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일은 우리 국군의 위용과 발전을 기리고 장병의 노고를 치하하는 건군 76주년 국군의 날이었다. 이날 정부의 시가행진에는 병력 3,000여명과 83종 340대의 장비가 동원됐다.
웅장하게 거행된 이 행사의 이면에 국군의 날을 제정하게 한 역사적인 양양의 38선 돌파 기념이라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정해진 유래는 이렇다.
6·25전쟁에서 육군 제3보병사단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 북진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당시, 북의 기습남침에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려 괴멸 직전에 처한 UN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역공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승리를 거듭하면서 북진하던 육군 1군단 예하 김백일 장군이 이끄는 3사단은 9월 29일,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 38선까지 진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에 있는 UN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작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황급히 연락한다.
“참모총장! 국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네. 각하! 3사단이 양양의 38선까지 진격하여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뭐야? 아니 총장은 누구의 부하인가? 맥아더의 부하인가? 나의 부하인가? 어찌하여 맥아더의 명령을 기다린단 말인가. 빨리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 ”
UN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대기명령을 무시하고 무조건 북진을 감행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정일권 참모총장은 즉시 김백일 장군에게 명령하였고 23연대 김종순 연대장이 이끄는 백골부대의 10중대가 역사적인 38선 돌파를 감행하게 되었다. 이때가 1950년 10월 1일. 11시 25분이라고 한다.
이는 후일, 국군의 창설일이 아닌 38선 돌파 기념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유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는 일찍이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에서 38선 표지석을 웅장하게 건립했으며, 십수 년째 회원들이 호국영령들을 위한 추모제와 민족통일기원제를 자발적으로 지내오고 있다.
그러함에도 양양의 38선 표지석과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의 추모행사는 제대로 된 세간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행정의 지원이 전무한 가운데 회원들의 주머니 돈으로 그나마 면면히 이어오던 추모제를 협의회의 극심한 재정난으로 인해 올해는 취소하기에 이르니, 이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사실, 양양 38선은 한국전쟁의 산물이자, 국군의 날을 제정하게 한 시발점이며 지역민들에게도 자유 대한한국을 안겨다 준 의미와 가치를 느끼게 하는 귀중한 사료적 장소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해마다 봉행하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 대한 추모제는 또 어떠한가.
요즘 MZ세대들과 대화를 해보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성에 대해서 느끼지도 못하고 분단의 아픔, 수복지구의 애환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국가관이나 애국심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이 도발의 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는 시점에 양양의 38선 표지석과 38추모제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본다.
이에 38선 표지석 주변에 국군의 날 제정의 유래와 한국전쟁 관련 자료, 전 세계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의 현실 인식, 애국심, 통일관, 국가관 등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생생한 사료관을 건립하여 안보교육에 활용하고 일반에게도 안보 관광의 명소로 알린다면 더 없이 유익할 것이다.
특히, 민족통일 양양군협의회에서 주최하는 국군의 날 기념행사와 추모제도 행정에서 예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국가급 안보 행사로 육성하고 역사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목,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한다면 국군의 날 38선 추모제의 의미가 더욱 더 크고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깊이 생각한다.
최종한 시인 민족통일양양군협의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