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무작정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푸르고 깊은 동해의 투명한 바다만 떠올랐다. 시원한 바다를 보면서 모든 걸 털어 내고 싶었다. 도심 구간을 벗어나 쭉 뻗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에 화풀이라도 하듯 차를 함부로 모는 나를 발견했다.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어쩌다 아는 노래가 나온다. 악다구니를 써가며 따라 불렀다. 하지만 돌덩이를 삼킨 듯 답답한 가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려운 숙제를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짧지 않은 결혼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시골에서 열리는 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에 여자 동창생과 함께 다녀온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 동창생은 아내와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 알려진 친구였다. 여자의 질투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일까. 하필 오늘 아침에 빨래하기 위해 내놓은 체육복 주머니에서 그게 나올 게 뭐람. 체육대회 날 저녁 식사를 하고 결제한 카드 영수증이 발견된 것이다. 아내의 태도는 단호했다. 영수증을 코밑까지 디밀면서 매몰차게 쏘아붙인다. ‘영수증에 찍힌 식당은 아베크족만 가는 곳이잖아. 그날 늦게 온 이유가 다 있었네. 그 동창 만나지 말라고 했었잖아.’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봄날 산불 번지듯이 점점 거칠어지고 커졌다. 급기야 상대 집안에 대한 험담까지 이어졌고, 설거지하던 아내가 들고 있던 바가지를 내동댕이쳤다. 난생처음 보는 아내의 무섭게 부릅뜬 눈빛에는 광기 같은 게 들어 있었다. 그 눈빛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아내의 뺨을 내려쳤다. 아차 하는 순간 사태는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드라마 세트장으로 사용했다는 그 성당은 바닷가 가장자리 바위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바닷가에 세워진 사찰은 본 적이 있었지만, 성당이 한적한 어촌에 서 있는 모습은 처음이다. 고딕 양식의 성당은 마치 유럽의 중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웅장한 성곽 같았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 온 파도가 성당 외벽에 부딪힌다. 커다란 포말은 수채화 밑그림 같은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바다에 떨어진다. 파도 소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다. 성당 맞은편 산기슭에는 등대가 홀로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즐기고 있다. 성당과 등대가 멀뚱멀뚱 쳐다보며 사랑놀이라도 하는 걸까? 둘 사이에 서 있는 나에게 갑자기 커진 파도 소리가 시기라도 하는 듯 고함을 지르는 것 같다.
등대로 가는 바닷길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길이 끝나고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우연히 큰 바위 뒤를 봤다. 헛것을 본 것일까? 물속에서 검은 물체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조금 더 가까이 서 보니까 사람이었다. 한 손에 낫을 든 사람이 동화 속 용왕님처럼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해녀였다. 검은 슈트에 수경을 벗더니 손가락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턴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내려와 있고 짧은 퍼머머리와 굽은 허리가 나이를 가늠케 한다. 몸을 물 밖으로 반쯤 뺀 해녀 할머니는 낫을 쥔 한 손을 힘겹게 휘저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커다란 망태기를 물 가장자리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상어 지느러미처럼 물살을 가르며 따라왔다. 자세히 보니 커다란 해초 더미였다. 낫을 든 한 손으로 땀을 훔치던 해녀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니, 그게 뭐예요?” 생각지도 않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뭐긴 뭐야 미역이지.” 해녀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전투적으로 대꾸한다.
“가만히 서서 있지 말고 이것 좀 당겨줘? 시간 되면 저 수레까지 실어 주면 더 좋고.”
미역이 가득 담긴 그것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물속에서는 쉽게 당겨졌겠지만 그걸 물 밖으로 꺼내자 엄청난 무게 때문에 혼자 들 수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족히 100킬로쯤 되는 물이 줄줄 흐르는 그것을 세 개씩이나 힘겹게 옮겼다. 잠시 힘 좀 쓴 것뿐인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더니 어디서 났는지 검은 비닐봉지에 미역 한 다발을 담아 건네준다. 힐긋힐긋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마치 바다에 온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젊은 사람이 얼굴이 그게 뭐 꼬?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인생 쉽게 가는 게 최고야”. 쉽게 가는 게 최고라는 말이 머리를 꽝 때린다.
커다란 보름달이 고속도로를 따라온다. 무거운 마음에 느릿느릿 달 구경하며 달려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뜻밖에 빠르다. ‘인생 쉽게 가는 게 최고야’라는 할머니의 말만 자꾸 떠오른다.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중앙 탁자 위에 여러 개의 촛불 조명을 켜 놓고 아내는 불콰한 얼굴로 파전 안주에 막걸릿잔을 비우고 있다. 그래, 할머니 말씀대로 쉽게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