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가죽가방

[박관식]

아버님은 검정 가죽가방을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셨다. 대학교 정년 퇴임할 때까지 새것을 마다하고 일부 가죽이 터지고 끝부분이 다 헌 가방을 고집했다. 나중에서야 그 가방이 조부가 유일하게 선물한 것임을 알았다. 

우리나라가 일본 강점기에서 해방되자마자 미소는 즉시 한반도를 북위 38도 따라서 동서로 칼로 그은 듯 직선으로 남북을 갈라놓았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사람들은 고향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조부와 부친도 생이별하게 되었다. 

다음 해 3월에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하자 많은 북한 주민이 월남을 시작했다. 급기야 5월에 남북한 이동이 금지가 되고, 8월에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었다. 당시 월남루트는 총 18개였다. 두 해 뒤인 1948년에 남북한 정부가 각각 8월과 9월에 수립되자 국경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부는 6.25사변 발발 전 겨울에 함흥 집을 나섰다. 일제 강점기에 함흥 근교의 집성촌에서 지식인으로 기와집을 지어서 사셨다. 아들의 미래를 보고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에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들이 졸업 후에 청주시 소재 학교에 근무 발령을 받았다. 그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들이 결혼한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첫 며느리의 얼굴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남측으로 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대가족이 사는 함흥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38선을 두 번이나 통과는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자간의 정은 강했던 모양이다. 아니 시아버지의 도리가 먼저였다. 전에 아제르바이잔 바쿠 국제공항에서 많은 부자들이 서로 이별하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이었다. 여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외국으로 떠나보내는 아버지가 아들을 꼭 껴안은 이별 장면을 공항 로비의 곳곳에서 보았다. 부친이 함흥 역에서 조부와 이별할 때의 모습 같아서 울컥했다. 우리 조부와 부친 사이의 끈끈한 정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 부친이 나의 성장 과정에서 나에게 보여주었던 사려 깊은 부정이었다고 믿는다.

살을 에는 추위에 누비 솜옷을 입은 조부는 보따리 한 개를 들고 월남루트를 탔다. 당시에도 보따리 무역상이 많았기에 그들에게 손을 댄 모양이다. 함흥에서 원산까지 기차로 와서 경원선으로 바꿔 타고 마지막 정거장인 복계역에서 하차했다. 밤이 되어서야 안내인을 따라서 산을 넘었다. 북쪽의 소련군 초소의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가 지나쳐 갔다. 38선을 통과하자 이어 남쪽의 미군 초소가 있다. 역시 교대를 할 시간을 기다려 초소 인근을 지나쳤다. 안내인은 익숙하였다.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따랐다. 남측에 위치한 포천으로 내려왔다. 그제야 좀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주까지 내려왔다. 지난 4박 5일 동안 한 잠도 자지를 못했다. 

조부는 누비옷 속에 솜 대신 고액권 지폐를 솜처럼 비비고 비벼서 감췄다. 초소에 걸리거나 혹시 모를 안내인에게 빼앗기질 않기 위한 방책이었다. 조부는 아들 집에 가자마자 곧 그 돈으로 시내 본정통에 가서 금쌍가락지, 검정 가죽가방 그리고 한약 한 재를 지어서 신혼의 아들 내외에게 주었다. 조부는 신혼부부에게 별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단지 잔잔한 미소 속에 역시 선생인 며느리가 흡족함이 녹아난듯하였다. 며칠 후에 조부는 홀연히 38선을 넘어 함흥집으로 되돌아가셨다. 38선 통과를 도와주는 안내인과 미리 약속이 된 듯하다. 어찌 되었건 그때를 마지막으로 조부와 부친과의 대면 및 비대면은 더 이상 없었다.

부친이 정년 은퇴 후에도 조부의 선물인 가죽 가방은 다락방에서 뒹굴었다. 부친이 사셨던 집은 일본 강점기에 지어진 전통 한옥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집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넓은 조선기와 파손 등으로 대대적인 집 수리를 해야 했다. 그 수리 과정에서 검정 가방이 없어졌다. 내가 항상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나에게도 검정 가죽가방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종합상사에서 이직할 때 직원들이 선물한 것이다. 또 하나는 휴스턴에서 내가 직접 구입한 가방이다. 주도가 휴스턴인 텍사스주는 매년 로데오 경기가 도시를 순회하면서 열린다. 그래서 로데오로 가죽제품과 청바지가 유명해졌다. 가죽 모자, 가죽 재킷, 가죽 장화, 가죽 안장 등 가죽 제품이 다 명품이다. 구입한 검정 가죽가방은 내가 공기업을 마지막으로 은퇴 후에도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직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야기가 많이 담긴 가방이자 보따리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가죽가방도 무겁게 느껴진다. 내용물도 가급적 적게 넣으려고 한다. 조부의 가죽가방은 이미 잃었지만 나의 가죽가방은 두 개 모두 건재하다. 내 아들이나 손자가 그 가죽가방을 잘 간직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역시 사라질 것이다. 추억은 추억을 담은 사람의 것이지 대물림은 아니다. 더구나 자금은 페이퍼리스 세상이 아닌가. 가죽 가방이 더 이상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추억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한 생각에 빠진다. 

#심운 2022.11.27.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