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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묵상글 들 (연중 제12주일 - O, Felix Culpa, O, Felix Timo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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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12주일 - O, Felix Culpa, O, Felix Timor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주제는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하느님과 바다>입니다.
독서 욥기가 바다와 파도를 하느님께서 가두심을 얘기하고,
복음은 주님께서 바다의 풍랑을 복종시키심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중 제12주일은 우선 "깊고 깊은 땅속도 당신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당신 것이네. 당신이 만드셨으니 바다도 당신의 것, 마른 땅도
당신이 손수 만드시었네."라는 시편 말씀처럼 바다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하느님 것이기에 하느님 손안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도
하느님 손안의 존재로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손안에 우리도 있고 바다도 있다는 것은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는 우리는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존재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 품 안에 품어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우리를 내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는 것이요
자기 부정이기 때문에 우리를 내치실 리가 없고 품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바다 위에서 우리와 한배를 타신 것이 아니라
바다와 우리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 손안에 있거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람 때문에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바닷물이 배에 들이치니
제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풍랑에 겁에 질려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제야 주님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주무시다가 일어나시어
풍랑을 잠재우시고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제자들을 나무라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고물을 베고 잤어야 했습니까?
잘 수는 있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처럼 잘 수 있어야 하지만 두려움으로 잘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두려움이 없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이 아니라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다와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이 이런 두려움 체험을 통해
주님께 대한 큰 두려움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맺음을 합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큰 두려움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큰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것이며 큰 믿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에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갖게 되는 인간적인 큰 두려움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영적인 큰 두려움과 큰 믿음의 마중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길에 아무런 풍랑도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움이 없기에 하느님을 찾지도
믿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두려움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큰 믿음을 지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느님 은총을 만나게
하기에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을 '오 복된 두려움이여/O Felix Timor'라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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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키엣대주교님.
시련과 믿음의 깊이
구약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상징입니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의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명하며 떠났습니다. 나이 많은 사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 유일한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받치려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들을 죽이려하는 순간 하느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막았고 아들 대신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 제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도록 완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센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도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편히 쉬고계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난 파도와 태풍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연과 바다를 경험한 사람이 더 할 것입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에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지경이고 요동치는 배위에서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수 많은 기적을 이루신 스승님이 계시건만 그분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편히 주무시고 계시는 스승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련을 통해 믿음을 주시고자 주무시는 척하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렇습니다. 마치 어린 자녀 몰래 숨어서 자신을 간절히 찾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녀의 사랑을 확인하듯 주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내 옆에 계시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때대로 그분의 존재를 잊기도 하고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식어갑니다. 시련이 닥쳐야만 다시 주님을 찾고 주님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커다란 시련이 닥치면 그제서야 나약한 자신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자 베드로는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떼지도 못하고 물에 빠졌습니다. 거센 파도에 익숙한 뱃사람들임에도 거센 파도와 풍랑에 두려웠습니다. 시련이 닥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시련을 극복할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십니다.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온전한 믿음을 주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련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어느 순간만 시련을 주십니다. 아직 당신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거친 풍랑이 두려워 주무시는 당신을 원망하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금새 거센 파도를 잠재워주셨습니다. 파도가 잔잔해지자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더 굳건해졌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과 권위를 본 제자들은 더 이상 시련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 경험을 통해 강해지고 믿음 또한 굳건해질 것입니다.
시련은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시련이 닥치면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믿었는데 이렇게 벌을 주신다며 원망스러워합니다. 그러나 힘든 그 순간 나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시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닥칠때일수록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는 진실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련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한 체험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귀한 믿음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시련과 도전들이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어떤 시련을 경험하였습니까?
2. 시련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누구입니까?
3. 주님께서 그 시련을 주신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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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2003년 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KBS 라디오의 방송작가가 건 전화였습니다. 라디오 프로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교회에 누가 되는 말을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을 알리는 선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했습니다.
방송 녹음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에 라디오 홀에서 녹음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생각만 하면 긴장되었습니다. 미리 방송국에 가서 대기하는데도 이 긴장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담당 피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믿음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하는 방송이어도 떨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부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떨었는데…. 피디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떨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저를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렇게 긴장하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긴장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만 믿는다면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의연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께서 오히려 지치셨습니다. 그만큼 전교여행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지치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쳐 주무시고 계시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지요.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표징을 봐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겁을 내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그마한 일에도 두려움을 갖고 얼마나 힘들어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믿음 없는 모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의 방법을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간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말끔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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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바론 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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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바라보세요.
2021년 지난 봄에 갑곶성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산수유, 목련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숭아꽃 등 각종 꽃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작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작년에도 갑곶성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작년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병 중에 계실 때,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도 제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어도 전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꽃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민 수용소에서 배고픔으로 힘든 난민에게 음식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가장 먼저 꽃밭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음의 안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힘들어했을 때, 주님께서는 분명 아름다운 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않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고통과 시련만을 주시는 주님일까요? 이길 힘도 분명히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지 않기에 고통과 시련만 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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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은 연중 제12 주일입니다. 불볕더위가 찾아오나 봅니다. 활활 타는 사랑의 불가마에서 단단히 정련되고 단련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고통과 위기 속에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요청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고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원망하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 1 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의인 욥이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침묵하시는지?’ 따지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욥을 깨우치고자 하느님은 ‘누가 진정 하느님인지?’를 되물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도도한 파도를 멈추게 하는 이는 누구이냐?”(욥 38,11).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을 해줍니다. 곧 거센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는 바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밝혀줍니다. 이를 대치되는 극한 상황을 통해 잘 드러내줍니다. 곧 바람과 풍랑에 겁먹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바람과 풍랑에도 편안하게 잠들어 계시며 권능으로 죽음과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 모습의 대치를 통해서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때는 저녁이 되었고 어둠이 닥쳐오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임을 알려줍니다.
호수 건너 저편, 생명의 뭍으로 가는 여행,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여행을 이끌고 계시며,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도 주무신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줍니다. 시편작가는 말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풍랑은 잠재우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의 생명으로 깨우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들어주시지 않으신다고 투정부릴 때, 곧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 독서>는 바로 이러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줍니다. 곧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평화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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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 꿈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정적으로 위기 앞에서는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돌풍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하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돌풍을 통해서 믿음의 현주소를 보았다는 것이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4,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생여정에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폭풍우가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키워야 합니다. 베드로 첫째편지 5장 7절에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옆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밤이란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이고, 깊은 물과 풍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손희송).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끊임없이 간청하면서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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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⒈ 연중 제12주일인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는 사도 바오로의 호소를 주제로 삼아 강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공생활 3년 동안 사도로 양성받지 않고서도 바오로는
사도로서 어느 사도에 못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신앙은,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23) 하고 말할 정도였고,
그분의 부활에 대한 그의 신앙도,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는 호소는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합하여 말하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우선은 우리들 각자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친다고 호소하며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로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함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⒉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도 없이 못박히신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모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도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부활도 하느님의
권능으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상기시키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한 말이다”(욥 38,8-11).
⒊ 특히 오늘 욥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당시에 일어난 전 지구적
변화 사태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시지만, 대홍수 당시에 그 변화가 가장 컸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세 1,5-6).
그리고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렸으며,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창세 7,11-12).
사십 일 간의 대홍수가 그친 후에도,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습니다(창세 7,19).
그 이유를 창세기에서는 큰 심연의 모든 샘구멍이 터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깊은 바다 속 지각의 지하수맥을 모두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깊은 지각에 흐르는 물은 뜨거운 용암이니, 이 말은 화산 폭발 사태가 대규모로 일어났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⒋ 그러자, “땅에 물이 점점 더 불어나, 온 하늘 아래 높은 산들을 모두 뒤덮었습니다”(창세 7,19).
“물은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나 더 불어났습니다”(창세 7,20).
'암마'는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사람마다 다르지만 평균 46cm로 칩니다.
그러니까 물이 산들을 덮고도 열다섯 암마의 높이만큼 더 불어났다는 말은 690cm,
거의 7m 높이만큼 전 지구를 뒤덮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덩어리들,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우글거리는 모든 것,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숨지고”(창세 7,21) 말았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비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⒌ 하느님께서는 한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고자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 1,6) 하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으신 다음,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창세 1,7-8).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궁창 위에 모아 놓으신 물을 죄다 쏟아지게 하시고,
바다 속 지각 안에 있던 지하수맥까지 몽땅 터트리셔서 지구 안팎에 조성해 모아 놓으신 물을 죄다 심판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홍수 때에 쏟아졌던 그 많은 물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답이 오늘 욥이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전 지구적인 조산운동, 조륙운동,
지각변동이 산과 바다, 모든 대륙에서 일어나서 바다는 더 깊게, 산은 더 높게 만드시어 물을 가두셨습니다.
⒍ 대홍수 이전에는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5).
그렇지만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기 때문에”(창세 2,6)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대홍수 이전에는 하늘 위에 떠돌던 물이 지구의 덮개처럼
작용하여 해로운 햇볕을 막아주는 한편 따뜻한 온기를 전달해 주었으므로 지구 상 어디에서나 고른 날씨가 가능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도 지구 전체에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예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내신 것을 후회하실 만큼 죄를 저질러서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을 유혹하던 그 수법으로 카인의 후예들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물덮개가 사라지자 보호막이 없어진 지구 상의 날씨가 사나워졌고,
그래서 생겨난 극지방의 추위와 적도지방의 더위가 해마다 큰 비바람을 되풀이해서 불게 만들었습니다.
⒎ 대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죄를 저지르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라고 축복을 내려 주셨지만, 노아의 후손 가운데에서도
니므롯 같은 자들은 또 다시 하느님께 거역할 뜻을 세우고 신아르 벌판에다 왕국을
건설하고는 그 중심에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8-10; 11,2).
당신께 맞서려고 세운 바벨탑을 못마땅하게 보신 하느님께서 언어를 흩트려 놓으시자 바벨탑을 세우던 니므롯의 후예들이
온 세상에 퍼졌고, 이들이 자행하는 우상 숭배 풍조 속에서 불러내신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에서도
이 우상 숭배 풍조를 흉내내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신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⒏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곧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듣고 나서 머리로는 알아듣는데 마음으로 깨닫는 바가 없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나서도 듣기 이전의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열매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세태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가르치신 후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처럼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제자들이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돌풍을 만나셨는데, 배에 물이 가득 차도록 ‘의도적으로’ 주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에 선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은 나룻배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찰 지경인데
비를 맞으면서 잠을 잔다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이 당신을 깨우자, 그제서야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를 잠재우시는 명령을 말씀 한 마디로 내리셨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바람과
호수를 다스리시는 힘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뜻은 죄를 짓게 부추기는 마귀의 유혹과,
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는 욕심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서 많은 열매를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⒐ ‘의도적으로’ 바람과 호수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먹고 살기 바빠서 눈앞의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구경만 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감동이라도 주는가, 아니면 시간이나 돈에 손해만 보게 만드는가 등을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주판을 두드리고 난 후 타산적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일어나게 만드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라 하고, 이들의 행동을 리더십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바꾸기 위해서 무언가 일을 벌립니다.
그리고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과, 구경만 하는 사람들에게 행동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해서 각자가 받고 있는 소명대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오늘 기적도 그렇습니다.
⒑ 교우 여러분, 세상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징표를 외면하려는 이기심의 바람을
잠재우십시오. 마음의 호수에서 출렁이는 욕심의 돌풍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리고 고요한 미풍으로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느끼는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하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말고 거룩한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
그 옛날 바다를 가두어 풀과 나무가 돋아나는 땅에서 우리를 살게 하신 하느님,
구름으로 땅을 덮어 우리를 생기있게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다그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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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3년의 기억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본당의 여름행사를 마치고, 성당 주일학교 교사들의 여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름행사가 많았습니다. 고등부는 지리산으로 산행을 갔었고, 중등부는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다른 본당과 함께 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초등부는 성당에서 놀이마당을 했습니다. 교안을 만들고, 물품을 준비하고, 율동을 연습하면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수고했던 교사들 30여명이 안면도로 3박4일 여행을 갔습니다. 민박집에 머물면서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고,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름, 젊음, 바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1983년의 여름 안면도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잊지 못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랜턴의 건전지가 떨어져서 몇몇 여교사들과 건전지를 사러 바닷가의 가게로 갔습니다.
건전지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제게 말을 걸었는데 저는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두려웠습니다. 캄캄한 밤이었고, 청년들이 몇 명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등부 교사인 홍 데레사가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동네 청년들은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초등부 교사인 강 막달레나는 조용히 빠져나와서 민박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는데 한명은 묵주기도를 하였고, 다른 한명은 어둔 밤을 헤치고 민박집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행히 민박집 주인과 교사들이 왔고, 모든 일은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캄캄한 어둠과 같습니다. 작은 불빛은 어둠을 밝혀 줍니다. 믿음의 불빛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은 조심해야 하지만 무서워 할 것은 아닙니다. 행동은 두려움을 벗어나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1년 넘게 코로나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결핍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시간, 영성체가 얼마나 은혜로운 선물인지를 절절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사제들은 신자 없는 미사를 지내면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얼마나 풍요롭고 은혜로운 것인지를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상을 잃어버리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지난 1년은 결핍의 시간이었습니다. 성지순례도 취소되었습니다. 어렵게 약속을 잡았던 신문홍보도 취소되었습니다. 사순특강도 취소되었습니다. 매달 결산을 하면서 늘어나는 손실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나 동료사제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텃밭을 가꾸면서 결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줌으로 강의를 시작하였고, 회의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불편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수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넣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나의 이름을 기억하심을 믿습니다. 또한, 체온을 측정하면서, 내 마음 안에 사랑의 온도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 봅니다. 손 소독제로 손을 닦으면서 하느님 앞에는 깨끗한 손, 빈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했는지, 과식 과음했는지를 반성하면서 말을 줄이고, 덜 먹고 덜 마시기를 다짐해봅니다. 성당에 들어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서 하느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를 찾았는지 성찰해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기 위해 띄엄띄엄 앉으면서, 내 이웃 사람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해주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억울함을 서로 풀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 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백신은 공공재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가 교황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개발한 백신을 한국에서 생산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산된 백신이 공공재로서 모두에게 나누어지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조심하면서, 가진 것을 나눈다면 곧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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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 항해航海 여정
- 참 좋으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들 -
삶은 여정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여정입니다. 모두가 여정중에 있는 개인이요 공동체입니다. 특히 믿는 이들에겐 그러합니다. 참 많이 사용했고 앞으로도 많이 사용해야 할 삶은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또 한 번 상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인생 여정중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한다면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이런 확인이 깊고 넓은 시야로 우리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환상이 말끔히 걷힌 투명한 본질적 삶을 살게 합니다.
하루하루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보람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을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오는 복음의 장면이 상징하는바 그대로 인생항해여정입니다. 한결같은 날씨의 항해 여정은 없습니다. 맑은 날씨만 있는 게 아니라 흐린 날씨도 있고 비바람 험한 날도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만 있는 게 아니라 폭풍우 험한 위태한 날도 있습니다.
우리 남양주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성 요셉수도공동체만 봐도 그러합니다. 1987년 개원후 34년 동안의 항해 여정 중 참 위기도 많았습니다. 화창한 봄날씨 같았던 날이 있었는가 하면 때로는 전복의 위기도 겪었고 험한 파고의 불안한 날도 있었습니다. 수도원만 그런게 아닙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항해 여정중 난파당하거나 조난 당하거나 위기중인 개인이나 공동체를 곳곳에서 목격하지 않습니까! 많은 개인이, 공동체들이, 나라들이 항해 여정중 위기중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끊임없이 위기를 겪지 않습니까? 참으로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도와 회개가 절박한 시대입니다.
내외적 위기를 겪을 때 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배수진을 치며 지냈습니다. 정주의 표상인 수도원 배경의 늘 거기 그 자리의 불암산은 흡사 믿음의 닻과 같았습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있어도
참眞 좋다善, 새롭다新. 아름답다美
당신이 바로 그렇다”-
어제 늘 거기 그 자리의 불암산을, 수도원 하늘길을, 수도원 성전을 보며 쓴 시입니다. 이들이 궁극으로 상징하는 바, 주님인 당신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그동안 성철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 말마디를 제 좌우명으로 삼고 지냈습니다. 이런 공동체 항해 여정중 탄생한 제 자작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하루하루 주님만 믿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유명시인의 고백에 이어 ‘시는 나의 닻이자 돛이자 덫이다’라던 어느 시인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인생 항해 여정중 주님은 나의 닻이자 돛이자 덫임을 깨닫습니다. 제 매일 강론도 닻이자 돛이자 덫임을 깨닫습니다. 구체적으로 항해 여정중인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주님은 믿음의 닻이자 희망의 돛이자 사랑의 덫임을 깨닫습니다.
첫째, 주님은 믿음의 닻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의 표상인 불암산이 상징하는 바 믿음의 닻입니다. 믿음의 닻이 있어야, 표류하지 않습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참으로 인생항해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탄 배가 상징하는 바, 예나 이제나 때로 항해 여정중 위기를 겪고 있는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거센 돌풍에 혼비백산한 배안의 제자들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께 부르짖자 주님은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후 이들을 향해 꾸짖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 믿음의 영원한 모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고 있기에 저리도 평화롭고 담담한 예수님이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믿음을 배웠을 제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위기시 주저함이 없이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둘째, 주님은 희망의 돛입니다.
성령의 바람따라 목적지로 이끄는 희망의 돛입니다. 구체적으로 희망의 돛은 말씀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이,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권능은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는 주님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믿음을 북돋우는 말씀의 은총입니다. 한결같은 말씀 공부와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Quiet! Be still!)”
말씀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니 그대로 권위있는 주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이런 말씀에 희망을 걸 때 샘솟은 용기요 힘입니다. 시편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은신처, 내 방패이시니,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14)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다음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아니 인생 항해 여정중의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편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거친 파도 잔잔해졌네. 바다가 잠잠해져 기뻐하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그분은 이끄셨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기적을.”(시편107,28-31)
시편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시편 말씀을 내 기도로 바칠 때 말씀은 희망의 돛이 됩니다. 우리를 하느님 계신 본향집 항구의 목적지로 이끄실 것입니다.
셋째, 사랑의 덫입니다.
복된 행운의 덫입니다. 주님 사랑의 덫입니다. 주님 사랑의 덫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의 덫, 말씀의 수인囚人, 강론의 덫, 강론의 수인囚人이 상징하는 바 주님 사랑의 덫입니다. 이렇게 믿고 살아가는 제 삶입니다. 주님 사랑의 덫에 걸려 있기는 제1독서의 욥도, 제2독서의 바오로도, 복음의 제자들도 똑같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자 운명이 되어버린 이들입니다.
사랑의 덫은 주님을 만나기에 복된 덕입니다. 역설적으로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덫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욥도, 제2독서의 바오로도, 복음의 제자들도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욥은 고난의 항해 여정에 항구했던 바 마침내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제1독서 욥기는 제38장의 일부이지만 참 장쾌한 내용 가득한 제38장입니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사내답게 네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욥38,2-3).
이어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땅의 주재자. 바다의 주재자, 빛과 어둠의 주재자. 기후의 주재자, 하늘의 주재자, 동물 세계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기후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생태적 회개와 더불어 드넓은 내적 시야를 지니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주님 사랑의 덫에 충실했기에 이런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우리 사랑의 덫의 주인공인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주님 사랑의 덫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의 사랑의 수인囚人,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믿음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의 만남만이 우리를 늘 좋고, 새롭고, 아름답게 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사랑의 덫이 우리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합니다.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만유의 주재자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믿음의 닻이자 희망의 돛이요 사랑의 덫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인생 항해 여정을 축복해 주시며 바오로의 참 좋은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늘 우리를 참 좋고 새롭고 아름답게 하시는 참 좋은 당신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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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왜 그리 겁이 많으냐?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바다가 배경이 되고 있고, 그 바다는 하느님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이제 하느님 앞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알아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하느님을 제쳐놓고 그분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모든 것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앞에 얼마나 무능력한가? 인간은 광대무변하고 찬란히 빛나는 삼라만상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티베리아 호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던 사도들이 호수의 일시적인 현상을 "죽음"의 위험으로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사도들이 갖게 되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이다. 또한 마르코는 예수님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도록 천천히 이끌어 간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주만물에 대한 권위 자체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광풍을 잠재우시는 분이시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의 모습과는 달리 온종일 군중들을 가르치신 뒤 너무 지친 나머지 파도 소리나 제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떨어진 분, 그래서 억지로 깨웠어야 했던 분, 그러나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다스리신 분이시다. 이런 나약성과 잇달아 드러나는 권위 있는 행동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도들은 감명을 받아 스승이 가지고 있는 '신비'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정말 그분은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주님과 같은 권위로써 다만 손짓 하나만으로도 바다의 물결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을 항상 우리는 갖게 된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사도들이 마지막 순간에만 배 안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위험한 순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행동에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신앙인의 마음에 항상 현존하시게 될 것이며, 신앙인은 하느님을 항상 자신을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는 이미 박해를 겪고 있었고, 신앙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교회의 믿음을 더 강화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이 낡고 지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세속적인 표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바오로는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신앙의 올바른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큰 희생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채찍질을 가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고 있는 그 "새로운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또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것은 더는 아무도 단순히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고(2코린 5,16 참조), 성령의 빛과 능력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온 마음 다해 따르며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복음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며, 하느님께 언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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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마르 4, 40)
어디로
가고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어중간한
우리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마음이
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매달려야
할 분은
찾아야 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으로
가는 길을
당신 믿음으로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 가장
뜨거운 믿음을
체험하는
은총의
순간이다.
믿음이란
두려움을 딛고
주님을 향하는
새로운 기쁨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이 필요한
믿음의 자리에
살고있다.
믿음은 상처와
실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막혔던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린다.
복음의 사람은
다름아닌
믿음의 사람이다.
주님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
믿음으로
삶의 새로운
기쁨을 만난다.
믿음을 깨우는
은총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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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만물의 주님이신 분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7-41)”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를 깨워라.”가 아니라,
“나를 믿어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사정을 모르신 채로 주무시고 계셔서
주님을 깨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무시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다른 일로 몹시 바쁘신 것처럼 생각되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 사정을 잘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자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에게서 바로 그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5-7).”
날이 밝으면 베드로 사도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헤로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밤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는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 전체가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밤을 새워서) 기도하고 있는데,
당사자는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의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운 것을 보면,
그는 아주 깊이 잠들었던 것 같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하나 없이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다음 구절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과
감옥에서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긴 모습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신 대로 완전한 믿음의 단계에 도달한 모습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1)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노련한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셔도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헤쳐 나갈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믿는 것을 함께 믿는 것, 그것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은 그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도 믿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했던 말,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사실상 거의 안 믿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도와달라고(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말이 아니라,
왜 주무시기만 하느냐고 항의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 그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3)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겉으로는 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한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왜 나를 깨웠느냐?” 라고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바람과 파도 때문에
당신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고, 또 제자들이 그 바람과 파도 때문에 죽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서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을 제자들도 알고 있었어야 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말이 될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기 전에 “그런 일로 너희가 죽지는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4)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는 제자들의
질문의 답은 “예수님은 자연계도 지배하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에 연결됩니다.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연계도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할 정도라면,
우리가 그 주권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처음에는 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했던 제자들은, 그 바람과 파도를
말씀만으로 제압하시는 권능을 보고서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두려움도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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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삶의 여정에서 큰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신앙으로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성숙한 신앙인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돌풍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였습니까? 겁을 내며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돌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도 어려움과 두려움이 생기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괜찮다고 하며 돌풍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께 기도하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위안을 전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희망적인 부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을 흔들어 깨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눈앞의 돌풍을 향하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 앞에서 무력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지상 여정이라는 배 안에서, 거센 돌풍은 물론 작은 파도에도 “나를 깨워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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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욥 38,1.8-11)는 하느님께서 욥에게 자신(인간)의 한계를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원인을 모르는 고통 속에 지친 욥에게 잘못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던 친구들(인과응보의 하느님)을 반박하던 욥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하느님께 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다를 가두어두신 것은 물론 인간에게 존재적 한계를 지어주신 분이시며(창조주), 홍해바다를 가르면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구원의) 하느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세상 물정을 그렇게 잘 안다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십니다.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고 바다의 오만을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당신(하느님)뿐인데,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하느님의 계획도 모르는 채 방자하고 건방지게 하느님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하느님께 대드는 꼴을 도도한 파도라고 하시면서 당신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도도하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우리의 양심 안에 새겨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복음(마르 4,35-41)은 광풍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신 채 호숫가 뭍에 있던 군중에게(4,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그분 둘레에 있는 이들과 제자들에게는(4,10)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주셨습니다(4,34). 그날 저녁이 되자(어둠) 제자들에게 군중을 남겨둔 채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예수님께서 제안하십니다(주도권). 말씀을 선포하시던 배(설교대)가 이제는 호수(악의 소굴)를 횡단하는 일에 쓰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을 따랐던 다른 배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군중과 작별하자마자 시작된 풍랑의 상황은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타신 배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거센 돌풍이 일었으며 물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서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다는데, 예수님께서 지니신 주권과 안전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제자들은 처음으로 예수님을 “스승님”이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죽을 지경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과 그들이 겪는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고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편안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람과 호수를 향해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시듯이 잠잠해지고 조용해지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즉시 광풍이 순풍으로 바뀌고, 커다란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것(마르 1,25)과 똑같습니다. 어둠(악의 세력)이 만들어낸 풍랑이 이는 호수를 꾸짖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의 장난(나쁜 생각과 추한 행동)을 단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배(공동체)는 어둠의 세력인 맞바람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6,47-51). 제자들이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고,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거친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시편 107,28).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당신 힘으로 뒤흔드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셨습니다.”(시편 74,13) 그런데도 제자들은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가 복종하는지 궁금하면서도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겁쟁이”라고, “믿음이 없다고” 야단치십니다. 비겁함과 불충실함의 결과는 죽음뿐입니다(묵시 21,8)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1,29-31),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으며(1,34), 나병환자(1,40-45)와 중풍병자(2,1-12)를 고쳐주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았으며(3,1-5), 따로 불러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일곱 번씩이나 비유를 들어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주셨건만(4,1-34)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과 그토록 함께 했다면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도 있으련만, 예수님에게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어둠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도 있으련만, 예수님께서는 겁부터 먹는 제자들을 보면서 한심스러우셨나 봅니다.
제2독서(5,14-17)는 세속적 기준으로 하는 신앙생활을 탓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썼던(2코린 5,7-8)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에서 살았던 자기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하느님을 위하여 그러한 것이고,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면 여러분을 위하여 그러한 것입니다.”(2코린 5,13)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질그릇 같은(2코린 4,7) 바오로와 그 일행을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인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을 수 있다면, 그래서 코린토 공동체를 위해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어려움도 다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2코린 11,23-28).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셨기 때문에 바오로는 그분을 위하여 살고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고 헌신적으로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거이고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속된 기준으로(육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모든 것을 속된 기준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기고만장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난 뒤에는 완전히 변화되어 자기가 박해했던 그분을 구세주로 선포하면서 오로지 그분의 말씀이 자기 삶의 잣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철저하게 변화된 바오로 자신을 두고 했던 “옛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 삶의 기준은 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제자들이 탔던 배에서만 돌풍과 거친 파도가 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풍랑과 거친 파도를 이겨보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뱃고물에서 편안하게 주무시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배를 따라 나섰던 다른 배들을 생각한다면 돌풍과 거친 파도는 제자들의 내적인 소용돌이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일 외적인 돌풍과 거친 파도가 있었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다른 배들에 있는 사람들도 살려달라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이 옛 것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에 빠진 나머지(2코린 11,17) 다툼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 다툼은 광풍으로 돌변했고, 엄청난 파도처럼 스스로를 삼켜버릴 듯했을 것입니다. 결국 돌풍은 밖에서 불어온 것이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착각과 오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켜놓고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법석을 떨다보니 돌풍처럼 심각한 다툼이 있었나봅니다. 제자들은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마음속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알면 자신을 흔들어놓는 거친 파장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만용을 부리거나 지나친 욕심에 매달릴 때 그것이 돌풍이나 거친 파도가 되어 자신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준엄한 명령을 잊어버릴 때 그것이 돌풍이 되거나 거친 파도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을 잊고, 이웃을 무시하면서 자기만의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그 착각과 욕심은 돌풍이 되거나 도도한 파도가 되어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요한 17,23).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의 궁극목적이 무엇인지 잘 안다면,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돌풍이나 거친 파도도 잠잠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더욱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변화된 삶을 살도록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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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운 건너감으로 초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비유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뒤 제자들에게 제안하십니다. "건너감"은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물을 건너는 매우 상징적인 체험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거센 돌풍으로 배에 물이 들어차는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태평스럽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니 다급해진 제자들이 스승을 깨우며 외치지요. 물일을 했던 제자들은 물이 생명이면서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본능과 체험으로 알 터이니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도 그랬습니다. 갈대 바다와 마주치자, 앞으로는 검푸른 바닷물이, 뒤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을 해오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탈출 14,10)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이집트 탈출 때 모세가 주님의 분부대로 지팡이를 뻗자 바다에 길이 납니다.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을 꾸짖고 호수에 침묵을 명하시지요. 그분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바람과 물결을 보며 제자들은 얼이 빠집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심을 본 것이지요.
이것이 제1독서에서 주님이 욥에게 물으신 질문의 답입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고통과 억울함에 차서 주님과 시비를 가리려는 욥에게 주님께서 물으시지요. 온 세상 만물과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마치 모든 걸 아는 듯 결백을 주장하며 따지는 욥을 새로이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여기까지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
주님께서 자연에 이렇게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널 때의 주님의 생각이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풍랑에게 던지신 일갈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하느님 자리에라도 있는 듯 불행과 고통에 분개하는 피조물 욥에게 선을 그어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외부적 파도와 돌풍 못지않게 요동치는 제자들의 내면을 두드리십니다. 죽을 것 같았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나간 뒤 예수님께서 "믿음"을 확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건너감입니다. 물을 건너면서 죄로 물든 옛 사람이 죽고, 믿음으로 거듭 난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이 세례지요.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듯, 풍랑으로 죽을 위기를 넘긴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이스라엘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고,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정립해야 하듯,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역시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분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지요? 좋고 행복하고 기쁠 때도 분명히 있지만 내맘 같지 않은 혼돈과 불안, 어둠과 고통이 곳곳에서 요동을 치는 게 인생이니까요.
막막한 인생의 바다를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건너는 우리가 그 파도와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이 물에서 죽음을 건너 생명을 얻은 존재라고 굳게 믿는 것, 둘째, 매일 그 믿음을 갱신시켜 주시는 말씀을 꼭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다시 힘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미 죽음을 건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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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4,39)
예수님께서 이렇게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에게 말씀하시니 풍랑이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몇년 전부터 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2019년 1월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소백산 등등. 사목지 근처에 있는 산들은 거의 다 올랐고, 이번에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산엘 갔었는데, 요즘은 매일 오후에 근처 적석산으로 산책을 갑니다.
산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기도지향을 두고 바치는 묵주기도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혼자 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 산에 가는 것을 걱정하는데,
주님과 성모님 손잡고 가니, 혼자가 아닙니다.
산행을 하면서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삶 전체를 묵상합니다.
특히 땀과 정상에서 느끼는 희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살아갑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4,41)
지금 우리가 굳게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서 일고 있는 거센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기의 말씀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의 결과로 마침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더 큰 축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코린토 교회에 권고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풍랑들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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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 주제는 ‘믿음과 두려움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두려우면 믿을 수 없고 믿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두려워했기에 자신들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두려움이 인다면 어쨌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생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를 생존시키기 위해 나와 동일시한 모든 것입니다. 나 자신과 나의 육체, 그리고 그것을 생존시킬 수 있는 재물과 명성, 그리고 자녀, 인간관계나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것들을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세상 가장 큰 부자도 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면 두렵지 않을까요? 그도 분명 죽을 것입니다. 생존문제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 두렵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죽지 않는 이상 죽음의 문제는 영원히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도시에 있어도 건물의 그림자가 있고 숲으로 가니 나무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사막으로 가니 자신의 그림자가 쫓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사막을 걷다 걷다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포기하듯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죽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나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란 죽어가는 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 테러로 23명의 목숨이 희생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경기장 인근에 있던 노숙자 스티브 존스는 폭죽놀이인 줄 알았던 굉음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자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친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과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존스와 친구들은 몸에 못이 박힌 채 울고 있는 부상자들을 부축하고 지혈을 도우며 보살폈습니다.
존스의 위대한 선행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려는 본능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한 행동입니다. 만약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티브 존스는 하루하루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생존할 걱정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차 테러가 있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살 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는 모두 죽음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죽음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존스는 그것을 ‘본능’, 곧 ‘양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 배 위에서 제자들이 찾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분을 깨우지 않으면 죽는 것이 그리도 겁이 납니다.
두려우면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단축하거나 심지어 생존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죽음 방법은 ‘아사’(餓死)였습니다. 굶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콜베 신부가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려면 죽음보다 소중한 가치인 사랑을 일깨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지옥 불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옥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본성을 깨워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내 안에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본성을 일깨울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만이 살려고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만이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길이고 참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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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다는 것, 오늘 우리들처럼 한없이 부족했고, 틈만 나면 흔들리며 우왕좌왕했다는 것이 많이 웃기기도 하면서 큰 위안거리로 다가옵니다. 크게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코 복음 4장 37~38절)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늘 우리 한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만 신뢰할 때,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코믹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제자들 입장에서는 심각했겠지요.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 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 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 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 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들 때 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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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믿음없이 두려움에만 사로잡여 있는 상황을 전해 줍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한 두려움과 그것에 대해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신적, 욱체적으로 약해지거나 앓고 있을 때 생깁니다. 라틴어 '앓다'를 뜻하는 ''infirmus'는 육체적인 건강상의 허약에 대해서 말할 뿐 아니라 정신적, 성격적으로 용기와 힘, 능력 등 모든 분야에서 드러나는 연약함과 무기력, 무능력, 결단성 부족, 두려움 등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정신적으로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시되고 소외된다는 두려움, 나의 마음을 열어야 하는 두려움, 상처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남이 알지 못하도록 나의 잘못과 약점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도 마치 자신이 훌륭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위선적인 행동이나 일들에 빠져버리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교만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이기주의적인 마음과 비겁함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성령에서 비롯되는 용기와 기도입니다.
두려움은 없앨 수 없고 우리가 늘 정신적으로 연약할 때 두려움이 다시 생기지만. 용기는 두려움을 대적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통제하게 해 줍니다. 이 용기는 두려움 앞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고 기쁨을 간직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이를 극복하는 항구한 의지요 결단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파라클리토''라는 어원은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기도란 단어의 뿌리는 라틴어 'precarius'에서 나왔는데 그 의미는 은총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은총에 의존하기에 불확실하고 그래서 두려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 안에 존재하기 위한 한 부분으로 그냥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해야만 하는 당위성은 아니지만 그냥하는 것이고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 우리 자신이 전에 알고 해왔던 것보다 우리의 마음에 더 자주 더 꾸준히 기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갈망이 일어나면 그것은 지향이 됩니다. 이 은총을 받은 지향은 사랑의 원천을 향하게 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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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0. 연중 제12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욥기38,1.8-11)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10~11)
'경계를'에 해당하는 '훅키'(huqqi; limits)의 원형 '호크'(hoq)는 '자르다', '그리다', '정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하카크'(haqaq)에서 유래하여 '규정되거나 제한된 것', '할당된 몫', '할당된 과업', '한정된 경계', '한계', '지정된 시간'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 창조때 하느님께서 바닷물의 양과 바다의 위치 등을 정확하게 규정해 놓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계가 나름대로의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긋고'에 해당하는 '와에쉬보르'(waeshibor; and I fixed; and I brake up)의 원형 '샤바르'(shabar)가 원래 '깨뜨리다', '산산히 부숴뜨리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산산히 조각을 내듯이 세밀하게 경계를 그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빗장과 대문'이라는 용어는 당시 가장 견고한 것으로 여겨졌던 성문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성문은 열리고 닫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성문에 빗장이 걸리면 어떤 사람도 출입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을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 바다의 한계를 정해 땅과 분리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은 인간들을 향한 모든 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아주 세밀하게 계획하시고(욥기28,4) 역사(役事) 하신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욥기 38장 11절은 욥기 38장 8절에서부터 언급되었던, 하느님께서 바다와 땅을 분리하고 경계를 그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결론이며, 동시에 바다가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바다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이다.
욥기 38장 11절에서 '~할 때에 말이다'에 해당하는 '와오마르'(waomar;and said)의 원형 '아마르'(amar)의 기본적인 뜻은 '말하다'이다.
여기서 이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의 주어와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본문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피조물인 바다도 이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서 '도도하다는 것'은 파도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넘쳐흐르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이상은 안된다'는 말과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의미상으로 같은 말인데, 반복을 통해 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출렁이는 파도, 그리고 그것의 한계를 정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 그것에 복종하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여기서 바다를 향해 '너희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욥과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에게 이제 더 이상 무익한 변론이나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를 간과하고, 함부로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거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뜻에 대해 판단하는 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연중 제12주일 복음(마르4,35~41)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9~41)
'꾸짖으시고'로 번역된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는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경우에 베드로를 향해서(마르8,33), 더러운 영을 향해서(마르1,25; 9,25), 열병에 대해서(루카4,39), 그리고 여기서는 바람을 향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 인간과 영계와 질병에 대해서까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권세가 미치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 구원 사업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를 꾸짖으셨으며, 질병과 부마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을 꾸짖으셨고, 게리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막는 풍랑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꾸짖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표출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권위 있는 활동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희생 제사를 바치며 달래거나 겁을 주는 방법이 아닌, 권위 있는 말씀으로 꾸짖는 방법을 이용하셨다.
한편, '바람'과 '호수'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가 동시에 등장하는 점이나 마르코 복음 4장 39절 후반절에서 호수더러 잠잠하라고 했는데,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점을 보면 그렇다.
구약 성경에서 '호수' 또는 '바다'는 욥기 38장 8~11절, 예레미야서 5장 22절에서 태고의 혼돈을 나타내며, 시편 69장 2절이하와 이사야서 43장 2절에서는 의인이 당하는 시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타신 배를 삼키고 그들을 죽이려 하는 호수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39절의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페피모소'(pephimoso; be still)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 분사 '페피모소'(pephimoso)는 그리스 문학의 이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령 제압을 위한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예수님 활동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부르짖음을 듣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역사는 오로지 주 하느님께 돌려지는 구약적 배경을 갖는다(시편107,29.30).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41절의 '복종하는가?'에 해당하는 '휘파쿠에이'(hypakouei; obey)의 원형은 파쿠오'(hypakouo)인데, 여기서는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으로 쓰였고, 어떤 곳에서는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형인 '휘파쿠우신'(hypakouousin)이 쓰였다.
복수로 쓰인 것은 '바람과 호수'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풍랑의 원인을 여러가지 자연적인 요소들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단수로 쓰인 것은 풍랑의 원인을 한 위격 또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연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흉폭해져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자연을 악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락한 자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조종받는 자연도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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