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서 내려오다 / 이기철
고견사(古見寺) 운상선원(雲上禪院)은 꽃으로 덮여 있다
들과 산을 제 색깔과 향기로 채우는 일을
풀과 꽃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사람 대신 꽃 이름 불러보고 싶어
예고 없이 산에 드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이 누구인가
달력의 5월은 아직 산중까지 오지 않아
물 소리가 골짜기를 여는 데 아침 나절이 걸린다
철쭉 지고 나니 설상화가 잎을 내밀어
덩달아 피는 꽃이 산을 무등 태운다
굴참나무 곁에서 바라보면 산이 꽃 향기에 실려
구름보다 가볍게 산 아래로 떠내려 가는 것이 보인다
꿩비름 노루발톱풀, 숨겨놓은 햇살이 솔그늘을 재운다
누가 이름하였는가, 운상선원(雲上禪院)엔 비가 오지 않을텐데
갑자기 몰려온 구름 송이가 후두둑 빗방울 뿌려
내 신명을 깨뜨린다
꽃은 지상(山上)에 피고 나는 하산(下山)해야 한다
때 절인 창자와 뇌수를 씻지 않고는 아무도
이 고산(高山)에 들 수 없다
나무 이름 꽃 이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내 거짓된 욕망이라고
바위를 스치는 바람 한 폭이 찢을 듯
내 옷소매를 당긴다
내려가라 내려가라 운상선원(雲上禪院)엔 오르기도 이렇게 힘겨운데
욕망을 숨긴 운동화 발로 어찌 선계(仙界)를 지나
하늘로 오를 것인가
[출처] 이기철 시인 13|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