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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용서’의 신학
자크 데리다, “세기와 용서,” in 『신앙과 지식』 (아카넷, 2016)
글_ 최경환
해체주의 철학자로 흔히 알려진 자크 데리다의 철학 속에서 새로운 종교성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대표적으로 존 카푸토(John Caputo)는 데리다가 현존과 동일성의 해체를 주장함으로 오히려 새로운 종교성을 촉발시켰고, 이를 통해 철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되찾게 됐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종교성에 관심을 두는 학자들은 데리다가 후기에 윤리적·종교적 전회를 했다고 말한다. 물론, 데리다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여기고 끝까지 무신론의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그는 종교학자나 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작업을 같이 해왔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사상 속에 은밀하게 스며있는 종교적 함의를 추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수 있다. 최근에 현대 철학자들이 ‘종교적인 것’의 귀환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들은 ‘선물’, ‘은총’, ‘환대’, ‘용서’와 같은 종교성이 충만한 언어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데리다가 있다.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 낸 『신앙과 지식』은 1994년 데리다와 바티모가 공동 주관한 세미나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그 중에서 데리다의 글을 따로 떼어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과 함께 묶어낸 것이다. 그 대담의 제목은 “세기와 용서”이고, 이는 러시아계 유대인 철학자인 얀켈레비치의 『용서』와 『공소시효 없음』이라는 책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에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의 “용서”에 대한 내용을 다룬 논문으로는 본회퍼 전공자인 김현수의 “조건적 용서와 무조건적 용서의 화해를 향하여”가 거의 유일한데, 그는 이 논문에서 얀켈레비치, 데리다, 리쾨르의 용서 개념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면서 서로의 사유를 교차적으로 비교한다. 본 발제문은 데리다의 “세기와 용서”라는 글을 정리하고, 얀켈레비치와 데리다의 ‘용서’ 개념을 정리한 김현수 박사의 글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I.
데리다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용서의 개념이 세속화된 방식으로 회심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극히 윤리적이고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 한 ‘용서’라는 개념이 인류 전체에 대한 범죄, 인간성을 철저히 말살시키는 범죄라는 개념과 맞물리면서 보편적으로 작동될 때, 그것은 인간 속에 깃든 신성에 대한 멸시이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적인 것의 신성성만이 최종적으로 이 개념[용서]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 만일 이러한 신성성이 경전의 종교들과 관련된 아브라함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이웃’ 혹은 ‘동류’에 대한 유대교적인, 아니 무엇보다 기독교적인 해석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만일 결과적으로 인류에 반하는 범죄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있어 가장 신성한 것에 대한 범죄이고, 따라서 이미 인간 안에 있는 신성, ‘인간이 된 신’ 혹은 ‘신에 의해 신이 된 인간’에 대한 범죄라면, ... 용서의 ‘세계화’는 진행 중인 거대한 고백의 장면과, 따라서 잠재적으로 기독교적인 전율-전회-고백, 그러니까 더 이상 기독교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기독교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세기와 용서”, 220-221쪽)
오늘날 용서는 정치적인 수사로 사용되고 있다. 데리다가 예로 들고 있듯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이익을 주고받는 협상 차원에서 오고가는 수사적 발언들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만 그것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아공이나 한국에서 용서는 철저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보편화된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뉘앙스나 의미는 어떤 점에서 기독교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데리다는 ‘용서’가 기독교적인 회심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데리다는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서’는 어떤 의미에서도 순수하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는 언제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이용되기 때문이다. 말로는 뭔가 고귀하고 정신적인 것에 봉사한다고 떠들지 모르지만, 그것의 본심은 언제나 뭔가 대가를 치루거나 기대한다. 그것이 애도의 작업이 되건 기억의 치료가 되든 어떤 것이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용서’가 정상적이지도, 규범적이지도 않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의 시련에 직면하여, 마치 역사적 시간성의 정상적인 경로를 중단하는 것처럼, 예외적이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세기와 용서”,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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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데리다는 용서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키기 위해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의 논의를 비판의 준거로 삼는다. 얀켈레비치는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학자다. 그는 1967년 『용서』를 출판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의 용서를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 ‘순간’(instant)의 개념을 이용한다. 용서는 우리가 사실상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자각 증상이 없이 도달하게 되는 이상적 한계이자 접근 불가능한 지평이다. 따라서 용서는 순간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일 뿐 지속되는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용서라고 불리는 사건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기 위해 지속을 멈춘다. 용서의 순간은 이전의 간격을 종결하고, 새로운 간격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늘 새롭게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사건이다. 따라서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무조건적이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변명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용서를 위한 어떤 이유를 찾아서도 안 된다. 이런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그러므로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이다.
하지만 얀켈레비치는 이후에 자신이 주장한 무조건적 용서를 철회하고 다른 입장으로 선회한다. 1971년에 발표한 논문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가”에서 그는 용서의 죽음을 선언한다. 이 논문에서 얀켈레비치는 독일인이 유대인에게 행한 범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독일인들이 행한 범죄는 “형이상학적 범죄”이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도덕과 무관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행위가 인간으로서 인간의 본질을 부정할 때, 도덕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행위를 용서하는 일은 도덕성과 모순되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용서를 요청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심지어 불합리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결국 그는 속죄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있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얀켈레비치의 논리를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용서는 인간적인 가능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범죄가 너무 심각하여 인간성을 파괴하는 범죄가 될 때,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용서의 문제가 될 수 없다.
2) 이러한 경우에 가해자의 용서해달라는 요청이 없으면, 용서의 길이 열릴 수 없다.
얀켈레비치는 『용서』에서 주장한 무조건적 용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아서, 결국에는 조건적 용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조건적 용서와 무조건적 용서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데리다는 이러한 얀켈레비치의 논의가 용서의 의미에 대한 후퇴라고 보고, 극단적으로 무조건적 용서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한다.
III.
데리다에게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논리와 상식이 들어맞지 않는 역설을 발생시킨다. 일단 우리들에게는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만일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정말 용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기와 용서”, 223쪽)
오늘날 용서의 보편성을 불러온 것은 역설적으로 극악무도한 악의 보편성 때문이다. “인간성을 파괴한 범죄가 용서가 [필요한] 지정학적 지평”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공소시효 폐지’에 대한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영원성의 차원에서 인간에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영원히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즉,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와 죄는 용서와 화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때문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범죄를 용서하는 것은 ‘법 너머의 법’이고 ‘역사 너머의 역사’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용서가 지닌 화해의 역량에 반하는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용서 가능하다”는 것이다(225쪽).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조건적 용서, 즉, 범죄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아내는 약속에 기반 한 용서, 이러한 조건이 만족되고 충족될 때, 용서를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조건적이고 교환적인 용서에 반대한다. 아브라함의 종교 전통에서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범죄자로서의 범죄자에게, 심지어 회개하지 않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조차도 은혜롭고 무한하게 반경제적으로 하사되는 무조건적 용서라는 하나의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226쪽).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그에 비례해서 용서를 해준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런데 이럴 경우, 이때의 죄인은 완전한 죄인이라기보다는 그보다는 좀 더 나은, 이미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적 용서가 지닌 딜레마는 용서가 이미 회심과 고백을 통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한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렇게 묻는다.
‘나는 네가 용서를 구함으로써 변화되었고 이제 더 이상 전과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하에서 너를 용서한다’고 말한다면, 저는 용서하는 것일까요? 저는 무엇을 용서합니까? 누구를? 무엇과 누구를?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231쪽)
용서가 존재하려면 죄와 죄인을 그 자체로서, 죄와 죄인이 둘 다 죄악만큼이나 죄악 그 자체로서 불가역적으로 남아 있어서 전환도, 개선도, 뉘우침이나 약속도 없이 여전히 다시 반복되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용서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용서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용서 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이라 주장해야만 하지 않나요?(232-233쪽)
그래서 데리다는 이러한 불가능한 용서는 미친 짓이고, 일종의 광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혁명과도 같고, “역사와 정치와 법의 일상적인 흐름을 불시에 습격”하는 것이다. 용서가 혁명적인 것은 이렇게 사람들의 일상성을 깨트리고, 정치적 역학 관계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흔들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의와 법의 테두리와 상식을 깨트리기 때문에 혁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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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데리다의 논리는 결국 용서할 수 있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는 서로 상호간에 주고받는 교환이나 거래가 아니다. 이는 데리다가 ‘선물’에 대해서 논하는 지점과 일맥상통한다.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물물교환을 한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물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선물을 주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참된 선물은 보답이나 교환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에게 용서는 선물과 같이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아포리아의 논리다.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용서는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 어떤 ‘의미’도, 어떤 목적성도, 심지어 어떤 명료함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의 광기입니다(241쪽).
데리다는 용서를 “교환도 조건도 없는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에 의해 주어진, 또는 신적인 규정에 의해 계시된 선물이다. 이러한 순수한 용서, 은혜로운 선물이 인간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속에 들어 올 때 혁명을 일어난다. 그 순간 사태가 변화되고 효과가 발휘된다.
V.
용서가 이렇게 법칙에 대한 예외 사항으로, 정의에 대한 예외로 남아 있는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면권’이라는 주권적 권리이다. 이는 “법 안에 법을 넘어서는 권력을 기입하는 권리”라고 부를 수 있다. 마치 신이 일방적인 권력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듯, 근대 주권국가의 통치자가 죄인에게 특사를 내리는 방식은 신정 정치의 방식과 유사하다. 실제로 서양에서 사면권을 지닌 대통령은 먼저 성경에 손을 대고 선서를 하고, 종교적인 연설을 한다고 한다.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근대 정치의 토대, 법과 정의의 근거는 오히려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예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쨌든 저는 ‘용서’라는 단어가 갖는 이 까다로운 문제를 그것이 미리 기입되어 있는 ‘절차들’로 환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258쪽).
[질문]
과실에 대한 인정과 피해자의 무조건적인 용서 사이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피해자가 부재할 경우, 용서의 당사자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내의 호소. 그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악한 행위에 대하여는 처벌하지만, 악한 행위자는 용서하자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보론]
폴 리쾨르는 용서의 문제를 기억과 망각의 작용과 관련하여 논의한다. 그의 마지막 대작인 Memory, History, Forgetting에서, 리쾨르는 인간이 기억을 통해 어떻게 역사를 만들고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는지 밝힌다. 이 책의 마지막은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끝내는데, 여기서 용서는 기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밝히고 있듯이, 용서는 망각이라는 작용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기억을 지워버림으로 용서는 가능한 것이다. 희생자의 기억을 복원시키고 보전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이다. 희생자의 기억을 역사 속에 묻어 둘 때, 우리는 도덕의 기초를 세 울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은 희생자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하여금 다시는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래서 리쾨르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 수행능력이라 했다.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인간만이 진정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이다. 희생자의 고통을 망각한다는 것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감추어졌던 역사 속에서 그들을 구속하는 것이 참된 정의이고 윤리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 이후에 망각은 새로운 의미 부여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망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기억의 악몽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자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통해 정화되고, 회복된 기억은 이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 나가기 위해 망각의 도움을 필요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희생자의 미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희생자와 가해자는 서로를 치유하고 동시에 과거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때 경험되는 망각은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현수, “조건적 용서와 무조건적 용서의 화해의 향하여: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 자끄 데리다, 폴 리꾀르의 용서이론에 대한 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76집, pp. 275-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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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세미나] 데리다의 '환대'의 윤리 (최경환)
주입된 과거의 어색함: 19세기 신학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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