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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성령강림절 후 열아홉 번째 주일)
여호수아 11:1~9
하나님의 음성 듣기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보십시오. 그러면 싸우겠습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파도를 잔잔케 해보십시오. 그러면 듣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마음에 붙일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로 만든 벽이 아니라 죄의 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아니라 영혼의 폭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시고…기다리시고…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떨기나무를, 삶이 아니라 벽돌을, 영혼이 아니라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잃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청각을 잃었느냐?”
-출처: 맥스 루카도, 「주와 같이 길 가는 것」(복있는 사람, 200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1월호), 185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점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계십니까?
여호수아 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동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습니다.
모세가 죽자 그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이 위치했던 가나안 중부지역을 점령했고, 그 후에는 가나안 남부 연합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남부 연합군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이 하솔 왕 야빈에게까지 들렸습니다. 하솔 왕 야빈은 가나안 북부 지역에 있던 왕들과 힘을 합쳐 북부 연합군을 구성했습니다.
4절에 보면, 가나안 북부 연합군의 수효가 얼마나 많던지, 마치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말과 병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북부 연합군이 보유하고 있던 말과 병거들은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유하지 못했던 당시의 최신식 무기였습니다.
병력의 숫자로 보나, 무기로 보나,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가나안 북부 연합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적과 말과 병거를 보면서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야, 너는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6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서를 읽다 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은 젊은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1:9)”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고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나라를 이끌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남부 연합군과 전투하기 직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나안 남부 연합군은 예루살렘 왕을 비롯한 5개 나라 군대들이 힘을 합친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 10:8).”
이 말씀에 용기를 얻었던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밤새 올라가 가나안 남부 연합군을 공격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도망가는 가나안 군사들을 향해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전투에서 여호수아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던 여호수아는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대가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7~8절).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어느 특정한 날에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우리의 삶을 통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단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중요한 순간마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용기를 얻은 여호수아는 전쟁에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혹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향해 신비주의자라고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신비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러 목자의 양들이 뒤섞여 풀을 뜯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양들은 각자의 목자를 따라갑니다.
양들이 자기 목자를 따라가는 이유는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지 않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의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어려워 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워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해 주시던 ‘언약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어린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소리가 나자,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세 번째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에도 이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제 서야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신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당부하기를, “만일 다시 너를 부르는 음성이 들리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 사무엘은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까요? 사무엘상 3장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사무엘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의 손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지내며 엘리 제사장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사무엘이 하나님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누구보다 하나님에 관해서 잘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무엘이라도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에서 자라 신앙생활이 몸에 베여있다 하더라도,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또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사무엘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자녀들과 청년들과 아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심으로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요셉, 다윗과 엘리야 같은 위인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처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카일 아이들먼은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가 다윗과 엘리야와 모세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며 질문을 쏟아 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해 봐요. 성령이 안에 거하는 느낌은 어땠어요? 정말로 당신이 약할 때 힘을 주시던가요?”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느낌은 어땠나요? 성령이 슬플 때는 기쁨을 주고 죄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일 때는 능력을 주셨으니 정말 좋았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기도하라! 사랑하라! 순종하라!”
여호수아처럼,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일까요? 또 사무엘을 부르셔서 그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것 또한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요?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지혜를 얻어서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능력 있게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가끔 집에서 자녀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얘야! 아빠가 지금 목이 몹시 마른 데, 아빠에게 물 좀 떠다 줄 수 있겠니?” 그런데 아이들이 컴퓨터나 스마트 폰에 푹 빠져있으면 아빠의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때로는 딸들이 게임에 너무 깊이 빠져서, 아빠의 말을 듣고도 못들은 채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깊이 빠져있거나,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할 때, 우리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과연 바울이 로마서 8장 5~6절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앞에 사망과 생명의 길이 갈리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보다 육신의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육신을 따르는 일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의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북부 연합군을 보고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킬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수아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모든 군사를 이끌고 북부 연합군을 갑자기 습격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대적들의 말 뒷발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살랐습니다(9절).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를 잘 나타낸 구절이 있습니다. 15절입니다. 우리 다 함께 15절을 찾아서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스승이었던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하지 아니한 것이 없을 정도로 여호수아는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인상 깊게 느낀 점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가나안 사람들이 자랑하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른 일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지 못했던 말과 병거는 어쩌면 그들이 전리품으로 얻고 싶어 했던 것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다윗은 시편 20편 7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오늘 여러분이 의지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외모나 재능입니까? 만일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시편 20:8).
물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우리교회 청소년들을 데리고 연합으로 열린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었습니다. 참석했던 아이 중에 제 딸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이제 저의 마음은 평안해요.” 그렇게 말하는 딸 아이의 얼굴에는 기쁨과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딸아이는 집에 돌아와서도 자신이 이번 수련회에서 받았던 은혜와 감격들을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딸이 일상으로 돌아온 첫날이었습니다. 저는 딸과 밀린 방학 숙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부모의 잔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딸아이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딸이 쳐다보며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빠, 나 어제 평안하다고 했던 것 취소!”
혹시 딸이 이번 수련회에서 더 큰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분명 제 딸아이는 여름 수련회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 한다면, 우리는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내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 행하시도록 삶의 자리를 주님께 양도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한번 은혜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긴장의 끈을 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 순간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께 맞추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드시고, 여러분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