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youtu.be/GJG5A-klfgE?si=XVdwl8oqZtHQHESw
Beethoven - Symphony No 5 - Furtwängler, BPO (1943)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지휘자. 그 이름 너무도 유명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어떤 예술세계를 추구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끝없이 성공신화를 써내려갔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지 잘 팔리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했고 그 해답을 너무 잘 알았던 사람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에 대하여
클래식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법한 명 지휘자의 이름이 있다.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지휘자임엔 틀림없는 인물. 또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선두주자 역할을 하며 클래식 음악을 유럽의 몇 개국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 세계에 보급시킨 선구자.
하지만 이런 카라얀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은 출세가도만을 달리기 위해 나치에 부역했던 변절자로서의 그의 과거와 대중의 인기에 지나치게 영합하려 했던 그의 속물근성을 두고 비난하는 점을 많이 볼 수 있다.
카라얀이란 인물은 그만큼 대단히 복잡미묘한 인물이다. 어쩌면 20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성공한 지휘자이면서 그의 성공신화에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예술인들이 겪어야 했던 거친 바다와도 같은 질곡의 삶의 스펙트럼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카라얀은 1908년 잘츠부르크 태생이다. 잘츠부르크. 유명한 곳이다. 바로 모차르트의 고향이기에 유명한 곳이다.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한때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아무래도 이공계열은 적성에 안 맞았던지 음악으로 자신의 인생을 급선회한다(백 번, 천 번 잘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카라얀 같은 학생들 있으면 얼른 진로를 바꾸시길.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가 되기로 꿈을 갖고 지휘공부를 시작했으며 21세가 되어 지방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데뷔를 갖고 크게 각광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20세기를 빛낸 가장 성공한 지휘자의 인생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성공만을 위해 달린 삶. 그리고 성공한 삶.
카라얀하면 떠오르는 그 유명한 포즈.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며 지휘하는 이 포즈. 그는 어떤 음악을 만들어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고민하고 생각한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카라얀을 20세기 음악사의 '멤피스토'라고 부른다. 그만큼 그는 성공에 집착했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던 그의 이력은 결코 도덕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바로 그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1. 나치에 자발적으로 입당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강요에 의해 입당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는 순전히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입당했고 나치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2. 세 번 결혼했다. 뭐, 세 번을 하건 서른 번을 하건 문제될 게 뭐 있겠느냐만은 그 세 번의 결혼이 모두 자신의 성공을 위해 때론 결혼한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첫 번째 부인인 11년 연상의 오페라 가수와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카라얀이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재혼하지 않았다.
3. 지나치게 대중에 영합하고 상업적인 음악들만을 만들었다. 즉, 클래식 음악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 아닌 레코딩으로 음반을 찍어내서 돈을 많이 버는 딴따라, 돈놀이 판으로 만들었다는 것. 이상의 이유들이 바로 카라얀에 대한 비난의 쟁점이 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자면 1의 反: 당시 나치에 입당했던 것은 비단 카라얀뿐이 아닌 수많은 예술가, 지식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그는 크나큰 야망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그의 앞엔 적들이 너무 많아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가 자신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선 나치보다 더한 것이라도 있으면 입당했을 것이다. 훗날 그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베를린 필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빽줄도 없었다. 양대 거목인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는 서로 다른 사람을 베를린 필의 후임으로 적극 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을 덧붙임)
2의 反: 음...이 부분은 많이 비난을 받을 만하다. -_-+ 여긴 통과~!
3의 反: 그럼 음악을 귀족들의 여가선용 차원으로 끼리끼리만 듣는 게 좋은가? 돈 없는 나같은 인간도 이렇게 음악도 듣고 블로깅도 할 수 있지 않느냐 말이다. -_-+
만일 카라얀의 선구자적인 안목(전쟁 후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음반산업이 크게 활성화 될 것이며 음반을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음악의 황제가 될 것이란)이 없었다면 유렵의 몇몇 나라의 특권층, 귀족들끼리만 마음의 양식이 되는 이 좋은 음악들을 듣고 놀았을 것 아닌가?
카라얀이 나치에 입당한 사실, 그리고 많은 레코딩을 통해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 아름다운 음악을 보급한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고 카라얀에 대해 알게 된 각자의 몫이다. 그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란 것이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차이. 뭔 소린가 알것냐? 이 악플다는 머저리들아? -_-+)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푸르트벵글러(L)와 카라얀(R). 두 사람은 서로 너무 닮았기에 그토록 서로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카라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 바로 푸르트벵글러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음악 인생에서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에 다름 아니었고 푸르트벵글러는 평생을 두고 카라얀을 무시했고 미워했다.
적어도 푸르트벵글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카라얀은 절대 황제, 일인자가 될 수 없었다. 너무도 커다란 존재의 그가 끌어 줘도 시원찮을 판에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그토록 미워하고 경계했으니 그의 인생이 퍽퍽하게 막혔을 법하다.
카라얀은 훗날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모든 음악활동이 중지되었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그는 오로지 악보해석을 공부하며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위기를 성공으로 바꿀 줄 아는 이 사람. 역시 성공하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점이 있다니깐). 그리고 이 기간에 푸르트벵글러는 사사건건 카라얀을 반대하며 그의 지휘자로서의 복귀를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 푸르트벵글러의 공연을 슬쩍 훔쳐보면서 그의 지휘를 보고 익히며 공부했다. 그리고 그 역시 푸르트벵글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푸르트벵글러 사후에 단 한 번도 그의 추모공연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멤피스토라 불릴법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가능하다. 우선 푸르트벵글러가 왜 그토록 카라얀을 미워했는지 하는 것이다. 사실 푸르트벵글러의 입장에선 카라얀 같은 잔챙이쯤은 미워할 필요,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유하면 좋을까? 탤런트 최불암이 '경찰청 사람들' 에 등장하는 단역 '이씨'를 미워하고 그가 연기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방송국 출입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의 눈엔 카라얀의 비범한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젊었을 적의 모습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이놈 이렇게 놔뒀다간 나를 밟고 올라갈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아무리 지금은 '경찰청 사람들'에서 '이씨'역으로 단역 생활하는 배우도 무섭게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푸르트벵글러 역시 그 명예욕과 시기, 질투가 만만치 않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한때 토스카니니는 자신을 칭찬했으나 푸르트벵글러는 토스카니니를 칭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 사후에 그의 추모공연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해는 간다. 어떤 미친놈이 평생을 두고 키워주기는커녕 발목만 잡았던 노인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면서 추모공연씩이나 해주겠나? 무골호인이거나 제대로 이중인격자 아니면 그렇게 못한다. 하지만 카라얀도 곤조가 있는 인간이었고 적어도 그 정도로 심한 이중인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954년. 드디어 카라얀을 사사건건 반대했던 황제가 운명했다. 푸르트벵글러는 결국 6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바로 황제의 자리인 베를린 필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1순위는 귀도 칸텔리였다(칸텔리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칸텔리는 토스카니니의 유일한 제자였다.
2순위는 첼리비다케였다(푸르트벵글러가 적극 후원)
3순위가 바로 카라얀이었고 가장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1순위의 칸텔리는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였고 2순위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재신임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그리고 하늘의 운빨이 뻗친 카라얀이 바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고 그때부터 그는 쭈~욱, 거침없이 성공신화를 써내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카라얀이 남긴 음악
카라얀의 고향 잘츠부르크에 있는 그의 동상. 죽어서 호강이다. 쩝~
카라얀이 어떤 인생을 살았던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 법. 그가 남겼던 주옥같은 명반을 살펴보자.
사실 카라얀의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대체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보면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카라얀의 음반을 많이 사서 듣는다. 가장 듣기 무난하고 유명하기 때문이다. 좀 더 들어보고 이것저것 주워 들은 것이 많은 사람들은 카라얀 별로라고 생각하고 그의 음악을 무작정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로 가서 더 많이, 훨씬 많이 들어보면 카라얀의 음반들 속에 숨어있는 탁월한 해석에 눈을 뜨고 카라얀을 찾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는 그 어떤 지휘자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곡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짜르트,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 브루크너, 시벨리우스의 교향곡과 협주곡들...게다가 바그너, 베르디, 모짜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이토록 많은 장르의 음악을 두루두루 다루었지만 진정 시대를 초월한 명반으로 기억되는 것은 별로 없다.
브람스, 브루크너의 교향곡과 몇 개의 오페라 정도? 그의 음악의 특징은 그다지 특색이 없다는 것에 있다고 해야 할까?
전과목에서 두루 좋은 점수를 맞는 학생과 한 과목은 뛰어나지만 다른 과목은 그저 그런 학생. 둘 중에 어떤 학생을 더 우수하다고 평가해야 할까?
다양한 작곡가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그다지 모나지 않은 음악적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점이 바로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것이다. 마치 통조림, 코카콜라와 같다며 카라얀을 그토록 비난했던 첼리비다케의 말처럼 말이다.
적어도 내겐 카라얀은 그런 지휘자, 그 정도의 지휘자로 남아 있다. 한국엔 한국만의 음식, 일본엔 일본만의 음식과 문화가 있는데 코카콜라의 맛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은 맛이라는 점. 그저 무난하고 모나지 않게 음악을 만들어내는 점이 바로 카라얀의 특징 아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교향곡과 오페라에선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만 협주곡에선 결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진 않다. 이는 그의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다루는 문제에 관한 것인데 협주곡이란 분야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와의 상생, 혹은 팽팽한 기싸움으로 이어진다.
상생을 하면 매우 좋은 결과를 얻지만 팽팽한 기싸움으로 이어지면 매우 긴장되면서 재미있는 음악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 지휘자와 독주자간에 어깃장이 나면 말 그대로 개판이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카라얀은 결코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독주자를 위해 양보해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끌고 있는 베를린 필, 빈 필과도 같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들로 하여금 독주자의 야코를 팍 죽이는데 힘썼다. 이런 이유로 카라얀의 음반 중에는 협주곡은 별로 있지도 않고 잘된 협주곡도 별로 없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어릴적부터 그가 공들여 키워준 독일 소녀 안네-소피 무터와 소련의 천재 소년 에브게니 키신과의 협연 정도랄까?
마지막으로 내가 즐겨듣는 음악의 스타일과 카라얀은 별로 맞지 않는다. 유려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그가 만드는 음악의 큰 특징이라면 나와는 별로 안 맞는 것이다. 푸르트벵글러, 므라빈스키처럼 때론 대단히 직선적이면서 꾸밈없는, 대단히 투박하게 들리지만 군더더기 없이 강렬한 느낌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라얀이 남긴 수많은 명반들의 평가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음악들과 그의 업적은 아마 수 백년의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바로 예술에서의 완벽주의와 대중적 인기라는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를 완벽에 가깝게 이루어낸 처음이자 마지막 마에스트로였기 때문이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의 2악장. 일명 '장송 행진곡'으로 유명하며 장례식 등에서 많이 사용하는 음악이다
출처 : Http://www.mediamob.co.kr/winshc/Blog.aspx?ID=97270 전진하기도바쁘다(블로그)
글쓴이 : 베토벨라
https://youtu.be/bw5Vsg9vRNs?si=t-15bhX4kJ3cEmOW
Antonín Dvořák – Symphony No.9 in E minor – Herbert von Karajan, Berlin Philharmonic, 196
첫댓글
Beethoven Symphony No 3 Herbert von Karajan
https://youtu.be/_RtmV8-2ZGU?si=3-zdh9z2rkdhqG1c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