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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57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축일/연중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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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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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eshKDdCfWM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34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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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모든 것을 다 잡는 것입니다!>
(유튜브 오디오 묵상)
https://youtu.be/hf_IcnWK7y4
떠도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아야 하고,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잡을 때는 목덜미를 잡아야 합니다.”
갑자기 의문거리가 한 가지 생기더군요. ‘그럼 개는 어딜 잡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저희집 ‘바둑이’꼬리를 잡았더니 엄청 두려워하더군요. 덩치 큰 능력을 ‘누리’ 꼬리를 잡았더니, 으르렁 대면서 벼락같이 화를 내더군요. ^^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귀나 목덜미나 어깨? 괜히 잡았다가 폭행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마음을 잡으면 모든 것을 다 잡는 것입니다. 마음을 잡으면 평생을 잡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저희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 가족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는 사람 마음을 잡는데, 특히 청소년들의 마음을 잡는데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의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살레시오 회원들과 교육자들을 향해 틈만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 그의 교육이 성공했던 비결은 바로 이것, 청소년들 마음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돈보스코와 함께 오라토리오 안에서 동고동락했던 청소년들은 이런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했습니다.
“돈보스코는 도둑 중에서 큰 도둑이세요. 제 마음을 송두리째 다 훔쳐가셨다니까요.”
돈보스코의 비결은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사랑,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일방통행식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쌍방통행식 사랑, 주고 받은 사랑, 움직이는 사랑, 사심없는 사랑, 공평한 사랑, 큰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이웃 사랑, 자녀 사랑과 관련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녀들은 내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들과 사랑을 주고 받고 있습니까? 우리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그들도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그게 참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까지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티비 리모컨을 과감히 내려놓고 서점에 자주 들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교육, 인간의 심리, 사랑의 본질을 주제로 한 책들을 읽고, 또 연구를 해야겠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돈보스코의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인간 존재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존중, 배려였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길거리를 방황하는 한 아이를 만났을 때나, 토리노 대교구 대주교님을 만났을 때나, 대하는 태도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글자도 못깨우친 열 살 짜리 코흘리개 꼬마가 찾아와도, 국왕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존경심을 지녔습니다.
자신은 작고 불편한 의자에 앉으면서, 남루하고 냄새나는 복장을 한 아이에게, 안락한 상석 의자를 권했습니다. 별로 의미도 없고,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듯 최대한 주의를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돈보스코께서 불세출의 성인(聖人)이 된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인간 존재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 그것이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별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돈보스코가 아이들로부터 사랑받은 비결이었고, 동시에 돈보스코가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돈보스코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한 인간 존재를 향한 끝도없는 인내와 동반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우리 역시 인간이라면 그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며, 그에 합당한 배려와 예의를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상처입고 방황하는 청소년들 안에 살아숨쉬고 현존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여러 형태의 중독과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들을 당신 생명에로 초대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청소년들을 일으켜세우시고, 끝까지 동반해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신앙 여정 안에, 언제나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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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만으로 충분한>
바오로 사도 서간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코린토 서간입니다. 서간을 읽다보면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향한, 그리고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한 절절한 애정, 무한한 인내, 아버지로서의 사목적 사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길이 잘못된 길이지 아닌지 구분도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고, 호되게 야단도 치는가 하면 너무 화가 나서 입에 담지 못할 악담도 합니다. 오로지 타락의 끝으로 향하는 아들을 위해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목서한인 코린토서가 바로 그랬습니다. 코린토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기원전 1000년전 쯤에 시작된 코린토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사다난한 역사와 함께 폐허와 재건이 반복되는 등 급격한 부침을 거듭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 요충지였던 코린토였기에 다인종, 다종교가 혼합된 개방적 도시로서 도덕적 윤리적 타락도 심각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음란과 환락이 만연하던 거대 도시가 코린토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가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회개와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던 흔적이 코린토 서간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때로 질책과 경고를 서슴지 않고 때로 다정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아끼지 않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과정에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나 하면 밥 먹듯이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고통과 십자가 앞에 면역이 되어 그 어떤 환난 앞에서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련이 다가와도 오로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체험했던 소중한 경험을 코린토 교회 신자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상태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일은 바오로 사도에게 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내면은 이미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안에 이 세상의 고통, 세상살이로 인한 걱정꺼리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환난의 시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하고 절실했던 하느님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이 은혜롭고 감미로운 주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우리 마음을 산란케 하지 않는 그런 상태, 세상이 주는 고통이나 시련이 크다 할지라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눈물로 하소연한 것처럼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에 주님만으로 충분한, 주님의 현존만으로 행복한 그런 신앙생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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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XhwT9E_P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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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교사는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권위 있는 교사”로서 율법을 가르치고 계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으셨다는 근거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그 영을 쫓아주시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은 육-혼(머리)-영(마음)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나쁜 영을 쫓아낼 수 있어야 참다운 율법 교사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쁜 영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마음에서 나오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돈에 대한 욕심, 육욕을 채우려는 마음, 교만함을 쫓아주는 교사가 참된 율법 교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러한 욕심들을 더 크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권위 없는 율법 교사가 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한 범죄집단이 아이를 납치해 돈을 받아내려 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이를 키우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이 5명의 범죄자 집단은 각자가 좋은 아버지가 되려 합니다. 한 사람은 엄격하고, 한 사람은 무섭고, 한 사람은 이상하고, 한 사람은 자상하고, 한 사람은 이해심이 깊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모습은 결국 우리가 보고 자란 아버지에게 다 있는 성격입니다.
아이는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한 여학생을 사랑하고 싶은.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잔혹한 킬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삶을 살려고 할 때마다 지하에 가둡니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괴물이 있고 그 괴물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합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물은 환상이지만 무척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 괴물은 실상 자신을 키우는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아버지들은 아이가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되도록 교육합니다. 그런데 무자비한 아버지 석태가 그 괴물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 괴물과 하나가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무서운 아버지들의 범죄집단과 하나가 되어 괴물이 되어버리면 그 괴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석태의 경험이었습니다. 괴물이 되면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리고 그 경험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이는 자신의 친부모까지도 죽이려 하는 그 엄청난 괴물을 죽이고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기로 합니다. 아버지들을 모조리 죽입니다. 괴물과 싸워 괴물을 죽인 것입니다. 아이는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준 한 학생을 멀리서 사랑할 수 있는 순수한 소년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교사들입니다. 특별히 자녀에게 그렇습니다. 자신이 세속-육신-마귀의 나쁜 영에 사로잡혀서 더는 그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싸우게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도 그 괴물에 사로잡혀 비록 그것을 괴물로 보는 고통에서는 벗어나겠지만, 그 괴물의 하수인이 되어 또 다른 괴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악령에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참다운 교사가 되어 아이 심장에서 그 괴물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이런 교사가 되려면 먼저 자기 심장이 성령으로 불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불이 제자의 심장에서 괴물을 태웁니다. 이것이 마귀를 쫓아내신 그리스도의 교육법입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학생 하나가 졸업을 앞두고 학업에서의 해방감을 누리기 위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조그마한 산장 숙소에서 어떤 노신사를 만났습니다. 여러 가지 대화가 오고 가던 중에 노신사가 그에게 묻습니다.
“학생은 무엇을 공부하고 있소?”
“방금 수학을 다 마스터했습니다. 끝을 내버렸습니다.”
노인이 한참을 웃었습니다. 처음엔 기분이 나쁘다가 뭔가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노신사가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나는 방금 수학 공부하기를 시작했소.”
학생은 조심스럽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화이트 헤드라고 하오.”
화이트 헤드는 영국 대학교수로 하버드 대학에서도 강의한 적이 있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습니다.
“보통 교사는 지껄인다. 좋은 교사는 잘 가르친다. 훌륭한 교사는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화이트 헤드가 한 말입니다. 화이트 헤드는 이 짧은 대화로 수학 전공자의 심장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그의 교만한 마음을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사의 모습입니다.
저는 화이트 헤드의 말을 이렇게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보통 교사’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사는 대부분 남이 써 놓은 것을 읽는 수준에 그칩니다. 학생들은 무슨 말인지 통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수법은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좋은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이 아닌 자신의 수준으로 가르칩니다. 학생들은 여전히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수준에 머물며 학생들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바랍니다.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가르칩니다. 그러니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핍니다. 그 불은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욕망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립니다. 그 불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악령을 몰아냅니다. 학생들의 마음 안에는 세속-육신-마귀의 악령이 있습니다. 그 어떤 교사든 그 악령을 몰아낼 수 없다면 그 교사는 권위 있는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가슴에 지펴진 불로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교사가 권위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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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신학자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시다.’라는 초세기 신자들의 오래된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성경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하여 전해졌고,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안다고 말합니다. 이 더러운 영의 소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더러운 영은 주님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성사 때 ‘마귀를 끊어 버리는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예식에서 우리의 고백은 앞으로 악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신앙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이적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압니다. 더 이상 세속의 많은 것에 의지하여 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그 사랑을 실천하여 참된 신앙인, 자유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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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3-24)
1)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마귀가 회당에 들어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도 없고,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이라고 해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또 성직자나 수도자라고 해서 못 건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건드린다는 말은, 사로잡아서 마귀 들린 상태로 만드는 것과, 어떤 유혹을 해서 죄 짓게 만드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장소에 있다고 해서 방심해도 안 되고, 자신이 거룩한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해서 자만해도 안 됩니다. 방심하고 자만하는 것은 마귀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2)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에게 접근했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속이는 자’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귀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진실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꾸민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사용한 호칭을 빌린 것인데,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자기들을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니 세상 모든 존재와 상관이 있는 분, 즉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말이고, 그래서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이 구원 사업에는 마귀의 세력을 쫓아내고 멸망시키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는 말은, 겉으로는 진실처럼 보이지만, 이 말도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말해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5-26)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1) “조용히 하여라.”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씀’이신(진리 자체이신) 분인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말할 자유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할 자유는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아무 말이나 마음대로 막 하는 자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진실을 말할 자유’이지 ‘거짓을 말할 자유’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십계명을 위반하는 대죄입니다.)
2)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귀에게는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일에 복종하지 않으면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마귀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마지막 발악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1,27)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 가르침이 ‘권위 있는’,즉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느끼고 놀랐었습니다.(마르 1,22) 그랬다가 마귀가 쫓겨나는 일을 통해서, 그 ‘하느님의 힘’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을 ‘사람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아직은 ‘하느님이신 분’으로는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었다면 놀라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다.’라는 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권위 있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예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쫓아내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마귀를 쫓아낼 때뿐만 아니라, 넓은 뜻으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울 때에도 항상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 즉 십계명 제2계명을 위반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마귀로부터 역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19,13-16)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성수 같은 성물을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런 물건 자체에 무슨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마치 부적을 사용하듯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 신앙’과 ‘헛된 미신’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성물’은 신앙을 도와주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보조 수단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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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지만 어릴 때 ‘국민 교육 헌장’을 외워야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의미를 잘 모르고 외웠지만 ‘조상의 빛난 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우리가 조상의 빛난 얼을 물려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후손에게 조상의 빛난 얼을 되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미국 원주민 중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100년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 말, 생각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경을 보존하고, 서로 연대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 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과 역사이기도 하지만 교회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치와 전통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비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추문은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제의 성소가 감소하고 있으며, 문을 닫아야 하는 교회가 생기고 있습니다. 카페로 변한 교회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도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목의 패러다임도 변화를 요구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박해의 시기가 있었고, 이단으로 분열되기도 했고, 종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후손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서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복음으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념하는 것들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속담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라고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이 기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내 주변에 나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내 아이들의 책상에 무엇이 있는지 보면 좋겠습니다. 물질과 자본의 커다란 힘이 어느덧 내가 기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성공이라는 기차에 올라타지 못하면 걱정하고, 야단치지만 희생이라는 기차에 타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요? 친교와 나눔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기도와 자선에는 시간내가기 어려운가요? 정치현안은 평론가 수준이면서, 경제현안은 꼼꼼히 살펴보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신문을 배우고 읽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지요? 잠시 스치듯 머무는 이 세상의 것들에는 지나친 열정과 관심을 보이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의 식탁에는 머물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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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되어요>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우리가 되어요>
늘 그렇게
더러운 영이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나
너는 너
새롭고 권위 있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나는 너
너는 나
그리하여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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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더러운 영을 이기는 사랑>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주일에는 본당에 가셔서 주일미사를 봉헌하시면서 기쁨을 누리셨나요? 한 동안 미사를 못 드리시다가 미사를 드리시니까 마음이 울컥 하셨죠? 코로나19 때문에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서 미사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새롭게 맞이할 한 주간도 즐겁게 잘 지내세요! ^^*
형제 자매님,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과 꼭 같은 예언자를 그들에게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봅니다. 여기엔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더러운 영은 회당 안에 있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예배하는 백성들 사이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혹은 알았다 하더라도 힘이 없어서 더러운 영이 들린 그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신 분인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진 않았습니다.
셋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은 그분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러운 영은 자기와 같은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사람들 사이에 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뜻(요한 17,21)에도 어긋나고, 믿는 이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성령과도 반대되는 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런 더러운 영을 그냥 두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그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더러운 영을 예수님께서 쉽게 쫓아내신 것은 예수님은 온전한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일치시키는 사랑이 분열을 이긴 것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오늘 날에도 이 더러운 영은 우리 사이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복음을 통해서 보았듯이, 더러운 영은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은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은 항상 편 가르기를 하기 때문에 공동체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공동체를 자기편과 상대편으로 가르는 사람은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공동체를 살펴봐도, 나라 전체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잣대를 가지고 나와 다른 사람을 편 가르기를 합니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성씨 등등 다양한 잣대들이 편 가르기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가장 심합니다. 온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정치인들이 서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자주 국론을 분열시킵니다. 그런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자신의 양심도 버리고 더러운 영에게 스스로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만일 우리 공동체에도 크고 작은 분열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기 저기 봉사활동을 많이 다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한 행동입니다.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행복을 알지도 못하기에 당연히 그 행복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더러운 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상대방에게 행복을 전해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치를 이루고 그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잘 사랑할 것을 새롭게 결심하고 우리의 결심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 미사 중에 기도하도록 합시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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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내가 하느님 앞에 있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두려움(경외심), 기쁨, 슬픔, 억울함!
경외심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뵙게 된다면 매우 강렬하게 느낄 감정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될 때 느낄 감정들입니다.
(경외심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우리가 믿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에게 그러한 감정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느님의 현존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44).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서에 기원전 1200년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백성이 느끼는 두려움은 이 땅 위에 몸소 함께 하시는 하느님, 목말라하는 이들의 갈증을 채워주시고 배고파하는 이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채워주시는 그분의 현존을 피부 속 깊이 느끼는 경외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르코 복음에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 보이는 태도는 다른 모습입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거룩한 분과 함께 할 수 없는 더러움이 가득 찬 자신을 보며 떨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과 더러운 영이 가진 두려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에 완전하게 참여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용서를 받아 구원되었고, 구원될 것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은 거룩함과 공존할 수 없는, 거룩함에 참여하고 싶은 않은 거부감, 거룩한 분임을 알지만 나와 상관없는 분으로 치부함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하면 잠시 하느님을 두려워하다가, 다시 그분께 다가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느끼는 두려움은 나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멀어지면 어쩌나! 아버지께서 나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계실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싸주시며 기쁘게 웃으실 아버지의 눈과 마주하지 못하고, 내 자신이 회피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용서를 청하는 자세입니다.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으셨기 때문에, 내가 좀 부족하더라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구원해 주실 것임을 믿고,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매일 그분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자비를 청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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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상규 베르나르도 신부님]
<카리타스 실천의 중심>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中에서 -
우연히 접한 짧은 시는 ‘세상과 교회의 중심은 어디이며, 교회 사랑실천의 중심은 어디인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한 이유는 교회 안에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홍보와 이해를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봉헌된 특별헌금도 한국 카리타스를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 흩어져 있는 가난한 나라를 지원하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 교구 내 사회복지시설에서 활동 중인 직원들이 마음을 모아 최근에 공동 미션을 만들었는데, 미션 문구는 ‘카리타스, 사람과 사랑이 함께합니다.’로 선정되었습니다. 교회의 사랑실천은 카리타스라고 불리며, 카리타스는 사랑의 왕직을 수행한다는 뜻에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실천적입니다.
또 단순히 사회복지실천으로 축소해서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더 가난하고 더 소외된 곳을 지향하는 실천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는 지역, 교구, 국가의 경계를 허무는 사랑실천이 카리타스입니다.
이렇듯 해외 원조 주일은 가장 카리타스적인 의미를 담은 주님의 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나 대구대교구가 아니라, 더 가난한 나라와 더 가난한 교구를 우리 지향의 중심에 두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 중심으로 모시는 날, 사람과 하느님 사랑이 함께 만나는 날이 되길 희망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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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수원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가?>
오늘 화답송의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영적인 감각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가진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와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의 이 치유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고, 인간을 구원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놀라면서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복음 1장 27ㄴ절)하며 서로 물어봅니다.
회당에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그 안에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라워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이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사야 예언서 29장 13절)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되돌리며 창조물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고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나라를 실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따라 한 생을 살았던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는 “저는 당신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데레사 성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놀라워하지만 않고, 당신의 협력자로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결과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했습니다. 하느님 홀로 완전한 세상과 교회를 만들지 않으시고 우리의 재능을 계발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살아가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가진 가르침과 말씀에 순명하고 따르려는 참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참 좋은 몫을 선택한 우리들과 코로나19로 힘들어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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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의 인생은 계속해서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됩니다. 완전히 똑같은 삶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삶? 아니면 나쁜 삶?
악순환 그래프는 ‘나는 나빠진다.’, ‘내 인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를 놓아버린다.’ 등의 반복입니다. 그에 반해서, 선순환 그래프도 있습니다. ‘나는 좋아진다.’, ‘내 인생을 귀하게 여긴다.’, ‘나를 힘껏 달리게 한다.’ 등의 반복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선순환 그래프보다 악순환 그래프를 따르는 사람이 실제로 많다고 합니다. 부정적 마음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인데, 외부에서 부정의 원인을 찾아서 결국 스스로 행복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순환 그래프와 악순환 그래프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악에 기울어지는 사람은 악순환 그래프를 반복합니다.
죄를 지을 때 단 한 번의 죄로 끝날까요? 아닙니다. 이 죄가 또 다른 죄를 낳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죄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악을 과감하게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순환 그래프에서 벗어나 선순환 그래프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십니다. 이 권위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도 꼼짝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 영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하지 않는 말을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마가 거짓만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악마는 죄를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유혹만을 할까요? 아닙니다. 악마의 이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고백하며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고백으로 단순히 지금 순간을 모면하기 위함이고, 사람들의 혼란을 가져올 뿐이지요.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악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만 악을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할 때, 선순환 그래프의 삶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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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살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 중고등학교는 대부분 교복을 입습니다. 이 교복의 역사는 1898년 배재학당에서 최초 시작되었으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복 자율화가 이루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얼마 못 가서 다시 교복을 입게 되었지만, 교복 자율화로 단 한 번도 교복을 입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중학교 1학년 입학하면서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장 재량으로 교복을 입거나 자유복을 입도록 했지요. 그래서 단 한 번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교복 자율화로 옷에 대한 부담이 컸었습니다. 남자 학교였지만, 똑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니면 친구들이 냄새난다고 놀렸거든요. 그래서 몇 벌의 옷을 돌려 입어야 하는데, 그때는 다들 어려워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스티브 잡스의 매번 똑같은 의상을 보면서 학생 때 제 모습에 후회가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만의 교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했다면 옷에 대한 부담감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남을 따라 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의 삶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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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
-경청, 섬김, 치유-
저는 책중에서는 사람을 다룬 평전評傳을 즐겨 읽고 신문에서는 주로 사람에 관계된 인터뷰 기사를 사람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또 신간서적에 관한 정보도 꼭 챙겨 봅니다. 감동적인 인터뷰 기사와 한 신간서적에 대한 설명이 이채로워 소개합니다. 류지현 LG 야구 감독의 인터뷰 기사 한 대목입니다.
“저는 감정 컨트롤의 롤모델로 김경문 야구 감독을 좋아합니다. 감독님이 경기 화면에 나오는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선수가 실수하거나 삼진을 먹고 들어올 때마다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좋아보입니다. 그런 상황이 아쉬움이 없을리 없고 속에서 끓어오를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하십니다. 참으로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꼴찌에게 박수를’ 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이처럼 참 권위는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존심을 지켜줍니다. 질책과 분노, 모욕으로 수치심과 모멸감을 주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이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이런 감독은 저절로 후배들이나 선수들에게 사랑과 존경, 신뢰를 받는 권위있고 품위있는 어른이 됩니다.
보고 배울 권위있고 품위있는 롤모델이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롤모델이 사라져가고 있기에 ‘친밀함이 두려운 인간’이 대세가 되는 세상이 되는가 봅니다. ‘디스커넥트 인간형이 온다’ 라는 신간서적에 대한 설명입니다.
“친밀감을 공포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 타인과 충분히 확보된 거리에 그들은 안심한다. 연애를 해도 사생활은 지킨다. 직장에서 효율적으로 일하고 불필요한 관계는 맺지 않는다. 애정을 향한 기대를 낮추니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들, 일본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카다 다카시는 이들을 ‘디스커넥트 인간형이라 부른다.
지금같은 탈애착이 진행되면 수십년도 채되지 않아 디스커넥트 인류가 과반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비약같은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나 친밀함을 두려워하고 결혼을 꺼리고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청년은 늘고 있는 것 같다. 어찌할 것인가!”
하여 보고 듣고 배우는 사랑이, 신뢰가, 존경이, 권위가,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 권위를, 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라보고 배울 권위가 없는 무질서한 사회는 재앙입니다. 실추된 권위나 신뢰의 회복은 참 기대하기 힘듭니다. 참으로 건강한 사회나 공동체는 권위의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바로 ‘–다운’ 사람들입니다. 부모다운, 스승다운, 어른다운, 사제다운, 수도자다운 등 누구나 각자 고유의 권위와 품위는 필수입니다.
하여 흔히 회자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되기전에 우선 사람이 되라’는 즉 권위있고 품위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참 고맙게도 우리 권위의 영원한 롤모델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밖에서 덧붙여지는 권위가 아니라 내면의 하느님 존재로부터 기인하는 참 권위와 품위입니다. 지위가 높고 재물이 많고 외모가 출중하고 옷잘입었다 하여 권위와 품위가 아니라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진짜 권위입니다. 성인들처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본래의 하느님 모상을 회복할수록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이요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의 처방 셋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경청의 사랑입니다.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형제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들음의 기쁨, 들음의 행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잘듣기위한 침묵이요 잘들어야 겸손이요 순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들음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의 귀로, 온몸과 온맘으로 듣는 것입니다. 분도 규칙서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도 들을 것을 참 많이도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자주 말씀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들을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날마다의 바로 오늘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신명기에서 먼 훗날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내다보며 오늘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들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마음의 귀로 겸손히 경청할 때 주님을 닮아 저절로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섬김입니다.
사랑의 섬김입니다. 경청의 섬김이요, 경청의 환대입니다. 바로 베타니아 집의 관상가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평생 하느님과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겼던 예수님이 섬김의 롤모델입니다. 하여 분도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자유롭게 해주는 예수님 사랑의 행위도 섬김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워할 것은 부족한 섬김의 삶입니다. 역시 아무리 섬겨도 섬김의 삶에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섬김의 롤모델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쉽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일 것입니다. 섬김을 영어로 하며 ‘서비스service’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고유의 공통적 본업은 ‘서비스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류감독의 좌우명은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 합니다. ‘귀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말의 힘을 절감하며 귀열어 마음을 얻으려, 늘 마음에 담고 지내는 이청득심以聽得心의 좌우명이라 합니다. 새삼 겸손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의 섬김이야 말로 최고의 섬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2독서 바오로의 권고도 섬김에 답이 있음을 봅니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세상일이 아닌 주님의 일에 힘쓰며 갈림없는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섬김의 영성뿐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주님을 섬기듯 섬김의 사랑으로 일치할 때, 자기 중심이 아닌 주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을 살 때 부부 공히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있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독신이든 부부든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할 때 사랑의 일치요 권위있고 품위있는 삶에 자유로운 삶일 것입니다.
셋째, 치유입니다.
치유의 사랑입니다. 주님 말씀을 경청함으로 살아계신 사랑의 주님, 섬김의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요 권위의 회복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이런 말씀의 경청은 그대로 주님과 일치의 만남에 직결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참 통쾌하게도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경런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니 온전한 치유요 본래의 권위의 회복입니다. 예방이 처방보다 백배 낫습니다. 평소 경청을 통한 주님과 일치의 삶으로 아예 더러운 영이 얼씬 못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문득 어제 풍랑을 꾸짖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합니다. 역시 통쾌한 장면입니다. 그러니 잡생각들이 내 마음을 혼란케 할 때, 예수님처럼 “조용히 하여라. 나에게서 나가라.” 속으로 큰 소리로 명령하고, 마음의 풍랑으로 시끄러울 때, 역시 예수님처럼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외치기 바랍니다. 전인적 온전한 영육의 치유에 본래의 권위와 품위도 회복될 것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나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권위와 품위의 삶일 것이며 답은 셋이니 경청의 사랑, 섬김의 사랑, 치유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모든 어둠의 더러운 영들을 청소淸掃해 주시고 본래의 권위와 품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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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새롭고 권위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 1,24)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마주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깃든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발을 일으키며 대들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잘 아는 더러운 영은,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이 세상에 기생할 수 있는 거점을 잃을까 두려운 듯합니다.
"멸망시키러"
사실 더러운 영, 그 자신이 어떤 가련한 사람을 멸망으로 끌어가고 있는 중이지요. 악은 먹잇감처럼 누군가를 골라 그 안에 자리를 잡고서, 그의 인격을 훼손하는 동시에 세상을 좀먹어 갑니다. 저마다 귀하고 소중한 하느님 모상의 존엄함을 함부로 무너뜨리면서 그렇게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공격하는 더러운 영의 말마디에 댓거리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도구가 된 가련한 이를 구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더러운 영과 입씨름해서 그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동안 시달려온 한 영혼의 회복과 안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이 쫓겨나고 그는 구원됩니다. 이에 회당에 모인 군중이 놀라지요. 사람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어둠의 세력까지 복종하는 "권위"도 놀랍거니와, 그저 상대할 필요 없는 미친 사람으로 치부해 무시해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새롭고" 신선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나 구마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겁니다. 율법 안의 문자적 의미는 가르쳤을지 몰라도 율법의 정신을 실제 삶 안에서 구현해 주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더러운 영의 항변에서처럼,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들과 그다지 "상관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이 군중에게는 더욱 새롭고 권위 있게 다가옵니다.
제1독서는 모세를 이을 새로운 예언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 마지않고 고대하던 새로운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가져다 주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 왔다면, 은총과 진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왔으니(요한 1,17 참조), 이제 종교적 가르침은 문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삶 안으로 들어와 생생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새롭고 권위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심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일"(1코린 7,32.34)
"세상일"(1코린 7,33.34)
사도는 "주님의 일"과 "세상일"을 대비시키기 위해 혼인 여부를 기준 해서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지만 혼인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혼인한 이들의 신앙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지요.
아무래도 배우자나 가족, 재산 등이 생기면 직접적인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당장 코앞에 닥친 그들의 안위와 기쁨을 하느님보다 우선시하게 되겠지요. 어쩌면 그건 생활인으로서 당연한 책임감과 충실성일 겁니다. 다만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며 주님의 일을 하려면, 선택과 집중에 있어 갈등 요소가 없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도 '주님의 일을 위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회당 안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통 받는 그
사람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악에서 그를 구하셨지요. 그의 회복이 하느님의 기쁨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안식일이었어도 아무 사심 없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이 병든 어떤 이에게 보여 주신 너그럽고 관대한 사랑이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유와 구원이 그분께 어떤 이득이나 혜택이 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누가 될지라도 그분은 사심 없이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십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나의 신부를 행복하게 해 줄까"를 늘 염두에 두고 계시는 분이시니까요.
사랑하는 빗님! 세상과 신앙의 경계를 걷는 우리에게 악의 세력은 구체적 삶의 현실이 주님과 상관 없다고 속삭입니다. 마음껏 세상일을 걱정하며 올인해도 된다고, 그게 정상이라고 유혹하며 신앙을 부끄럽고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요. 오늘 더러운 영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곳곳에서 재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살고 있건 삐걱대고 있건 우리 모두는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잘 살면 그분께 기쁨과 영광이 되고, 행여 못 살아도 그분 자비와 연민의 대상이니까요. 나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는 듯 나에게 올인해 사랑을 바치시는 주님께, 그분의 정결한 신부로서 맞갖는 사랑을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우리는 더욱 충만하고 생기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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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4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오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예언자”(요한 1,21), 곧 메시아를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림이 없이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신 뒤에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시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을 첫 행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곧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다음, ‘악마의 추방을 통해 “하늘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혀로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때가 차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늘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으로 행하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사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구마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모습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 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그분과 친교와 유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내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 주님의 빛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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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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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마 기적'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구마 기적을 예수님 공생활, 곧 예수님 전도 활동의 첫 사건으로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사화들 중에서 이 구마 기적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기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묵상했습니다.
믿는 이들의 여정이나 보편적인 인생 여정이나 할 것 없이 그 여정은 끊임없는 두 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개의 영, 곧 깨끗한 영인 성령과 더러운 영인 악령과의 끊임없는 영적 싸움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성령이 승리한 모습을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5,22-23)
반대로 악령에 진 모습을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5,19-21a)
예수님께서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 그래서 성령을 따라가는 사람들, 성령의 열매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악령을 몰아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악령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자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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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gHItifI83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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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참된 권위는
참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여 주신다.
새롭고
권위 있는
우리 삶의
가르침이다.
참된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참된
권위가 있다.
우리를
찾아오신
사랑의 참된
권위이시다.
삶을
바꾸어 놓는
강력한
말씀이시다.
인격의
존엄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신다.
구원하시는
권위 앞에
우리 모두는
무릎을
꿇게 된다.
권위는
받아들임으로
복음이 된다.
참된 권위와
참된 가르침은
인위적이지 않다.
참된 권위는
흩어진
자녀들을
한 곳으로
모아들이는
사랑의
일치이다.
참사랑이시기에
분열과 오류를
배척한다.
십자가를
지시는
참된 권위 안에
우리의
참된 회개도
있다.
기도와
순명의 삶으로
권위에
응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뜨거운
사랑과 용서의
현존(現存)이다.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는
해방과 구원의
참된 권위이다.
진리를
선포하시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오늘을 다시
살게 한다.
그 권위를
믿고 따르는
은총가득한
주일이다.
그 권위에
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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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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