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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섬' 하의도.,前 김대중 대통령 생가.| 기본 자료실
하의도(荷衣島).
하의도.,신도 해수욕장.
하의도 옆섬 신도에서 2박하면서 신도 및 대야도 구경 웅곡항 섬 공영버스로 당두항으로 이동, 당두선착장에서 소형낚싯배로 10분 걸려 신도로 건너면 바로 눈앞에.,능산도.
섬과 섬 사이를 지그자그로 돌아 신도선착장에 도착, 선착장 마을에 이만수 선장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섬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기는 하지만 걸어서 돌아도 1-2시간이면 충분할 작은 섬. 주민도 불과 19가구 정도에 불과하며 최연소자 50세, 최연장자 89세 장노년층. 선착장 큰마을, 해수욕장 옆 안태마을 두 곳. 내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하의도 본섬을 둘러보고., 귀경할 예정. 신도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우의도. 큰 낚싯배(시속 65km)로는., 15분 소요거리. 대야도 뒤쪽으로.,도초도, 비금도 등 옹기종기. 비금도에서 1박 후 다시 2시간 더 걸려.,우이도. - 어느 피서객의., 하의도 여행 계획 -
하의도.
온갖 고난에서도 꽃을 피우는 인동초처럼 꿋꿋이 자리를 지켜 온 '평화의 섬' 하의도. '물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전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공주의 섬"이라 부르는 까닭은 뭘까?'
'상의도 하의도'.,섹시한 김태희(청담동에서.)
하의도
스케이트 벗고, 하의도 벗은 이상화.
목포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도초도로 직접 닿는 방법(퀘속선/50분)
2016년 8월 10일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김대중 前대통령의 고향 하의도를 가기 위해 목포 여객터미날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하의도 염전.,김무성. 서울 사당역에서 6시 10분 출발, 5시간 후 목포 도착. 목포 평화광장 부촌식당에서 바지락초무침 점심식사. 목포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 출항시간은 오후 2시.
조양 페리호 & 쾌속선
'목포~하의도' 쾌속선 1시간 10분, 페리호는 2시간 30분. 여객선은 남신안농협2호로 2016년 8월 10일.,첫 취항한 배. 정원 224명에 자동차 수십대를 실을 수 있는 제법 큰 여객선. 안좌도-자라섬--장산도-옥도-장병도 등을 거쳐 2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하의도 웅곡항 선착장에는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대통령 태생지 하의도(荷衣島)’ 표지석과 함께 ‘하의도 상여소리 노래비’ 등이 세워져 있다.
하의도는 서남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목포에서 약 59.7km 떨어져 있는 섬이며., ‘연화부수(蓮花浮水)’ 즉, 물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여 ‘하의도’라 부른다.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된.,하의도.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2010년에 착공하여 2017년 6월 완공 계획 신안군.,'하의도~신의도' 교량 길이는 1389m 다리 명(名)은.,공모 중. '어떤 이름으로 명명될까?'
1004의 섬.,신안군.
목포항
2017년 하의도 앞바다., 풍력단지 조성 계획.
흑산도 다음으로 육지에서 먼 섬으로 전체면적 34.6㎢, 해안선 129.8km, 인구 2천명 신안군 '1004섬' 중 작은 섬. 전국의 지형을 답사 중에 이 섬에도 들르게 되어 지형을 보니 '연꽃이 활짝 핀' 연화만개(蓮花滿開) 형상.
'마치, 바다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듯.,' 그후로 연화부수(蓮花浮水) 지세라 하여 연꽃 荷, 옷 衣, 섬 島.,하의도(荷衣島)라 명명.
음양설에 의거한.,음산함, 즉 낮고 평탄한 지세.,하의도. 근현대사 역사적 발자취가 살아 숨 쉬는.,하의도. 덕봉강당, 농민항쟁기념관, 대통령 생가가 있는 곳. 덕봉강당은 유년기 김대중에게 꿈을 일깨워준.,서당.
덕봉강당을 설립하여 중국, 일본까지도 돌아다니면서 2000여권 고서(필사본)를 모아 초암의 높은 학문을 배우러 나주, 신안 등지에서 수 천명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대리에 봉람제를 신축, 덕봉강당이라 명명. 오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퇴계 율곡, 초암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 333년간 농지탈환운동이 벌어졌던.,하의도.
조선 정조 때의 세도가에 대한 항쟁에서부터 미군정에 대한 항거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하의도. 조선 인조가 정명공주(1603~1685) 부마에게 하사. 그로부터 하의도는 333년 간 주민들이 토지반환 소송. 한국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하의도.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서 333년을 싸웠던 것.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기나긴 농민항쟁이었다. '농민항쟁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걸까?' 임진왜란 후 하의3도에 정착한 주민들이 개간하여 만들어진 토지 20결(약 8만평)이 1623년 인조가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 결혼때 풍산홍씨 가문에게 4대손까지 무토사패(無土賜牌). '인조는 왜 풍산홍씨 부마 가문에 <하의 3도>를 무토사패 한 것일까?' ................................ ................................ 정명공주는 선조와 계비 간 첫딸이자.,인조의 고모. 광해군에게 폐비된 인목대비 딸이자 영창대군의 누나. 인조 보다 훨씬 나이 어리지만 왕실 종친 서열로는.,웃어른.
화정 드라마.,정명공주. 인목대비는 '선조의 차남' 인 광해군보다 9년 연하. 아들보다 무려 9살 어린.,계모. 선조 사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서인 한 것. 선조는 51세 되던 해에 정비가 사망하자 19살 인목왕후(김제남의 딸)를 계비로 맞아 28세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얻은 첫딸.,정명공주.
늙으막에 접어든 선조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정명공주를 애지중지 총애하였다. 그러나, 선조 사후 즉위한 광해가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폐출하였을 때 딸 정명공주도 함께 감금생활을 하였다. 서궁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서 11년 간 갇혀 살며 핍박 받았던.,두 모녀. 인조는 이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고.,쿠데타. 인목대비는 신분이 복권되었고, 정명공주 역시 신분이 복권되었다. 정명공주 나이가 21세 때의 일이었다 정명공주는 16세부터 21세까지 어머니인 인목대비와 함께 지내느라 혼기를 놓치고 21세 노처녀가 되어 있었다. ............................ ............................ 1623년(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에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인조가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인조는 자신의 거사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두 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주는 등 온갖 최상의 예우를 다했다. 반정 사흘 뒤 예조의 청을 받아들여 정명공주의 부마간택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공주의 나이가 많은 탓에 부마 후보자의 연령제한까지 푸는 등 소동을 벌인 끝에 8월 11일에 이르러서야 초간택으로 9명을 선발 9월 12일 재간택에서 중추부 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이 부마로 낙점. ...................풍산홍씨(豊山 洪氏).................... 경북 안동시 풍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년(고종 29년) 문과 장원. 고려 국학직학(國學直學), 묘소는 풍산면 신성포 오산당. 풍산 홍씨는 조선후기 세도가문으로,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30명을 배출. 홍주원(洪柱元) : 선조의 부마 홍만용(洪萬容) : 숙종 때 예조판서 홍만형 : 병조좌랑, 이조좌랑 홍현보(洪鉉輔) : 영조 때 예조판서 홍봉한 : 영조 때 영의정, '정조 생모'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낙성 : 영의정 홍인한 : 좌의정 홍국영 : 홍만형 5대손으로 정조 때 도승지 숙위대장.,4년간 세도정치 홍양호 : 학자 홍만선(洪萬選) : 숙종 때의 실학자,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 정조후궁 원빈 홍씨 장조(영조의 차남)정비 헌경왕후 정명공주(선조의 장녀)부마 홍주원 숙선옹주(정조의 서녀)부마 홍현주 .................................................. 홍주원은 공주보다 세살 아래 18세. 두 사람의 혼례는 해를 넘기지 않으려는 인목대비 뜻대로 음력 12월 11일에 치뤄졌다.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신혼집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마련된다. 50칸 법적 공주궁의 수준을 넘는 규모.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뒤 삼촌의 왕위를 찬탈했던 인조에 의해 두 모녀는 선조 때 신분으로 다시 복권. 인조의 보살핌 속에서 행복을 되찾는다. 그러나, 인목대비 사후 상황이 달라진다. 인목대비 처소에서 발견된 비단에 쓰인.,백서. 왕을 폐하고 다시 세우자는.,백서(帛書) 세 폭. 평소 의심이 많은 성격인.,인조. 발끈하여 그 배후를 밝히라고.,어명. 인조 의심병이 도질 때마다.,가시방석. 인조 재위 동안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광해군 때 유폐 생활 같았다. 인조는 정의구현을 부르짖으며 쿠데타에 성공하여 보위에 올랐지만 정치력 자체가 워낙 부족한 인물이었다. 인조는 국제정세에 매우 어두웠고 외교감각, 위기 극복능력도 아둔하여 백성들을 참혹한 전란과 시련에 빠트린 것. '즉위 초 공신' 이괄의 난으로 비롯된 공포심. 반란군과의 항전의 실패로 인한 수치심과 용렬함. 재위 내내 병자호란 당시의 트라우마에 젖어있던 인조. 조선을 개혁하려 한 소현세자의 꿈을 짓밟고 독살한.,의심병. 인조는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사했고, 손자들까지 제주 유배. 인조는 의심병으로 반인륜적인 조치를 거리낌없이 했다. 인조가 즉위 초에는 무한 선물공세. 반정 정권이 안정된 후.,냉냉한 태도. 인조가 말년에는 변덕스러움이 죽 끓듯. '정명공주가 혹시나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내지는 않을까?' '그전에 선수를 처야 하지 않을까?' 툭하면 의심병이 도져서 내시와 궁녀 나인를 시켜 공주 처소를 감시하기 일쑤. '혹시, 누군가에게 밀서를 보내려고 하지나 않으려나?'
광해군 때에는 서예로 마음을 달랬지만 인조 말년엔 아예 절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처럼 죽어 지내야만 했다. 조선역사 상 여성으로는 유일한 당대 명필인.,정명공주.
정명공주는 이 백서의 배후로 의심받고 한때 곤경. 인조반정 공신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 극복. 1649년(인조 27년) 음 5월 8일, 병석의 인조는 55세에 운명. 병석에 누웠던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의식을 잃자 세자가 약지를 깨물어 입에 피를 흘려넣었지만.,소용 없었다. 사실, 백성들 그 누구도 인조가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정명공주는 인조 사후 83세까지 효종, 현종, 숙종 3대 왕실 웃어른. 조선의 통치이념은 '충효사상' 유교관. 공주는 말년까지 최고의 대접을 받았으며 천수를 다하도록 부귀영화와 행복을 누렸다.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그녀의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 '사도세자 비'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원빈 홍씨 등은 모두 정명공주의 후손들이었다.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공주의 집이 50간을 넘지 못하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당시 200간이 넘었고 경상도에만 8,076결의 땅을 하사 받았고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까지 하사.
거기에 더하여 암태도까지 소유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가 반정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정명공주에게 선물공세를 펼쳤던 결과. 그후, 공주는 향년 83세까지 효종, 현종, 숙종 3대 왕에 걸쳐 왕실 웃어른으로 대우 받은 결과. 조선의 역대 왕들이 사패했던 공주의 재산.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다. 조선시대 사패 재산은 곧, 가문의 영광. 그로부터 333년 간에 걸쳐 소작쟁의, 소유권 분쟁 등. 농민항쟁 역사가 이어진 것.
............... 암태도 소작쟁의.............. 1922년 24건, 1929년엔 1590건이나 발생. 1923년 암태도 농민 500여 명이 벌인 소작쟁의. 7, 8할 소작료를 못 견뎌 4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 지주가 응하지 않자 소작료 불납(不納) 동맹. 1924년 4월 면민대회를 열어 규탄한 사건이다. ..............................................................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巖泰面)에 속하는.,암태도.
2011년 4월 목포에 있던 신안군청이 압해도로 이전 (압해도 49.12㎢, 해안선81.9㎞.)
2013년 12월 김대중대교를 통해 무안군과 연결 2010년 9월에는 암태도를 잇는 새천년대교 착공.
백제시대 아차산현. 신라시대 압해군. 고려시대 나주목 조선시대 나주목. 1896년 지도군 압해면. 1914년에 무안군으로 이속. 1969년에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군 압해도는 전남 신안군 압해면이 되었다. 낙지 발 모양 지세라 하여 압해라 불렀다고 한다. 섬이 바다.,海를 누를 압(押).,형상이라., 압해(押海).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押海面) 학동리(鶴洞里) 2008년 4월에 개통한 압해대교(목포~압해도.,연륙교).
한반도 섬에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국가에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하여 동해, 서해 남해 섬들은 무인지경이 되었다. 국법으로 금하였으니 섬에서 사는 자체가 죄.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전후로 섬의 중요성을 인식. 거주가 허락된 섬의 역사는 약 삼사백년. 조선시대 공도정책 이전에 수천년 이어온 섬의 역사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황폐화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사 지을 땅을 만들었고 국법에도 미개간지는 임진왜란 이후에야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역시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 개간, 갯벌 간척으로 농토를 만들었다. 1623년, 인조는 하의3도를 정명공주에게 사패. 그러나, 이미 개간된 땅 24결이 있는줄 몰랐던듯.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단서.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홍씨가문은 하의도 소유권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하여, 하의3도 주민들이 개간한 땅도 홍씨가문 소유,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섬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해 결세를 거두어 갔다. 결국, 주민들은 국가와 홍씨가문에 이중으로 세금을 냈다. 일토양세(一土兩稅)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도 거세졌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땅마저 빼앗기자 땅을 되찾기 위해 333년간 대를 이어 싸웠다. 하지만, 권세를 지닌 홍씨가문에 번번이 패했다. 구한, 말 하의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또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로 넘어갔다.
'하의3도'의 땅은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주민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하의3도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 1945년 8.15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333년만에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되어 있는 하의면의 본 섬. (면적 14.46㎢, 해안선 길이 32㎞) 하의도는 연화부수형의 지형인데 연꽃으로 만든 옷 모양이라 하의도. 옛 이름은 고이도 혹은 고의도였다. 일본 헤이안시대 승려 엔닌(圓仁, 794∼864) 그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고이도(高移島)로, <삼국사기> 효공왕(?∼912) 3년조 기록에는 고이도(皐夷島). <고려사> 권1 건화4년(914)조에는 고의도(皐衣島)로 표기.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8월27일 기사에는 하의도(河衣島). 고이도에서 고의도, 고의도에서 또 하의도로 표기가 변해온 것이다. ....................... ........................ '공주의 섬' 하의도에서 태어난.,김대중 이섬에서 333년간 농민항쟁의 장구한 역사를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며 정치가로서 입문한 후 인동초 같은 고난의 길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것. '정치는 어떻게 해야, 나라가 잘될 것인가?' '어떻게 정치를 해야, 민초들이 고초를 덜까?' '공주의 섬' 하의도는 그에게 정치 스승이었을듯.
'전 김대중 대통령 생가' 주변 하의도 후광리에는 염전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와 함께 꼭 찾아가는 곳이., 큰바위얼굴. 어은리 앞 무인도인 죽도(竹島) 형상이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하여.,큰바위얼굴.
그곳에서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린다. 하지만, 죽도의 전설에 의하면 원래 사자바위라고 불렸단다. 암자를 짓고 큰 수사자를 키우며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피서마을에 자주 출몰해 큰 피혜. 주민들과 가축들까지 해치자 고승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승은 수사자와 함께 큰 호랑이 사냥에 나서 결국, 호랑이를 잡았다. 고승은 호랑이를 마을 앞산의 석굴에 가두었지만 애석하게도 고승과 사자는 호랑이 사냥 중에 큰 부상을 입어 죽음을 맞게 된 것. 마을 사람들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죽도에 고승과 사자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죽도는 점차 사자 형상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이를 사자바위라 부르게 되었단다. 또 호랑이를 가두었던 바위는 범바위라 부른다.” ..................... .....................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향 하의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2009년 4월. 그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 -김대중 -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같은 해 8월 18일 85세에 운명. 마지막 고향 방문 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겼던.,말.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3도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자" 1924년 1월 6일 하의도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둘째 부인인 장수금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서자였다. 아버지는 첫째 부인과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김대중은 어머니가 낳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남이었고 아버지 집은 본 마을. 둘째부인인 어머니 집은 간척지인 후광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간척지 후광리에서 따로 살았다. 밥을 해주는 함바집을 하고 막걸리도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당시 김대중은 유학자 초암 김련이 세운 서당 덕봉강당에서 공부했고 4년제 초등학교가 생기자 서당 학력을 인정받아 2학년 편입해 4년과정을 수료. 그후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섬에서 뭍으로의 유학이란 지금 외국유학 만큼이나 어려운 일. 1924년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하의도. 어머니는 목포로 나가 뒷바라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1945년 8·15해방 후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948~1950년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와중에 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 1951년,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흥국해운·대양조선공업 사장. 1962년 이휘호 여사와 결혼
. 하의도 후광리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는 고적하다. 김대중 생가의 추모관에는 그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1973년 박정희 군사정권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경에서 납치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생환. 동경납치사건 직후 기자회견 그의 얼굴은 온통 상처.
사진 속 그 눈빛은 아직도 생사를 헤매는듯 그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가물거렸던 것일까. 1987년 5.18묘지를 방문하고 오열하는 그의 사진. 전두환 군사정권의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풀려나서 미국 망명길에 썼던 그의 글은 상여소리처럼 처연하다.
미국 망명길에 앞서 1981년 청주교도소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서 아내와 두 아들을 면회하는 그의 등은 한껏 굽었다. 또 다른 사진은 삭발을 당하고 감옥에서 책읽는 모습. ‘정치가 예술’이라던 김대중.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썼다.
가난한 자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하던 자와 빼앗던 자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대열에 참여케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치는 예술이 된다.” - 김대중 옥중서신 -
그러나 역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나와 염전 길을 지나면 면소재지가 있는., 곰실(웅곡)마을이 나타난다. 종남리 마을 어귀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쪼금 매다 오요. 녹두밭도 매고 오요.” “팔십 닛이나 되요. 아들이 하지 마라하면 오냐 안할란다 해놓고 하요. 가만 앉아 있어 머 하것소. 용돈도 벌고 좋제.” “할머니, 생전에 전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
“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 한디 암것도 안해줬어.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 않았던 그의 행적이 고향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던 모양. 손녀를 키우고 혼자 사는 사위가 안쓰럽단다. 나는 자식들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이 젤 부럽소.”
느릿느릿 가다가 쉬고 쉬다가 가는 할머니의 걸음은 달팽이보다 느리다. 해 넘기 전에 집에 들어가실 수 있으려나. 하의도는 조선시대에는 공주의 섬이었고 후광리에 김대중 생가가 있는 대통령의 섬. 하의도는 '한국 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섬.
하의도 생가 씻김굿.
2016.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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