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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재판정으로 끌려가지만 갈리오 총독이 관여하려 하지 않아 풀려나 시리아로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다시 보게 되면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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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유다인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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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유다인들의 고발로 재판을 받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코린토를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지만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를 계속해서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 곧 수난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잠시는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해산을 앞둔 여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지금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묘사하시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의미까지 알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존재나 마음을 다하여 애착하던 것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만큼이나 혹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여정일 때, 반드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이 주는 ‘기쁨’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술적 영감과 철학적 사고는 슬픔이나 비극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여야 행복을 그리워하고 슬퍼하여야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만큼의 고통에서 태어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가식적 행복일 수 있고, 언제 슬픔으로 바뀔지 모르는 불안을 품고 있습니다. 영적 기쁨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믿을 때 생기는 은총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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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속 주님의 말씀은 온통 ‘근심’과 ‘기쁨’이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제 당신을 잃고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장례 때 곡하는 행위) 그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 과연 그분의 뜻을 알아듣고 깊은 슬픔과 걱정에서 선뜻 돌아설 수 있었을까 생각되지만, 자상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산고를 겪는 여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미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해산하는 여인’을 ‘메시아 시대의 구원’의 상징으로 자주 썼습니다(이사 26,16-19; 66,7-14; 묵시 12,2-5 참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같은 주님의 약속은 고된 일상과 눈물 속에서도 영원한 기쁨을 바라는 모든 이를 향합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현존과 보호를 믿는 이가 얼마나 담대한지 전하여 줍니다. 코린토에서 동족들의 모욕과 반대를 받고 시름에 빠진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니 그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바오로는 계속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모함하던 유다인들은 이내 재판정에서 쫓겨나 큰 수치를 당합니다.
증오심과 폭력성을 드러낸 그들은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매질하지만, 그 또한 굴복하지 않습니다. 바오로와 소스테네스의 근심과 고통은 주님의 현존 안에서 아무도 빼앗지 못할 확고한 믿음과 기쁨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앞선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알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 끝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는데, 우리라고 어찌 그 길을 피하여 갈 수 있을까요?(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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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 근처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의 말[馬]이 까닭 없이 도망을 쳐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끼던 말을 잃은 그 노인을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다시 노인에게 돌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그는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화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많은 오랑캐가 한꺼번에 침입해 오자 마을의 장정들이 이에 맞서 싸우다 열의 아홉은 전사합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처럼 우리 삶의 길흉화복은 늘 변화가 많아 예측할 수도 예단할 수도 없습니다.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한 여인이 해산의 진통을 이겨 낸 뒤에야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내맡겨 봅시다. 주님께서 분명 그 모든 근심을 새로운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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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고통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의 시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시간이고 종말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와 나누는 ‘화해’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저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각자가 계획하고 결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내 자신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나은 나’, ‘지금보다 멋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세상은 좋아합니다. 서점가에 쌓여 있는 자기 계발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부추기고 사람들이 그런 책을 읽을수록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제거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족하면 서로 돕고, 어설프면 서로 챙겨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갈수록 종교가 힐링 센터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가 경쟁에 지친 개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만 머물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결심과 격려의 자리로만 굳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릴까요?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회할 어제도, 살아갈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과 존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듬는 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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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알고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이 세상 곳곳에 넓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의 세력도 승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를 완전히 역전시키시고 맙니다. 빛이 어둠을, 정의가 불의를, 사랑이 미움을, 예수님의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을 끝내 이기고 만 것이 아닙니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참된 승리를 위하여 십자가라는 시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시련 없는 영광은 생각할 수 없지요. 그러니 시련과 역경은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앞날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시련이 주어질 때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며,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려 할 때, 우리의 삶은 의외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마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시련을 통한 성숙한 신앙인의 길을 걷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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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보통의 기쁨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곧 사라지거나,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하는 기쁨을 나 홀로 누리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비슷한 상실감과 근심에 빠질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애통해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산할 때에 겪을 진통으로 근심에 싸인 여인이 아이를 낳고 나서 얻게 될 기쁨을 실감나게 비유하시며,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고통을 겪겠지만 부활의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기에, 아무도 빼앗지 못할 충만한 기쁨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약속은 제자들과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박해를 받아도 변명을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삶은 아름답지만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이 커도 내가 얻을 기쁨이 크면 견디어 낼 용기를 얻습니다. 근심 없이 살 수는 없지만, 근심을 후회나 자책이 아닌 삶의 열정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은 기쁘게 삽니다.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 내고 간직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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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당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어떤 중국인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서양 신은 저리도 고통스러운 모습일까?”라고 중얼거렸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왜 저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야 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전쟁과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 때, 우리도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기억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 안에서 아무도 뺏을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과 희망, ‘아무도 뺏을 수 없는’ 부활의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길고 어두운 고통의 동굴을 지나야 하기에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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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에 우리는 요한 복음 16장의 말씀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별하시는 자리에서 남기신 마지막 담화를 날마다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하며 우리는 깊은 위로와 감동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먼 저 다가올 고난과 슬픔의 시간에 대한 당부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중요한 약속들을 하시며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깊이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그리고 근심과 슬픔 뒤에 올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완전한 인식을 약속하십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16장 전체의 절정이자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기쁨과 인식의 약속이 사실은 별개가 아니라 깊이 일치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부활을 통하여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인식에서 옵니다. 이러한 참된 인식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충만하게 합니다.
그 리스도인에게 특전으로 주어진 이러한 인식은 오로지 성령의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깨달음으로써 느끼는 기쁨은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성령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진리를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약속받은 기쁨입니다.
이 대목에 나타난 예수님의 약속의 깊은 의미를 미국의 저명한 성서학자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는 자신의 『요한 복음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단지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인식에서 주어지는 기쁨만이 아니다. '파라클레토스'(보호자)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 것으로 말미암아 지속되는 기쁨이다."
주 님의 약속은 온갖 권세가 창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도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과 현존을 체험하고 기쁨을 느끼는 이는 참으로 세상을 이기신 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용기를 낼 이유가 있습니다(요한 16,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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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혼자 사는 동생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도 가정을 가지고 있고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동생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희귀병에 걸려 혼자서 투병하는 것을 알고, 힘들지만 시간을 내서 동생을 간호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짓눌렀던 근심이 오히려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교우가 복음 나눔을 하면서 전한 말입니다. 혼자가 되어 술로 방황을 하던 동생을 외면하고 있을 때는 늘 근심과 갈등을 안고 살았는데, 결단을 내리고 그를 돌보아 주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동생을 돌보아 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은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교우는 동생 때문에 겪은 갈등의 시간을 ‘영적인 해산’의 순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려면 반드시 이런 ‘영적인 해산’의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겨 내야 할 고통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그저 안락함만을 좇으며 살면, 기쁨은 없고 오로지 ‘거짓의 나’를 붙잡는 삶만 남게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 말씀하셨지요.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사랑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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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습니다. 고양이가 고통 없이 새끼를 낳을 수 있도록 ‘무통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한곳에서 키웠습니다. 한편 옆 장소에는 정상적으로 새끼를 낳은 고양이와 새끼들을 길렀습니다.
새끼들이 커지자 어미에게 귀찮은 행동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새끼를 낳은 어미는 자리를 옮겨 가며 끝까지 피해 다녔습니다. ‘무통 분만’을 한 어미도 한동안은 피해 다녔습니다. 하지만 계속 괴롭히자 나중에는 새끼를 물어 버렸습니다.
해산할 때 여인은 본능적으로 불안해합니다. 아이가 잘 태어날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진통보다 아이에 대한 걱정이 훨씬 큽니다. 그만큼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무통 주사’를 원하는 것은 은총을 외면하는 유혹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뀌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인간적 계산으로 피하려 들면 안 됩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며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체험합니다. ‘내 몫’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면 두려움도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만여 개의 알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얼마의 알을 낳을까요? 모든 환경이 만족스러운 상태이기에 자연 상태의 금붕어보다 더 많이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자그마치 6~70%나 적은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합니다. 아무런 위험도 없고, 적당한 온도와 먹이도 풍부한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다. 그런데도 알은 오히려 적게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인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연의 삶, 즉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점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를 원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금붕어인가 아니면 어항 속의 금붕어입니까?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에 직면하는 그 순간은 괴롭고 힘들 수 있겠지만, 고통을 통해서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두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관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고통을 극복하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이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때로는 불공평한 하느님의 잘못된 행동이라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결국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 속에 있다면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에게 성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진정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께서는 해산의 고통과 기쁨을 말씀하시면서, 수난의 고통 다음에 오는 부활의 기쁨은 너무나도 클 것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제자들은 온갖 근심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담과 걱정,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 큰 관심을 갖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가 보는 일이다(박서영).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저도 참 소심했습니다. 쓸데없는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울적했고, 긴장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 때 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 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 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들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보내 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손 두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로움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당연이 겪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근심 걱정과 관련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 자비와 은총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매일 선포되는 말씀과 더불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과분한 성령의 은사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근심은 근심도 아닙니다. 기도 안에 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은 머지않아 넘치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어렸을 때 잠을 참 두려워하였습니다. 자고 못 일어나고 나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존재이니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과 나는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없는 존재이니 ‘준비’하고 사는 삶입니다.
저는 준비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온종일 행복하게 지내다 보니 잠이 두렵지 않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행복하게 지낼까를 궁리했습니다. 이것이 잠을 이길 수 없는 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온종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어도 많이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커피를 마시지 말고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올 사건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이 현명한 삶인지 밝히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은 아기를 낳은 기쁨으로 잊어버립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가치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음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의 ‘하늘 나라 첫 동네’에서 ‘전과 20범’ 환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 명을 죽인 죄로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였는데 위암 말기로 가망이 없어서 성모 꽃마을에 맡긴 것입니다.
처음 들어올 때는 마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몸집도 큰데다가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 도합 5단이나 되는 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암 말기라고는 하나 그 살기가 대단하였습니다. 도박에 빠져 가정을 망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어렸을 때부터 어긋나서 술만 마시면 싸움질이었습니다. 워낙 싸움을 잘했습니다. 몇 년씩 여섯 여자와 살았는데, 그중 한 여자가 이제 다른 남자와 살겠다고 그 남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화가 난 그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한 대씩 때렸는데 둘 다 사망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서 또 싸움하다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가밀로 신부님은 그 사람이 불쌍하여 수소문한 끝에 그의 동생의 연락처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고 하고, 형도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가밀로 신부님의 부탁으로 서로 좋은 말만 하기로 하여 만났습니다. 처음엔 형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는 바람에 거기서 끝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해서 조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못난 형을 둬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죽는 거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 출혈로 각혈을 하게 되자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죽음이 두렵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도 형과 조금 더 있다가 새벽에 출근하기도 하며 조금씩 화해하였습니다. 형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잠도 이기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 뒤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니!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은 공짜로 주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무언가 준비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끝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도 기쁠 수 있는 무언가를 낳아야 합니다. 위 사람은 가밀로 신부님 말대로 용서라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준비한 것입니다.
교만으로 자신이 죽음 뒤에까지 다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맙시다. 그러면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는 피를 흘리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대신 그 순간이 오면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주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 선교의 열매를 준비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새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이렇게 새들은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노래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분주한 것은 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애벌레들이 느리지만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벌레들에게는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산보를 가는 사람이 무심코 밟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새들에게 아침 식사가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Whe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don't just hope for easy resolutions; instead, strive to make yourself stronger." 어떤 나비도 애벌레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거친 애벌레들은 마침내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것입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시 애벌레의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침 산보 길에 보는 애벌레들이 무사히 나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님은 위암이 생겼고, 암은 여섯 군데의 장기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3개월 시간이 남았다고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암을 극복해서 살고 싶은 의지가 강했습니다. 몸에 많은 의료장비를 달고 있으면서도 산보를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형님은 직업을 포기하고 동생을 위해서 이사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형제님을 찾아가서 고백성사를 드렸고,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건강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드렸습니다. 무덤에 묻혔던 나자로가 무덤을 덮었던 돌을 치우자 무덤에서 나왔던 것처럼 형제님의 갈망, 형님의 돌봄, 신부님의 기도가 함께하니 형제님을 덮었던 암이 치워졌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형제님도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었습니다. 3년 동안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형님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3년 동안 힘든 일을 참아 주었던 아내에게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환시를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그런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으시고 버림받으시는 그 극심한 수난의 순간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충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거기에 무엇을 걸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희생을 통해서 단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기쁨과 슬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기쁨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기쁨이요
슬픔의 믿음 아니라
믿음의 슬픔이니
믿음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기쁨이요
슬픔의 희망 아니라
희망의 슬픔이니
희망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기쁨이요
슬픔의 사랑 아니라
사랑의 슬픔이니
사랑 안에서
기쁨은 슬픔을 품고
슬픔은 기쁨을 낳습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아무리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내가 얻을 기쁨이 더 크다고 했을 때 그 고통을 견디어 낼 용기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통이 다가왔을 때 근심과 걱정 속에서 좌절하고 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삶의 열정을 가지고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말로 표현 못할 극도의 고통이 앞에 놓여져 있었지만 결코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 고통의 잔을 받아들이셨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넘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8년 전에 아버지께서 선종하셨을 때 정말 남은 가족들의 심적인 고통과 충격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신앙 안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의 안에서 만난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늘 기도하며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씀대로 더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사실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서 늘 지켜주심을 믿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근심은 그렇게 주님과 함께할 때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주님이 모든 근심의 치유자이시며 사랑과 기쁨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인의 기쁨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유학 시절 로마에서 외국어로 겨우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볼 때, 그 시험 끝엔 방학이 있음을 위안 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현재 모든 조건이 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현세의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아무리 거센 비바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걷다 보면 집에 도착해서 몸을 따뜻이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길에서 절망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귀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누리는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이 누리는 기쁨의 근거는 죄와 죽음까지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감준수 신부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 22)
사순시기에서 부활 시기로 영적 움직임은 불안에서 평화로 그리고 근심에서 기쁨으로 회심입니다. 사순기기는 해산할 여자처럼 걱정과 근심에 싸이지만, 부활 시기는 해산한 여자처럼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평화처럼 부활의 선물이고, 부활의 기쁨은 사랑하는 이와 재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하나의 선물, 곧 무상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 안에 있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어떤 누구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6,23)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기쁨 중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크리스챤 생활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문 삶의 결과가 기쁨이며 이는 바로 내적 기쁨이자 존재적 기쁨입니다. 이를 체험하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충실한 기도 생활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기쁨이 충만한 삶은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예전 보다 세상의 이치는 물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 살 때,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살았던 젊은 필리핀 신부에 대한 저의 느낌은 긍정적이기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그 까닭이란 제 눈에는 보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도대체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았지요. 결국 제대로 본다는 것도 단지 보이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살 때 보는 것은, 육으로 보는 것이었고 거짓되고 피상적인 봄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의 슬픔을 처절하게 겪고 난 뒤 다시 보게 된 부활을 체험한 이후의 보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후자의 보는 것은 곧 마음이나 심령으로 보는 것으로써 이 보는 것은 참되고 깨달음을 수반한 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뜨듯 참된 심령의 눈을 뜨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인 눈을 뜨고서는 제자들은 몰이해의 안개가 걷히듯 모든 것을 제대로 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의심이나 의문이 사라졌기에 주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의 우리 역시 동일하게 믿음의 눈이 열리고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참된 내적 전환 곧 근심,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외적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흐르는 시간의 강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는 근심의 무게를 깊은 내성과 숙고를 통해 거슬러 올라와야 만이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의 과정을 해산의 진통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여인에게 산고가 예고되어 있듯이, 우리도 인생을 ‘苦海’라고 표현했듯이 인생 항로에서 갖가지 근심과 시련의 시간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어려움과 고통을 무의미하게 생각하거나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며 힘겹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후에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이 계시기에 고통과 질곡의 시간을 인내하고 희망하면서 닥칠 그 날을 고대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부활 이후 제자들의 슬픔, 근심은 기쁨으로 변화되었으며, 이 기쁨은 실제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많은 순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은 이산가족 상봉 중계방송을 시청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기쁨, 다시 만남의 기쁨!!! 생사를 모르는 채 살아왔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연상한다면 아마도 부활 후 스승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의 기쁨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 재회의 기쁨의 크기가 큰 쪽이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으셨던 주님을 생생하게 다시 만나 제자들의 기쁨이 훨씬 더 컸으리라 봅니다. 자신들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다시 찾아오셨기에 받은 기쁨이었기에.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쁨이 일시적이고 지나가며 외적인 기쁨이라면, 주님께서 부활 후 주시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항구하며 내적인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근원적 기쁨이며 존재적 기쁨이고 은사적인 기쁨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가져다준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내 영혼 안에 함께 계시는 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한 마디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잦은 자연 재화와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향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외적인 기쁨,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기에 참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입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젊은 세대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끈기도 인내심도 없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인 하면 으레 은근과 근기를 말했었는데,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기에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너무 화려하고 큰 것만을 추구하기에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 사회 구조 자체가 그들의 희망을 꺾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익숙하다 보니 삶의 잔잔하고 소소한 작은 기쁨이나 참된 존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 곧 참된 기쁨이 지금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 참된 눈이 열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사18,10)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 바오로는 항상 늘 기뻐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였습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의 좋은 성격이나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받는 사랑에서 내어주는 사랑을 자신이 먼저 사신 분이십니다. 이는 사랑받고 싶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쁨에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기쁨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존재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울한 성인은 불행한 성인이기에 불행한 성인이 아니 되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환난이나 근심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아갑시다. 기도를 대신해서 김종삼의 「어부」라는 시를 보내니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삶이 힘들더라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는 날까지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기뻐하십시오!
“기쁨은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입니다. 수도원 곳곳에 무수히 만개한 하얀 이팝나무꽃들이 기쁨의 선물처럼 생각됩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이팝나무 꽃말도 멋집니다. 새삼 기쁨의 선물도 발견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심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점심밥을 먹다가 창밖 눈부시게 빛나는 쌀밥같은 이팝나무꽃들을 보는 순간 떠오른 “눈부신 날에는”이란 시입니다. 시역시 저에겐 기쁨의 선물이자 발견입니다.
“5월
'영원한 사랑'이란
꽃말의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
눈부신 이와 함께
눈부신 만남
눈부신 위로
눈부신 기쁨을 나누고 싶다
새하얀 이팝나무꽃들 눈부신 날에는”-2024.5.9
유난히 “눈부시다”라는 말마디가 마음에서 맴돌았습니다.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빛나는 선물같은 눈부신 삶입니다. 눈부심의 중심에 바로 눈부신 분,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언젠가 나눴던 “선물”이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 폈다지면 또 오늘의 꽃 폈다지고...
평생을 하루하루 그렇게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2001.4.23.
살아야 할 꽃자리, 기쁨의 선물을 발견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기쁨의 선물들 한 중심에 파스카의 주님이 계십니다. 파스카의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우리가 만나야할 눈부신 분은 바로 파스카의 주님입니다. 다음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은 이미 실현되어 기쁨의 선물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부활한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할 때 눈부신 선물인 기쁨의 빛에 온갖 번민과 의심의 어둠이 말끔히 걷힙니다.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 빼앗아올 수 없는 기쁨,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쁨, 주님의 선물인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영원한 기쁨, 참 기쁨입니다.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 중에도 끊임없이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세상에 이런 파스카의 기쁨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록의 5월, 파스카의 기쁨을 색깔로 하면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저의 기쁨은 집무실옆 신록과 애기똥풀꽃이 어울어진 꽃길, 하늘길에서 고백성사후 사진을 찍어 나눠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의 기쁨과 행복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제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사진처럼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신부님, 예쁘게 찍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내면에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기쁨은 순전히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거행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인 기쁨의 원천인 파스카의 주님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기쁨 역시 영적훈련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기쁨의 영적훈련의 장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쁨의 전사’로 사는 삶이라면 얼마나 멋진 삶이겠는지요!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 누구보다 기쁨을 강조한 기쁨의 사도, 기쁨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이 늘 함께 하심이 바로 기쁨의 비결, 행복의 비결임을 봅니다. 환시중 들려온 주님의 약속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도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바오로 사도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에게 당부 말씀을 주십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주는 말씀 처방전에 참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멘.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1-23ㄱ).”
1) 여기서 ‘진통’과 ‘해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인 ‘예’입니다.
<“예수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은 산모가 겪는 진통과 같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출산과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잊어버린다.’ 라는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산모가 진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잊어버린다.’ 라는 말은, ‘망각’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해방’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겪었던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즉 고통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만큼 부활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2)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 부활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시점에서 생각하면, 교회 공동체는, 또는 신앙인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도 희미해질 것이고, 결국에는 부활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까 더 이상 사순절은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이긴 한데, 부활 전의 과정도 중요하고, 부활의 이유와 목적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먼저 믿어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우리의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셔서 부활하셨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부활의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의 부활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길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이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4)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는 말씀은, “내가 부활해서 너희에게 나타나면”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라는 말씀은, “너희 마음이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될 것이고,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도’는 박해자들, 사탄, 시간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박해자들’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박해해도, 너희의 기쁨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는 “부활의 기쁨은 세상의 박해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탄’으로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사탄의 유혹과 방해를 물리치는 힘이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유혹을 물리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으로 해석하면,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5)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그날’은 부활과 성령강림을 함께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또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전히 깨달았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확신하고 있는 신앙을 증언하고 선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한 번에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련과 정화 과정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1베드 1,7).>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결코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스스로가 그 기쁨을 놓아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승리’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의 말·샘 기도>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이번 주간에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활하시리라고 예고하셨던 말씀을, 승천이라는 전례주기에 맞춰 되돌아보고,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2-23ㄱ)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승천하시면 다시 우리 육의 눈으로는 뵐 수 없겠지만,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우리의 온 몸으로 깨닫게 해주시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주님과의 순간들을 기대합니다.
잃었던 것을 찾으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한 6, 20-23> 5월 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36년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다시 찾았을 때 그 시간을 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 후 나라는 공산당에 의해서 이곳 왜관 근처까지 점령당하고 그 당시 격전지였던 왜관에서 70여 년을 살면서 성당이 총구멍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며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시 찾은 38선, 동서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살고 꼴찌 가던 나라가 10위 안에 드는 나라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리는 것은 나라만이 아닙니다. 귀중한 물건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기쁨도 누리게 됩니다. 사람도 잃었다가 다시 찾으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하느님도 잊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찾지 않으면 진, 선, 미의 길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믿는 것을 허깨비를 따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믿음, 희망,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 찾아 믿는 것만큼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무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 온갖 생명에 힘을 주고 생명을 보존하도록 이끄시는 하느님, 준비된 하느님 나라에 살게 하시는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사는 의미도 없고, 살지도 못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주님, 잃어버린 작은아들을 찾으시는 비유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쉽게 양심의 길을 잃고 진실과 선행과 사랑을 잊어버리는 세상에서 잃은 것을 찾고 새롭게 사는 것만이 바른 삶의 길입니다. 비록 잊었어도, 찾지 못했어도 다시 찾아 사랑을 나누는 일만큼 기쁨이 넘치는 일은 없습니다. 보통 상담 오시는 분은 얼굴이 굳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지만, 웃으며 기쁘게 나가시는 뒷모습은 보기 좋고 행복해 보입니다.
어느 날 여행하다가 휴대폰을 잃어버렸습니다. 휴대폰만이 아니라, 1,200명 되는 친구도 잃어버려서 묵상 글 보낼 수 없게 되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휴대폰 못 찾으면 할 일이 없어지니 저를 데려가세요.” 하고 찾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하늘을 찌르는듯하여 감사 찬미기도 드렸습니다.
모든 것 잃어도 하느님 잃지 않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서 '모성애'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고양이를 이용하여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출산을 앞둔 고양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의 고양이들은 출산할 때 진통제를 놓아 '무통분만'을 하게 하고, 다른 그룹의 고양이들은 그냥 정상적으로 '자연분만'하게 한 다음, 각각의 어미 고양이를 자신이 낳은 새끼 고양이와 한 장소에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각 그룹의 어미 고양이들이 새끼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지켜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그룹의 고양이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고픈 새끼 고양이들이 모유를 먹기 위해 어미 고양이의 젖을 물었을 때, 자연분만을 한 어미 고양이들은 새끼가 젖을 깨무는 것이 아파도 끝까지 참으면서 젖을 먹는 새끼 고양이들을 사랑스럽게 핥아준 반면, 무통분만을 한 어미 고양이들은 새끼가 자기 젖을 깨무는 고통이 느껴지자 마자 날카롭게 성질을 내며 새끼들을 물어 죽여버린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새끼를 낳을 때 겪는 고통이 어미로 하여금 새끼에 대한 모성애를 갖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 버린다." 출산할 때가 되면 여인은 본능적으로 불안해합니다. 아기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잘 태어날 지, 자기 자신이 출산에 따르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끝까지 잘 견뎌낼 수 있을지가 너무나 걱정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어머니는 절대 출산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자기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라, 자궁 바깥의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열심히 애를 쓰는 아기도 함께 겪는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아기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알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출산에 따르는 엄청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낳은 아기를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감동이, 아기에 대한 사랑이 훨씬 더 커집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인내하며 더 큰 난관을 극복할수록, 나중에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과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달콤한 결과만을 취하려고 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은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보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진통제'를 맞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쓴 맛'을 피하기 위해 진통제를 맞으면, 나중에는 인생의 '단 맛'마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진통제란 특정한 하나의 감각만을 무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전체를 무디게 하는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를 원한다면, 나의 인생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은총들을 제대로 체험하기를 바란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에 당당하게 맞서서 그것들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출산할 때 남편이 옆에서 함께 하며 응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고통을 겪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출산할 때가 되면 여인은 본능적으로 불안해합니다. 아기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잘 태어날 지, 자기 자신이 출산에 따르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끝까지 잘 견뎌낼 수 있을지가 너무나 걱정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어머니는 절대 출산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자기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라, 자궁 바깥의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열심히 애를 쓰는 아기도 함께 겪는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아기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알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출산에 따르는 엄청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낳은 아기를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감동이, 아기에 대한 사랑이 훨씬 더 커집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인내하며 더 큰 난관을 극복할수록, 나중에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과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달콤한 결과만을 취하려고 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은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보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진통제‘를 맞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쓴 맛‘을 피하기 위해 진통제를 맞으면, 나중에는 인생의 ’단 맛‘마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진통제란 특정한 하나의 감각만을 무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전체를 무디게 하는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를 원한다면, 나의 인생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은총들을 제대로 체험하기를 바란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에 당당하게 맞서서 그것들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출산할 때 남편이 옆에서 함께 하며 응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고통을 겪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참된 기쁨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기쁨도
하느님 안에서
익어가는 것이며
익어가는
그 기쁨을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고통 없는
기쁨이
없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축복이 되며
고통이
기쁨이 됩니다.
고통을 지나야
비로소 기쁨을
만나게 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우리의
길과 길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기쁨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
십자가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우리를
업고 가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부활의 교훈
부활의 기쁨을
진정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영국의 한 연구팀이 70세 전후의 259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자기반성과 치매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였는데, 그 결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확한 인과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반성의 시간을 하루에 10분 이상 갖게 되면 분명히 인지력과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치매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연구 발표에서도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영양제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10분이라는 시간. 아주 긴 시간일까요?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뇌 건강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10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강이 최고라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하는 기도, 묵상은 꼭 필요한 영양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영양제를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고 필요한 시간인데도 항상 뒤로 미뤄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일이 급해서, 피곤해서,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등의 말로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맨 뒤로 미룹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모습입니다.
올해부터 저는 혈압약을 먹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이제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면서 아침 식사 후에 한 알씩 꼭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복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혈압 조절이 안 될 수 있어서 규칙적인 복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신경 써서 규칙적인 복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묵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뒤로 미루다가는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난 전날 겪을 제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큰 사건을 기다리는 고통이라고 하시지요. 마치 진통의 고통을 겪은 뒤에 사랑하는 아기를 낳는 것처럼, 그 고통 뒤에 고통을 잊을 만큼의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을 만나고 지금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이유를 붙여서 후회의 시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의 시간을 위해 지금 당장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랜디 포시).
성령의 사람이 누구에게도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진감래(苦盡甘來)’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둘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가난과 굶주림이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길에는 넝마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고, 동냥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달동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들이 많았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일하였습니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판자촌은 아파트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인을 보면 주눅 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쫓아서 미국으로 이민 오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의료체계가 잘 마련되어 있고, 한국 사회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 뉴욕에서 4년째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한국이 지난 50년 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정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입니다. 우리가 정한 물리적인 시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프고, 늙고, 죽어갑니다. 이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60년을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슬픔과 기쁨, 고독과 희망의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에서는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움과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과 절망의 시간에서는 바늘 하나를 넣을 수 없을 만큼 작고, 좁습니다. 불평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감사의 시간을 가지면 남의 손을 이끌게 됩니다. 의미의 시간은 주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너머 마침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빛이 가로막히니
빛은 슬퍼하고
어둠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빛이리니
슬퍼도 빛이어야지요
지금
선이 비웃음 받으니
선은 슬퍼하고
악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선이리니
슬퍼도 선이어야지요
지금
사랑이 거부당하니
사랑은 슬퍼하고
미움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사랑이리니
슬퍼도 사랑이어야지요
지금
정의가 짓밟히니
정의는 슬퍼하고
불의는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정의이리니
슬퍼도 정의이어야지요
지금
진리가 외면당하니
진리는 슬퍼하고
거짓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진리이리니
슬퍼도 진리이어야지요
지금
살림이 힘겨워지니
살림은 슬퍼하고
죽임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살림이리니
슬퍼도 살림이어야지요
지금
희망이 어려워지니
희망은 슬퍼하고
절망은 기뻐하더라도
마침내
온 누리 희망이리니
슬퍼도 희망이어야지요
복음이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믿음이 커가면 사랑도 커간다. 그런데 커가는 사랑도 나에게서 무너질 때가 있다. 큰 사랑을 내가 보아 한계에 직면할 때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너무 나약해 신뢰가 깨질 때가 있다. 작별과 죽음이 자기 앞에 놓일 때이다. 그에 대한 신뢰가 사상누각처럼 와르르 부서져 내릴 때 근심으로 가득찬다. 성목요일 밤이 그랬고 절정은 성금요일에서이다.
그런데 사흘만에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이는 근심이 변하여 큰 기쁨이 된다. 그 기쁨으로는 아직은 부족한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떠나신다는 말씀이 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제자들에게 또 다른 근심거리다. 도대체 또 이 무슨 말씀인가? ‘성령을 보내겠다. 그분께서 오시면 근심이 변하여 충만한 기쁨이 될 것이다.’ 그 말씀도 감이 없다. 믿음이 완성되지 않은채 있는 제자들이다.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갔다가 또 다시 오시는 날, 제자들은 더 이상 주님께 묻지 않게 된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모두 알려 주시고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 마음에 함께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도 확실히 알게 된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16,22-23)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쁨을 찾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말하길 인간은 호모 루덴스, 유희적 인간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어느 누가 슬픔과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에도 많은 종류가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쾌락적이고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닌 영혼이 즐거워할 수 있는 온전하고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 어느 누가 주는 기쁨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기쁨입니다.
곧 지금 이 순간 근심에 싸여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참된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이자 파스카의 신비이며 참된 구원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없음에 대해 울며 애통해하고 그러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근심이 나중에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나중이라면 전 복음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볼 그때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다시 본다는 것은 재림의 때 왕으로서 오실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는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이야기이지요. 사실 구약의 시기의 때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리는 시기가 첫 번째 울며 애통하며 또 근심의 시기이라면 이제 왕으로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이 사실 울며 애통하며 근심의 두 번째 시기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실행된 것처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꼭 지켜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살아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혹은 죽어서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희망하고 있습니다. 재림의 때가 오기를 하루하루 살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울며 애통해하고 근심의 삶이 기쁨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날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께 묻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묻지 않을 것의 의미는 “요구하다” 입니다. 즉 그날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신앙인의 삶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이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볼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다리는 삶이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기쁨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의 삶이 해산의 고통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며 고통의 삶을 살면서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아멘!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영세 받을 때 그 기쁨이 바로 오늘 성경이 이뤄지는 순간이라 봅니다.
흙먼지 공해에 시달리는 세상 오염 벗어버리는 영적 상황이라 봅니다.
배물 사상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 자녀 사상으로 탄생하는 영광입니다.
내가 나의 정신이 하느님 가족이라는 새 세상의 새아기로 탄생합니다.
이제 나의 존재는 주님의 부활로 생명을 되찾고 영복생활 보장됩니다
내 삶의 중심이 세상속물에서 하느님 중심 하늘정신으로 되는 겁니다.
이런 영광의 구원선물은 예수님 부활의 덕분이며 하늘 가족 생활이죠.
이 기쁨을 세상의 누구도 빼앗지 못하도록 주님의 기도로 지켜갑시다.
가톨릭알림 말: 인류가 하늘가족 된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죠.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가 바라는 귀하고 가치있는 것들은 고통 없이, 힘들고 괴로운 과정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게 되었을 때 마음이 만족하여 기쁨을 누리지요. 그런데 그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반드시 거치게 됩니다. 혹여나 별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원하던 것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얻은 것은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을 주지 못하지요. 기쁨과 고통은 서로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고 편한 것만 찾는 요즘 사회 분위기에서는 고통을 겪기 싫어서 기쁨을 포기해 버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게 싫어서 수학을 포기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참고 하기 싫은 것들을 억지로 견뎌가며 상대방에게 맞춰가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사랑하기를 포기합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참는 괴로움보다 그것 자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정말 더 클까?’라는 의심과 불신 때문에, 차라리 기쁨과 행복을 안누리는 쪽을 택하는 겁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면 삶이 주는 깊고 진한 맛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한 채 죽게 될테니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할거라고 하십니다. 그런 상황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근심과 걱정으로 매일 밤을 지새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근심이 주님께 대한, 그분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통해 ‘기쁨으로 바뀔 거’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세상 근심과 걱정, 고통과 시련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로 그것들이 더 커지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가 힘겨운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거기에 따르는 기쁨과 행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이 힘들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 동안 참고 조심하며 견뎌야 할 것들이 그렇게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기꺼이 그 과정을 감내하고자 하는 것은 ‘엄마’가 되기 위함입니다. 참된 사랑의 결실로 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그 기쁨이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 과정을 통해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 참된 행복, 무한한 기쁨 등을 생각하며 그 희망의 빛으로 지금 겪는 고통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둘 것은, 오늘 복음의 비유 속 여인이 그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내 안에’ 태어나셔야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태어나신다는 것은 내가 그분의 은총 덕분에 그리고 믿음 덕분에 하느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그 기쁨을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온전히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특별한 선물이기에, 내가 그분 부르심에 사랑의 실천으로 응답하여 맺어진 결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직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그 사랑의 선물을 놓치지 말고 잘 받아야겠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내 마음 웅덩이가 크고 깊게 파이는만큼, 더 큰 은총과 기쁨을 누릴 것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나눌 수 있는 기쁨.
박용욱 미카엘 신부님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누군가를 제치고 달려 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승자의 입장에서 기쁨을 누릴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경쟁에서 얻은 기쁨, 누군가를 패자로 만들고 손에 거머쥔 기쁨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요? 패자의 등을 밟고 올라선 승자의 기쁨은 정상에 오르자마자 내려갈 길을 걱정해야 하는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나의 승리를 함께 기뻐하던 이들이 질투와 시기로 등을 돌리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하느님을 뵙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하느님의 시선도 닮게 되지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 하시던 하느님의 시선을 닮아 세상 만물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눈뜬 사람은 더 이상 누군가를 패자로 삼아 얻는 승자의 기쁨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그분의 손길을 느끼기 더 쉬워지니 하느님을 뵙는 기쁨은 갈수록 크고 풍성해질 따름입니다. 끊임없이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서 기쁨을 찾는 세상 안에서, 신앙인들마저 서로 나누지도 못할 기쁨을 추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빼앗지 못할 영원한 기쁨을 고대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은 어디다 발 디딜 데조차 없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이 어딘지 모르게 서운하고 쓸쓸하고 불편하며, 누구 하나 마음을 나누고 싶은 이가 없거나,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을 때 깊은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2-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까지, 그 때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와 평화를 안겨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기를, 주님께 위안을 받고 싶어 하기를 바라보시며, 주님의 모든 것을 다 주시기라도 할 량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에게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던져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 다가갑시다. 주님께 의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수 있도록 주님께 우리 마음을 열고 우리의 슬픔과 아쉬움을 보여드립시다. 그리고 주님을 뵈옴으로써,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 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의 기쁨 안에 머물고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아멘.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주시는 분 <요한 16, 20-23> 5월 1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밖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생명을 내주면서 마음에 품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그 기쁨을 지킨 사람들이 무수해서 죽기까지 그 기쁨 속에 살다가 더 큰 기쁨을 영원히 간직하고 하느님 앞에 살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말만 앞세우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는 기쁨이며 어떤 죄에서도 용서하시고 보다 나은 위치에 올려놓으시는 기쁨입니다. 작은아들의 비유에서 잘 보았듯이 죄를 짓고 돌아온 아들을 죄 없이 살던 큰아들보다 더 기쁘게 맞이하시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같이 주님이 주시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은 어떤 죽음의 고통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변하지 않는 기쁨을 주십니다.
하루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려는 24살 된 미국에 사는 학생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질문하다가 “그 나이 되시기까지 삶의 중심에서 유혹이나 후회 없이 사셨습니까?” “없을 수 없지만, 사명감으로 살았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기도문에 있듯이 주님도 세 가지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듯이 사명감으로 이겨냈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음의 시련을 겪는 것을 이겨내는 힘은 나라에 대한 의무감입니다. 그리고 이 나이 90이 되도록 이끄시고 보호해 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플러스입니다. 없는 가운데 존재하게 하신 창조의 뜻을 따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며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또 하나의 큰 기쁨은 죄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죄인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뉘우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면서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고 모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란 이름으로 죄의 뿌리까지 찾아내어 복수심 조장하고 사람을 폐기 처분하는 세상을 보면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먼저라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불의한 마름을 용서하시는 비유에서 잠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하느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무한한 자비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 큰 자비를 베풀며 사랑을 보여줄 때 세상은 아름답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산 넘어, 들 넘어, 강을 건너 찾아내신 목자의 기쁨.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양이 아닌가 생각하며 오늘의 기쁨을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언제나
진통의 시간과
완성의 시간이
있습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이며
몰려드는
애통의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의 아픈
시작입니다.
십자가로
십자가를
벗어나고
십자가로
사랑에
도달합니다.
사랑과
십자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가야할 때를
아시기에
함께했던 기쁨과
다시 만날 기쁨은
빼앗지 못할
기쁨이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주님의 뜻과
하나로
결합되는
환상이 아닌
실체입니다.
주님의 기쁨 안에
소중한 우리가
있습니다.
어김없이
빼앗지 못할
기쁨을
출산하시는
우리의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기쁨의 실체가
다름아닌
십자가임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십자가가
탄생이며
만남이며
봉헌이며
사랑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오시면 어린 저를 보고는 꼭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그때는 되고 싶은 모습이 너무 많았습니다. 과학자, 의사, 판사, 대통령, 경찰, 소방관…. 그래서 매번 다른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그중에 하나는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이렇게 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신부가 되기 전, 신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글을 매일 같이 쓰고 또 책도 출판하리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어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신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 특수 사목 신부로 오랫동안 살지도 몰랐습니다.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재주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하는 강사 신부가 되었습니다.
미래는 자기가 생각한 데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의 뜻에 따라 지금의 내 모습이 된 것이 된 것이 아닐까요?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주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내 모습이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노력을 통해 주님 계획이 더 빨리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분명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주님의 패배에 기뻐하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처럼 보여도 결국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 편이 되어 주님 계획에 동참해야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이 기쁨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시련 후에야 부활의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아픔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승리의 주님이시기에 주님과 함께라면 분명히 승리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계획에 철저히 동참하는 주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에머슨).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근본적으로 결핍 투성이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기에,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근심 걱정이요, 진통이요, 고통입니다. 그저 아무런 고통 없기를, 무탈하고 승승장구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너무 얌체 같은 바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그토록 극심했던 고통의 완화되고 해소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견딜만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기쁨으로 승화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산고(産苦)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쌓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복음 16장 21절)1
그뿐이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길고 긴 코스의 반환점을 돌고 나서 느끼는 육체적 고통을 상상을 초월합니다. 결승점을 앞두고 느끼는 신체적 피로도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시 후 1등으로 골인하고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쓰게 된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과 환희의 고통입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감금이 난무하던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청춘들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을 드나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이 참혹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고통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동료 인간들의 더 따뜻한 연대와 동반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더 집중해서 바라봐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는 고통입니다.
기쁨의 씨앗: 희망하는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다시 보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관상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이 느끼는 근심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평화를 빼앗겼을 때 가지는 근심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잃는 고통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이 보이지 않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다시 부모를 잃은 고통과 같은 어둠을 견뎌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만나 자신이 인간이고 부모처럼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이 근원적인 불안을 잘 표현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로봇입니다. ‘하비’ 박사는 죽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은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한 가정에 입양시킵니다. 그 가정의 아이는 몸이 아파서 의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냉동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엄마 ‘모니카’는 로봇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동화를 읽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동화를 듣고는 자신도 ‘푸른 요정’을 만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냉동상태로 있던 모니카의 아들 ‘마틴’이 치료되어 돌아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데이빗이 마틴처럼 자기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데이빗을 산에 버립니다. 회사로 돌려주었다가는 데이빗이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푸른 요정을 만나 꼭 인간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모니카는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진짜 아들인 마틴을 위해 데이빗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인간 사회를 방황하지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로봇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공지능 로봇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 불안한 세상에서 간신히 ‘조’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으로 자신을 만든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을 친절히 맞아줍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하비 박사가 자신과 똑같은 로봇을 이미 수십 개, 수백 개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아버지 하비 박사를 통해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푸른 요정을 만납니다. 비록 동상이기는 했지만, 그 요정에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2천 년이 지납니다. 지구는 멸망하여 더는 인간이 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데이빗의 기억을 보고 그가 인간이 되고 싶어 2천 년 동안 푸른 요정 앞에서 청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외계인들은 그도 인간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 모니카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기억을 넣어줍니다. 데이빗은 이제 엄마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엄마 품에 잠이 듭니다.
데이빗은 로봇이면서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희망은 먼저 인간이 희망해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데이빗은 희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에 의해 정말 인간이 되는 꿈을 꿉니다. 데이빗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은 원한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큰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지닌 이가 먼저 믿어주고 희망해주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들이 그렇게 하였고 그들만큼 자랐고 개들만큼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죽음을 이기시게 해 주시어 우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예수님은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당신이 인간이 되셨고 부활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자기의 짧은 오른팔을 뻗어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만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랑 똑같구나!”
키릴의 근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성장하여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손자로 받아 준 할아버지도 자신처럼 한쪽 팔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릴에게 한 집안으로 입양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모험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자기를 새 부모가 사랑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자신을 그들과 같은 모습임을 보여줄 때는 기쁨에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모습을 한 부모님인 하느님께 안기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근심과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다 보면 키릴처럼 기쁨을 맛볼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믿음과 의지입니다. 키릴은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온전히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수준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실 희망은 고통스럽습니다. 도파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항상 더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께서 이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시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희망하게 합니다. 믿게 합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죽음도 두렵지 않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기쁨은 바로 이 성령을 받는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며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수준의 존재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전통적으로 서품성구를 정하고 있습니다. 서품상본 앞면에는 서품성구에 맞는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서품성구, 서품일자, 첫 미사, 서품자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저는 31년 전에 서품을 준비하면서 서품성구를 정하였습니다. 저의 서품성구는 시편126장 5절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였습니다. 다른 많은 성경말씀이 있지만 왜 제게 그 시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운명처럼 그 말씀은 저를 사로잡았고, 저의 사제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말을 군대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훈련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실제 전투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피와 같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애벌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애벌레가 불쌍하다고 고치를 밖에서 열어주면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야만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과 희망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때로는 의견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을 보았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쁜 이야기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행복만을 이야기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통을 가감 없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인은 근심에 쌓입니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 박해와 순교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은 ‘불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소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릴 것이고,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기준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노폐물이 걸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도, 소화가 잘 되어야만 합니다. 소화가 안 되고, 배변이 안 되면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없고, 우리의 건강은 점차 나빠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지 마십시오.”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사랑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올바르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올바름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진실하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진실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아우르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아우름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내어주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내어줌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이어주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이어줌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살리기에 겪어야 할 아픔이라면
끝내는 살림의 기쁨을 낳으리니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이 기쁨 맘껏 누릴 벗들이 있으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기쁨 품은 아픔을 품겠습니다
누구도 빼앗지 못할 기쁨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갓 태어난 조카를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봤던 때가 생생합니다. 어른들은 눈도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를 보며 누구를 닮았다고 열심히 추리하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변하는 얼굴 표정 하나에 금방 아이가 웃었다며 함께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생명이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힘이 온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듯 아이가 태어나는 기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머잖아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감내해야 하겠지만 그 진통의 시간을 겪고 나면 누구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생각해보면 갓난아이의 탄생 역시 고통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산모와 아이는 출산과 출생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아이는 지상의 새로운 삶을 위해 먼저 엄마 배 속에서의 삶을 마감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죽음을 통해 껍질을 깨고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삶도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통해 성장하고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마침내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수없이 고통의 순간들을 맞닥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때로는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서 얻게 될 기쁨이 크다고 했을 때 그 고통을 이겨낼 용기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통이 다가왔을 때 더욱더 열정을 가지고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말로 표현 못할 극도의 고통이 앞에 놓여져 있었지만 결코 예수님께서는 거부하지 않으셨고, 또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을 받아들이시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지나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6년 전에 아버지께서 선종을 앞두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내가 80평생을 하느님 안에 살아온 것이 바로 은총이자 기적이야. 나는 이제 하느님께로 돌아가니 늘 기도하며 걱정하지 말고 기쁘게 잘 지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은총이고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근심은 그렇게 주님과 함께할 때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주님이 모든 근심의 치유자이시며 사랑과 기쁨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좋은 그림 한 장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목표의 산을 오른다. 높은 산이다. 숨을 몰아 쉬며 자기와 싸움을 했다. 고산증, 낮과 밤의 일교차, 산소결핍, 심각한 고통을 극복하고 목표에 올랐다.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이 환호는 목표에 이른 기쁨이다. 기쁨을 간직한 좋은 그림 한 장 마음에 담고 하산을 했다.그 기쁨은 또 다른 고통을 극복할 삶의 에너지가 된다. 이것이 기쁨이다.
높은 산, 꽃들이 피어나 향기롭다. 맹위를 떨친 추위를 견디어낸 인동초가 곱게 꽃을 피웠다. 이는 인동초만이 지닌 기쁨이다. 생명은 고통을 살아야 성숙한다. 우리는 곧 잘 십자가에 대하여 웅변적 설교를 한다. 마치 자기가 십자가를 극복한 유경험자처럼 영원한 생명의 값진 도구라고, 그런데 정작 그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치고 대부분 십자가를 싫어한다. 그가 천당에 가서 보니 입만 와 있었다.
나이들고 인생이란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지나온 삶을 돌아 본다. 하느님과 나 밖에 그 어떤 누구도 없다. 나는 하느님을 다시 본다. 그때 하느님 만나 뵈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림 한 장, 산모가 심한 진통 후 아이를 얻었다는 기쁨, 이보더 더 좋은 그림은 없다. 이 그림 한 장으로 산모는 또 앞으로 다가올 영원성을 지니고 산다. 고통이 만들어 낸 기쁨은 바람을 넘는 언덕처럼 값진 생명 에너지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16,21)
삶의 동력이 되어 준 기쁨, 좋은 그림 한 장, 나에게 있는가? 나에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워낸 부활과 승천이다. 내가 오늘을 사는 삶의 에너지이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기도하면서도 주님의 위안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주님의 은총과 위로를 기다리는 마음이 답답하리만치 간절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2-23)
어릴 때부터 간직해오던 우리의 꿈이,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꿈이 내 개인적인 풍요와 안락을 가져다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인격의 풍요와 정진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들 모두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 열매라면, 주님께서 그 꿈이 이루어질 만한 조건과 상황이 채워지게 될 때,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진정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불가사의하고 간절한 염원들이 채워지고 이루어짐으로써 주님께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 피신하는 이 몸을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헤아려주소서.’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새 생명을 탄생시킨 후에는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그 진통의 고통을 잊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하신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는 그분의 부활 의미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건너가는 것과 같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도, 내가 새로이 태어날 때도 그 기쁨이 하도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절) 희생과 고통이 지불되지 않은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지불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주님에게서 오는 이 기쁨은 그렇기에 자기가 지불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지불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때,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23절) 하신 것 같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충만해질 것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신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고통이 없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과 싸움이다. 나 자신과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다. 이 고통을 지불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앙인은 미래를 예수님께 맡기는 기인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울겠지만 곧 그 반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해산할 여인의 진통걱정이 아이를 낳으면 기쁨으로 바뀌는 것 처럼요.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께 미리 알려주신 자상한분이셨습니다.
시간 초월의 눈으로 보시는 예수님과 시간에 매인 제자들의 모습이죠.
조금 후에 닥칠 일을 전혀 모르고 자기 생각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은 모르는 미래라며 거부하고 부정까지도 하니까 안타깝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 그 이상은 하늘에 맡긴다고는 합니다.
신앙인들은 이점에서 미래를 예수님께 맡기는 미래지향 기인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하여라.
이기우 신부님
부활 제6주간 수요일이었던 그제가 부활 후 40일로서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승천 후 제3일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할 때에 진통을 겪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고통을 잊어버리는 이치를 비유하여, 십자가의 고통이 괴로울 것이나 부활의 기쁨이 이를 능가하리라는 가르침으로 사도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과연 이 가르침대로,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전히 현지 유다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던 바오로와 그 일행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격려를 받아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공동체를 건설하였습니다. 그가 들은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사도 18,9-10)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서 가장 오랫동안이나 선교한 에페소에 비하면 꼭 절반 가량의 기간과 노력을 코린토에 들인 셈이었는데, 이는 그의 선교 구상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어림잡아 2대1로 나타낸다고 할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신 섭리적 구상에 따른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수 부활 같은 신적 메시지는 다만 고백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에 담긴 가치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에서도 또 에페소에서도 큰 공동체를 세웠으며, 로마의 복음화와 더 나아가서 유럽 대륙의 복음화 과업이 이렇게 하여 준비되었습니다.
복음화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증언이라는 가치가 실현된 결과입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이 신앙과 증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했던 희생이 컸고, 그 희생은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끝내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까지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에 대해 무지하던 그리스인들에게는 창조주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쳐 주어야 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계시된 신앙을 물려받았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오해받으시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길을 고스란히 걸으며 십자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메시지의 진정성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참된 영과 거짓 영을 식별해 주고 참된 영을 보내주시는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보편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 더 나아가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 길이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벽과 이승훈, 권철신과 권일신, 정약전과 정약종과 정약용 등 한국교회의 초기 사도들 역시 무신론적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린 유림들과 조정에 대해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명을 바침으로써 증거하고자 했고, 무신론적 풍조에 억눌려 다신교화되어 버린 전통 신관에 대해서는 참된 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만 오는 것이고 나머지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조상을 공경하는 영일 뿐이므로 무분별하게 신의 이름을 붙여서는 미신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이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임금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는 무리라는 터무니 없는 유림측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야말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참종교, 즉 임금 중의 임금이시오 큰 아버지이심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쳤습니다. 또한 단군이든 또 다른 조상이든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무속과 역술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영적으로 식별하였습니다. 즉, 조상은 공경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일 수 없으며, 단지 그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숭배해 왔으며 그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올바로 계승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수행한 영적 식별 작업이었으며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려던 노력이었습니다.
개인에게든 민족에게든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고대에서 행해진 그리스인들과 유다인들의 역사적 사례와 조선 시대 유림들의 역사적 사례에서 확인되었듯이, 그릇된 영에 이끌리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어 멸망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보편 초대교회의 희생어린 노력으로 로마의 복음화를 이룩했듯이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면 한국 초대교회의 희생에서 시작된 노력도 머지않아 성령의 이끄심으로 민족 복음화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식별과 신성의 증거라는 사도직 활동은 우리 신앙 선조들을 이어 받아서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선교 활동입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에게 내려주신 격려의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활약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旅程. -파스카의 믿음과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저는 행복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반道伴이자 친구親舊인 주님과 날로 깊어져가는 우정이 참 행복의 비결입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친구인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전우이자 학우이자 형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과의 전우애戰友愛가, 학우애學友愛가, 형제애兄弟愛가 날로 깊어져 갈 때 참행복입니다.
3박4일의 피정을 끝내고 귀가하는 자매가 떠나기 전 만남을 청했습니다. 두 번째 면담과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2009년부터 수도원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으니 무려 13년이 지났습니다. 수도원에 믿음의 잔뿌리를 내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매와 면담시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오자마자 떠나는 기분입니다. 너무나 시간이 빠르게 지납니다. 어제가 오늘같고 그날이 그날같습니다. 객관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는데 웬지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믿음 부족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기에 두렵고 불안한 것입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충실히 사는 것이 답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오늘이 답입니다. 오늘을 믿음으로 잘 살아야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고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어 즉시 두거지 보속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성가를 4절까지 부르라 했고, 하나는 제일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에 “웃어요”라는 초록색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저산도 옮기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다도 가르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생명 바치라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넋을 다하리 믿음으로”(성가480,1-2)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20년전 선물로 받은 성서가 이 말씀 부분은 너무 많이 사용했기에 누렇게 바랬고 한쪽 끝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참 많이 써드린 말씀 처방전 구절입니다. 힘들고 절망스러운 환경일수록 꼭 이 말씀 처방전을 써드렸습니다. 사람은 그냥 놔두면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경향이 있기에, 살아있는 그날까지 부단히 나를 주님께 끌어 올리는 분투의 노력이 영적전투의 요체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새롭게 기쁘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이래야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매일 평생을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평생 매일 강론을 써왔습니다. 공부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이자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새벽 강론쓰는 시간입니다. 저절로 부르게 되는 ‘기쁜 날’이란 성가(479)입니다.
“주님 말씀 받은 오늘 기쁘고도 복되어라.
기쁜 이맘 못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1절에 이어 2절, 3절 가사도 참 좋습니다.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의 우정이 깊어갈수록 기쁨과 감사입니다. 참 기쁨은 주님께서 선물하시는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는 날인 오늘이 바로 기쁨의 그날입니다. 기쁜 날이자 모든 것이 해소, 해결되어 물을 것이 없는 참행복한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행복도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발견하는 파스카의 행복이요, 바로 이 행복을, 이 기쁨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참 자랑스런 것이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할 것 없습니다. 내 선택에 달린 기쁨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참 멋지고 상쾌한 날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 5월은 대부분 좋은 날들이었습니다. 지난 밤 약간의 단비로 가뭄으로 타던 대지가 아연 생기가 돋았습니다. 어제 아침 정원 산책시 떠오른 시입니다.
“밤새
약간 내린 단비로
시들어 누렇게 말라가든
풀밭이
살아나
파릇파릇 생기가 돈다
영혼밭에
기도가 바로 그러하다.”
이래서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혼에 내리는 단비입니다. 기도는 영혼에 물주기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믿음’, ‘온유와 겸손’,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 모두가 파스카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니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이, 전우애가, 학우애가, 형제애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늘 함께 계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주님은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환시중에 나타나 그를 격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함이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늘 함께 계신 주님과의 깊어져 가는 사랑과 신뢰의 우정이 결정적인 답입니다. 보십시오.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던 갈리오 역시 바오로에 호의적이라 유다인들에 부화뇌동 동조하지 않고 실제로 바오로를 도왔으니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어 파스카의기쁨과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제 좋아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고난 뒤에 얻은 기쁨은 참 기쁨입니다.<요한,16/20-23ㄱ>5/2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온갖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당한 다음 다시 살아난 부할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6주간 누리다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의 맞이하고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를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작은아들의 비유 속에 많은 고난를 받고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자비의 은총을 받고 큰 기쁨 중에 사는 것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항의를 하면서 대들었으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고난 뒤에 얻은 기쁨은 다시 빼앗기지 않습니다. 주님의 박해자 사울은 주님을 만나 바오로 사도가 되어 죽기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기쁨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도 한 번 잃은 주님을 아버지 집에 가서 찾은 다음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살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가진바가 귀한 줄 모르고 살다가 잃은 다음 귀한 것을 알도 다시는 잃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잃었던 신앙 찾으면 죽기 까지 지키고 신앙으로 얻어지는 기쁨 속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근본밉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나의 존재는 없는 것이고 존재에 따르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포도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잎도 나고 꽃도피고 열매도 맺듯이 주님 아니시면 아무것도 붙어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립니다.
나무 뿌리에 연결되어야 거름과 물을 공급받고 나무를 통해 흐르는 줄기를 따라 가자가 살게 됩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함같이 주님에 붙어 있어야 주님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어제 만는 사람이 “ 신부님 저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하기에 “잠간 숨을 멈추어 보새요.” 만일 숨을 쉬도록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주님이 아니 계시면 숨을 쉬는 공기도 없고 태양의 힘도 없다면 나는 살 수없습니다. 저는 숨을 쉴 때 마다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땅이 없고 하늘이 없으면 사람이 지금처럼 살아 움직이지 못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통해서 느끼고 보고 듣고 숨쉬고 움직입니다. 또한 오늘이란 이 시간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 없을 수도 있는 데 있다는 것 감사 할 일이 아닙니까?
또한 하느님으로 세상 오시어 하느님 자비 사랑에 초대받고 기쁨이 넘치는 잔치 상에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저는 주님의 기도를 드고 할 때 마다 이렇게 감동합니다.
다급하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아버지의 거룩하심 따라 살아 아버지이름을 빛내고 아버지를 찾은 사람은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잔치 상에 초대받고 “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그 나라에 살려면 길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과 같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는 감동을 주고 기도를 들면서 전율을 느낍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문을 알고 입으로 외우지만 말고 하나하나 몸으로 실천하며 기쁨 중에 살도록 기도합니다.
이우진 요셉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과거 신학교에서 힘들었던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시험이었습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누구든 좋아하지 않겠지요. 오죽하면 신학교는 시험만 없으면 천국이라고 할까요? 정말 시험 전에는 죽을 맛이지요. 공부하기도 싫고, 공부하려고만 앉으면 왜 이리 할 일들이 생각날까요? 평소에는 귀찮아서 안하던 청소나 빨래도
왠지 지금 당장 해야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래도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험을 끝내면 그 해방감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진정한 기쁨이지요. 그날은 왠만해선 화도 안냅니다.
모두가 기분이 좋아요. 물론 시험을 망친 것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요. 아마 모두가 이렇지 않을까요? 우린 결국 모두 사람이니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것을 여인의 출산에 빗대서 말씀하십니다.
감히 어떤 것을 출산에 비할 수 있을까요? 출산은 참으로 동전의 뒷면에서 앞면으로 뒤집히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보통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지요. 그렇게 너무나 칠흑과도 같은 어두운 동전의 뒷면을 출산이라는 행위로 넘기면, 그 뒤에는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밝은 앞면이 나옵니다. 세상에 나와 배우자를 닮은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대부분 어머님들은
이 순간 출산 때의 고통을 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너무나 크기에 고통은 지나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머니는 대단하다고 하는가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이지요. 출산을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마주대고 생각해봅니다. 모든 것이 들어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그만큼 기뻐하나요? 근심을 잊을만큼 행복한가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기쁨의 시기를 보내고 있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주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지 늘 잊지말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찬란한
오월의
맑은 아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기쁨은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의
소중한 이유이다.
삶을 새롭게
보게 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만남도
기쁨도
새롭지 않으면
십자가를 너머
부활을 볼 수 없다.
기쁨은
예수님같이
사람들 속에서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함께 하는
참된
기쁨이다.
진통의 시간도
축복이
되게하는
탄생의 기쁨이다.
탄생의 기쁨이
이러하듯
다시 보게 되는
부활의 기쁨은
오죽하랴!
고생 끝에 낙(樂)이
오듯 기쁨은
다채로운
이 여정을 걸어간다.
삶 자체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고통과 기쁨임을
내포하고 있다.
온전한 기쁨을
깨닫기까지
고통을 통해
나아가는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한다.
영원한 사랑은
새로워지는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새로운 관계
영원한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찬란한 오월이
출렁거린다.
새롭고
다르게
만나게 되는
오늘의 기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