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1)閔 寬 東⋅裵 玗 桯*
1. 序論
2. 국내 關羽廟의 현황과 分析
3. 국내 關羽廟의 건립과 受容
4. 關羽關聯 傳說의 紹介와 分析
5. 結論
국문제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와 함께 유입된 관우신앙은, 명나라 장수 陳寅이 1598년 남대문
밖 남산기슭에 관우묘를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대략 27곳 이상에서 관우묘가
건립되었는데 그중 現存하는 곳은 14곳으로 확인된다.
관우묘는 주로 왜군과의 격전지에 건립되었으며 건립주체는 대개 명나라와 조선왕실 및
민간의 주도로 건립하였다. 관우묘의 名稱 또한 초기에는 주로 關王廟로 부르다가 후대에는
關帝廟 및 關聖廟로 격상되었다.
관우묘는 초기에 주로 단순한 유교적 사당의 의미로 참배되었다. 그러나 肅宗과 英⋅正祖
및 高宗 등이 직접 관우묘에 참배하며 儀禮化 하였고 또 이러한 공식의례를 통하여 정치적
명분과 왕실안정의 의도로도 활용하였다.
朝鮮後期로 들어서며 관우신은 민간신앙 및 무속신앙으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종교화되는
* 閔寬東: 慶熙大學校 中語中文學科 敎授
裵玗桯: 慶熙大學校 大學院 中語中文學科 博士課程修了
88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관우신앙이 무속신앙으로 발전한 데에는 高宗 때 巫女 眞靈君
과 賢靈君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는 善陰騭敎⋅甑山敎⋅關聖敎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관우묘의 건립과 함께 시작된 관우전설은 약 23종이 있는데 크게 現夢類⋅顯靈類⋅治病
類⋅祈福類⋅禁忌類 등으로 분류된다. 전설에 나타난 관우는 초기에는 忠義를 겸비한 군신
으로 國家守護와 王室安定을 담당하는 수호신이었지만, 후대 민간에 수용되면서 財物神⋅
發福神⋅治病神 등 다양화된 萬能神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중심어: 관우, 관우묘, 관우신앙, 수용, 참배, 관우전설
1. 序論
關羽(162년?~219년)는 중국 역사상 가장 특이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살아서
는 살인도주범에서 將軍으로, 將軍에서 漢壽亭侯로, 또 죽어서는 侯에서 公으로, 公에서 王
으로, 王에서 帝로, 帝에서 神으로 추존되다가, 급기야 明末淸初에는 孔子와 함께 중국의
文武二聖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누린다.1) 이러한 關羽崇拜의 배경에는 물론 明代 四大奇書
인 《三國志演義》가 보편화됨에 따라 이루어진 영향도 있었지만 특히 宋⋅元⋅明⋅淸代에
이루어진 정치적 의도와 종교적 영향에서2) 起因된다.
관우에 대한 국내 최초기록은 삼국시대에 유입된 陳壽의 《三國志》로 추정되며, 소설로의
유입은 고려 말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三國志平話》이다.3) 그러나 당시에는 관우라는 인물
이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다가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가 국내에 유입(대략 1500년대
1) 關羽는 죽어서 隋 文帝때 忠惠公으로 勅封이 되었고, 宋 徽宗때 武安王으로 봉해졌다가, 明 神宗
(1614年)때 關聖帝로 勅封되었다. 또 명말청초 이전에는 文聖으로 孔子를, 武聖으로 呂尙 강태
공을 文武二聖으로 추존하였으나 후에 武聖을 관우로 대치하였다.
2) 송대 徽宗年間에 금나라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염원에서 관우를 武安
王으로 봉하였고 명대에는 태조 주원장과 永樂帝때에 영험이 나타나며 關羽神은 본격적으로 숭
배의 대상이 된다. 청대 또한 한족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관우신을 수용함으로 확고한 관제신앙
으로 발전한다. 또 송대부터 본격적 체계를 갖춘 도교의 부흥과 함께 관우신앙은 종교적인 측면
에서 神格化되며 자리를 잡아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3) 민관동, <삼국지연의의 국내 유입과 출판>, 《중국문화연구》 제24집, 209쪽 참고.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89
초⋅중기로 추정)되면서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宣祖年間(1567-1606년)에
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유입과 국내출판(1560년대 초⋅중기)이 이루어지면서 문인 및
백성들 사이로 폭넓게 저변이 확대되었고, 급기야 임진왜란(1592-1598년)이 끝날 무렵에
는 關羽廟가 국내에 설립되면서 관우를 신앙으로서 받아들이는 입지가 공고해진 것으로 추
정된다.
비록 他意에 의하여 세워진 關羽廟이지만 “忠과 義”의 상징인 “관우”를 수호신으로 수용함
으로써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는 표면적 의도와 또 다른 정치적 의도도 그
기저에 깔려있었기에 關羽廟는 점차 관우신앙으로 확대 전파되었고 관우묘에 대한 의식 또
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변수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본고에서는 국내 關羽廟에 대한 관련 자료를 재조사하여 一目瞭然하게 도표로 만들었고,
이러한 도표에 근거하여 分析을 시도하였다. 또 기존의 관련 자료와 연구 자료를 총괄하여
관우묘가 세워지게 된 역사적 배경과 수용양상 그리고 이를 통하여 나타난 關羽關聯 傳說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2. 國內 關羽廟의 현황과 分析
국내 관우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李慶善의 《三國志演義의 比較文學的 硏究》(一志社,
1978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 책 제3부 <관우신앙에 관한 고찰>에서 관우묘에 대한 관
련기록과 민간신앙 문제를 매우 치밀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관우묘에 대해서는 15곳 정도만
조사하여 누락된 곳이 생겼고 또 誤謬도 다수 발견된다. 그 후에 나온 단행본으로는 金鐸의
《한국의 관제 신앙》(전국 16곳 조사, 선학사, 2006년)과 元正根의 《충의의 화신 관우》(상생
출판사, 2014년)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이전에 누락된 관우묘와 각종 관련기록 부분을 세밀
하게 보충하여 충실도를 기하였다.4) 그러나 이들은 지나치게 宗敎信仰的 관점에 치중한 일
4) 단행본으로 南德鉉의 《영웅을 넘어 신이 된 사람 관우》(현자의 마을, 2014년)가 있으나 국내
자료는 소개하지 않았다. 그 외 소논문으로 쓴 자료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김용국, <關王廟建置考>, 《향토서울》 25, 1965년. 김필례, <관우설화연구>, 《漢城語文學》 17,
1998년. 김의숙, <홍천군 붓꼬지관성사 연구>, 《강원지역문화연구》 2, 2003년. 손숙경, <19세기
후반 관왕숭배의 확산과 관왕묘제례의 주도권을 둘러싼 동래지역사회의 동향>, 《고문서연구》
23, 2003년. 장장식,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민속학연구》 14, 2004년. 김명
자, <안동의 관왕묘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동향>, 《한국민속학》 43, 2005년. 이유나, <조선후기
90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면이 있고, 또 주로 古典文獻에 나오는 관련기록을 引用과 解說의 방법으로 접근하여 考證
과 分析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기존 연구와의 중복을 피해 관련 문헌기록을 근거하여 관우묘의 현황(총 27곳)을
재조사하여 도표로 정리하였다. 또한 기존 연구 가운데 漏落된 부분과 誤記된 부분을 바로
잡으며 고증과 분석의 방법으로 연구를 시도하였다.
1) 국내 관우묘 관련자료
의 관우신앙 연구>, 《동학연구》 20, 2006년. 전인초, <關羽의 人物造型과 關帝信仰의 朝鮮傳來>,
《동방학지》 134, 2006년. 구은아, <서울의 관제묘와 관제신앙>, 《문명연지》 13, 2012년. 신선
아, <고종대 관우신앙의 변화>, 서울여대 석사논문(사학과), 2014년.
番號廟名建立時期建立者關王廟의 特徵宗敎色彩場所現況
1
南關王
廟
宣祖
31年
(1598)
明 遊擊隊長
陳寅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관우묘(一名 :
南廟). 塑像. 關平과 周倉이 시립. 宣
祖가 參拜
祠廟
崇禮門밖
→사당동5)
現存
2 關侯廟
宣祖31年
(1598)
明
將軍
茅國器
明將 茅國器가 성주성 승왜리 전투의
승리가 관운장의 靈驗이라 믿고 세움.
후에 명나라 都督 劉綎이 묘비를 세움.
성주성 동문밖에 있다가 1727년(英祖)
南丁아래로 옮김. 현재는 관운사(조계
종 사찰)에서 配享함. 塑像으로 모심.
祠廟→
佛敎
寺刹
慶北
星州
現存
3 關王廟
宣祖31年
(1598)
明
眞定營都司
薛虎臣
안동 목성산 기슭에 건립, 후에 안동향
교와 마주보고 있다하여 1606년(선조
39)에 西岳寺 동편으로 이전. 벽화에.
삼고초려, 적벽화전도가 있음. 石像,
關平과 周倉이 侍立.
祠廟→
甑山敎
慶北
安東
現存
4 關王廟
宣祖31年
(1598)
明 都督陳璘
康津 廟堂島는 명 도독 陳璘이 승전 기
원으로 건립. 1684년 개수하면서 이순
신과 陳璘을 별사로 배향함. 1713년
(숙종39) 관왕묘비 건립. 1763년 御
筆賜額 후 誕報廟라 함. 해방 후 관왕
묘자리에 충무사를 건립
祠廟
全南
康津
古今島
現存
5 關王廟
宣祖32年
(1599)
明 將軍
藍芳威
明 都督 劉綎이 묘비를 세움. 肅宗 42
年(1716)에 朴乃貞이 남원성 동문 밖
에서 동문 안에 누각을 지어 塑像과 碑
를 이전, 英祖17年(1741) 南原府使
許璘이 현재 위치로 옮김. 왕천군,장선
군,주창,옹보,관평,조루,옥천대사,요하
장군,제갈공명 등의 畵像이 봉안.
祠廟
全北
南原
現存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91
6
東關王
廟
宣祖34年
(1601)
明 神宗이
巡撫使
萬世德을
시켜 建立
東廟. 관우의 銅像과 묘정비문이 존재.
좌우에 관평과 주창 등 4인 시립. 풍수
사상에 의거 동쪽에 地氣補完의 필요성
으로 크게 만들었다고 함.
祠廟
서울시
鐘路
崇仁洞
現存
7 關皇廟未詳
壬辰倭亂
(推定)
300여 년 전부터 관운장의 肖像을 모
시는 祠堂이었음.6) 현재 관황묘는 현
존하지 않고, 一心寺만이 관련 설화를
간직하고 있음.
祠廟
全南
新安郡
一心寺
遺失
8 關王廟
英祖6年
(1730)에
건립
(推定)
마을
주민들이
建立
壬辰倭亂 이후 明의 援兵과 관련해 朝
鮮 後期에 세워진 것으로 보임. 關王을
모시면 좋단 얘길 듣고 마을 사람들이
關羽의 肖像畵를 집에 마련해 제사를
모셨는데, 참여하는 사람이 늘자 祠堂
을 세웠다고 전해짐. 驚蟄과 霜降때에
祭를 모심. 現在 방치상태임7)
祠廟
全南
麗水市南面
現存
9 關聖廟
純祖31年
(1831)/
高宗
28年
(1891)
參奉
宋錫珍이
創建(推定)
관운장을 享祀하는데 그의 生辰 每年
6月 24日(음)과 忌日인 10月 19日
(음)에 祭祀를 지냄. 읍원정 뒤편의 대
숲속에 關聖廟가 있었으나 現在는 터만
存在.
건립시기는 1831년설과 1891년설이
있음.
民間信仰
→甑山敎
全北
井邑市
泰仁面
遺失
10 未詳
純祖
壬辰
(1832)
以前
未詳
(고종실록 28년(1891)/신묘/12월28
일) 純祖 壬辰年(1832)에 전교를 내려
관우사당인 동묘⋅남묘⋅안동⋅성주⋅
남원⋅당진에 관리를 보내 예를 올린
기록.
祠廟
忠南
唐津
遺失
11 關聖廟
哲宗12年
(1861)
조계식이
땅을 희사함
건립된 후 關聖敎 신도들의 도움으로
재건과 증축을 거듭하다 廢祠됨. 1959
年 하계호가 발행한 關羽의 가계, 행
적, 그리고 조선의 관성묘 내력을 기록
한 《明聖經》에 그 흔적이 남아있음.8)
祠廟
→關聖敎
全北
金堤市堯村洞
遺失
12 關皇廟
高宗12年
(1875)
朴禹衡이
東萊府使
朴齊寬의
要請으로
建立
동래읍성에 관황묘전설만 존재. 朴齊寬
이 東萊府使로 부임한 어느 날 꿈에서
관운장이 나타나, “고독하게 묻혀 있으
니 넓은 자리로 옮겨주시오”라고 함.
꿈자리가 기이하게 여긴 그는 김장군이
죽은 터에 관황묘를 세웠다고함
祠廟
釜山
東萊
遺失
13 關聖廟
高宗17年
(1880)
金堤市
孔德面
東溪里
住民
高宗17年(1880)어느 날 이곳에 사는
朴翁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자 그 꿈을
좇아 관우 사당을 지음. 봄⋅가을 두
차례 제사지냄. 현재는 弊祠됨
祠廟
→
道敎信仰
全北
金堤市孔德面
遺失
92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14 關帝廟
高宗
18年
(1881)
사인
박도환
1875년 상인이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
이 관성제군이었다. 한양의 박도환이
한양 남묘로 모시려 했으나 꿈에 관우
가 현신하여 평양에 모시라고 함
祠廟平壤未詳
15
北關帝
廟
(北廟)
高宗20年
(1883)
巫女
眞靈君이
劃策하여
明成皇后가
세움
眞靈君(李姓女)이 奏請해 만듦. 이곳은
甲申政變(1884)때 高宗이 避身한 장
소, 1902年에 칭호를 顯靈昭德義烈武
安關帝‘로 격상시킴. 1910년 5월에 毁
撤되어 일체가 동묘로 合祀됨. 塑像.
道敎巫俗
信仰
서울
明倫洞
遺失
16
南關雲
廟
高宗21年
(1884)
判官
吳相準
유비, 관우, 장비의 화상을 봉안. 木造
로 이루어진 倚像, 현재 關帝廟라는 현
판이 걸려 있음. 지금은 미륵대도 금화
종 강화선원에서 관리함.
彌勒大道
金華宗
江華島現存
17
東關帝
廟
高宗22年
(1885)
馬女史가
創建
關羽를 비롯한 劉備와 張飛를 모심. 現
在 무형문화재 제8호 외포리 곶창굿의
기능보유자 정정애가 관리
民間巫俗
信仰
江華島現存
18
西關帝
廟
高宗
(推定)
未詳기록이 없음 未詳江華島遺失
19 關廟
高宗24年
(1887)
關羽의
현몽을 한
鄕老가 건립
解良은 關羽가 태어난 中國 解良과 同
名. 河東 地域 유지들이 뜻을 모아 廟
를 건립. 봄⋅가을에 享禮를 행함. 日
帝時代 때 소실
民間信仰
慶南
河東郡解良村
遺失
20
北關雲
廟
高宗29年
(1892)
江華山城守門
將 尹義普가
建立
유비, 관우, 장비의 화상을 봉안. 塑像,
외삼문에 關帝廟라는 현판이 있음, 光
武10年(1906)에 重建. 現在 무속인
가정집 내에 외삼문과 묘당이 있음.
民間巫俗
信仰
江華島現存
21 關王廟
高宗31年
(1894)
淸에 의해
建立(推定)
滿月臺 北東쪽에 있다고 함. 端午날이
되면 관왕묘에 빌러오는 여성들이 많았
다고 전해짐.
民間信仰
京畿道
開城
未詳
22 關聖廟
高宗32年
(1895)
全羅觀察使
金聲根과南固
別將 李信文
周王廟, 關帝廟라고도 함. 조선 후기
화가인 소정산이 그린 삼국지연의 그림
(10폭)이 있음. 1950년대 塑造木刻像
으로 모심.
祠廟
→
民間信仰
全北
全州
現存
23
西廟
(崇義
廟)
高宗
光武8年
(1904)
巫女
賢靈君이
획책하여
嚴妃가 세움
崇義廟, 일반적으로 西廟라 불림. 西廟
에서 봉안하던 관성제군의 화상은
1909년 東廟로 移奉되어 合祀됨. 劉備
를 모시고 關羽, 張飛, 公明, 趙雲, 馬
超, 黃忠, 玉甫, 周倉, 趙累, 關平 등을
配享함.
道敎
巫俗信仰
서울시西大
門區
天然洞
遺失
24 關王廟
高宗
또는1670年
代(推定)
육의전商人
(推定)
위치상 中廟라 불림.9) 關羽를 중심으
로 關平과 周倉이 侍立. 옆에는 유비와
장비의 초상이 있었음. 종각 모퉁이에
붙어있는 관공의 사당. 조선시대 상인
들이 주로 참배한 곳으로 알려짐.
道敎
民間信仰
서울시
鐘路
보신각 옆
遺失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93
2) 관련자료 분석
국내 관우묘에 대한 조사는 조선시대로 한정하였다. 물론 일제시대 이후에 건립 및 복원
된 것도 있지만 학술적 가치가 떨어지기에 생략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건립된 관우묘
5) 숭례문 밖 남산 기슭에 있다가 1979년 동작구 사당동(180-1번지)으로 옮겨짐.
6) 1896년 주요 祭祀였던 관황묘에 제사를 드리는 내용이 초대 지도군수를 지낸 오횡묵이 남긴 기
록인 《지도군총쇄록》에 자세히 소개됨.
7) 디지털 여수 문화대전 http://yeosu.grandculture.net/ 참조.
8) 디지털 김제 문화대전 http://gimje.grandculture.ne 참조. 《關聖帝君應驗明聖經》(活字本. 1
冊)은 高宗 20年(1883) 간행.
9) 「매일신보」 1928년 3월 2일자에 ‘신화같은 전설같은 중앙관제묘 유래’라는 기사 참조.
10) 《顯宗改修實錄》 권6, 2년 辛亥 11월 戊子條 참고.
11) 《顯宗實錄》 권16, 10년 己酉 3월 甲辰條 참고.
25 關聖廟
高宗
(推定)
高宗 後宮
嚴妃(推定)
관우장군과 그 부인의 影幀이 配置, 護
國信仰과 더불어 佛敎, 儒敎, 道敎 등
다양한 성격이 혼합.
儒佛道의
巫俗信仰
서울시中區
獎忠洞
現存
26 聖帝廟
高宗
(推定)
民間人(推定)
關羽와 그의 부인 影幀을 主神으로 모
심. 現在에도 商人들이 장사를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특징.
道敎民間
信仰
서울시
中區
芳山洞
現存
27 關聖祠
高宗
(推定)
未詳
眞靈君李氏의 請願으로 건립되었다함
(推定). 6.25때 燒失 후 재건.
民間巫俗
信仰
江原道
洪川郡
西面
現存
附錄
1
永同堂
谷里十
二將神
堂
壬辰倭亂後
(推定)
未詳
《三國志演義》에 나오는 12將神의 影幀
을 모셔놓음. 당시 關羽가 郡守의 꿈에
나타나 관왕묘를 복원하고 古谷里로 이
전하여 제사지낼 것을 원하여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12將神堂이라 부르고
洞祭를 지냄.
民間巫俗
信仰
忠北
永同郡永同邑
現存
附錄
2
武侯廟
宣祖
年間
宣祖의명으로
萬曆癸卯年
(1603)
선조가 임진왜란 때 적을 물리치고 세
운사당. 근처에 臥龍山이 있어 공명의
공덕이라 믿고 세움10)
祠廟
平北
義州
未詳
附錄
3
諸葛武
侯祠
肅宗
年間
南陽縣監
閔耆重
閔耆重이 南陽縣監건립한 사묘로 諸葛
武侯와 胡文正公을 配享함11)
祠廟
京畿道
華城
未詳
附錄
4
臥龍廟
高宗
年間
(推定)
朝鮮末
嚴妃(推定)
삼국시대 蜀漢의 정치가인 諸葛孔明을
모시는 廟祠. 제갈공명과 관운장의 石
膏像이 모셔져있음. 一名 武侯廟라함
民間巫俗
信仰
서울시
中區
藝場洞
現存
94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는 총 27개로 확인된다. 그 중 서울에 건립된 관우묘는 7군데이며, 경북에 2군데, 경남 2군
데, 전북 5군데, 전남 3군데, 경기도 강화도 4군데, 개성 1군데, 충청도 1군데, 강원도 1군
데, 평안도 1군데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으나 비교적 서울과 전라도에 집중되었다. 그중
遺失되었거나 未詳인 곳이 13개가 있어 현재는 14개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12장신의 영정을 모셔놓은 신당과 제갈공명을 모시는 臥龍廟와
武侯廟도 확인되었다.
관우묘의 명칭은 關王廟⋅關侯廟⋅關聖廟⋅關廟⋅關雲廟⋅關帝廟⋅聖帝廟⋅關皇廟⋅崇
義廟⋅關聖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중 관왕묘라는 이름이 8군데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관성묘(5군데)와 관제묘(4군데)순이다. 관우묘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즉 宣祖時代 건립된 관우묘는 대부분 關王廟라 이름을 붙이다가, 그
후 특히 高宗때 부터는 關聖廟⋅關帝廟⋅關皇廟⋅聖帝廟 등으로 바뀌는 양상을 보인다. 이
는 관우가 宋 徽宗때 武安王으로 봉해졌다가, 明 神宗(1614年)때 關聖帝로 勅封되었기에
명칭 또한 변화가 생긴 것이며, 여기에 高宗이 大韓帝國의 皇帝로 즉위하면서 관우의 칭호
도 關帝로 격상시킨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또 서울과 강화도의 관우묘는 묘당의 위치
에 따라 동묘⋅서묘⋅남묘⋅북묘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관우묘의 건립주체는 크게 명나라와 조선 정부 그리고 민간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宣祖
31年(1598)부터 宣祖 34年(1601)까지 세워진 6군데의 관우묘는 명나라의 장수들이나 明
皇帝의 명을 받들어 건립된 것이다. 즉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일어난 정유재란
(1597-1598) 때 세워진 관우묘가 대부분인데 이는 관운장이 곳곳에 顯靈하여 명나라 군대
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었기에 이를 기념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 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관우를 祭祀하는 유교적 색채가 강한 사당이나
혹은 민간신앙 형태의 祠廟가 간헐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高宗年間에 들어서면
서 관우묘의 건립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宣祖 以後 王室主導의 관우묘가 처음 건립된
것은 高宗 20年(1883)에 서울시 송동(명륜동)에 세워진 北關王廟와 그 후에 세워진 崇義廟
(西廟)이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관우에 대한 숭배는 민간무속신앙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민
간에서도 본격적으로 관우묘를 건립하여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또 기존에 儒敎祠堂의 색채
가 강했던 관우묘도 道敎的 색채가 강한 민간무속신앙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상의 자료에 근거하여 건립시기를 분석하면 건립시기가 주로 임진왜란과 조선말기로
집중된다. 이는 당시의 外憂內患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나라의 운명이 風前燈火
처럼 위태로운 시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은 나라의 安寧과 國土守護를 바라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95
관우묘 건립주체를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앞 도표에서 1번부터 6번까지의 주체는
명나라 장군과 명 황제의 지시로 건립된 것이다. 건립 지역도 왜군과의 격전지이거나 관우
의 顯靈이 있었던 곳이 대부분이다. 이는 관우신의 힘을 빌려 왜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를 염원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또 도표 12번⋅16번⋅20번⋅22번은 관우의 顯靈을 믿던
地方의 官吏가 주도하여 건립한 것이며, 도표 15번과 23번은 왕실 주도로 건립된 것이다.
그 외 도표 8번⋅9번⋅10번⋅11번⋅13번⋅17번⋅19번⋅24번⋅26번은 건립주체가 민간
주도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기타의 것들은 비록 건립주체가 확인되지 않지만 대략 민간
에 의하여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관우묘가 건립된 지역을 살펴보면 우선 宣祖年間에 세워진 관우묘는 임진왜란
때 朝⋅明聯合軍의 부대와 일본과의 격전지를 중심으로 하여 세워졌으며, 高宗年間에 세워
진 관우묘는 서울과 강화도에 주로 건립된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관우묘는 서울의 동⋅
서⋅남⋅북 네 곳을 포함하여 장충동의 관성묘, 중구 방산동의 성제묘 등이 있고, 지방에는
안동⋅성주⋅강진 고금도⋅남원⋅전주⋅하동⋅신안⋅여수⋅김제⋅개성⋅동래⋅강화⋅태
인⋅당진⋅평양 등에 건립되었으나 그 중 일부는 遺失되어 터만 남아있다.12) 그 외 강화도
에 高宗時期에 세워진 4곳의 관우묘가 있는데 이는 강화도가 본래 민간무속신앙의 聖地인
영향도 있지만 高宗時期에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이 주로 강화도 근처에서 격전을 벌였던 역
사적 사실과 관련이 깊다. 즉 관우신의 顯靈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守護하고자 하는 간
절한 염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500여년의 유교국가 조선에서 도교적 성격이 강한 관우묘가 어떻게 수용되었을
까? 하는 문제이다. 壬辰倭亂 以後 宣祖年間에 만들어진 관우묘의 경우에는 중앙 정부가 주
도를 하며 관리를 하였다. 즉 국가를 수호하는 忠義의 武神으로 관우를 모셨기에 이는 다분
히 유교 사당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기에 宣祖나 英⋅正祖도 이러한 차원에서 참배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내면에는 武神으로 忠을 강조한 관우를 통하여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의도가 있었기에 제례의식에 있어서도 유교적 성격이 강하게 남
아있었다.
그러나 高宗年間에 와서는 민간의 巫俗信仰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중국
에서 크게 번창한 道敎信仰의 영향과도 無關하지가 않다. 중국에서의 關帝信仰은 전통적 도
교의 관습에 불교까지 융합되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화되었는데, 우
리나라의 관우신앙 역시 朝鮮後期에 이르러 유교⋅불교⋅도교⋅민간신앙이 융합된 형태로
12) 全北 鎭安의 관성묘는 192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생략한다. 혹 이전에 있었던 것을
1920년 전후에 재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96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남관왕묘⋅동관왕묘⋅북관왕묘⋅숭의묘(서묘)는 정부 주도로 건립되었으나, 종
로의 중앙관왕묘⋅장충동의 관성묘⋅방산동의 성제묘 등은 민간인에 의해 세운 것인데 특
히 종로의 중앙관왕묘 등은 육의전의 상인들이 주도로 운영된 곳으로 상인들이 장사를 잘되
게 해달라고 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忠義의 화신이었던 관우가 어느새 중국 도교사원에
서와 같이 財物神의13) 성격으로 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1882年(고종 19년)에 체결된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시작으로 국내에 진출한 청나라 상인들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
다.
또 현재 남아있는 관우묘 중 경북 성주의 관후묘는 관운사에서 배향하고, 전남 신안의
관황묘는 일심사에서 배향하고 있다. 이는 관우묘가 불교와도 융합된 형태로 남아 있음이
확인되는 특이한 實例가 되고 있다.
그 밖에 충북 영동군에 있는 영동 당곡리 십이장신당은 《三國志演義》에 나오는 12장신의
영정을 모셔놓은 신당이다. 이는 관우가 이 지방 郡守의 꿈에 나타나 관왕묘를 복원하고 제
사지낼 것을 원하여 지금의 자리로 사당을 옮겨 십이장신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민간
무속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14)
그 외에도 서울 남산 예장동에 있는 臥龍廟15)는 諸葛孔明을 모시는 祠廟로 조선시대 말
嚴妃가 처음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경내에는 와룡묘 외에 檀君廟⋅帝釋殿⋅藥師殿⋅三
聖閣⋅寮舍⋅文臣閣 등이 있다.16) 臥龍廟는 중국 도교계 신령을 모시는 단순한 사당이라고
보다는 오히려 韓國化된 혼합적 민간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3) 忠義의 軍神인 관우가 商業神으로 거듭난 데는 소금 전매업으로 전국적 상권을 다진 산서성 해
주(관우고향)인의 숭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14)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참조.
15) 남산의 臥龍廟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
룡묘를 짓게 하였고, 그 후부터 왕들이 관원을 보내어 제를 올리거나 祭文을 지어 보낸 예도
있으며, 賜額의 예도 전한다. 또 《顯宗改修實錄》(권6, 2년 辛亥 11월 戊子條)에는 宣祖가 임진
왜란 때 적을 물리치고 세운사당인 武侯廟가 있는데 근처에 臥龍山이 있어 공명의 공덕이라 믿
고 세웠다고 하는데 평안도 義州의 武侯廟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顯宗實錄》(권16, 10
년 己酉 3월 甲辰條)에는 閔耆重이 南陽縣監(京畿道 華城)으로 있을 때 건립한 諸葛武侯祠가
있었다고 한다.
16)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참조.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97
3. 국내 關羽廟의 建立과 수용
1) 국내 관우묘의 건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조선에서 관우에 대한 숭배나 신앙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숭배는 임진왜란 때 세워진 관우묘의 건립부터 시작된다. 관우묘를 처음으로
세운 사람은 明의 장수인 遊擊隊長 陳寅이다. 이러한 사실을 柳成龍의 《西厓集Ⅱ》 <記關王
廟>에 잘 나타나 있다.
정유년 겨울에 명장이 모든 군영을 합하여 울산에 웅거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불
리하여 무술년 1월 4일에 물러났다. 그 중에 유격장군 陳寅이 있었는데 힘써 싸우
는 도중에 적의 탄환을 맞고 실려 서울에 돌아와 병을 조리하였다. 그는 우거하고
있던 숭례문 밖 산기슭에 묘당 한 채를 창건하고 관왕과 제장의 신상을 봉안하였다.
…<中略>… 주상께서도 몸소 그곳에 가 보실 때에 내가 비변사 여러 막료들과 더불
어 수행하여 묘정에 나가 그 상에 두 번 절하였다.17)
이처럼 宣祖 31年(1598) 4月에 陳寅은 蔚山의 島山城 戰鬪에서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關羽가 현령하여 자신의 상처가 治癒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전
투에서 神兵의 도움이 있었다며 자신이 거처하던 남산 기슭에 남관왕묘를 세운 것이 시초이
다. 그 외의 기록은 李瀷의 《星湖僿說》에 자세히 나타나있다.
漢陽 동⋅남문 밖에는 모두 關王廟가 있는데, 《西厓集》에 그 본말이 실려 있다.
허균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현령비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동으로 출정한
장병들(명나라 군사)의 말이 평양의 승첩과 도산의 싸움 및 삼도에서 왜놈을 몰아
내는 전쟁에 있어 다 異蹟이 나타났다 하므로 천자가 4천금을 만세덕에게 주어 조
선에 祠廟를 세우게 하였다” … <中略> … 무릇 우리나라에서는 그 외에 묘가 넷이
있다. 즉 강진의 것은 明나라 장수 도독 陳璘이 세운 것으로, … <中略> … 그리고
17) 유성룡, 《서애집Ⅱ》 <기관왕묘> 민족문화추진회, 1977년. 141쪽 참고.
丁酉冬, 天將合諸營兵, 進攻蔚山賊壘, 不利, 戊戌正月初四日退師, 遊擊將軍陳寅, 力戰中賊丸,
載還漢都調病, 適於所寓崇禮門外山麓剝起廟堂一座, 中設神像, 以奉關王諸將, …<中略>… 上亦往
觀之, 余與備邊司諸僚隨, 駕詣廟廷再拜.
98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남원에는 명나라 장수 이신방⋅장표⋅모승선을 배향하였고, 안동의 것은 명장 설호
신이 세운 것으로 석상이 있으며, 성주의 것은 명장인 모국기가 세운 것이다.18)
이처럼 정유재란 때 陳寅이 세운 남관왕묘 외에도 성주 관후묘는 명장 茅國器가 성주성
전투 승리가 관운장의 영험이라 믿고 세웠으며, 안동 관왕묘는 명나라 진정영도사 薛虎臣이
세웠다. 그리고 전남 강진 고금도의 관왕묘는 명나라 도독 陳璘19)이 승전 기원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다음 해(1599년)에는 명나라 도독 劉綎이 남원에 藍芳威를 시켜 건립하였다. 그
외 선조 때 세워진 마지막 관왕묘는 선조 34년(1601)에 명나라 神宗이 萬世德을 시켜 건립
한 것인데 一名 東廟라고도 한다.20) 비록 명나라의 강요로 만들어진 관왕묘이지만 명나라
가 멸망한 뒤에는 오히려 명에 대한 의리를 표방하는 遺址의 역할까지도 하면서 점차 민간
신앙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전라도 신안⋅여수⋅정읍 태인21), 김제를 중심으로 민간이 주도
가 되어 사당을 건립하거나 혹 일부 祠廟에서는 民間巫俗信仰的 종교형태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高宗年間에 이르러서는 자발적인 사당건립과 함께 민간신앙으로 뿌
18) 李瀷, 《國譯星湖僿說》 4, 민족문화추진위, 1985년, 56쪽을 참고하고 오역을 바로 잡음.
京都東南門外皆有關王廟, 柳西厓集載其本末. 許筠承命撰顯靈碑云, 東征將士皆言平壤之捷 島山
之戰 三路驅倭之役皆著之異, 天子以四千金付, 撫臣萬世德立祀於朝鮮. …<中略>…凡我國有廟又
四處, 康津天將都督陳璘所建, …<中略>…南原則以天將李新芳蔣表毛承先配, 安東則天將薛虎臣所
建有石像, 星州天將毛(茅)國器所建. 그 외 관우묘에 대한 기록은 《朝鮮王朝實錄》⋅《西厓集》⋅
《增補文獻備考》⋅《星湖僿說》⋅《承政院日記》⋅《燃藜室記述》⋅《惺所覆瓿藁》⋅《五洲衍文長箋散
稿》⋅《壬辰錄》⋅《大東野乘》⋅《芝峰類說》⋅《新增東國輿地勝覽》⋅《梅泉野錄》 등에 나온다.
19) 최초로 관우묘를 세운 陳寅과 陳璘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은 동일인물이 아니
다. 遊擊隊長 陳寅은 육지로 1597년에 들어와 울산 도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한양에서 치료
를 하였지만 都督 陳璘은 수군으로 1597년에 군선을 거느리고 唐津에 들어와 海上을 담당하였
으며 주로 전라도 고금도에서 머물렀다. 특히 전라도지역에서 李舜臣과 연합하여 활약한 장수로
울산전투에는 참여한 사실이 없다. 또 고금도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장소로 전쟁이 끝난 후 관우와 진린 및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이긍익의 《燃藜室記述》에는 강진 고금도와 성주 관왕묘가 1597년으로 되어있
으나 誤記로 확인된다.
20) 동묘의 건립은 관우의 顯靈을 전해들은 明 神宗皇帝가 1599년에 巡撫使 萬世德을 통하여 四千
金을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동쪽의 地氣를 보완할 목적 하에 만들어 졌는데 선조 때 만들
어진 관왕묘 중 조정에서 상당한 건립비를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관왕묘 건설은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에 이것의 건립에 대하여 조정에서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하였고,
또 전후복구 시기이기에 민원도 자자했다고 한다. 이 관련기록은 《선조실록》에 자세하다.
21) 태인의 관성묘는 후대에 증산교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순회보」 128호 [典經 지명
답사](태인 관왕묘)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99
리를 내리게 된다.
高宗年間에 왕실주도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관우묘는 북관제묘와 숭의묘(서묘)이다. 북관
제묘는 명성황후가 眞靈君의 靈驗을 매우 신뢰하고 총애하였는데, 진령군이 관성제군의 신
당을 세워야 한다는 요청에 의해 서울시 명륜동에 건립하게 된 것이다.22) 또 숭의묘는
1904년 嚴妃(純獻皇貴妃)가 賢靈君(尹姓女)을 시켜 서대문 天然洞에 세워 자손의 번창과
發福을 기원하였다고 한다.23)
또 地方官吏의 주도로 건립된 관우묘로는 부산 동래의 關聖廟와 전주의 關聖廟 및 강화도
의 南關雲廟와 北關雲廟를 들 수 있다. 동래 관성묘는 高宗 12年(1875)에 東萊府使로 부임
한 朴齊寬의 꿈에 관우가 現夢하여 동네 유지 朴禹衡의 지원으로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遺失
되어 전설만 남아 있다.24) 그리고 전주의 관성묘는 高宗 31年(1892)에 全羅觀察使 金聲根
과 南固別將 李信文 등이 지방 유지의 헌금을 모아 建立하였다. 그 후 1950년대 塑造木刻像
으로 보수작업을 하였다.25) 또 강화도의 南關雲廟는 高宗 21年(1884) 判官 吳相準이 건립
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미륵대도 금화종 강화선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26), 北關雲廟는 高
宗 29年(1892)에 江華山城 守門將 尹義普가 건립하였는데 1906년에 重建하였다. 현재는
巫俗人이 거쳐하며 관리하고 있다.27)
그 외 강화도에는 민간에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東關帝廟와 西關帝廟가 있는데 동관제
묘는 高宗 22年(1885)에 馬女史라는 사람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동관제묘는 관우와 유비
및 장비를 함께 모시는 것이 특징이며 현재 무형문화재 제8호 외포리 곶창굿 기능보유자
정정애가 관리하고 있다.28) 또 서관제묘는 실전되어 관련기록이 全無하다. 대략 高宗年間
22) 1883년 명륜동에 세워진 북관제묘는 다음해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 고종이 정변을 피해 황망히
북관왕묘로 피신하였다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때 관우의 신령 덕분에
무사했다고 여기게 되어 그 후로 관우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北廟는
명륜동 홍덕골에 있었다고 하나, 現在는 그 터만 남아 있고, 비석은 4年 후인 高宗 24年(1887)
에 세웠다. 碑文의 내용은 국내에서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기록은 《別乾坤》 23호(1929년 9월호), <京城이 가진 名所와 古蹟>에 자세하다.
23) 숭의묘는 1902년 궁내부 특진관 조병식의 발의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1904년에 건립되었다. 숭
의묘는 劉備⋅關羽⋅張飛를 모신 것이 특징이다. 숭의묘에 대한 기록은 《高宗實錄》 권42, 高宗
39年條에 자세하다.
24) 金鐸, 《韓國의 關帝信仰》, 선학사, 2004년, 51쪽 참고.
25)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참조.
26) 강화로 인터넷 방송 http://www.ghtv.kr/ 참조.
27) 金鐸, 《韓國의 關帝信仰》, 선학사, 2004년, 52쪽 참고.
28) 강화로 인터넷 방송 http://www.ghtv.kr/ 참조.
100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자도 未詳이다.
그리고 민간의 주도로 건립된 관우묘 가운데 서울에 소재하는 것으로는 종로의 중앙관왕
묘와 방산동의 성제묘 및 장충동의 관제묘가 있다. 종로의 중앙관왕묘는 1670년대 건립설
과 高宗年間 건립설이 있으며 건립자는 市廛의 상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종각 옆에 붙
어 있다가 1950년 보신각이 불타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주로 육의전의 상인들이 재
물을 기원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29) 또 高宗年間에 민간에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되는 방산동의 성제묘는 관우와 부인을 함께 모신 것이 특징인데 이곳 또한 상인들이 주로
재물을 기원하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30) 이상의 기록에서처럼 高宗年間에는 관우
신이 국가 수호의 수호신에서 중국 도교의 관우신앙과 동일한 財物神으로 역할을 轉業하는
양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본격적인 중국도교의 유입과 특히 壬午軍亂 이후 급격히 늘
어난 淸나라 商人들의 영향으로 思料된다. 그 외 장충동의 關帝廟는 건립연대에 대한 정확
한 기록이 없어 대략 高宗年間로 추정하며 설립자도 다만 嚴妃關聯說만 전해진다. 이곳에도
관우와 부인의 영정이 모셔진 것이 특징이며 종교적 색채는 민간무속신앙에 유교와 불교
및 도교가 다양하게 혼합된 민간신앙으로 색채를 띠고 있다.31)
또 민간에서 주도되어 건립한 地方所在의 관우묘는 김제시 요촌동의 관성묘와 공덕면의
관성묘가 있고 하동의 관묘 및 개성의 관왕묘 등이 있다. 전북 김제시 요촌동의 관성묘는
哲宗 12年(1861)에 조계식이 땅을 희사하여 지었다고 하며, 후대에 관성교 신도들의 도움
으로 발전하다가 유실되었다.32) 그리고 공덕면의 관성묘는 高宗 17年(1880) 공덕면 동계
리 주민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유실되었다.33) 또 경남 하동의 관묘는 高宗 24年
(1887) 관우의 현몽을 한 노인과 동네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으나 日帝時代때 遺失
되었다고 한다.34)
그 외 북한 지역의 개성 관왕묘는 高宗 31年(1894)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未詳이다. 위치
는 개성 만월대 북동쪽에 있다고 하며 특히 단오에 많은 發福을 비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35) 또 평양 鎭衛隊 건물 뒤쪽 높은 산에도 관제묘(서묘)가 있었는데 1881년에 건
29) 장장식,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민속학연구》 제14호, 국립민속박물관,
2004. 42쪽.
30)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참조.
31)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참조.
32) 디지털 김제 문화대전 http://gimje.grandculture.ne 참조.
33) 디지털 김제 문화대전 http://gimje.grandculture.ne 참조.
34) 金鐸, 《韓國의 關帝信仰》, 선학사, 2004년, 52쪽 참고.
35) 金鐸, 《韓國의 關帝信仰》, 선학사, 2004년, 96쪽 참고.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01
립되었으며 建立者는 박도환이다.36)
2) 국내 關羽神의 수용
다음은 국내 관우신의 수용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관우신의 수용은 먼저 왕실에
서의 수용형태와 민간에서의 수용형태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왕실의 수용은 《朝鮮
王朝實錄》에 나타난 주요 關聯資料를 정리하여 도표로 만들었다.
(1) 왕실의 수용
36) 葛城末治(日本), 《朝鮮金石總覽》 下冊, 1325-1326쪽. 김탁의 《한국의 관제신앙》에는 1866년으
로 적혀있으나 誤記로 보인다.
國王內容參拜與否儀禮關聯記錄
宣祖
31年(1598)
4月 25日 關王廟 修築時 자금 조달에 대해 상의함.
5월 14日 關王廟에 親祭함. 宣祖가 무릎을 꿇고 분향한
다음 술 석 잔을 올림. 再拜 후 명 잡희를37) 함께 관람
함. 사간원에서는 임금에게 즉시 환궁을 요청함.
參拜
관우제사
의식따로
존재하지
않음
32年(1599) 宣祖實錄
윤4月 7日 關王廟 설립과 관련하여 윤근수와 논의함.
6월 19일 사헌부에서 동관왕묘의 건립에 민원을 보고함
33年(1600)
10月 20日 호조에서 關王廟 역사에 소요되는 비용 보고
함.
34年(1601)
8月27日 關王廟를 3년 동안 지은 것이 완만하긴 하였으
나 그 노고가 없지 않다고 치하함.
光海
君
4年(1612)
6月 1日 關王廟의 관리와 수호에 대해 예조에 전교함.
纛所의 禮에 의거 每年 驚蟄과 霜降에 관원을 보내 거행
함. 기록없음 下祀光海君日記
10年(1618)
11月18日 東쪽의 關王廟와 楊經略의 비각을 서둘러 점
검하고 수리하라 전교함.
仁祖5年(1627)
7月 2日 關王廟에 있는 明나라 사신에게 식량 반찬 등을
하사함.
기록없음 기록없음 仁祖實錄
孝宗無無기록없음 기록없음
顯宗12年(1671)
10月 17日 南關王廟 塑像에 물기가 흐른 자국이 있다고
보고함.
기록없음 기록없음 顯宗實錄
肅宗
17年(1691)
2月 26日 關王廟 참배가 무사들이 관우의 忠의 정신을
본받아 왕실을 守護하는 데 있음을 밝힘.
2月 27日 武安王의 사당을 보수하라는 備忘記를 내림. 參拜 肅宗實錄
18年(1692) 9月 15日 武安王을 敬慕하는 뜻의 시 2수를 지어 내림.
102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29年(1703) 6月 19日 숭례문 밖 關王廟에 參拜함.
36年(1710)
12月 17日 전라도 고금도의 關王廟에 陳寅과 李舜臣을
享祀하는 일을 논의함.
37年(1711)
1月3日 성주⋅안동의 關王廟를 보수하도록 하고 예조에
서 關王廟의 享祀 절목을 정함.
5月 12日 안동 關王廟의 庭階를 넓히고, 성주관왕묘는
移建토록 함.
6月25日 關王廟에 거동하여 拜禮 행하는 것으로 정함.
景宗無無기록없음 기록없음
英祖
1年(1725) 3月 24日 關王廟와 宣武祠에 致祭함.
參拜小祀英祖實錄
3年(1727) 관왕묘에 들러 재배함.
15年(1739) 東關王廟를 중수하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게 함.
20年(1744)
關羽에 대한 국가의 제사를 吉禮의 小祀로 정함.
《國朝續五禮儀》
22年(1746)
8月 10日 東關王廟⋅南關王廟를 拜禮함.
8月 22日 ‘顯靈昭德王廟’ 여섯 글자를 친히 써서 東關王
廟⋅南關王廟 두 廟에 걸게 함.
26年(1750) 8月 20日 성주 關王廟를 수리하게 함.
正祖
2年(1778)
9月 2日 鷺梁에서 大閱을 행하고, 關王廟에 들어가 展拜
禮를 행함.
參拜中祀正祖實錄
9年(1785) 9月 11日 관왕묘 제사의례를 中祠로 승격함.
10年(1786)
2月 2日 關王廟에 樂章을 지어 사용함.
11月 15日 四祖御製의 武安王墓碑를 동묘와 남묘에 각
기 나누어 건립.
純祖
6年(1804) 9月 1日 還宮할 때 南關王廟에 들러 展拜함.
參拜中祀純祖實錄
32年(1832)
3月 14日 湖南의 誕報廟와 嶺南의 關王廟에 衣對와 鋪
陳을 예조에서 두 道의 도신에게 알리어 똑같이 새로 갖
추도록 하라 명함.
憲宗12年(1846) 4月 9日 東關王廟에 奠酌禮를 행함. 參拜中祀憲宗實錄
哲宗
3年(1852) 2月 27日 南關王廟에 展拜함.
參拜中祀哲宗實錄
12年(1861) 2月 18日 南關王廟에 奠酌禮를 행함.
高宗
3年(1866) 9月 5日 東關王廟를 두루 展拜함.
參拜
中祀→小
祀→中祀
高宗實錄
20年(1883)
9月 25日 北關王廟가 竣工됨. 제식과 절차는 동⋅남관왕
묘의 규례대로 함.
33年(1896)
8月 14日 궁내부에서 大祀, 中祀, 小祀에 관한 별지를
만듦. 關王廟 제사를 中祀로 결정함.
36年(1899)
4月 11日 關王廟가 重建 중인데 松京(개성)에 관왕묘를
세운 것은 여러 해가 되었으니, 香祝을 봉하여 보내는
절차는 星州⋅安東⋅關西의 規例대로 하고 해당 地方官
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함.
5月 25日 南關王廟의 廟宇가 완공되어 塑像을 還安할
것과 각 關王廟에 奠酌禮를 거행하도록 명함. 祭文은 임
금이 직접 지어 보내겠다함.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03
이상의 자료에 근거하면, 관우묘은 명나라에 의해 생겨났지만 선조 때부터 고종에 이르기
까지 국가의 주도로 유교의 제례의식에 의거해 참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후 제왕마다
각기 다른 행보를 보인다. 왕실의 수용문제를 시기별로 좀 더 세밀히 분석하면 크게 4대 시
기로 분류된다. 첫째가 消極的 觀望期, 둘째는 積極的 活用期, 셋째는 受動的 踏襲期, 넷째
는 能動的 受容期이다.
첫째 소극적 관망기는 宣祖부터 顯宗까지이다. 선조는 비록 명나라 장수의 권유로 관왕묘
의 건립과 참배까지 하였지만38) 그 후대의 광해군과 인조⋅효종⋅현종은 구태여 관우묘에
참배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고 관왕묘를 노골적으로 배척하지도 않았다. 즉
한편으로는 관왕묘에 대한 補修作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
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곳은 중국사신이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참배하는 방문코스였기
에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해 기본적 관리만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적극적 활용기는 숙종부터 영⋅정조시기로 군왕이 관우묘를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
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했던 시기를 말한다. 즉 숙종이 관우 숭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己巳換局과 많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은 이러한 환국을 겪으면
서 관우의 忠義精神을 본받아 왕실을 수호하고 왕실의 기반을 다지고자 관왕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39) 그 다음 왕 경종은 재위기간이 짧아 참배의 경황이 없었
고 英祖는 탕평과 관우의 충의를 권장하는 일환으로 1744년(英祖 20年)에 撰定된 《國朝續
五禮儀序列》 <吉禮>의 小祀에40) 관왕묘의 제사를 정식으로 국가 祀典에 입조시킨다. 또 正
37) 여기에서 雜戱는 明 傳奇 가운데 《삼국지연의》나 관공과 연관된 희곡공연일 가능성이 크다. 또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국내에서 공연된 최초의 중국 희곡이라는 점이다.
38) 당시 유교사상이 지배적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에서 관왕묘 설립과 숭배는 많은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반발을 무릅쓰고 선조가 관왕묘의 설립에 의지를 보인 것은 관우
의 忠義와 尙武精神의 통하여 왕실의 안녕과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39) 《肅宗實錄》 권23, 숙종 17년 2월 27일에 “관제의 충의를 본받아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라는 기
록이 있다.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 62쪽 참고.
40) 궁중에서 제사의 종류에는 永寧殿⋅社稷壇⋅園丘壇 등에 지낸 大祀, 風⋅雲⋅雷⋅雨⋅岳⋅海⋅
瀆의 神과 先農⋅先蠶⋅雨祀⋅文宣王 및 역대 始祖 등에게 지낸 中祀, 馬祖⋅先牧⋅馬社⋅馬
12月 16日 全州 關王廟에 致祭하게 함.
39年(1902)
1月 27日 관왕을 皇帝로 높여 “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봉호를 바꾸었음.
41年(1904) 4月 27日 西部에 崇義廟를 새로 세움.
純宗2年(1908)
7月 관왕묘 제사가 撤廢되고 西廟도 撤廢되며 부지는 國
有로 이속됨.
기록없음 廢止
104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祖는 1785년(正祖 9年)에는 四朝御製武安王墓碑를 동묘와 남묘에 세우고 관왕묘 제사를 小
祀에서 中祀로 격상시키고 또 關廟樂章도 제정하였다. 그 후 관왕묘 제례는 음악이 수반된
제례악으로 발전하였다.41) 이처럼 이들은 왕권안정에 관우신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셋째 수동적 답습기는 순조⋅헌종⋅철종 때로 정조 때 승격된 中祀를 지속적으로 답습하
였던 시기이다. 이들은 교외로 나갈 때는 관왕묘에 들러 의례를 행하여 先祖들이 만들어 놓
은 규칙을 충실하게 지켜나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왕권강화에는 정치
적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넷째 능동적 수용기는 고종 때로 이 시기에는 고종이 관우의 영험을 체험하면서 관우신을
믿게 되었고 또 이러한 관우신의 靈驗으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복원시키고자 자발적으로
관우묘를 세우는 등 적극적인 수용이 있었다. 사실 조선에서 관우신앙에 가장 많은 믿음과
관심을 보인 왕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즉위 초부터 관례에 따라 관왕묘에 자주 행차하여 참
배하였고 1896년(고종 33년) 8월 14일에는 관왕묘 제사를 다시 中祀로 격상시켰다.42) 또
한 북관왕묘와 서묘(숭의묘)를 건립하여 동서남북으로 관우신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고, 관
우의 封號를 왕에서 황제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종의 관우신앙은 대내외적 국가
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日帝를 포함한 외세 침탈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왕실을 보호하려는 간절한 염원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관우신에 대한 왕실의 수용양상을 왕실 제례의식에 근거해 총괄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제사로 의례화한 최초의 왕은 英祖로 1744년에 小祀로 승격시켜 儀禮的 參拜를
공식화 하였고 1785년 正祖는 이 小祀를 中祀로 승격시켜 참배의 격을 높였다. 이후 순조⋅
헌종⋅철종⋅고종 때까지 이러한 의례는 공식화되어 참배가 이루어지다가 高宗 甲午改革
때에 잠시 小祀로 격하된다. 그 후 1896년에 다시 中祀로 격상되었다가 純宗 隆熙 2年
(1908) 7월에 대한제국과 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日帝의 압력으로 순종의 칙령
에 의해 공식적으로 철폐되며 왕실에서의 제사의식은 사라지게 된다.
또 《朝鮮王朝實錄》 가운데 역대 제왕들의 관왕묘 참배기록을 살펴보면, 英祖 31회, 正祖
17회, 高宗 14회, 純祖 12회, 哲宗 4회, 肅宗 2회, 憲宗 2회, 宣祖 1회 순으로 나타난다.43)
步⋅靈星⋅名山大川 등에 지낸 小祀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吉禮 (두산백과)
41)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 68-69쪽 참고.
42) 원래는 中祠였으나 甲午改革(1894年) 때에 小祠로 격하되었다가 이때 다시 中祠로 격상됨.
43) 이 자료의 근거는 이성형의 논문 <對明義理論의 推移와 朝鮮 關王廟>(《韓國漢文學硏究》 제53집,
2014년 3월) 가운데 宣祖부터 正祖까지 국왕의 관왕묘를 참배회수를 조사하였는데, 宣祖는 1
회, 肅宗은 5회, 英祖는 36회, 正祖는 18회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다시 조사해본 결과
미세한 차이가 있어 宣祖부터 高宗까지 再調査하였다.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05
예상대로 英祖와 正祖 및 高宗의 참배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영조와 정조가
關羽神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적절히 활용한 실례이며, 純祖 또한
영⋅정조대에 만들어 놓은 의례를 충실히 답습하여 따랐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세 번
째로 많이 참배한 고종은 그야말로 관우신에 대한 자신의 靈驗과 시대의 절박함이 참배로
이어지게 한 것이라 판단된다. 역대 제왕들이 참배한 장소는 대부분 남관왕묘와 동관왕묘였
으나, 1883년(高宗 20年)부터는 갑자기 북관왕묘로 장소를 바꾸는데 이는 고종이 靈驗을
보고 세운 곳이 북관왕묘이기에 이곳으로 참배 장소를 바꾼 것이라 사료된다.
그 외 관우숭배 의식은 國政의 향방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방문하는 朝鮮通信使의 使行記錄에 따르면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통신사의 餞別宴會가 관왕
묘에서 행해졌으며 대궐에 들어가 復命하기 전 사신들이 관복을 갈아입는 장소로도 이곳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통신사의 관왕묘 방문이 하나의 통과의례로 정착된 점에
는 關羽神의 靈驗으로 안전하게 임무를 마치고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保險的 性格과 信仰的
機能으로도 설명 할 수 있다.44)
(2) 민간의 수용
민간에서의 수용은 크게 4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즉 祠廟參拜 段階 → 民間信仰 段階
→ 巫俗信仰 段階 → 初期 宗敎化 段階로 분류된다.
祠廟參拜는 先祖 혹은 先賢의 神主나 影幀을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단계로 주로 宣祖時
期부터 高宗年間까지 이어진 유교적 성격의 제사행위이다. 최초의 관우묘인 남관왕묘에 대
한 제례는 관우의 생일인 5월 13일에 거행되었다.45) 그 후 매년 정기적으로 驚蟄日과 霜降
日에 왕이 친히 참석하거나 관원을 보내 거행하였다.46) 또 지방의 關羽廟에서도 이것에 의
거하여 驚蟄日과 霜降日에 거행하였다. 이러한 제례의식은 민간으로 배어들며 백성들의 관
심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과가 곧 민간신앙으로 이어진다.
民間信仰는 특정한 敎祖나 敎理體系 및 敎團組織을 가지지 않고 일반대중의 생활 속에
傳承되어오는 呪術的인 신앙형태로 주로 祈福行爲을 의미한다. 관우묘에 대한 기복행위는
英祖 16年(1730)에 건립된 여수 관왕묘에 잘 나타난다. 당시에 關王을 모시면 소원을 성취
44) 정은영, <조선 후기 통신사의 관왕묘 방문과 의미>, 《국제어문》 제50집, 2010년 12월. 63-91쪽
참고.
45) 5월 13일 천둥과 번개가 쳐서(관우신의 감응이라 기뻐했다고 함) 행사는 14일에 거행됨.
46) 《光海君日記》 광해군 4년, 6월 1일조.
106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한다는 말을 믿고 집집마다 關羽의 肖像畵를 마련해 제사를 모셨는데, 참여하는 사람이 늘
자 祠堂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외 아직도 시골마을의 洞祭에서 관우신을 모시는 곳이 다
수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초기 민간신앙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또 《英祖實錄》 英祖
37年(1751)에는 “근래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서 淫祀가 행해지고 있으므로 특별히 관리하
여 嚴斷하라”47)라는 영조의 下命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淫祀란 정식의례에 의한 제사행위가
아닌 잡스런 呪術行爲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하면 이미 당시 민간에는 이러한 주
술적 민간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술적 민간신앙에 巫堂이
개입을 하면서 무속신앙으로 이어진다.
巫俗信仰은 원시종교 신앙의 한 형태로 神靈의 계시를 받아 神通力을 얻은 巫堂이 주축이
되어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呪術宗敎 신앙이다. 무당은 주로 神靈과의 교류를 통해 질병
치료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등의 종교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무속신앙은 高宗 20年
(1883) 明成皇后의 총애를 입으며 北關王廟 건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巫堂 眞靈君(이성
녀)의 등장으로 본격화 된다. 물론 이전에도 무속신앙은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지만 眞靈君
과 賢靈君의 등장이 민간의 무속신앙에 기폭제가 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實例로
高宗年間에 만들어진 강화도의 東關帝廟와 北關雲廟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곳은 현재에도
무속인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初期 宗敎化는 대략 도교⋅불교⋅유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화가 일어나는 단계로 대표적
인 종교가 善陰騭敎와 關聖敎 및 甑山敎를 들 수 있다.48) 이들 종교가 全的으로 도교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도교에서 母胎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먼저 조선시대 도교관련 서적의 출판을 살펴보면, 대략 朝鮮 正祖年間부터 출판이 시작되
었는데 그중에서 관우관련 서적으로는 1855년(哲宗)에 《關聖帝君應驗明聖經》의 출판을 기
점으로 1876년(高宗 13年)에 《關聖帝君聖蹟圖誌全集》과 《海東聖蹟誌》, 1880년(高宗 17
年)에는 《三聖訓經》과 《過火存神》, 1882년(高宗 19年)에는 《關帝寶訓像註》, 1883년(高宗
20年)에는 《關聖帝君明聖經諺解》, 1884년(高宗 21年)에는 《關聖帝君五倫經》 등이 간행되
었다.49) 이러한 서적은 관우신앙이 국내에 태동하여 정착하는데 밀접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위에 처음 나타난 종교가 선음즐교이다.
47) 《英祖實錄》 권98,(영조 37년 12월 丁丑) “上命近來東南關王廟, 便成淫祀, 特爲申飭禁斷焉”
48) 이상의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김탁의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과 원정근의 《충의의
화신 관우》(상생출판사, 2014년) 등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본 논문에서는 개략적인 소개로
그친다.
49) 신선아, <고종대 관우신앙의 변화>, 서울여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년, 24-25쪽 참고.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07
善陰騭敎는 1872년 11월에 서울 삼각산 甘露庵에서 崔瑆煥⋅丁克慶⋅劉聖鍾 등 100여
명이 조직한 염불단체 法蓮寺(혹은 묘련사)가 효시이다. 선음즐교는 주신으로 關聖帝君(關
羽)과 文昌帝君(張亞子)⋅孚佑帝君(呂洞賓)을 三帝君으로 신봉한다. 선음즐교는 한국종교
사상 처음으로 관제신앙을 조직화한 교단이기하나 지금은 더 이상 전하지 않는다.50)
그다음 나타난 것이 증산교인데, 甑山敎는 조선말 姜一淳(1871~1909년)이 전라도를 거
점으로 일으킨 신흥종교로 甑山은 그의 號이다. 증산교는 東學과 함께 한국 민중종교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으며 1920년대에는 무려 100여 교파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09년
강증산이 죽자, 증산교는 仙道敎⋅普天敎⋅彌勒佛敎 등 수십 개의 교단으로 분파되었다. 증
산교에서는 關帝가 증산을 보호하는 보좌신격으로 숭배되며 현재까지도 한국종교 가운데
관제신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거의 유일한 교단이다.51)
關聖敎는 1920년 朴基洪과 金龍植 두 사람이 종래 關帝를 숭배하던 崇神團體와 殿內巫
및 일반 민중을 교도로 삼아 새롭게 조식한 교단이다. 선음즐교나 증산교는 여러 신을 포괄
적으로 숭대대상을 삼고 있지만 관성교는 관우만을 독립적으로 숭배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이 특징이다. 관성교는 한때 한국 관우신앙의 대표적인 교단으로 자리를 잡았었지만, 지금
은 이미 쇠락하여 찾아보기 어렵다.52) 그 외 관우신을 모시는 종교로는 금강대도⋅무량대
도⋅미륵대도 등이 있다.
이처럼 관우신앙은 祠廟參拜의 단계에서 다양한 수용의 방식을 거치면서 종교화 과정까
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용과정에서 어떤 종교는 독특한 생명력을 가지고 발전하는가 하
면 어떤 종교는 갑자기 생명력을 잃으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하였다.
4. 關羽關聯 傳說의 紹介와 分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특히 관왕묘가 건립된 이후에 관우에 대한 전설은 급격히 만들어지
기 시작한다. 특히 《임진록》 등과 같은 문헌의 기록과 民間傳說에 매우 다양하게 등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전설들을 크게 現夢類⋅顯靈類⋅治病類⋅祈福類⋅禁忌類 등으로 유형으로
분류해 보았다. 조선 말기까지의 자료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50)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 99-105쪽 참고.
51)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 105-127쪽 참고.
52) 김탁, 《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년) 128-149쪽 참고.
108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類型出現時期地 域傳說內容結果關聯文獻
現 夢類 1
임진왜란
이전
궁궐
선조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임진왜란을 예
고함.
倭亂
勃發
임진록
권영철본
2 임진왜란이전 최일경 집
임진왜란을 예언한 우의정 최일경이 태어
날 때 관우가 태몽으로 나타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함.
貴人
出生
啓示
임진록
국립도서관본
3 임진왜란 명나라
이덕형(유성룡)이 청병요구를 명황제에게
하나 거절당함. 그날 관우가 명황제의 꿈
에 나타나 조선을 구하라고 함.
派兵
임진록 경판본/
구비문학
4 임진왜란 명나라
명 황제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조선이 어
려우니 이여송을 보내어 구원하라고 함.
派兵/
救援
임진록
5 임진왜란 국내
明將 이여송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이순신
을 기용하여 수전에 임하라고 함.
起用/
勝利
임진록
권영철본
6 임진왜란
강진
고금도
明將 陳璘의 꿈속에 관우가 나타나 必勝戰
法을 알려줌. 승리 후 관우가 다시 나타나
祠廟를 세워 달라하여 祠廟를 세움.
戰法
啓示
李天常(明人)의
古今島關王廟創建事實
7 임진왜란
南關
王廟
한 선비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이항복을
해치려는 자의 음모를 퇴치시키고 이항복
에게 남관왕묘의 건립 터를 계시함.
啓示/
陰謀
底止
任埅의 天倪錄
8 高宗年間궁궐
고종과 민비의 꿈에 괴한이 나타나 해치려
하자 관우가 나타나 구해줌.
救援
別乾坤23호 1929년
9월호
9 조선후기
漢陽
漢江
사악한 도술사가 한양을 혼란에 빠트리려
고 하자 관우가 한 선비의 꿈에 나타나
그 음모를 저지시킴.
啓示/
陰謀
底止
任埅의 天倪錄
10
조선후기 全國
各地
관우의 신령이 꿈에 나타나(普信閣 守直官
/ 金堤地方 朴翁 / 觀察使 김성근과 別將
이문신 / 맹사성 / 東萊府使 박재관 / 安
東府使 / 永同郡守/박도환) 자신의 祠廟
를 세워달라고(혹 移轉 / 비⋅바람을 가
려달라며 補修) 요구함.
祠廟
建立
및
移轉
補修
每日申報/文化財廳/朝
鮮金石總覽/朝鮮民譚集
/永嘉誌/韓國口碑文學
大系 等
顯靈類 1 임진왜란
숭례문/
동대문
小西行長과 加藤淸正이 한양에 쳐들어오나
관운장의 신령이 나타나 퇴치(혹은 淸正을
참수).
倭軍
退治
壬辰錄京版本/國立圖書
館本/
朝鮮民譚集
2 임진왜란
숭례문/동
대문
관운장의 顯靈이 나타나 왜군을 무찌르자
加藤淸正이 자신의 白馬의 목을 따 피를
뿌리는 바람에 顯靈이 사라짐.
關羽
顯靈
消失
壬辰錄 권영철본과
朝鮮民譚集 參考
3 임진왜란 星州
승왜리 전투에서 관운장이 나타나 왜병을
무찌름, 일제때 일본 경찰서장이 관묘를
철거했다가 急煞을 맞아 죽음.
倭軍
退治/
急煞
이경선의 삼국지연의
비교문학적 연구
4 임진왜란
平壤等
各地
왜군과의 전투에서 관우장과 神兵이 나타
나 왜적을 무찌름. 이 유형은 평양 직산남
원 등 전국 각지에 있음.
倭軍
退治
過火存神 / 東野彙輯
等
治病類 1
조선
영⋅정조
남관
왕묘
학질을 앓는 남녀들을 남관왕묘 관운장의
좌상 밑에 들여보내니 병이 달아났다 함.
治病
燕巖集 권7 별집,
嬰處稿序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09
이상의 도표에서는 동일 내용이거나 유사한 내용은 같은 유형으로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그 결과 관우관련 전설은 약 23개 정도가 확인된다.
전설의 출현 시기는 주로 임진왜란시기와 조선후기 高宗年間에 집중적으로 만들어 졌으
며 출현지역도 전국 각지에서 고르게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전설유형이 現夢類이다. 이는 關羽의 靈驗을 드러내는 가장 효율적
인 방법이 꿈이기에 現夢을 매개체로 한 것이 가장 많은 것이라 판단된다. 현몽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명 황제나 宣祖 및 高宗 등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파병
을 종용한다든지, 임진왜란의 발발을 경고한다든지, 또는 꿈속에 나타난 괴한을 退治해 준
다든지 하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 관우의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또 明將 李如松의 꿈속에
나타나 이순신을 수군제독으로 임명하라고 권하는 내용이나 明將 陳璘의 꿈에서는 병법까
지 啓示하는 등 관우를 매우 全知全能한 神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귀인의 탄생을
계시하는 胎夢에도 출현하여 관우의 神秘性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圖表의 現夢類 10에서처럼 관우가 친히 현몽하여 자신의 사당건립을 요구하는 다
소 뻔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政府官吏를 포함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관우가
직접 현몽하여 자신의 사당을 지으라고 한다든가, 비⋅바람에 노출되었으니 가려달라든가,
2 조선후기 부산
부산 다대포에서 關羽像을 건짐. 당시 釜
山僉使 鄭日復이 병중이었는데 關羽像에
병을 빌어 완치됨.
治病
이경선의 삼국지연의
비교문학적 연구
祈福類 1 高宗年間 漢陽
眞靈君 李氏가 민비에게 관우신을 숭배하
면 자손이 번성하고 복운이 올 것이라 함.
北廟
建設
高宗實錄
2 조선후기 全州
이우상(문장으로 유명함)의 부친은 관성묘
에 가서 아들을 낳아 달라고 빌음.
得男孫晉泰의 朝鮮民譚集
禁忌類 1 조선후기
釜山
東萊
동래 관왕묘를 지을 때 지붕에 있던 呂氏
姓의 인부가 낙상사고로 떨어져 죽음.
그 후에도 여씨가 묘안에 들어오다 기절.
呂氏
出入
禁止
최상수의
한국민간전설집
2 조선후기 平壤
평양 서묘를 지을 때 기왓장을 지고 지붕
에 올라가다 눈이 캄캄해져 발을 헛디디고
낙상하여 죽음.
呂氏
出入
禁止
최상수의
한국민간전설집
3 조선후기
江原
洪川
여씨가 지나가면 발이 땅에 붙어 버림.
관료가 참배를 안 하고 지나가면 발굽이
땅에 붙어 下馬하여 지나감.
呂氏
出入
禁止
강원지역문화
연구 2호
關羽
誕生
神話
未詳未詳
관우 어머니는 신체가 커서 그 郎君을 못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구름을 타고 온
신과 夢中配合하여 낳았다고 함.
關羽
誕生
한국민속학42집,김명
자채록(박삼봉증언)
其他임진왜란 安東/南原
이여송이 유성룡에게 조선은 누구를 武神
으로 삼느냐고 하자 엉겁결에 관우라고
함. 거짓이 드러날까 급히 관우묘를 세움.
祠廟
建立
이경선의
삼국지연의
비교문학적연구
110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또는 장소가 쓸쓸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든가 하는 요구를 한다. 이는 절대적이고 엄격한
神格에 人間味가 다소 가미된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 많은 유형이 顯靈類이다. 현령류는 관우가 꿈을 매개체로 하지 않고 직접 現身하
는 방법으로 現夢類보다 더 神秘感과 敬畏感을 준다. 이러한 유형은 이미 중국 명나라 초기
의 전설에 등장한다. 즉 명 태조 주원장이 파양에서 전쟁을 할 때, 그가 탄 배가 여울목에
붙어버렸는데 관우가 나타나 바람머리를 돌려주어 적의 전함을 불태우고 승리를 하였다고
한다.53) 이러한 계기로 명나라는 關羽神을 더 추앙하고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전설에서는 관운장이 顯靈하여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왜군을 무
찌르는 전설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전설은 神秘感과 敬畏感은 물론 痛快感마저 자아내게 한
다. 이처럼 顯靈類 傳說은 비록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전설을 통해 우리의
염원을 반영한 結晶體이기도 하다. 그 외 또 다른 전설에서는 불리함을 감지한 倭將 加藤淸
正이 白馬의 목을 쳐 붉은 피를 관운장에게 뿌리는 바람에 靈力을 잃은 관우가 消失되어
버린다는 전설도 있다.
또 治病類는 2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한양에서 瘧疾에 걸린 사람을 南關王廟의 關羽像 아
래에 넣었더니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고, 또 하나는 질병을 앓던 자가 기도를 하여 치유되었
다는 전설이다. 이는 관우신앙이 민간으로 유포되며 병까지 치료하는 신통력을 추가하는 전
설로 관우의 전지전능함이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祈福類는 단순히 관우신을 잘 숭배하면 많은 복을 받는다는 高宗年間의 眞靈君이
閔妃(명성황후)를 획책하여 북묘를 지었다는 전설로 무속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
전설이며, 또 이우상의 부친이 관성묘에 아들을 낳아 달라고 기도한 끝에 이우상을 낳게 되
었는데 그는 文章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는 전설이다. 이처럼 관우신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 萬能神으로 부각되어 가는 것을 전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關羽關聯 傳說 가운데 매우 독특한 전설이 禁忌類이다. 왜냐하면 全知全能한 萬能神으로
재탄생한 관우신이 자신을 죽인 자가 呂蒙이라 하여 후대의 呂氏에게 危害를 가하거나 죽이
기까지 하는 전설은 신격화된 관우의 행동으로는 품격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三國志演義》의 내용이 민간으로 대중화되면서 만들어진 전설로 추정되며 또 한편으로는
관우신의 영험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려다 얻어진 副産物일 가능성도 있다.
그 외 關羽誕生神話가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관우어머니는 기골이 장대하여 배우자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구름을 타고 온 신과 夢中配合하여 관우를 낳았다는 내용인데
53) 李瀷, 《國譯 星湖僿說》 4권,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85년. 55쪽.
高皇帝鄱陽之役, 御舟膠淺, 王能現其神(關羽), 回風而焚賊艦.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11
이는 관우의 신격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쉽게 추정할 수 있다.
其他의 전설로는 明將 이여송이 조선에 파병되어 유성룡에게 조선은 누구를 軍神으로 숭
배하느냐고 묻자 유성룡은 임기응변으로 관우라고 거짓을 고하였다. 그 후 자신의 거짓말이
밝혀질까 두려워 황급히 관우묘를 세웠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民譚의 諧謔性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의 자료에서 확인되듯이 관우신은 임진왜란 시기에는 뛰어난 武神으로 조선을 지켜
주는 守護神으로 등장하였다가 후대로 갈수록 本業이 바뀌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
은 肯定的인 관점에서 보면 萬能神이라 할 수 있지만 否定的인 관점에서 보면 雜神이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준다. 즉 發福을 시켜준다든가, 아들을 낳게 해준다든가, 병을 치료해준다
든가 하는 점에서 雜神的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무속신앙과 종교적 영
향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로 사료된다.
5. 結論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위기에 빠질 때마다 신에게 의지하며 기적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祈福行爲는 신앙으로 이어져 많은 종교가 만들어 지고 또 흥망성쇠의
전철을 밟아왔다. 그 가운데 독특한 경로를 밟으며 발전해온 신이 중국의 關羽神이다. 즉
관우신은 儒敎에서는 나라를 수호하는 충의의 武神으로, 佛敎에서는 寺刹을 지키는 伽藍神
으로, 道敎에서는 악마를 쫓아내고 재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三界伏魔大帝로 수용
되며 그야말로 萬能守護神이 되었다.
대략 宣祖年間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명나라 군대와 함께 유입된 관우신은, 명나라 장수
陳寅이 1598년 남대문 밖 남산기슭에 관우묘를 건립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후 전국
에 대략 27곳 이상에서 관우묘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곳은 14곳으로 확인된
다. 관우묘는 주로 왜군과의 격전지 위주로 건립되었으며 건립의 주체는 크게 명나라와 조
선왕실 및 민간에서 건립하였다. 관우묘의 名稱 또한 초기에는 주로 關王墓로 부르다가 후
대로 오면서 關帝廟 및 關聖廟로 격상되었다.
관우묘는 초기에 주로 유교적 사당의 의미로 참배되었지만 후에 숙종과 영⋅정조 및 고종
등이 직접 관우묘에 참배하며 국가의례화를 하였다. 또 그들은 이러한 공식의례를 통하여
정치적 명분과 왕실안정 및 국가수호의 의도로 이용하였다.
112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관우신은 후에 민간신앙 및 무속신앙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종교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무속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高宗年間에 나타난 眞靈君과 賢靈君의 영향도 무
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계기가 민간무속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사
료된다. 한편으로는 善陰騭敎와 甑山敎 및 關聖敎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 관우묘의 건립과 함께 관우에 대한 전설도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크게 現夢類⋅顯靈
類⋅治病類⋅祈福類⋅禁忌類 등으로 분류된다. 전설에 나타난 관우는 초기 忠義와 武力의
힘으로 國家守護 및 王室安定을 주로 담당하는 수호신이 되었다가, 후대에 민간으로 수용되
면서 본래의 관장업무가 財物神⋅發福神⋅治病神 등 全知全能한 萬能神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萬能神 關羽는 중국에서는 그 세력을 점점 확장하며 발전하고 있지만 우리나
라에서는 역사를 뒤로한 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
<參考文獻>
《朝鮮王朝實錄》 <국역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韓國口碑文學大系》,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1978년.
李源命, 《東野彙輯》, 서울大 文理科大學 國文學會, 1958년.
朝鮮總督府, 《朝鮮金石總覽》, 亞細亞文化社, 1976년.
柳成龍, 《서애집Ⅱ》 <기관왕묘>, 민족문화추진회, 1977년.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민족문화추진회, 1977년.
李瀷, 《國譯星湖僿說》 4, 민족문화추진회, 1977년.
朴趾源, 《燕巖集》, 경인문화사, 1979년.
黃玹, 《梅泉野錄》, 良友堂, 1988년.
孫晉泰, 《朝鮮民譚集》, 향토연구사, 1930년.
崔常壽, 《韓國民間傳說集》, 통문관, 1958년.
金起東, 《壬辰錄》, 瑞文堂, 1978년.
소재영⋅장경남(譯), 《한국고전문학전집4, 임진록》,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3년.
李慶善, 《三國志演義의 比較文學的 硏究》, 一志社, 1978년.
金鐸, 《韓國의 關帝信仰》, 선학사, 2004년.
원정근, 《충의의 화신 관우》, 상생출판사, 2014년.
國內 關羽廟의 現況과 受容에 대한 硏究 / 113
전인초, <關羽의 人物造型과 關帝信仰의 朝鮮傳來>, 《동방학지》 134호, 2006년.
김필례, <관우설화연구>, 《漢城語文學》 17, 1998년.
구은아, <서울의 관제묘와 관제신앙>, 《문명연지》 13, 2012년.
김의숙, <홍천군 붓꼬지 관성사 연구>, 《강원지역문화연구》 2, 2003년.
김명자, <안동의 관왕묘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동향>, 《한국민속학》 43, 2005년.
민관동, <삼국지연의의 국내 유입과 출판>, 《중국문화연구》 제24집, 2014년.
손숙경, <19세기후반 관왕숭배의 확산과 관왕묘제례의 주도권을 둘러싼 동래지역사회 의
동향>, 《고문서연구》 23, 2003년.
이유나, <조선후기의 관우신앙 연구>, 《동학연구》 20집, 2006년.
이성형, <對明義理論의 推移와 朝鮮 關王廟>, 《韓國漢文學硏究》 제53집, 2014년 3월
장장식, <서울의 관왕묘 건치와 관우신앙의 양상>, 《민속학연구》 제14호, 국립민속박물
관, 2004년.
정은영, <조선 후기 통신사의 관왕묘 방문과 의미>, 《국제어문》 제50집, 2010년.
신선아, <고종대 관우신앙의 변화>, 서울여대 석사논문, 2014년.
문화재청 http://www.cha.go.kr/
강화로 인터넷 방송 http://www.ghtv.kr/
디지털 여수 문화대전 http://yeosu.grandculture.net/
<Abstract>
The God of Guan yu entered Korea with Ming troops, when Japanese Invasion
in King Sun-jo period. The God of Guan yu put down roots in Korea by a
commander of Ming, Chenyin(陳寅) that built a Guan Yu’s shrine at the foot of a
Namsan Mountain out the South Gate of Seoul in 1598.
Since then, Guan Yu’s shrine was built in more than 27 locations but only exist
14 locations in Korea. Mostly, Guan Yu’s shrine was built on ferocious battlefield
with Japanese army, and the shrine was built by Ming and Chosun Dynasty, among
people as a main agent.
In its early days, the name of Guan Yu’s shrine was a Guanwang Miao(關王廟)
114 / 中國小說論叢 (第 45 輯)
and it was upgraded to Guandi Miao(關帝廟) Guansheng Miao(關聖廟) in later
generation.
The Guan Yu’s shrine was worshipped in terms of Confucian shrine at the
beginning. Since then, the shrine was ritualized nationally by King Sukjong, King
Youngjo, Jungjo and King Gojong worshipped at the Guan Yu’s shrine. They also
utilized the official rituals for a political cause, a stabilization of royal family and
home country protection.
The God of Guan Yu was led to popular beliefs, shamanistic beliefs and the
shrine has religious aspects after all. Jinryeonggun(眞靈君) and Hyunryeonggun(賢
靈君) in the period of King Gojong were influenced on the development of
shamanistic beliefs. The shrine was also influenced on the emergence of private
religion such as the Seoneumjeul religion(善陰騭敎), the Jeungsan religion(甑山敎)
and the Gwanseong religion(關聖敎).
The legend of Guan Yu with Guan Yu’s shrine was classed as an appearance in
a dream(現夢類), an appearance of a God figure(顯靈類), a cure of disease(治病類),
and a kind of taboo(禁忌類).
Guan Yu in the legend was a guardian god in charge of country protection and
stabilization royal family with loyalty and force. At the turn of the popular belief,
the original managing duties extended to a God of Wealth(財物神), a God to bring
good luck(發福神), a God of cure of disease(治病神), and an Almighty God(全知全能
萬能神).
Keywords: Guan Yu, Guan Yu’s shrine, Belief of Guan Yu, accept, ritualization, The
legend of Guan Yu
투고(접수)일 2015년 3월 10일 심 사 일 2015년 3월 23일
수 정 일 2015년 4월 3일 게재확정일 2015년 4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