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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역대기 하권의 말씀 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 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마태 6,31.32ㄴ)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니 의식주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도록 청하기도 전에 다 주시는가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다 주시는지는 의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면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이 없어야 하고, 우리의 경험 안에서도 안 들어주신다는 느낌이 없을 텐데,
실제로는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고 우리 기도도 안 들어주신 적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주님께서는 토를 다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ㄱ)
제 생각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그런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필요한 것을 청하더라도 그것이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고,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중심적이고 할 도리를 모르며,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대의를 저버립니다.
제 생각에 대의(大義) 중의 대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한두 사람의 선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 곧 공동선을 늘 지향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은 대의를 저버리고,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대의를 찾고 공동선을 지향할 것이며,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고 늘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소인이나 미성숙한 사람은 기도를 하더라도 자기 좋을 것만 찾을 것이고, 자기 좋을 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지 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찾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한다고 합시다.
술만 먹으면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하면, 간경화 환자이면서 술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시겠지요.
그의 필요를 아시지만 그의 필요가 공동선도 자기 개인을 위한 선도 아닌 필요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필요를 하느님은 외면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고,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외면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집단적인 불의는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의인 다섯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과 롯 외에 아무도 의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 모두가 회개하기 전까지 온난화로 인한 폭염은 계속될 것이고,
니네베처럼 왕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배 채우기만을 일삼던 그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남이 배를 곯고 집단적인 기아는 계속될 것입니다.
집단적인 불의에 의한 집단적인 불행과 빈곤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고,
우리 인간이 집단적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밖에는 답이 없음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온전히 의탁하라>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 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 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4-5) 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에 매이면 걱정거리만 커집니다.
눈을 돌려 “야훼이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에로 한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마태 5, 29-29)
시골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그 끈질기고 왕성한 잡초들 사이로 여기저기 피어나는 청초하고 어여쁜 들꽃들이 있습니다.
나리꽃이며, 구철초며, 개망초며...
비싼 값의 씨앗을 따로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힘들게 허리 굽혀가며 모종을 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절기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야생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어 딱 한 송이 들꽃만을 바라봅니다.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쁜지, 그 작은 얼굴이 오목조목 갖출 것 다 갖추고,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때로 한심하고, 정말 못 나 보이고, 때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하느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비슷하고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보실 때는,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고, 다 특별하며, 다 나름 사랑스럽습니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섭리하시고 돌보아 주실 터인데, 미리 앞장서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오늘은 자비하신 주님의 충만한 현존 안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모두 함께, 걱정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1)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하느님만 사랑하고, 하느님만 섬겨라.” 라는 명령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만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마태 22,37)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티모 6,7-10)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1티모 6,17-19)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라는 말은 이천 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2)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만일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또는 공동체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야단치기 전에 먼저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에서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4-17)
말만 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7-18)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내가’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3)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마태 10,9-11)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빈손’으로 떠났는데, 그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먹을 것을 하늘에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니까 일하지 않아도 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2테살 3,10.12)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 - “걱정하지 마라, 보라, 찾으라”>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
<2000.4.24.>
언제 어디서나 더불어의 삶중에도 내면은 위의 민들레꽃처럼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가난하고 겸손한 은수자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도움이 됩니다.
“매일 자기 전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위대함은 확실하게 쌓여간다”
<다산>
“날마다 세 가지 점에서 나를 반성한다.
일을 할 때 불성실하지는 않았는가?
벗의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배울 때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
<논어>
이런 좋은 습관 역시 얼마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요! 예전 피정자들에게 자주 예로 들었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 품위있는 노년 삶의 우선 순서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2.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확하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역대기 상권에서 요아스 임금이 우상들을 섬긴 것도, 배은망덕하게도 생명의 은인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인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이 살해된 근본적 원인도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그런 삶자체 모두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양자택일 역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삶의 중심이 하느님과 재물 둘일 때, 그리하여 마음이 갈릴 때입니다.
확고부동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세 가지 충고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첫째, 걱정하지 마라!
정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삶이라면, 저절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을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미 전래 되는 속담에도 믿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다 그가 먹을 것은 타고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달려 있다.’, 이런 삶의 낙관 역시 믿음의 반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전반적으로 얼마나 약화되어 있는지요!
하루하루의 삶에,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추억을 쌓아가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말그 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게 하는 믿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 믿음의 삶이 탄력좋은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무너질 때 무기력, 무감감, 무의욕의 삶이요, 저절로 죄와 더불어 심신도 병들게 됩니다.
영적 건강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둘째, 보아라!
‘들어라!’,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허상이나 환상을 꿰뚫어 삶의 진상을,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느님 섭리의 현존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이며, 마음 깊이에서는 찬미와 감사도, 기쁨과 평화도 샘솟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그런 분이십니다.
대영성가이자 신비가이자 관상적 활동가인 예수님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조화로운 평화공존의 세상이요 하찮은 미물들 역시 하느님 안에서 한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지구에 대한 무절제한 채굴과 세상 생명체들에 대한 잔인한 착취와 학대 역시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도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이런 강론을 능가할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믿음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크나큰 도전이 됩니다.
매사 세상 만물과 사건들은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눈여겨보고 지켜봐야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찾아라!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인간 실존입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의 평생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져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안빈낙도 자족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최대의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처방이 이런 내적 혁명의 생태적 회개의 삶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불어 공동체 삶중에도 내면은 충만한 고독의 은수자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모두 한 마음,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팬데믹이 시작되고, 뉴욕의 상황이 심각했을 때입니다.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다행히 저는 큰 어려움 없이 팬데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텍사스에 토네이도와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비바람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접한 분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텍사스가 워낙 큰 지역이기에 제가 속한 동네는 큰 피해는 없었지만,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강풍으로 ‘전기’가 나갔습니다.
전기가 있을 때는 그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답답한 것이 많았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니 초가 있어서 급한 대로 불을 밝혔습니다.
다행히 전기는 3시간 있다가 복구되었습니다.
전기는 늘 우리 곁에 있어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기와 같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우리의 생활에도 큰 불편함이 있을 겁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포스의 불덩이를 훔쳐다 인류에게 전해주었고, 그 불로 인해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만큼 현대의 인류 문명을 만들어 낸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전기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족을 이루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새도, 들의 꽃도 다 먹이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많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소의 고삐에 달린 줄을 잡고 걸으면 커다란 소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어린아이 뒤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재물, 권력, 업적은 마치 소가 어린아이를 따라가듯이 주어질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은 찾지 않고 먼저 재물, 권력, 업적만을 쫓기에 재물이라는 램프 안에, 권력이라는 램프 안에, 업적이라는 램프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3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3가지 소원은 아니지만 3가지 질문에 충실한 사람은 3가지 소원이 아니라 원하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1997년 8월과 9월에 두 분의 여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한 분은 시골의 소녀에서 영국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던 ‘다이애나 황태자 비’였습니다.
다른 한 분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마더 테레사는 더욱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막강한 권력, 엄청난 재물을 지녔던 분은 점차 기억에서 사라져 갑니다.
주름진 얼굴, 가난한 삶, 겸손한 마음을 지녔던 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있습니다.
인생은 늘 밝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생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의 때에는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그 힘을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마음,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 땅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열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인은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뜻에 중심을 두는 삶>
어떤 야구선수가 한 기자와 인터뷰했습니다.
이 선수는 오랜 시간 야구를 한 베테랑이었는데, 기자는 관중석에서 상대 팀 팬들이 야유를 많이 보내지 않냐면서 이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 그런 말을 듣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기자는 그렇게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냐면서 다시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는 겁니다.”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는 방법이 아닌 이기는 방법만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힘든 훈련도 이기기 위한 것이고, 이기기 위해 때로는 미신과 같은 징크스를 만들어 실천하기도 합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은 2만 개가 넘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역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야유에 흔들린다면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야유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놀리거나 험담의 말, 부정적인 말 등….
과연 이 말을 듣고 흔들린다면 삶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우리를 향해 하시는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걱정은 참으로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 자기 명예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종 말과 행동에 대한 걱정도 너무나 큽니다.
이런 걱정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이기는 삶이 아닌, 지는 삶입니다.
이기는 삶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주님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뜻에 중심을 두는 삶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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