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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2일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49,1-6
복 음 : 요한 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산업 혁명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식민지 쟁탈전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는데,
특별히 영국의 식민지 중 오스트레일리아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모두 배에 태워 보내 버리면 영국은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 생각했고,
더 번영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이 매우 우수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죄인을 수용하기 위해 점령한 나라인데,
지금은 영국보다도 더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죄인을 무조건 없애면 진정한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같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차별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분명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늘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악을 그 자리에 없애지 않는 것은 모두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끊임없이 판단과 단죄를 하면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반에도 그들 모두 사랑으로 함께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을 배반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시지요.
이는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서 자기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둠의 길로 달려 나갑니다.
예수님의 외로움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직접 뽑은 제자가 배신하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는
곧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제자 역시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당신 수난과 죽음을 온전히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짊어져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장담을 보게 됩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 앞에 호언장담할 때가 많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것처럼,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아무 일도 없으면, 건강이 허락되면,
가정이 평화로우면,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이런 조건이 해결되면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핑계를 만드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 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 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 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 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깨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 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 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네티컷 한인 성당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신부님과 공동체 분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습니다.
일기예보에는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걱정하면서 출발하는데 하늘은 흐리고 안개는 끼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해가 나오며 오히려 조금 더웠습니다.
일기예보는 다행히 맞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과 기술의 예측입니다.
인공위성과 컴퓨터는 거의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자연현상을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도
아직은 100%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에 ‘예언서’가 있습니다.
예언서는 일기예보처럼 앞으로 드러날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무속인들처럼 사람의 앞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미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갈망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누가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이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또한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좀 부정적인 견지에서 두 인물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와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또 한 인물이 들어오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 물었다."(요한 13,23.25)
우리는 누군가에게 직접 여쭙기 곤란한 일이 있을 때
그와 가장 친한 사람에게 부탁해 간접적으로라도 답을 얻곤 합니다.
그 제자가 제자단 안에서 그런 역할이었나 봅니다.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역시 그에게 부탁할 정도니까요.
하느님 앞의 인간은 다양한 역할과 소명을 지닙니다.
열성적으로 직접 선교에 뛰어든 이도 있고,
노동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도 있고,
지식을 쌓아 전달하는 이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기도로 세상을 떠받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좀 더 접근해 그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여부는
신분의 종류, 소임의 성격, 자리의 높낮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이 하느님과 자신과의 '거리'에 달린 문제입니다.
봉쇄 담장 안에서도 탐욕과 분노로 하느님을 멀리할 수 있고,
세상 장터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과 일치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그분 심장에서 울리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 특권
역시 딱히 어떤 신분에 주어진다기보다,
어느 신분이든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지향과 열성, 실천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분 품 안에 머무르는 이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예수님 마음에 흐르는 내밀한 고통은 물론 기쁨과 환희까지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신비에 접근할 권한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느냐, 가까이 있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 제자 덕분에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쿼바디스]란 영화 기억하시나요?
아주 오래된 영화여서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베드로가 로마 선교 가는 여정에 박해와 죽음이 두려워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가 떠나시려 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지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요한 13,36)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고 말씀하시지요.
베드로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다시 회상하며
자기의 지팡이를 길에다 꽂아 버려둔 채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로 힘차게 되돌아갑니다.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가 버려둔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가 됩니다.
벗님도 현실을 직면하기가 몹시 두려워 회피하거나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때 베드로가 오늘 주님께 던졌던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쿼 바디스, 도미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려 하느냐는 질문이지만,
사실은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묻는 질문이지요.
그분께서 명쾌한 답을 벗님에게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분께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어 벗님에게
승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Quo vadis, Domine?]
예수님은 오늘 마음이 산란하시고 착잡하십니다.(요한 13,21 참조)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고발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분노하시지 않고, 안타까워하시면서도 그 일을 시작하라고 독려하십니다.
당신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그러고 나서 작정하신 듯 제자들에게 당신이 곧 영광 받게 될 것이고
떠나게 되어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 하십니다.(요한 13,31-33 참조)
베드로는 여전히 못 알아듣고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요?"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가요?
"죽으러" 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금 내가 그분을 따라 죽을 수는 없지만 언젠가 나도 죽을 날이 옵니다.
그때야 나도 그분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수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
그것이 의미 없는 두려운 길이 아니고 생명과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주님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는 길입니다."(이사 49,6)
그래서 죽음도, 부활도 영광의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잘 죽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가족이나 다른 이웃, 세상에 유익한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그런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말로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헛된 맹세는 필요 없습니다.
"쿼바디스" 영화에서, 나중에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에 대한 정답으로
박해를 피하는 길이 아니라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고,
그가 버린 지팡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잘~ 죽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부활을 위해 잘~ 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이 뭔지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부활을 꿈꾼다면 먼저 잘 죽어야만 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약하기 짝이 없는 나는 베드로처럼 또 넘어지기를 반복하지만(요한 13,38 참조),
주님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고,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이사 49,5)
그러니 용기를 갖고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까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목적지는 죽음이요, 죽음은 부활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나는 살아있는가? 산 사람은 살리고 죽은 사람은 죽인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해하는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는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입니다.
계명은 누군가의 뜻이고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당신에게 영광을 올리면
당신도 미래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유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고
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의사는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또 열심히만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의사 이국종 선생의 아버지는 6·25 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 국가유공자 의료 복지 카드를 내밀며 병원을 전전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고 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다 오직 ‘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너에게 받을 의료비는 없단다”라며
이국종 어린이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이국종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라는
삶의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아덴만 작전으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겠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총상이 심해, 마치 떨어지는 칼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일이었습니다.
이국종 선생은 자원하여 그를 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상태가 심해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이미 딱딱해지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도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지혈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국종 선생은 환자를 급하게 이송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수송할 수 있는 비행기를 빌리는데 4억 4,000만 원이었습니다.
외교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국가는 여러 절차를 이야기하며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국종 선행은 “이송비 4억 4천은 내가 낼 테니 일단 이송하라”라는 말을 하고
이국종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빌려 한국에서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석해균 선장은 6개월 만에 두 발로 걸어서 퇴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명세를 치른 이국종 선생 덕분으로 아주대 병원은 유명해졌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국종 교수팀이 긴박하게 데려와 살리는 환자가 많아질수록
병원은 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돈으로는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무리가 있었고
그 이후 추가 비용은 병원이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의사들도 자신들이 벌어 좋은 기계를 사야 할 돈들이
다 중증외상센터 적자 메우는 데로 들어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중증외상센터로 오시는 분들은
다 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국종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수술환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병원은 더 큰 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잠도 자지 못하며 일하는데
윗사람과 동료 교수들에게 종일 욕을 먹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국종은
결국 권역외상센터 지원 예산 201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7년 동안 고장 난 무전기를 바꿔 달라는 말만
수백 번을 했다며 분노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일개 의사가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라고 여긴 이국종 교수는
결국 아주대병원에 사퇴 의사를 밝히게 됩니다.
“한국에서 다시는 이거 안 할 거예요. 이번 생은 망했습니다.
두 번 다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이국종 교수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결국 사퇴하고 떠난 소중한 인재’, 유튜브 채널, 그 시절 그배우]
물론 동료 의사들이나 나라 관리들도 살자고 그런 결정들을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위해 지나치게 에너지를 다 빼버려
소진된 이국종 교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의사지만 결국엔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 갇힌 현실에서 어떻게 두 부류로 갈리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병원과 나라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나와 전혀 상관없고
이익도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을 살릴 것인가.
병원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환자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을 살린다는 것 안에는 ‘내가 살겠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병원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내가 살겠다는 마음이 조금만 들어있어도
누군가는 죽게 되는 데 협조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이들도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가리옷 유다도 그 말에 동의하여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안에 ‘그래야 나도 살지!’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죽이려는 뜻이 아니면 실천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다 하느님의 뜻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이웃이 죽는지, 혹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이 두 부분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모든 행위는 누군가는 살리고 동시에 누군가는 죽입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이 필요하여 타인을 죽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빛으로 갈 것인지, 어둠으로 갈 것인지는 명확합니다.
빛으로 가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