카타리나는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 자료집에서 발췌 |
성격이 맞지 않아 불행한 결혼이었으며 10년이 지나면서 남편의 방탕으로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때부터 남편이 반성하면서 성화된 가정의 꽃을 피웠고
함께 병원 근무를 하다가 장부 사후부터 많은 신비 체험을 겪는 가운데 신비신학 분야의 유명한 저서를 남겨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를 특히 경고하신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저희가 사탄의 흉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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