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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그두 사람은 바로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신천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라는 사람은 ‘내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 생각하고 뉴욕에다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바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신앙의 자유의 나라인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컴퓨터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벌어서 많은 재산을 벌어 자손들이 잘 살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살아가는 극빈자가 286명이면서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억5천 만 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800억 원의 돈을 축냈습니다.
이런 반면에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신앙을 찾아 미국에 왔던 에드워드 조나단은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습니다. 자손들 중에 선교사 목사만도 116명이 나왔고,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만도 86명, 군인이 76명, 나라의 고급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실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의원 주지사가 나왔고, 장로 집사가 286명이 나왔답니다. 도합 816명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가문이 나라에 낸 세금과 지도자로서 미국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정부 재산을 하나도 축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의 결과가 뭘까요? 유산 중에 최고의 유산은 믿음의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거액의 재물을 유산을 남겨주려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산이 내 자손들에게 복된 유산이 될 것인지는 고민해 보고 전해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열심히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그것을 자손들에게 남겨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뭐냐면 이 유산이 자식들을 망하게 하고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재물의 유산보다 더 중요하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을 유산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과 사랑, 이것을 물려줄 때, 재산 유산이 자식의 앞길에 도움이 되는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만대가 큰 은혜와 복을 받는 믿음과 사랑의 가문이 되시길 바랍니다
관상대로 살아간다.
이승철 (거제 향토 연구소장 및 효당 문학상 운영 위원장)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의 여운이 체가시기도전인 1960년 초겨울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 물여울 따라 눈바람이 불어왔다. 귀곡성처럼 들리는 바람소리는 동부전선 최전방 문등리 계곡을 무섭도록 울렸다. 산과 계곡이 온통 흰 눈으로 덮여있다.
적막강산의 최전방 비무장 지대는 간간히 포성이 들린다. 휴전은 되었지만 최전방은 언제나 긴장감이 감돈다. 민간인은 볼 수 없는 휴전선이다. 보초를 서는 밤은 창공의 달빛이 교교(皎皎)하여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식당으로 가는데 선임하사인 윤 중사가 식사를 하고 자기를 좀 보자고 한다.
제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윤 중사는 늘씬한 키에 얼굴이 갸름하고 신사풍의 모습이다. 제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윤 중사는 무슨 걱정이 있는지 말이 적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이 상병”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윤 중사 앞으로 갔다.
“이 상병이 관상을 잘 본다고 하던데 내 관상을 한번 봐 주게” 그날따라 윤 중사의 관상이 너무나 초라하고 서글퍼 보였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너무나 천박한 상이였다. 코는 칼날 같고 미간은 찌그러져 있고 하관은 쪽 빨아져 있었다.
“선임하사님. 요즘걱정이 있습니까? 멀리서 볼 때는 귀상으로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니 빈상(貧相)입니다. 재물이모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좋은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이럴 때는 마음을 넓게 먹고 심신수련을 해야 좋은 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상과 운명은 스스로 얼마든지 개척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본 윤 중사의 관상은 온갖 수심이 가득 차 있어서 스스로 악운을 불러들이는 상이었다. 제대하고 살아갈 걱정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상심하지 말고 얼굴을 펴고 살면 좋은 운이 온다는 말로 위로를 하고 막사로 돌아왔다. 보름쯤 지났을까 윤 중사가 찾는다고 한다. ‘관상을 다시 볼 여고 나를 찾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중대 본부로 달려갔다.
나무를 때는 날로는 벌겋게 달아 있고 내무반의 분위기는 설렁 했다. 윤 중사는, 흰 창을 들렌 눈을 까뒤집고. “ 이 상병 너 이 새끼 연탄월말 보고서 작성이 왜 엉터리로 했어.”업무트집을 하면서 주먹이 날라 왔다. 그 때서야 아차 얼마 전에 봐준 관상 때문에 분풀이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윤 중사의 구두 발이 내 정강이(촛대 빼)를 강타한다.
순간 나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윤 중사는 얇은 코를 벌렁 거리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 푸리 나무 몽둥이로 내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나는 기절을 했다. 얼굴에 찬물이 끼얹는 것을 알고는 정신을 차렸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생병의 응급치료를 받았다. 볼기짝이 황토밭고랑 처럼 터져있었다. 아파 죽을 지경이다. 며칠간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동기생 박 상병이 간호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중사나 하사 계급장을 단 군인만 봐도 윤 중사의 성난 얼굴이 떠오르고 그때 생각이 났다. 제대 선물로 나에게 매타작을 하고 간 윤 중사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강원도 속초가 고향이란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방향으로 갈 때마다 그 사람 생각이 떠올랐다. 관상이 나쁘더라도 좋다고 했더라면 매 맞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사람도 기분이 좋아서 희망을 가지고 살 것인데, 철없던 시절 눈치 없이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다. 이제는 지난날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무정 한 것이 세월인가, 삼십여년이 지난 어느 날 봄에 같이 근무 하였던 동료로부터 윤 중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속초 부둣가에서 고기를 운반 해주는 품팔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해 가을 설악산 단풍 촬영을 가면서 그 사람을 찾아 갔다. 윤 중사는 부인과 이혼하고 홀몸으로 노동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요즘 와서는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면서 나와는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 군대 생활하면서 관상을 봐주고 매 맞은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고기 파는 여인들이 자기들 관상을 한번 봐 달라며 매달리는 것을 겨우 뿌리쳤다.
물어물어 찾아 간 곳이 한적한 뒷골목 낡은 집에서 월세 방 생활을 하고 있었다. “ 윤 하모 중사 아닙니까?” 하니까, 깡마른 긴 얼굴을 내밀며,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왔습니까? 너무 누추해서” 하면서 방에서 나온다. “윤 중사님 관상 봐주고 죽도록 매 맞은 이승철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니까 그때서야 깜짝 놀라면서 당황해 한다. 내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때 당신 말만 듣고 조언을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고생은 안 할 것인데, 정말 미안합니다. 용서 해 주이소,” 내 손을 잡고 떨고 있는 그 사람이 너무나 처량하고 불상했다.
관상이 참 중요 하다는 것을 세삼 실감을 하였다.관상이 나빠도 마음이 착하고 너그러우면 좋은 운명으로 바꿀 수 있은데, 이 사람은 오랜 군대 생활을 하면서 부하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살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버릇 때문에 부인과 이혼 하고 자식들도 그 곁을 떠나 버렸다.
불쌍하고 가련한 그의 인생살이를 보니 삼십년 전 그 용맹과 기백은 다 어디로 가고 풀죽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다. 동해안 밤바다를 따라 내려왔다. 밝은 달빛은 밤바다를 환희 비추고 있었다. 최전방 하얀 눈 위에 은빛처럼 쏟아 내리던 적막한 달빛처럼, 달빛도 쓸쓸하기만 하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편안하게 고쳐먹으면, 나쁜 관상도 좋게 펴이고 운명도 좋아진다.
필자의 생각은 아래와 같다 참고 하시길 바람니다.
사람들은 사주 팔자데로 관상데로 사는것이 아니라 ~ 무얼 어떻게 생각 하느냐에 따라 관상이 바뀌고 무얼 어떻게 생각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고 말하는데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 하셨드시 말하는 데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관상데로 살아간다]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 眞理(진리)라는 자연계
참조. 구약성경 [창세기 제1장] 말씀
3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6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9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1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4절.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본인이 타고난 四柱八字(사주팔자)를 알고, 주역(
그 실례로 필자가 1959년 고등학교 재학 시절 1학년 담임이셨던 선생님의 四柱를 보면 文, 貴, 藝, 破,인데, 선생님께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시고, 막연하게 지내는 어느날 점쾌를 풀어 준다는 사주쟁이의 말씀이 자네 이 四柱를 가지고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자네 탓이라네~ 즉 하고 싶은데로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助言(조언)을 듣고, 그날 부터 학문에 정진해야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獨學(독학)으로 중,고,대학을 검정고시로 합격하고, 문교부 중앙교원 자격 검정고시에서 중등학교, 고등학교 국어과에 동시에 합격하시어 1957년 4월 1일부로 敎員(교원)으로 발령을 받아 37년간 敎職(교직)에 몸 담아 오시다가 1994년 8월 31일 통영여자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 하셨다. 국어를 전공하신 은사님의 국어 古語 교육시간에 [나랏 말쌈]이 하시면서 참으로 또렸 또렸하게 가르치시던 은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十中八九(십중팔구)는 타고난 四柱八字(사주팔자)를 극복 못하고, 생긴데로 산다.
참조. 신약성경 : [마태오 복음서 제7장] 말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루카 11,9-13)
7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절.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절.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절.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절.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신용산시대 개막을 알리는 현수막을 삼각지 일대 곳곳에 걸고, 삼각지 육군본부가 대전 계룡대로 지난 1989년 7월 6일밤 자정을 기하여 이전할때 서울에서 밤새도록 이동하던 800대의 대한 통운차량이 계룡대 육군본부 정문으로 통과할때에 육군 참모차장 신 말엽 장군께서 계룡대 정문에서 육군본부 전 참모장들과 도열하며, 사열을 받던 추억어린 장면은 그때 필자가 기록녹화를 맡았다.
헌병감 역사상 이날 사상 처음으로 원(1)스타에서 투(2)스타를 달고, 계룡대에서 첫날 始務式(시무식)을 하던 감격의 그날 최석립 헌병감은 대전 국군 묘지도 참배하였다.
그 당시 계룡대 이동 호송을 맡았던 헌병대장 이 기덕소령의 解體式(해체식)녹화를 끝내고, 식사후 석별의 아쉬움을 남기고 혜여졌다. 그 날 현병대장 이 기덕 소령은 필자가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사주를 봐주면서 자네는 별은 못 달지만 영관급(領官級) 장교의 으뜸 계급인 대령으로 진급한다는 예언을 듣고 기분좋게 혜어졌다.
그후 1992년 봄, 어느날 남한산성 행정학교에서 대령을 달고 필자에게 와서 [충성]하며 울렁차게 인사하는 건장한 군인이 다가와 씩씩하게 크게 인사를 하기에 놀랐다. 曰(왈) 양 선생님께서 大領(대령)을 진급한다고 하셨듯이 저는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하도 반가워서 그래요? 어디에서 근무 해요? 하니 1군 사령부에서 헌병대장으로 근무한다며, 감격해 하던 추억도 있다. 신용산시대를 알리고 떠난 그 자리에 전쟁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때 전쟁 기념관 설립때 활약하시던 소장 신 재성 장군님도 추억에 남는다.
원본 보기
http://blog.daum.net/bangyang/19677
그때 그시절 이야기 아래 영문자를 크릭 하세요
그 위용을 보면서 다시는 처참했던
6.25같은 전쟁이 다시는 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아 ! 아 ! 잊으랴 ~ 어찌 우리 이날을 ~
전쟁 기념관을 관람하세요!
↓ 클릭 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nkkdfDo3DiE
https://www.youtube.com/watch?v=TkIykkHI6uw
https://www.youtube.com/watch?v=3N1jk9oiLU8
우리 군의 심장, 계룡대를 견학할 수 있다. - 국방홍보원 -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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