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신(神)이 인간을 창조할 때 남성과 여성을 한 몸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지혜로운 데다가 힘이 너무 세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본 제우스신은 생각 다 못해 다시 남녀를 갈라놓기로 했다. 찢긴 살을 긁어모아 묶어놓은 것이 배꼽이다. 배꼽을 앞에 둔 것은 배꼽을 보며 반성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갈라진 남녀는 자기의 짝을 만나기 위해 무한 노력을 한다 그러다가 남녀가 만나게 되면 서로 포옹하며 입을 맞추고 냄새를 맡는 것은 옛날 한 몸이었던 내 짝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짝으로 알고 살다 보니 자기의 옛날 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다시 갈라선다. 이것이 제우스신이 만들어준 우리의 인간사다.
사람 나이 80이 넘으면 상가(喪家)에 가지 말 것이며,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도 될 나이라고 했다. 그런데 혼인식에 가지 말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혼인식에 참석해 혼인문화의 쿠데타 같은 시대의 변화를 보았다. 혼인(婚姻)은 인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행사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는 반상제(班常制)로 양반(兩班)과 중인(中人), 상민(常民 )의 사회적 구조가 엄연한 시대로 인간의 중대사인 혼인에도 반상제를 적용했다.
양반(兩班) 자녀들의 혼인은 매파(중매쟁이)에 의해 가문이 비슷한 집안끼리 혼인을 했고, 혼례식에 입는 예복이나 혼례식 명칭도 차별화했다. 신랑은 사모관대에 신부는 원삼 족두리를 하고 혼례를 치렀고, 지체 높은 두 양반 가문이 사돈이 되었으니 가문이 더욱 빛난다는 의미로 혼인의 명칭도 華빛날 화, 婚혼인할 혼, 화혼이라고 하였다.
중인(中人 중산층) 들도 매파를 통해 가세가 비슷한 집안끼리 혼례를 치렀고 혼례식 예복도 신랑은 사모관대에 신부는 원삼 족두리를 쓰고 혼례를 치렀다. 사모관대(紗帽冠帶)는 과거에 급제한 벼슬한 사람들이 궁에 입궐할 때나 입는 관복과 모자다.
원삼은 왕비와 세자빈을 비롯한 왕실 여성들이 입는 옷이고 족두리는 왕실과 사대부 자녀들의 혼례 때 머리에 쓰는 장식 모자였다. 평생 벼슬 한번 못하는 백성들의 일생 중 최고날은 혼례식이다. 조정에서는 이날만 신랑신부에게 특별히 허락해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를 쓰고 혼례를 치르도록 한 것이다. 혼례식 명칭은 혼인이 성사되었다는 의미로 盛성할 성, 婚혼인할 혼 성혼이라고 하였다.
상민(常民 빈곤층)들은 생계가 어려우니 격식을 따질 여가도 없었다. 심한 경우 평상시 입고 있던 옷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밥상에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맞절을 하는 것으로 혼례를 치렀다. 이는 두 사람이 부부 가되기로 인연을 맺었으니 結맺을결, 婚혼인할 혼 결혼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25 전쟁을 겪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양문화가 유입되고 우리의 전통인 결혼문화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랑은 사모관대 대신 양복을 입고 신부는 원삼 족두리대신 드레스와 면사포를 쓰고 결혼하는 것이 유행했다. 1910년 조일병합후 일본에 의해 양반들의 특권인 반상제를 타파했고 해방 후 서민들은 사회적 명망 있는 교수나 국회의원, 기관장 등을 주례로 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들과의 교분이 있다는 의미를 부여해 집안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혼인 명칭은 70년대 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봉투에 한자로 祝 華婚(축 화혼) 또는 祝 盛婚(축 성혼)이라고 써 식견(識見)을 과시했고 대부분은 祝 結婚(축 결혼)이라고 썼다. 현대에 결혼식은 신랑은 양복에다 신부는 속살이 드러나는 드레스에 면사포도 생략했다. 결혼식을 주도하는 주례도 없다.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신랑신부가 혼인 서약서를 낭독하고 신부가 축가(祝歌)를 부르는 것으로 결혼식은 마무리된다. 오직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신랑신부 어머니들의 전통 한복뿐이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젊은이들은 봉투에 결혼식 명칭을 무어라고 쓰는지 궁금해 20대 청년에게 알아보니 봉투에 그냥 이름만 써서 낸다고 한다. 하기야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참석해 축하해주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격식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의 결혼식 전통문화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빠르게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