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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 달변가 아폴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하시며, 당신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나 받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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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킬라와 아퀼라는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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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 곧 ‘기도’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본문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강조 용법으로 시작되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청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마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바라는 것이 뚝딱 이루어진다는 현혹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모한 약속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뒷부분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전제하시며, 당신께서 대변인처럼 우리의 처지를 하느님께 청하여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곧 기도는 청탁이나 거래, 주문을 외우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그렇게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고, 그 만남이 주는 평화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들어주십니다. 주문이나 주술로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에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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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은 신의 이름을 거듭 부르면, 신을 조종하여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뜻만 고집하기보다 먼저 그분의 뜻을 찾고 나의 의지가 그 뜻에 일치되기를 청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충만한 기쁨, 이해와 깨달음, 아버지의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직접 청하고 사랑과 기쁨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아폴로는 예수님을 증언한 탁월한 설교가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이, 곧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 말미암아 성령을 알게 되고, 마침내 바오로가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1코린 3,6)라고 말할 정도로 하느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문득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간절히 청한 때가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지께 필요한 은총과 성령을 청하는 자녀의 삶으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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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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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가 날마다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 주님의 사랑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옳은 일인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 구원 업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을 전하는 모든 이, 우리의 부모님, 형제, 친지, 그리고 우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과 일치한 이들이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항구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 ‘항구함의 은총’을 얻으려면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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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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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기만 하면 바라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술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청원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신적 일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는 그 순간에 내 마음에 사적 욕심이 끼어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오는 충만함과 기쁨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을 받느냐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내적인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드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주십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간절히 청할 때 기쁨이 넘친다는 사실이고, 그 기쁨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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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물론 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야 합니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기도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먼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이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잘못에 용서를 청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뒤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강복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청하는 것은 맨 마지막 단계에 놓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직전에 약간의 여유를 두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면서 성령께 기도의 은총을 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면서 내가 바라는 은총이 주어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요. 그만큼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은 많지 않습니까? 가족과 친척, 가까운 이들에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회개, 고통받는 이, 병자, 연옥 영혼들, 성직자와 수도자, 나라의 위정자들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은총을 가득 내려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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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 이름이 가진 권위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과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3-4세기에, 예수님을 한낱 인간으로 여기고 다만 하느님의 능력을 얻으신 분이라고 폄하해 온 아리우스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단과 투쟁하며 많은 교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라는 신앙을 지켜 냈습니다. 그 바탕에 단순하면서도 간절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살아온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 감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보았고, 자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게 해 주신 분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고,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나의 관심과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지향과 마음’으로 기도할 때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지닌 달변과 성경에 정통한 능력을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전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하여 성장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능력을 내 이익의 도구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힘으로 청할 때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보이지 않는 힘이 되는 내 배우자와 가족, 형제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용기를 가져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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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의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그러한 친교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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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며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면서,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과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기도는 가짜 기도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기도 역시 가짜 기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헤아리고 그 정신에 맞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빠진 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요술사가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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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층은 사도들과 순회 설교가들과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계속 격려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 교회에는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1코린 1,12) 하면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살펴볼 때,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언변이 좋은 아폴로는 아마도 여러 가지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거나 바오로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 주어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하던 한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 따르면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 공동체 안에서 힘을 얻습니까, 아니면 본당 공동체 안의 삶이 짐스럽고 지치게 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줍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까? 주님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삶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실망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말씀은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오늘 독서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부활과 복음의 기쁨으로 공동체에 활력이 넘쳐흐릅니다. 서로에게 그 기쁨과 활력을 전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 주는지 살펴봅시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와 프리기아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며 담대하게 설교합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가르침을 주고 형제들도 그를 격려합니다. 격려를 받은 아폴로는 다시 아카이아에서 신자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와 같이 초기 공동체는, 사도나 선교사만 신자들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모두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을 키워 주고 가꾸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공동체라 하더라도 사도들처럼 문제를 해결하려고 먼저 그분께 겸허하게 간청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노력한다면, 보호자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복음 말씀대로 우리 기쁨은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울러 이 기회에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복음의 기쁨』 첫머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과 활력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 이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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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나의 건강도 재물도 재능도 오히려 다 거두어 가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절실해졌고 간절해졌습니다. 숨 쉬며 걸을 수 있는 것도, 한 조각의 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어느새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모두 감사하게 되니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난 은총을 얻어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총은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행복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행복을 청원하고 싶다면 기도드릴 때도 삶의 부족함을 채워 주십사고 하기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고 그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사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어떤 것에 목이 마르고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만이라도 다 헤아리고 감사드릴 수 있어도 우리의 부족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것을 바라기보다 주님을 더 깊이 깨닫고 알기를 바라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주님의 호칭으로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마음으로 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원 기도가 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더 성숙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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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맺어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찾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찾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찾습니다. 다급하면 부모 생각을 먼저 하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도 주님과 ‘그러한 관계’를 만들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미끼가 먹음직스러워 보이기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물고기가 잡힙니다. 걱정만 보이는 것 같더라도,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처럼 부모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신앙인의 부모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것은 부모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좋은 관계’를 그분께서 맺어 주셨습니다. 자녀인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는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먼저 떠올려 봐야 합니다.
어느 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만난 할머니를 말씀하시면서, 이 할머니는 신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훌륭하고 경건하고 소박한 할머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할머니께 “성모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해주셨습니다.
“저를 어루만져 주실까요? 아니면 제 이름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성모님은 (할머니는 자기 집게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렇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 교황님은 할머니께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성모님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십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대답에 교황님께서는 감탄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 가리키신 것이 성모님의 삶이었고, 그래서 십자가의 가장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언제나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보다 세상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논리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즉 세상 안에서 나의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큰 주님의 뜻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자주 흔들리면서 세상의 뜻을 따르려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그 확신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즉,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유한한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쫓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삶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거름 삼아 예쁜 꽃을 피우는 과정임을 배우는 것(하지희).
정말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실건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엇인가를 청하기 좋아하고 받기를 좋아하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희소식 한 가지를 건네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제 개인적으로 ‘무엇이든지?’라는 표현에 의문 부호를 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고 주실 것인가요? 진짜? 확실한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손이 닳도록 빌면서 청하고 또 청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지난 세월은 어떡합니까? 누가 책임져 줄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보상해주실 건가요?
결국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인 듯합니다. 물론 세상에서의 성공과 승승장구, 건강, 합격, 승진, 화목, 평화...이런 것들, 당연히 청해야 마땅합니다. 우선 내가 건강하고, 내 가족이 평화로워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느님도 섬기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청하는 그런 요소들이 지닌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손에 움켜쥔 한줌 물과 같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멸성, 영원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 하신 것은 그런 작은 것,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영원한 대상, 보다 충만한 대상,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대상을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그 대상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청원기도 때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작은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청해야겠습니다. 세월 흐르면 다 지나갈 별것 아닌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대상인 성령을 청해야겠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도록, 내 안에 머무시도록,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나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흘러넘치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아드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97세의 어머니는 노환이 심해져서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타주에 있던 아들은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1달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사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무입니다. 보름 전에 아들은 어머니의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점차 나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곡기를 끊으신 어머니는 정말 많이 야위었습니다. 아들은 한 번 더 전화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호흡이 가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미사시간이 아직 2시간이 남았기에 기꺼이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비록 말은 못하시고,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고, 어머니는 1달 동안 3번의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둘째아들 부부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도 말없이 묵묵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오랜 동안 냉담하다가 다시 성당으로 온 형제님도 있습니다. 매주 점심 준비를 해 주는 구역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 외길이려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나
외길이려네
온갖
어둠의 갈레길
삼키려 해도
빛에게서 나와
빛과 함께 빛내다
빛에게 돌아가는
빛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슬픔의 갈레길
잡으려 해도
기쁨에게서 나와
기쁨과 함께 기쁘게 하다
기쁨에게 돌아가는
기쁨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탐욕의 갈레길
손 내밀어도
사랑에게서 나와
사랑과 함께 사랑하다
사랑에게 돌아가는
사랑의 외길이려네
나
외길이려네
온갖
죽임의 갈레길
벗하려 해도
살림에게서 나와
살림과 함께 살리다
살림에게 돌아가는
살림의 외길이려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예전에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요즘에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이름으로’나 ‘통하여’나 결국에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 상호명에 자신이 이름이나 가족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ooo 빵집’, ‘ooo 사무소’ ‘ooo 병원’ 등등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상호로 걸고 일을 합니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사실 자신이 하는 것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모든 희망을 걸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질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그분께 모든 희망을 걸고 기도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그분께 희망을 걸고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그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오늘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한번 구원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러분! 저 오늘 아침부터 아는 지인이 오셔서 안내하느라 운전을 하였지요. 그런데 항상 운전하던 차인데 이질감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깨름직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던 중에 사고가 났습니다. 아침부터 갑자기 졸음이 오더니 가는 중에 옆 차선으로 넘어간게 한 두번이 아니고 그렇게 사고를 힘들게 피했지요. 그러면서 평소와 같지 않았던 느낌이 기여코 집에 돌아오는 4시경에 큰 사고가 났습니다. 오전일 다 보고 오후 점심을 먹은 후 돌아가던 길인데 분명 졸리지도 않았는데 순간 진짜 정말 한 순간 졸았고 제 차가 왼쪽 부분에서 무엇인가와 크게 부딪히고 붕 높이 떳습니다. 붕뜨면서 왼쪽으로 7미터정도 날아갔고 가드레일덕분에 산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충돌 시점 부분부터 둘러보니 작은 경차였다면 몇바퀴 굴렀을테고 최소 한명은 사망했을 것이라 하더군요! 한방에 신부 두 명이 갈뻔했네요!
저는 충격을 받은 순간 브레이크를 쎄게 밝고 핸들을 오른쪽으로만 그리고 하느님께 같이 탔던 손님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기도했지요.
정말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저를 포함 3명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는 찢겨지고 푹들어가고 그나마 차의 뼈대가 좋은 차라 운이 좋은 것이라 경찰이 말하더라구요. 하지만 전 오늘 강론을 올리지 않아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 틀림없어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큰 사고임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에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요. 그래서 지금 인사하려구요.
"하느님 이제 충실히 강론 올리고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충실치 못한 저를 일깨워 주시면서 우리 일행을 다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여러분들께도 인사드립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16,24) 라는 이 말씀은 당신이 오시기 전까지, 당신께서 이 땅을 사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기에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아무것도 청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16.27)에 이젠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16,26)하고 말씀하십니다.
흔히 사람은 자기 생긴 대로 산다, 는 말처럼 우리 기도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의 태도처럼 예수님과 관계, 기도의 관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타인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기도를 자주 드리지 못합니다. 물론 저의 성향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가야 할 길을, 살아야 할 삶을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안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청원의 기도보다는 단지 주님 사랑과 자비하신 손에 저를 내어 맡기는 감사의 기도를, 특히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도록 내어 맡김 기도와 의탁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16,24) 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사랑이신 당신께 간절히 청하는 그 자체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며 사랑의 의탁입니다. 만일 지금 청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16,28)하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그 길은, 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청할 뿐입니다. 제 삶이 마침 하는 그날까지, 그 길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지금처럼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사제로 제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오늘 복음의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16,28)하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되돌아가신 그 길은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이 길에서 진리인 예수님과 함께 사노라면 우리는 어제의 어둠에서 빛으로, 거짓에서 참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때 모든 묶임에서 벗어나 삶의 온전한 자유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체험하게 되면, 체험할수록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넘치고 넘쳐 마침내 생명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리고 성령의 사랑 안에서,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온 존재로 청해야 할 기도입니다. 좋은 몫입니다.
이런 기도가 선행될 때 우리 모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처럼, 아폴로처럼 예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길, 하느님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걷도록 이끌어 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18,26참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의 인도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참된 ‘하느님의 길’로 아폴로를 이끌어 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생각과 출신은 다르지만, 예수님을 중심에 둔 삶이 그들 모두를 끈끈하게 연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폴로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부터 하느님의 길을 정확히 배운 뒤 성령을 힘입어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18,28)을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선포함으로써 유다인을 논박할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 (18,27)을 본보기 삼아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오늘 당신은 저희에게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의지하여 간절히 청합니다. 이 땅에 참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세상이 되도록 평화와 기쁨의 성령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여기에서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순위로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바람이나 필요에 따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의에 따라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리고 품고 있는 관심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를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욕망의 해석자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말씀은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간청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찾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무엇을 청할 것인가
진동길 마리오 신부님
내 안에 두 인격이 존재합니다. 마르타를 닮은 인격과 마리아를 닮은 인격입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모시고도 분주합니다.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습니다. 할 일이 많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은 마음을 변하게 하고 마음은 생각을 바꾸며, 생각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조차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가장 먼저여야겠지요. 무엇을 하는가보다 어떤 믿음,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인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 무엇보다 사랑이 최우선임을 압니다. 그 옛날 마리아가 사랑이신 주님께 보여줬던 그 사랑처럼. 이제는 나도 그 무엇보다 사랑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려 합니다. 그분의 눈빛과 그 숨결과 다정한 말씀. 사랑이 가장 먼저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나는 그분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언젠가는 나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갈 날이 오겠지요. 그러니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하신 말씀을 오늘 다시 되새깁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청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것을 받아 누리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라는 말씀이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께 기도한 시간이 얼만데, 그분께 청하고 바란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작 그런 것들을 원하는대로 이뤄주시지 않았으면서 우리가 청하지 않았다고 하시니, 그분께 청한 기도가 이뤄지지 않은 탓을 모두 우리에게 돌리시는 것 같아 마음이 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님께 청한 것들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우리 탓’이 맞습니다. 제대로, 올바르게 청하지 못했기에 들어주지 않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믿고 따르며 사랑하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하라는 겁니다. 그렇다고해서 사랑이라는 이유로 마지못해 양보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것이 주님께도 기쁨이 되겠지만,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기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을 받게 될까요? 내 욕심을 채워주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주시는게 아닙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며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는 소중하고 귀한 선물인 은총을 주십니다. 그 선물 덕분으로 내가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됨으로써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폴로’처럼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에 정통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미 여러 차례의 훌륭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던 그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누군지도 모를 여인들의 초대에 응하여 그녀들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그 말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구원의 진리를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참된 겸손과,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꼭 붙들어 보다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 완전한 믿음을 지닌 채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따르면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삶을 완성하게 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이는 우리 삶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압축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치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세상 것들만 추구하며 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머지 않아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될 그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럽거나 죄송스럽지 않도록 기회 될 때마다 내 욕심보다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하면 무엇을 받게 될까요? 내 욕심을 채워주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주시는게 아닙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며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는 소중하고 귀한 선물인 은총을 주십니다. 그 선물 덕분으로 내가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됨으로써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폴로’처럼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에 정통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미 여러 차례의 훌륭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던 그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누군지도 모를 여인들의 초대에 응하여 그녀들이 하는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그 말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구원의 진리를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참된 겸손과,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꼭 붙들어 보다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 완전한 믿음을 지닌 채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따르면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삶을 완성하게 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이는 우리 삶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압축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치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세상 것들만 추구하며 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머지 않아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될 그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럽거나 죄송스럽지 않도록 기회 될 때마다 내 욕심보다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무지개를 쫓아가던 소년이, 어느 날 더 이상 무지개를 쫓아가기를 포기하자,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ㄴ-24)
희망을 버리면 늙어버리고,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게 되는가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서 빨리 죽게되기만 바라게 되나 봅니다. 나이 들어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채, 맥없이 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도 슬픔입니다. 병들고 누워있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리거나 삶을 포기하는 것같은 일상이 오히려 지옥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기로 합시다. 지금 이 시기 이 자리에서, 내가 꿈꾸던 희망을 어떻게 내 일상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 모색하고, 내 꿈을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가까이 접근시켜, 잘 이룰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의미 깊게 되새기고 실현시키며, 희망과 기쁨으로 살아가기로 합시다.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사랑을 살게 한다. <요한 16, 23-28> 5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서로 믿음이 있는 세상과 믿음이 없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서 희망도 없고 사랑도 없는 세상에 살든지, 희망과 사랑이 있는 세상에 살든지 판가름 나게 합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 차 안에서 옆 사람을 믿지 못하면 안전한 여행이 불가능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앉아 있으니 어떤 노신사가 큰 보따리를 제게 주면서 밖에 나갔다 올 것이니 잠깐 봐 달라고 하여 받아 들고 있다가 돌아와서 보따리를 건네주니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세요?” 합니다. “아니요.” 하니 “이것이 전부 돈입니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뭘 보고 제게 믿고 맡기셨습니까?” 하니 “믿을만하게 보여서요”
믿음은 자기 전체를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서로 믿음이 없다면 내주지도 못하고 어떤 일을 맡기지도 못합니다.
종교적 행위야말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주고 믿음을 갖는 행위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신다.” 하십니다. 사랑을 느껴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도 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믿음이 참믿음이 됩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우리를 사랑하신 행적을 남기셔도 서로 사랑하도록 명하신 것같이 사랑하는 삶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로 믿음이 없어지면 가까이 가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 중에 이혼한 사람, 이혼하려는 사람, 온갖 사람을 면담하게 되는데 저의 원칙은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듯 서로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두 모녀가 일생 원수로 지냈는데 저와 이야기하다가 서로 얼싸안고 화해의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이혼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기도와 대화법을 알려줬는데, 요사이는 정답게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다고 전해주는 소식 들으면서 하느님 위대하다고 생각하며 감사기도 드립니다.
서로 믿음을 저버리지 마시고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이어주는 하느님 아버지 찾아서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같이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골수에
새기고
사무쳐야 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건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밝은
이정표가
됩니다.
사랑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도
새날을
맞이합니다.
사랑은
기도로 드러나고
진정한 사랑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한없는
삶의 진리
사랑입니다.
올바른 사랑의
실천을 배웁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생명과
우리
존재에 대한
참모습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에서
만납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사랑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기쁨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 늦은 봄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재미있게 노는데, 한 친구가 “눈 온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덩어리인 우박이었습니다. 눈인 줄 알고 맞았다가 따끔하고 아파서 얼른 우박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금세 그쳤지만, 우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박으로 농산물 피해가 크고, 단단한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습니까? 그때 우박의 크기가 훨씬 컸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따끔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 봅니다. 눈 대신 매번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음이 정말로 다행스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불만 거리만 찾고 있으며, 이런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본당 신부를 하다 보니 완전히 초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의욕이 넘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형편없는 강론도 잘 들어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주일 미사에 충실히 나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성가를 힘차게 부르는 어린이들,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는 청소년들, 할 일이 많은데도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 세상의 힘듦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신자들…. 모두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본당 신부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감사할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고 감사할 일을 주시는 주님임을 받아들여야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주님께 청할 수 있고, 또 이런 믿음으로 청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이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오드리 헵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우리가 계속 봉독한 요한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별사는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3~24절)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 중에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이 있습니다. 100 퍼센트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100 퍼센트, 꼭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아무 것이나 죄다 청해도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허무맹랑한 청원, 황당무계한 청원, 낯부끄러운 청원, 유아기적 청원은 해서 안 될 것입니다. 청원 기도에도 식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의 청원 기도에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개입되기 십상입니다.
유한한 우리들의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의 작은 노력은 뒷전인 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는 동화 같은 인생의 반전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간 측의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만 공을 넘겨 드려서도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나 자신의 인생과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청원기도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가 원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좀 껐으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오고 가는 깊이 있는 영적 친교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겠습니다.
기도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 그분 앞에 내가 앉아 있고, 그분께서 내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고, 그분께서 사랑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왕이 자신이 아끼는 신하에게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를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신하는 과연 어떤 것을 청할까요?
한 가지만 청하라 했으니 아무래도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청할 것 정말 크게 한 가지 청할 것입니다. ‘현금으로 백만 원을 주세요.’ ‘땅 다섯 평만 주세요.’라고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평생 먹고 정도의 돈인 ‘10억만 주세요.’ 아니면 ‘넉넉한 퇴직금이나 연금이 보장되는 장관 자리 하나 주세요.’ 라고 청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입니다. 이왕이면 드리는 청, 보다 큰 청, 보다 중요한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인간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할 작은 고통 하나, 눈 녹듯이 없애 달라고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그 고통을 잘 극복할 힘을 청하고, 그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뜻을 이해할 능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양한 한계와 약점 지닌 존재이기에 필연처럼 짊어져야 할 매일의 십자가 없애주시기를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일상의 십자가 기꺼이 지고 갈 인내심을 청하고, 내 십자가 통해 주님의 십자가 묵상할 지혜를 주시라고 청해야겠습니다.
부초처럼, 뜬구름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보다는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불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청해야겠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의심하면서 사유하였습니다. 그러다 의심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입니다. 지난번 성지순례를 갔다 오면서 늘 입고 다니던 옷이 낡아져서 더 이상 입기가 어려웠습니다. 해외여행 중에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권, 핸드폰, 지갑’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권’입니다. 여권이 없으면 함께 이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탑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옷이 찢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권을 보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깨에 메는 가방에 보관합니다. 여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옷에 보관합니다. 주로 남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여권은 늘 입고 다니는 옷의 안 주머니에 보관하였습니다. 순례 중에도 여권을 보관하는 옷 생각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생각’이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입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애주가는 ‘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뻐서 한잔, 우울해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경치가 좋아서 한잔을 떠올립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거나 해결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은 고기에게는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하고 결혼하면 사랑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생각이 덜나기 마련입니다. 저도 아마존에서 여행에 필요한 ‘옷’을 구매했습니다. 여권을 보관할 옷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주가들도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더 이상 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며칠 동안 술을 가까지 하지 않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가 있었고, 미사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와 생각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라면 기도는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생각은 내가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나의 전구로, 타인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의 만족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생명을 살리는 ‘우유’가 됩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저도 그릇된 생각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죄’가 되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하였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해 주셨고, 모두가 건강하게 순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는 반항하던 유다인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쪽 벽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흩어졌고, 1년에 한번 무너진 성전의 한 쪽 벽에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이 지나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한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유다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면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폴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에도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난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성가 봉사를 해 주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부축해 드렸습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도 필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기쁨의 여정.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삼일간 계속되는 주제가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울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주님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공자의 논어의 시작이 참 멋집니다. 참 멋진 군자, 공자입니다. 예수님과 만났어도 곧 의기투합했을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 시작되는 논어의 시작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먼 지방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가 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의 군자삼락에 대한 자부심에 공감이 갑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그리스도교의 군자들인 우리 수도승들에게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군자삼락입니다. 정말 좋은 도반의 방문은 기쁩니다. 빈손으로 와도 그 존재자체가 반가움과 기쁨입니다. 과연 이런 도반이 있습니까?
어제도 기쁨으로 가득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회의가 있어 서울에 들렸던 제주에서 은거(隱居)의 삶을 살고 있는 도반이 잠시 수도원에서 하루 묵어가면서 저에게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참 오랜만에 웃으며 유쾌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집무실 앞 주님의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에서 혼자의 독사진도 찍어 드렸고, 함께도 찍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도반만이 아니라 고백성사차 집무실을 찾았던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집무실옆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 사랑의 꽃길, 기쁨의 꽃길, 평화의 꽃길에서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인 힐링의 선물, 기쁨의 선물을 드린 것입니다. 힐링과 기쁨,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고백성사의 근본 목표이기도 합니다. 새삼 서로를 즐겁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기쁨의 선물, 기쁨의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이미 어제 정했습니다. “기쁨의 여정-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으로 말입니다. 어제는 삼시경후 공동체 형제들이 모인 가운데 귀엽고 예쁜 새 승용예초기 축복식이 있었고 또 이것이 우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가톨릭 축복 예식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듯 역시 아름다움의 기쁨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또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주님의 파스카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5월 신록과 파스카의 꽃들을 상징하는 무수한 꽃들의 아름다움이 또 우리를 감동케하고 기쁘게 합니다.
축복기도시 아름다웠던 독서와 축복기도를 나눕니다. 요즘 복음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요 계속되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역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바깥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처신할 수 있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1테살4,11-12)
백장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있듯이,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수도승의 노동 윤리의 기초가 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노동의 기쁨, 역시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합니다. 축복기도문도 참 아름답습니다.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한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이 도구들을 봉헌하는
자녀들을 굽어보시어,
이들이 열심히 일하여
창조사업에 협력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인류발전에 공헌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도구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할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기도문이요 안전에 각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기도문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마지막 대목인 우리 주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삶의 모두가 됩니다.
아무리 영성을 강조해도 토마스 머튼이, 산티아고가, 렉시오 디비나가 우리 주 그리스도를 가려선 안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 예수님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정말 하나의 소원을 청한다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뿐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기쁨도 날로 깊어지고 더해져 갈 것이니 그대로 기쁨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에 일치할수록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니, 바로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도 우리의 주님 사랑의 의욕을 붇돋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이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와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담대히, 확고히 열정을 가지고 유다인들을 논박하는 아폴로! 기쁨과 활력으로 넘치는 모습입니다. 새삼 그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 예수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날로 기쁨 충만한 기쁨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청해야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께
오직 사랑을
청해야지요
착함께
오직 착함을
청해야지요
참됨께
오직 참됨을
청해야지요
올곧음께
오직 올곧음을
청해야지요
베풂께
오직 베풂을
청해야지요
품음께
오직 품음을
청해야지요
살림께
오직 살림을
청해야지요
평화께
오직 평화를
청해야지요
더불어 삶께
오직 더불어 삶을
청해야지요
하느님께
오직 하느님을
청해야지요
어떻게 기도를 청할까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인간의 한계가 생겨나면 그 누구도 ‘이름도 모르는 신’에게 매달려 기도를 한다. 성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신전 앞에 아레오파고에서 한 설교를 떠올린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한다. 그분께 통하여 기도하라 이른다.
한계는 고통이다. 한계의 사람이면 대부분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이는 인간성숙에 필수적 과정이다. 그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기도를 한다면 이 난세에 고통을 잘 견디어 내도록 저희와 함께 해 주시길 간절히 청하며 둘이나 셋이 힘을 모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께서 들어주실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으뜸이 되신 성모님의 전구도 함께 청하자.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우리가 쓰는 외국어 단어 중에 ‘브랜드(영어:brand)’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랜드는 어떤 경제적인 생산자를 구별하는 지각된 이미지와 경험의 집합이며, 좁게는 어떤 상품이나 회사를 나타내는 상표,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기업의 무형자산으로 소비자와 시장에서 그 기업의 가치를 상징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브랜드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은 최고의 가치를 드러내는 분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름이자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이름과 함께하는 것이고 그분의 뜻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과 함께, 그분의 뜻과 함께할 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바로 이루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청함에 대해 말씀하시고 청하는 이는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하기에 기쁨이 충만해진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청하기에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이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이지요. 즉 기도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 사랑, 하느님에게서 나오셨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였지요. 하지만 자신은 이제 십자가 고난,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계시기에 이제 자신의 부재를 통해서 앞으로 제자들이 직접 아버지께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함에 있어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순종하고 이끄심에 완성될 것임을 믿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이럴수록 하느님께 더 다가가는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또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부족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녀가 됩시다. 아멘.
주님께 나아가기를 항상 노력하고 기도하며 살자.
강지훈 시몬 신부님
요한 복음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이렇게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우리 인간 가운데로 오셨고,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제 막 완성하려고 하십니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셨지만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신 하느님의 일들을 이제 당신의 제자들이 계속해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일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활동들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그분의 정신 안에서 살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제자들은 또 다른 예수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도 사랑하시고 아버지 하느님 역시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이 관계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사명이었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이유입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 사람도 속하게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 쪽만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결코 완전한 형태의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주고 받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몰랐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에게서 한 번도 눈길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수조차도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당신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 안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 역시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당신께서 주시는 사랑을 진정으로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라는 존재가 지금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기도가 나 자신의 안위와 평화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매일 미사 때 마다 예수님의 몸을 내 안에 모시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에 나는 언제나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그 큰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 큰 겸손과 희생을 생각하며 매일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 나아가기를 항상 노력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16,28)
김종오 신부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 보따리입니다. 그 선물 보따리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기쁜 소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버지의 사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로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세상에 보내신 선물 보따리입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너무도 다양한 삶을 사는 우리이기에 받은 선물도 그만큼 다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에 새겨두신 선물 보따리에서 몇 개는 이미 꺼내어 사랑스런 과거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있지만, 아직도 풀지 않은 선물들은 미래라는 이름의 가능성과 희망으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통해 악마에게 받은 선물도 우리 마음에는 섞여 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밀밭의 가라지처럼 악도 함께 섞여서 자랐습니다. 악마의 선물도 이미 몇 개는 상처가 되어 아픈 과거라는 이름의 불가능과 절망처럼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랑의 선물을 이웃에게 풀어주고 언젠가 다시 아버지께 되돌아갑니다. 악의 자녀들은 악이 맡긴 무관심과 불의와 부정의 선물을 이웃에게 풀어주고 악에게 되돌아갑니다.
아버지의 선물 보따리는 포장이 허술해도 내용은 알찹니다. 그러나 악의 선물은 포장만 화려하고 내용은 부실합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현실이라는 포장지에 눈이 멀어, 겉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어도 내용이 알찬 주님의 선물을 우리는 자주 외면합니다.
언젠가 아버지께 되돌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닮아 순수한 사랑이라는 알맹이를 세상에 전하며,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어떤 시인의 용감한 외침을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주님의 이름으로
신중호 신부님
복음에는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거듭해서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이들은 간절히 기도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열심히 기도한 게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요구를 다 들어주신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엄청난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하면 무엇이든 주실 거라는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기꺼이 들어주시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시고 나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아버지의 전 존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셨습니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일치하여 청한다는 말입니다. 곧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녀보다 더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청하여라!(요한 16장 23ㄴ~28)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믿으며 존경까지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자기 자식같이 사랑하고 청하는것이 있다면 그보다 더 해줄것입니다 ~~
칭찬받고 인정받기위해서 척 하지말고 진심으로 내가할 수 있는 사랑을 한다면, 그 빛과 향기는 번져갑니다.
똥냄새는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러나~ 다 나쁜것이 아니라 약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약함이 있죠 당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변치않는 주님이십니다.
변덕스럽지도 않으시고 ~
심은데서 거두게 하시는 신실 하신 분이시니, 사랑으로 섬기며 오늘 나의 일상을 통해 믿음의 나무를 굳건히 합시다.
소보둥지에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있습니다.
짹짝이 아니라 특이한 음률로 '뭐~를 하세요?' 라고 합니다.
시간마다 자신을 들여다보니 성찰이 되라고 말입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님
‘하느님, 저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좀 더 많은 것을 먼저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저는 겸손하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먼저 저를 높이 올려주십시오.’ ‘저는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고 싶습니다. 그러니 먼저 제가 변두리로 밀려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거룩한 뜻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욕망과 욕구를 채워달라는 기도일 뿐입니다. 점점 신앙이 일종의 보험이 되고 있습니다. 각박한 경쟁 사회 안에서 나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보려 합니다. 그러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행운이 필요하다면 그때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경우 하느님은 막연히 내 소원을 들어주고 액땜해주시는 영험한 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바를 생각하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우리도 함께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라는 기도는 하느님을 내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내 뜻을 변화시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는 주님 말씀은 일종의 격려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감히 아버지께 청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이제는 용기를 내어 직접 청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청해도 되는 첫번째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니,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가장 적당한 때에 채워주시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시니,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한 것을 들어주신다면 나의 바람이 하느님의 뜻과 통했다는 뜻이니 너무나도 기쁜 일입니다. 혹여 청한 것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아직 적당한 때가 되지 않았거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뜻일 뿐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게 아니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청해도 되는 두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가족’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그러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청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혹여 철 없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들을 청해도 당신 자녀인 우리를 꾸짖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 마음 속 갈망을 당신의 뜻에 일치 시키도록, 그리고 그렇게 일치를 이룬데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가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맡기신 고유한 소명을 ‘다 이루고’ 그분 나라에 들어가도록 이끌어주시고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니 힘과 용기를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꾸준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말에 ‘돌아가셨다.’란 단어가 있습니다. 그 의미가 우리 신앙의 의미와 똑같지는 않지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가 우리의 신앙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인생을 잘 마쳤다는 의미로서의 ‘선종’이나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오른다는 ‘소천’ 등의 단어에서도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심성과 우리 신앙인의 종교심성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지상에 파견되었다가 지상생애를 마치고 다시 아버지께 되돌아간다는 의미가 우리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3-24절) 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진정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종말론적인 희망을 여기서 미리 앞당겨 살게 되었다는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기도한 것을 다 들어주셨다고 기뻐하며 감사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전제 같은 것이 있나 봅니다. ‘우리에게 탐욕이 아닌 한,’ ‘우리가 받아 누릴 만하고, 그 은총으로 형제들에게 기쁨이 될 만하면,’ ‘나나 몇몇이 아니라 모두가 마음을 모아 청하는 것이라면,’ ‘나나 우리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온 세상에 기쁨이 되는 한’ 등등이 우리 기도 성취의 일종의 전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 장례미사를 봉헌하며 이야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꿈꾸던 것들을 주님 품 안에서 다 펼칠 수 있게 되기를, 이 땅에서 이루지 못했던 고운 이상들을 주님 안에서 다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우리가 지상에서 다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오늘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 모두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바들이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요한 16, 23-28> 5월 2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5월은 사랑의 달입니다.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 사방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산천을 아름답게 꾸미고, 마음 편하게 하는 계절이며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약한 어린이를 돌보고, 쇠약해지는 부모님을 찾아보고, 제자들을 돌보는 스승을 찾아 서로 사랑함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자연과 어울려 서로 “잼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복음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은 믿음과 희망으로 이어지고 하느님의 성자이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나왔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하느님 사랑이 가능해지고 보증받는다고 하십니다.
내일은 주님이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시는 승천 대축일입니다. 승천 축일은 주님이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사랑하며 현존하심을 감사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님을 부르고 찾으면 언제나 제 옆에 계시고, 묻는 말에 응답하시고, 미사를 통해 언제나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믿는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주시고, 사랑의 증표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내가 찾는 곳에 언제나 계시면서 “도리도리, 곤지곤지, 잼잼” 하시며 진, 선, 미를 전해주십니다. 오늘 돌 지낸 어린이가 나를 찾아오는데 “도리도리, 곤지곤지, 잼잼”하고 “짝짜꿍” 놀이하며 하느님 사랑이 진, 선, 미를 전해주시는 사랑임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시편 8편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전해주십니다. 오늘 반드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사람의 마음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성장에 필요한 것을 모두 마련하시고 나누어 주시며 생명이 유지되는 한 이끌어 주십니다. 산소가 없으면 몇 분도 살지 못하고 태양의 힘이 없으면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물과 소금이 없으면 몸 안의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아침 기도 때 로마서 14, 7-9를 듣다가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죽고 사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믿음으로 사나 죽으나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것만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날로 정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중요한
신앙인의 자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신
예수님께
가치를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중심을 둘 때
우리는
우리의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무게만큼
달라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우리자신을
알게 합니다.
믿음은 이제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익어가야 할
믿음과 사랑
사랑과
믿음입니다.
믿음과 일상이
한 몸이 됩니다.
우리 삶의 자세가
신앙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믿음으로
기다러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일상 속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일상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는
빛나는 중심
구원입니다.
구원을
믿습니다.
성지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동차 장난감을 계속 움직이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다가가서 “신부님도 한 번 해볼까?”하면서 자동차를 뒤로 당겨 앞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해달라며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2~3번 연속해서 해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해달라며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했으니까 이제 그만할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경우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아이는 움직임 자체를 보기 때문에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고, 어른은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움직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예도 볼 수 있습니다. 화가는 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은 그렇게 오래 볼 수 없습니다. 화가는 그 모습의 본질을 계속 찾으며 보는 것이고, 일반 사람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만 보면서 자기 판단으로 단정 짓고 맙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판단이 등장하면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겉으로만 대충 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본질을 봐야 오래 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보게 되면서 계속 보고 싶은 분이 될 것입니다. 기도, 묵상, 미사,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하기 싫어하고 지루해야 하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16,23)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일을 선포하실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하나를 보면서, 주님의 본질을 보게 되고 새로움을 찾게 됩니다. 계속 주님께 머물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의 주님께 대한 시선은 과연 어떠합니까?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 유일한 행복이다(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 연로하신 한 자매님께서 제게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기도 지향을 두고 기도 바치면서 너무나 웃겼습니다.
시장통에 작은 점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장사하기가 힘들어서 내놓았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났는데도 매수자가 없어 답답해 죽겠다. 신부님 기도빨 세다니, 부탁드린다. 팔리기만 하면 섭섭지 않게 후사하겠다고 하십니다.
다행인지, 제 기도빨이 셌던 탓인지, 일주일 뒤에 자매님께서 환한 얼굴로 미사에 오셔서 아이들한테 아이스크림 한 턱 제대로 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지향을 두고 바치는 기도, 하느님께서 보시고 깔깔 웃으시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역세권 아파트 분양에 참여했는데, 꼭 당첨되기는 바라는 청원기도, 내가 좋아하는 축구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사실 이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강요요 억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바람직한 청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성령께서 항상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대신해서 성령께서 함께 기도해주시길 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더 꿋꿋이 더 당당히 사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가 고통과 시련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기꺼이 맞설 의로움과 의연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선익을 위한 지향도 필요하지만 공동선을 위해 더 많이 기도 바쳐야겠습니다. 더 이상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 더 이상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더 이상 그 누구도 피눈물 흘리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의 도래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청원기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청원 기도의 지향이 좀더 폭넓어질 때, 생기는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큰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사소한 청들은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기도 지향을 진지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기도의 폭과 지평을 좀 더 확장시켜나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제 주변에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퀸즈 성당의 신부님들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팬데믹 기간에 매주 나눔을 하였고, 지금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캠핑도 같이 다녔습니다. 퀸즈 성당의 봉사자들은 매달 우편물 작업을 도와주십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토요일에 가서 하루 머물기도 하고, 일찍 가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늑한 방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LA에도 제가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부부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명예기자로 인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초대하였던 제자들처럼 제가 LA로 갈 기회가 있으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작년에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LA에 만들었습니다. 기꺼이 사무실을 내어주고, 지국장을 맡아 주신 형제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제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폴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아폴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지만 곧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아폴로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본당신부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제가 있던 성당으로 전입 왔습니다. 형제님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고를 만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성당의 시설분과를 맡아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대회를 맡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처럼 형제님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늘 겸손하였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에 본당에서의 사목경험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발표를 듣고 교구 사목국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첫 본당신부를 마치고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업무를 맡았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복 신앙과 참된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복 신앙은 청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 신앙은 자칫 하느님과 흥정을 하거나, 거래를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기복 신앙의 위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부른다고 모두 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청하면서 함께 삶이 뒷받침이 되는 신앙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사악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20년간 눈 부칠 겨를도 없이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14년간을 일하였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올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많은 노력을 함께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께 청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름으로 청하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사랑과 정의,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기쁨 충만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나이 40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싶으면 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도 평생공부입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정말 소원이 무엇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함없이 기도 잘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겸손히 평생 배워야 할 기도요, 무엇보다 기도의 필수 전제 조건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바로 오늘 본기도가 청원기도의 모범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요! 한마디로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정말 이런 기도는 그대로 응답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오래전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은, 자주 인용했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에 대답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지금도 묻는 다면 역시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삶이었는지, 참 성인의 삶이었는지, 참 행복한 삶이었는지는 죽음에 직면해서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환상이나 거품이나 거짓은 말끔히 걷히고 진실만이 환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착한 자매들이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을 때는 답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먹을 것을 묻습니다만 저는 이런 경우 “자매님을 좋아합니다. 하느님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에둘러 대답하곤 합니다. 언젠가는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부끄러워하는 분에게 주신 글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실 좋은 분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좋은 분 자체가 최고의 선물로 생각됩니다. 아마 하느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하여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한 수사가 문틈으로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썼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당신 외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만으로 족합니다!”
요지의 문답이요, 수차례 인용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저에게 청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주님이신 당신을 한결같이 간절히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 하나뿐이겠습니다. 당신의 전사戰士답게 죽는 그날까지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다가, 즉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는 것뿐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미사와 강론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며 걷는 것 하나뿐이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청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다 아시는데도 청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다 보면 필요한 것 한가지는 주님뿐임을 깨달아 알 것이며, 사랑의 눈만 열리면 다 받은 것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여기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항구히 간절히 사랑하는 것 하나만이 참 필요한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이래서 기도는 주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습니다. 제멋대로, 제생각대로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요,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의 이름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하는대로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 충만한 기쁨이란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제가 볼 때 사도행전의 혜성같이 등장한 신비의 인물, 아폴로도 성령께서 교회에, 바오로에게 보내 주신 뜻밖의 기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며 공공연히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니 교회에, 바오로에게 천군만마의 역할을 하는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복자福者도 부자富者도 자유인自由人도 아닙니다. 마음은 참 어둡고 허전할 것입니다. 참으로 꼭 필요한 주님만을 청할 때 기쁨과 평화, 희망의 참 좋은 선물을 받습니다. 주님 자체가 기쁨이자 평화요 희망이기에 기쁨 충만한, 희망찬 평화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내 이름으로 청하라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가 해야 할 바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복福된 운명의 인생 여정임을 깨닫게 될 것이니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며칠전 나눈 짧은 시를 또 나누고 싶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웃는 얼굴은
다 꽃이다
주님은
다 예뻐하신다.”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주님 사랑에 더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사랑도 평생 노력이요 평생 훈련입니다. 무엇보다 참 필요하고 참 좋으신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선물이신 주님을 모시는 은혜 충만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늘 이야기를 해주셨다. 제자들은 하늘 이야기가 너무 어려웠다. 땅에서 살기에 감이 오지 않았다. 잘 알아듣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삶을 보여주셨다. 하늘의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고, 하늘의 하느님은 이 땅에 생생히 살아계셨고 그 모두가 하느님의 인간 사랑이었음을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셨다. 제자들은 기쁨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때가 이르면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늘 이야기를 비유로가 아닌 직언의 말씀으로 하실 때가 올 것이다. 이제는 제자들이 말씀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땅 되시고 땅이 되신 그분께서 하늘로 오르신다. 또한 땅이었던 제자들이 하늘 되어 땅에서 하늘을 산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16,27-28)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스포츠인이 경기에 임하면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그 스포츠인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인 성호경은 아주 짧은 기도이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아버지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르시며, 늘 성령과 일치를 이루시면서 모든 삶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곧 늘 언제나 삼위일체의 관계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예수님의 모습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모든 일을 그 관계 안에서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충만한 기쁨의 체험은
우리의 일상을 참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또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면
나의 내면은 벅찬 감격과 감사함으로 가득해 집니다
믿음에 기반한 사랑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게 합니다
일상의 기도에
충만한 기쁨을 청해 봅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Ask and you will receive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을 다시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이 앞으로 받을 수난 십자가의 죽음 다음으로 부활과 승천 후 우리들에게 보내실 그 분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분이라 함은 바로 성령님이신데 즉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스스로 아버지께 청하였지요. 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청함을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어쩜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성령을 받기 전까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을 통해서 진정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제자들은 비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게 됨을 알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내려오시어 하시는 일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해주시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아주 심오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청함으로써 우리가 기쁨에 충만해질 것이라는 것인데 청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들이 매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기쁨에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으로써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이끄심에 내어맡기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이끄심에 내어 맡기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비유가 필요 없겠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에게
빛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물에게
물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바람에게
바람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길에게
길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생명에게
생명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사람에게
사람의 비유가
필요 없듯이
하느님 닮은 이에게
하느님의 비유가
필요 없겠지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생애와 영성
16세기 종교개혁의 대격변기에 이냐시오 로욜라와 '주님 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이냐시오의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식별했습니다.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고, 그 모임인 ‘예수회’는 1540년 교회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성은 뚜렷하게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사는 것, "그리스도의 마음"을 열망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예수회 행동 양식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이며 특성입니다.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향한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고 그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가 요청한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따르는 자기 헌신의 태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만이 삶과 일의 원형이며, 각자의 상황에서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회원들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람들의 염원과 필요를 바라보며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을 위한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합니다.
영성 살기
이냐시오 영성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을 위한 영적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부단한 기도와 영신 수련과 양심 성찰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복음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것입니다. 영신 수련은 피정 지도자가 피정 받는 이에게 기도의 주제와 방법, 시간 등을 알려 주고 기도하도록 한 후 면담을 통해 기도의 내용 등을 살피면서 영적 성장을 돕는 이냐시오 영성 프로그램입니다. 이냐시오 영성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이론적인 이해보다도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 따른 관상 기도를 일상 중에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심 성찰은 하루에 두 번 하는데, 약 15분간 자신의 양심의 상태가 어떤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양심 성찰은 다섯 단계로 진행되는데 한마디로 하루 중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께 응답했는지 감정의 상태를 우선적으로 살피면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감정들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데, 그 원인들을 양심 성찰을 통해 확인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다보면 자연히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주님을 모시기로 합시다.
성찰
나는 언제, 왜 기도합니까?
내가 지금 매일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청원기도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자신은 늘 청원기도만 하는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청원보다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이분에게 저는 계속 청원기도를 하시라고 말씀드리면서 대신 가장 좋은 것을 더 힘써 청하시라고 조언해드렸습니다. 예컨대 금방 사라질 재물을 달라는 청원과 함께 하늘에 재물을 쌓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하시고, 시험에 합격하기만 바라는 것을 넘어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을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육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기도를 더 열심히 바치시라고 말씀드렸지요. 재물이나 시험 합격, 육신의 건강은 분명 다 좋은 것이지만 혹시라도 거기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가장 좋은 것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이름은 무엇보다 그분의 정체성을 의미하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그분과 함께 청한다는 의미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이 가장 좋은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늘 아버지께 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영으로만 존재 하지 않으신다.<요한 16/23-28>5/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영으로 산다는 것은 육을 완전히 배재한 삶이 아니라 영의 힘이 육을 관리하고 다스림을 말합니다. 영적 사람은 숨도 쉬지 않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 삶의 가치를 드높이고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라 말 할 수 있다.
하느님도 순수한 영적 존재가 아니라 영과 뜻으로 이루어졌다 “ 하느님의 뜻이 하늘 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느님 영의 힘으로 움직이시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을 하느님의 뜻으로 움직이시려 사랑을 모든 것의 본질로 삼우셨습니다. 가장 인간 적인 것이 가장 영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시간가 공간 안에는 영과 육이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연결 고리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성부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시간과 공간 안에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며 입김을 넣어주신 같이 사람은 하느님의 영으로 살게 하시었습니다. 사람은 음식으로만 살지 않은 다고하심 같이 그이상의 생명을 살도록 마련하신 영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무엇을 청할 까요. 시간 공간 안에 필요할 일용할 양식, 원수를 용서하는 마음, 온갖 유혹에 자유스러워 지는 것, 온갖 악에서 벗어나나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쓰러져 병을 앓고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건강하게 우리 안에 살며 세상이 복음화 되도록 각자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영의 힘으로 세상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저는 요사이 하느님 영의 힘에 의지하어 기도가 나의 일과입니다. 몇일전 인사이동 결과가 표시되었는데 저를 위한 이사명령을 없습니다. 아빠스님에게 저는 그대로 사세요. 하십니다. 아마죽는 날 까지 아무런 인사이동은 없고 주님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사는 것이 저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카톡에 1000명 이상 되는 분들 위하여 기도하며 보내고 더 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연락을 하시는 분 자기사정을 위하여 기도를 청하는 분이며 나라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영적 사람이며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오늘 믿음과 사랑을 살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예전 본당에서 지인을 모시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식사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약하려고 했던 식사 장소에서 본당 신자분의 가족이 고위 임원으로 재직중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신 그 신자분께서 식당에 가면 '자기 이름'을 말하라고, 자기가 미리 얘기를 해둘테니 가서 '누구누구 소개로 왔다'고 하면 여러가지로 신경써서 잘 챙겨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호의 덕분에 편안한 자리에서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식사비 할인까지 받을 수 있었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청한다'라고 하면 보통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로 인해 제자들과 슬픈 이별을 하게 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게 여러가지로 마음 쓰이셔서, 지금까지 당신 뒤를 따르며 여러가지로 고생한 제자들에게 더 시련과 고통을 겪게 하시는게 못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그들에게 '선심'이라도 쓰시는걸까요? 너희들이 그동안 세상에서 나와 함께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너희가 그만큼의 보상과 대접을 받도록 내가 아버지께 잘 얘기해주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가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시도록 내가 힘좀 써주겠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이 당신 이름만 대면 우리가 원하는걸 다 이뤄주시겠다는 즉, 당신 이름으로 하는 '청탁'은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시도록 힘써주겠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시지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내 이름으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을 영어로 옮기면 "the name of me"가 됩니다. 여기서 명사 'name'은 단순히 ‘이름’만을 뜻하지 않고 대상의 ‘본질’을 의미하지요.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값'에 기대어, 그분의 명성과 지위를 이용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걸 얻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을 부탁할 때 그와 가까운 사람, 그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대리인'을 앞세워 청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겁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데,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한다는 것은 주님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분께서 바라시는 더 큰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청하고, 내가 청하는 바를 그분께서 이루시도록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협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나 자신과 내가 아끼는 이들의 안녕과 복을 이뤄달라는 청원 말고, 순수하게 '사랑을 위한 청원'을, 아버지의 본질에 부합하는 청원을 제대로 해 본적이 있는지요? 그렇지 않기에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노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본질인 사랑을 위해 청하려면, 먼저 기도라는 친밀한 대화를 통해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삶으로 그분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참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 안에서' 주님과 통하는 상태가 되면, 내가 무엇을 청하든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시게 됩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이기우 신부님
오늘의 말씀에서 묵상해야 할 화두는 복음에서는 기도요, 독서에서는 지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네 신앙 현실의 경험과 다소 아니 어쩌면 한참 동떨어집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해 오고 있지만 기도하는 것마다 들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기도가 그분의 기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기도해야 당신 귀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가 삶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으면 즉시 알아들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마음에 그려지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6,8).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여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삶에서 우러나왔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삶에서 기도와 동떨어진 채 간절한 마음도 없이 입으로만 기도하는 수가 많은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 이해와 우리의 기도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진정성이요 실천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부터 청하되(마태 6,33), 기도하고 나서는 그 기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24).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기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을 정리해 놓은 인식 체계가 성경이나 교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는 세상 지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는 힘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으로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영적인 지식은 자기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의 동업자이자 동료 선교사가 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가 아폴로라는 설교가를 만나서 한 수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평신도 부부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지식은 성경에도 정통하고 예수님에 관한 일들까지도 정확히 가르쳤던 직업적인 설교가를 가르쳐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 부부는 바오로로부터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에 관한 초대교회의 체험과 전승을 전수받을 수 있었지만, 아폴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도 지도자 역할을 한 선비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약종은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는데, 그는 강학회에서 교리에 통달했던 이벽으로부터 직접 천주교 교리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벽이 지은 ‘성교요지’와 한역서학서들을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마재 교우촌에서 사귄 황일광 시몬이라는 천민 출신의 교우로부터 민중 언어는 물론 그에 담긴 민중의 심성 속에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 신관을 배워서 이 교리를 담아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신화되어 버린 민간 무속에 대하여 영적인 식별을 정확히 해 냈으므로, 교우촌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한 후에 교리서 저술을 맡겨서 ‘주교요지’가 쓰여지게 되었는데, 평신도로서 정약종이 쓴 이 책이, 프랑스 선교사 마이야(馮秉正, Joseph Marie Anne de Moyriac de Mailla)가 지은 ‘성세추요(聖世蒭蕘, 대중교리서, 1733)’라는 한역교리서보다 낫다고 주 신부도 평한 바 있습니다.
박해가 종식된 직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 보두네(Baudounet, François Xavier, 1859-1915) 신부는 호남 지방의 교우촌들을 둘러보고 나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이런 보고서를 써 보냈습니다. “새로 입교한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주교요지’를 통해 얻어진 교리 지식을 실천한 결과가 이렇듯 놀라웠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부모 잃은 어린이에게는 대부(代父)와 대모(代母)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지니고 있던 교리 지식의 실상이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세상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살았던 영적인 지식이었으며, 공동생활 양식을 실천한 인간관계의 지혜였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삶과 마음으로 바치는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믿음이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이다.
우리의
출발점을
다시 만나는
믿음의
시간이다.
믿음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올바른
방향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흠숭이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우리 영혼을
다시 은총으로
깨어나게 한다.
만남을 여는
믿음의 현존이
기도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이며
우리들
삶 자체이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실천하기에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며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정체를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의
실천인 것이다.
기도의 실천이
곧 자기정화이며
공동체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서로 나누고
서로 존중하는
믿음의 진실한
공동체를
꿈꾸어본다.
미룰 수 없는
믿음의 실천이다.
선입견이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하여 실제 체험에 앞서 갖는 주관적 가치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선입견 없이 받아들여야 그 대상의 고유함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고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치소에 가서 특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얼굴에 짙은 흉터가 있고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앉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제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저의 잘못된 선입견이었습니다. 그들의 인상은 저보다 더 좋아 보였고, 부족한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습니다.
구치소 안에서의 강의를 통해 제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선입견을 부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입견을 부수는 방법은 직접 마주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만약 마주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부정적 생각의 선입견을 절대로 없앨 수가 없습니다.
늘 사랑이라는 긍정적 마음으로 직접 마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선입견을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필요한 사랑의 마음은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입견 없이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주님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으며, 이 청을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선입견을 사랑을 잃어버리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의 청을 들어주실까?’, ‘이를 받을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 ‘하느님께서 과연 계시는 것일까?’ 등의 물음으로는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는 아기를 떠올려 보세요. 아기는 부모에게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청합니다. 이렇게 청한다고 부모가 화를 내고 절대로 청하지 말라고 혼을 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도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청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부정적인 선입견을 모두 벗어던지고 사랑 그 자체만을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달라이 라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예전에 본당신부일 때, 봉성체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다리가 아프셔서 걸을 수가 없다며 늘 집에만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제게 이런 부탁을 하십니다.
“신부님, 저 이제 살 만큼 살았어요. 주님께 저 좀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어떻게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저 웃으며,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을 때 부르실 거예요. 그때까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씀드릴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할머니의 가족으로부터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할머니 집으로 찾아갔는데,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속으로 늘 하느님께 곧바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던 할머니가 그 응답을 받는 것일까 싶었지요. 할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너무 아파 죽겠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누구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이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죽겠다는 말보다 지금 해야 할 것을 떠올리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말이지요.
인간의 호흡은 지극히 잦고 짧은데 비해, 하느님의 호흡은 길고도 느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2013년 2월 가톨릭교회 역사상 초유의 대사건이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교회 역사상 유래없이, 자유의지를 통해 교황직에서 물러나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용기있는 결단을 통해 우리 교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 교황님의 결단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선출이라는 의미있는 결실을 맺게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출 직후, 바티칸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따뜻하고 친근한 저녁 인사를 건넨 교황님께서는 광장에 모인 신자들과 전 세계 형제자매들에게 첫강복을 주시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기도가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계십니다. 기도가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고 확신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기도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동시에 실제적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에게 하듯이, 하느님께 곧바로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 말씀드리는 기도를 하면 더 깊은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말이 하느님 보시기에 하찮거나 부적절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기꺼이 듣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기꺼이 나아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초대하는 이달의 묵상 기도, 가톨릭출판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거듭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특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3~24절)
그러나 구체적인 기도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보면 어떻습니까? 백번 천번, 만번 청했는데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한 가지 기도 주제를 두고 간절히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모른체 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에 대한 성숙도를 먼저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나’ 위주의 기도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유아기적인 기도는 아니었는지 되짚어봐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호흡은 지극히 잦고 짧은데 비해, 하느님의 호흡은 길고도 느립니다. 인간의 시계 바늘은 째깍째깍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데 비해, 하느님의 시계 바늘은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우리는 초스피드 응답을 바라는데 비해, 하느님께서는 아주 더디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한 바에 대한 응답을 즉시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얻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 우리가 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호의를 하느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사실 청원기도도 좋지만, 기도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깊고 충만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원기도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 덕행과 영적 지식을 추구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타 다른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흘러넘치도록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더 사랑받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시고,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모두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청하는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사랑받는 가장 완전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이 더는 ‘비유’로 말할 필요가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이름’은 곧 ‘본성’을 의미합니다. 태어날 때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또한 동시에 ‘본성’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기가 장난감 자동차를 끌고 길가로 나왔다가 경찰에게 잡힌 사진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 어린 아기가 큰 자동차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청한다면 부모는 들어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 더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모와 같은 본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겐 아직 ‘비유’가 더 필요합니다.
비유란 ‘표징’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신처럼 아이를 끌어올리기 위한 사랑의 표징이 바로 비유인 것입니다.
제가 며칠을 라면만 먹다가 물려서 어머니께 불평했을 때 어머니는 먹기 싫으면 젓가락을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서운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손에 고생해서 생긴 굳은살을 보고, 거칠어지고 비틀어진 손과 발을 보니 그제야 그 라면도 부모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성장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렇게 더 높은 본성을 지닌 이들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굳은살이 곧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비유이고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사랑의 표징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청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은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그 표징을 먹고 마셔서 우리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더는 표징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때 기쁨에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미국의 유명 여배우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다.”
이 말 안에 숨긴 뜻은 무엇일까요? 여자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사랑스럽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만약 여자가 끊임없이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표징을 요구한다면 남자는 점점 지쳐갈 것입니다.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없어서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믿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표징만 요구하고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그 상대에게 지쳐갑니다.이 지침은 또한 이별을 전제하고 있기에, 곧 이별하게 될 사람에게 청하는 모든 것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진 자가 더 받게 마련입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 사랑받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한 여성을 인도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 여성도 인도에 여행을 온 여행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비윤리적인 모습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주로 릭샤 비용이나 물건값을 속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인도인들 때문에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인디어 욕설’이었습니다. 그들이 욕을 할 때 먼저 알아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지인들끼리 주고받는 말 속에 섞인 욕을 듣고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현지인들이 매우 놀랐고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 졌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이제는 그녀를 슬슬 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 주인은 식자재가 떨어졌다며 그녀를 거부했고, 알리바바 바지를 다른 가게보다 10루피(200원) 더 받으려고 했다고 심한 욕설을 들은 주인은 그녀가 다가오면 서둘러 문을 닫았습니다. 심지어 골목에서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도 그녀만 나타나면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인도 여행 중 얻게 된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몇 번 노천카페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언제나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욕설에 상처 입은 사람은 결국 그녀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인도 여행 중 그녀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군고구마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적어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성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께도 사랑받음을 믿기 때문에 더는 다른 비유나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좋은 이유가 있어서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레이스’란 아이는 어렸을 때 천연두가 걸려 얼굴에 심한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흉터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부부가 모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고 믿을 때 가장 사랑받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더는 비유나 표징이 필요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얻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고 항상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본성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가 다다르기를 원하는 참행복의 단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당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가지, 상추, 피망, 고추, 토마토, 오이, 깻잎’을 심었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심었습니다. 올해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소일이지만 생명을 키우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 일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면서 조금씩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입니다. 수시로 자라는 잡초를 뽑아 주면서 마음에 자라는 분심, 잡념, 욕심도 뽑아내면 좋겠습니다. 작년처럼 이웃들과 나눠 먹으려 합니다.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도 출근하면서 인사하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분들은 늘 작은 일이라도 하신다고 합니다. 마당에 심은 모종들이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일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영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란 ‘쾌락’을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러는 “권력”을 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줌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정신적으로 힘겨운 상황, 신체적 억압 속에서도 정신의 자유, 정신적 독립의 흔적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인생이 던지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고, 거기에 계속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추구할 때, 믿음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와 같은 이론을 정립하여 “의미치료(Logotherapy)"를 확립하였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입니다. 작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대교구 로버트 배런 주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17세기 위대한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인류의 모든 문제는 홀로 방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 상황을 삶의 중대한 질문과 진지하게 대면하면서 방 안에 홀로 앉아 ‘내적 수행으로의 초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네 복음서 중 하나를 통독해보기를 권한다. 이참에 영성 서적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묵주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 묵주기도는 가톨릭 전통에서 가장 탁월한 기도 중 하나다. 파스칼의 말이 맞는다면,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들은 방에 홀로 앉아 영적 묵상을 하면서 해결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격리 생활은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
부활시기에 우리는 미사의 독서로 사도행전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에게 삶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박해와 고통은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협조자를 만났을 때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기뻐하였습니다.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면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들의 삶을 통해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황무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믿음의 결실들이 아시아의 각 지방에서 맺어졌습니다.
우리들의 복자, 성인들 역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바로 한국 교회의 ‘사도행전’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하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 어느 박해의 시대보다 더 커다란 배교의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물질과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다원주의와 이성 중심의 생각’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상대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 새로운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구원의 완성, ‘돌아가셨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죽었다’는 유한함을 드러낸다. 유한한 생명으로 끝났다는 표현이다.
‘돌아가셨다’는 예사롭지 않은 표현이다. 본래의 위치로의 복귀이다. 영원함을 포함한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이 말씀 안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돌아가셨음’은 하느님께로의 복귀이며 인간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돌아가셨다’ 함은 죽은 자가 아닌 영원히 살아있는 자들에게 유보된 귀한 존칭이며 영원성을 간직한 인간완성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으로 말씀이 동정 성모님을 빌려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세상에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세상은 모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주님을 두고 누구를 따라가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셨고 충만케 하셨다. 뽑아세워준 자들이 누리는 축복이다.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주님의 승천대축일이다’
제대로 살려면 ‘돌아가도록’ 살자, 주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히 마련하신 길이다
<그사이에 나 있음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온 날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는 날
그사이에
나 있음에
세상은 더디더라도
살만해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아름다워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평화로워지고 있는가
세상은 더디더라도
하느님 닮아가고 있는가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보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은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사랑할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이루어갈 때 하느님의 자녀이자 그분의 제자로서의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6, 23a-28(부활 6주 토)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을,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을,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줍니다.
이를 좀 더 보면,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둘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규명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는 말씀입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청하지 않았다.”(요한 16,24)
주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한가롭기를 원했고, 잃지 않기를 원하면서
가난하기를 원하지는 안했습니다.
능력을 갖추고 싶어 했고, 존경받고 싶어 했고, 잘 난 사람이고 싶어 하면서
낮은 사람이기를 원하지는 안했습니다.
편협 되게 사랑하면서, 더불어 고통 받으려 하지 안했습니다.
괴로워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한 것도 아닌데,
괴로워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하지 안했습니다.
입으로는 날마다 죽겠다 말하고는
실제로는 조금도 죽어 살지 안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 드릴 때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 역사의 시작 때부터 기도해 오던 대로 야훼 하느님께 청하되, 이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내가 대신 아버지께 말씀드려 줄 테니 아버지께 가지 말고 내게 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일신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신앙의 도전이 되었을 겁니다. 출신을 뻔히 아는 목수의 아들이 아무리 뛰어난 가르침과 기적을 행한들, 감히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니요. 이를 믿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예수님의 자리와 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또한 혼돈스러웠을 법합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율법에 그다지 목을 메지 않는 듯 보였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새로 등장한 신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믿어 온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면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분이시지요. 이제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겸손하신 하느님께서 아들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 겸손하신 아드님께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26-27)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사에 횡행하는 청탁 요건과 다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께 다가갈 때 더 깊은 결속에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기도는 삼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아폴로가 등장합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사도 18,25)아폴로는 성경에 정통한 달변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유다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길에 반대하는 유다인들이 기존의 하느님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분하고 대치시키는데 반해 아폴로는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믿음에 투신하지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사도 18,28)아폴로는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분,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심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에게 있어 야훼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사랑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기에 세상은 믿음에 있어 갈라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이 지혜는,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우리를 당신 사랑의 유대 안으로 데려가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세상의 잇속은 나누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데 익숙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조화와 일치, 통합으로 이끄십니다. 아버지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다가와 머무르고 청하고 사랑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우리의 사랑에 목마른 분이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과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며, 기도 안에 더욱 깊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장 큰 선물인 성령을 주실 것이니,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요한 16,24 참조) 아멘.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과의 갈등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전통 믿음이고 ‘새포도주는 새부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셨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라는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일치를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대가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이제는 지나가는 옛날의 풍경이지만 먹는 것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에 성당에서 경로잔치를 하면 할머니들이 꼭 받은 음식과 간식을 남겼다가 싸가지고 갑니다.
손주들 준다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손주들이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사랑은 좋다는 것이 있으면 사랑하는 손주가 떠오르고 그것을 꼭 챙겨 주고 싶은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독일의 위르겐 몰트만은 2차 대전 후에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주었지요.
그의 강연 중에서 “진정한 사랑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생명을 또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로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사랑하는 당신 아들을 세상에 내어 주신 사실’을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상대에게 좋은 것이 있다면 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 사랑의 특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극치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의 말씀은 그 모든 것이 기쁨이 충만해 지기 위한 것이고 하십니다.
사랑의 대상에게 기쁨이 되려고 하는 것이 특징이기에 꽃 한송이라도 선물하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 꽃을 받고 기뻐하는 연인의 모습은 사랑의 드라마에서 보는 심심치 않은 메뉴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주요한 주제가 되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죄인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생명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희생으로 바치며 어떻게든 구원을 주시려는 사랑의 진솔한 모습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며 기쁨을 주시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말을 하지요.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요.
한계가 있는 우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그리고 성장해서 집을 떠나서는 친구들에게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사랑의 위대함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눈물로 깨닫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는 ‘완전한 사랑의 자리에 주님께서 계십니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지요.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적 사랑이 돌아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신앙인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으로 우리도 내 이웃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26절)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현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영적인 사람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받으신 육체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줌으로써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육체를 거두심으로써 세상을 떠나셨고, 인간으로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로 가셨지만, 그분의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세상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다’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5,1-11)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신자들과는 달리 자기 재산의 일부는 숨겨놓았습니다. 이는 봉헌금을 아낀다는 뜻이 아니라 탐욕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속이려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인데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 두 사람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힙니다(3,6; 4,3). 그리고 최고 의회로부터 앞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지시를 받습니다(4,18). 그러나 베드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4,18-20). 이렇게 두 사람이 최고 의회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며 복음 선포를 그치지 않자 최고 의회에서는 다시 사도들을 붙잡아 매질을 합니다(5,17.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더 큰 고통을 감수한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 주님 뜻이 내 뜻이 되는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새벽 성무일도 장엄한 시편 136장 26절까지 반복된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는 후렴입니다. 주님의 자애로 가득한 참 아름다운 성모성월 5월,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의 청명한 날들입니다. 끊임없이 피고 지는 꽃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고 회개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쉬듯이 밥먹듯이 해야하는 이 세 수행입니다.
-“숨 쉴 때마다
온몸과 맘을 적시는
꽃향기
사랑의 향기
존재의 향기
당신의 향기
이 향기로 산다”-
새벽 일어나 출입구를 나설 때 한 숨 가득 들어오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저절로 나온 고백告白입니다. 꽃향기를 쉼쉬듯 주님 향기를, 주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기도와 삶이 하나되어 주님을 날로 닮아갈 때 이뤄지는 기적같은 현실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뜻이 제 뜻이 되게 하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새벽 산책중 예수님 성심상 바위에 잠시 엎드려 바치는 화살기도입니다. 참으로 늘 말씀을 숨쉬며 살고 싶은 마음에 늘 들고 다니는 매일미사책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한결같은 수행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고 참 내가 되게 합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의 신비가 주님을 닮아갈수록 참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설적인 성인이 오늘 우리 분도 수도자들이 기리는 성 파코미오 아빠스입니다. 공주共住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꼽히는 성인은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57년 한 생애 참으로 한결같은 기도로 주님과 일치의 삶을 살았던 수도성인입니다. 이집트 상부, 오늘날 룩소로의 타벤니시라는 마을에 머물러 기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너를 찾아와 수도자가 될 것이니 그곳에 머물로 집을 한 채 지어라.” 하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파코미오 수도원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한결같이 항구히 살아온 이들에게 기적은 너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33년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보니 무수히 목격하는 기적들입니다. 10년 이상 겪어 온 한 자매의 삶 역시 신비로운 기적입니다.
“9년 만에 하느님께서 주신 외손자의 선물입니다. 사위와 딸이 한결같이 기다리며 기도해온 결과 주신 외손자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딸 부부는 외손자의 이름을 ‘이도’라 지었고 성명은 ‘정이도’입니다. ‘그리스도’에서 딴 이름 ‘리도’로 ‘리’는 ‘이’로 바꿔 ‘이도’입니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뤄졌다 하여 감사하는 마음에 ‘이도’라 이름 지었다니 얼마나 갸륵한 젊은 부부의 신심인지요! 정말 한결같이 기도할 때 일어나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할 때 부수적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것만 남습니다. 원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정말 필요한 것 하나만 남으니 바로 이것이 주님 뜻이자 내 뜻이 되는 겁니다.
-“신부님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무엇인가 선물하고픈 마음에 묻는 수녀님에 즉각적인 답입니다.
“수녀님을 좋아합니다.”
당혹감에 젖은 수녀님에게 곧 드린 답변입니다.
“주님만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수녀님과 주고 받은 덕담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물음에 대한 ‘주님, 당신 외는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만 원합니다.’라고 답했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역시 복음에서 당신 이름으로 청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구원의 길, 하늘길임을 각인시키는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하늘길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유독 눈에 띠는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이미 주님의 “길”을 알고 있던’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바로 여기 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아십니다. 하느님의 길, 하늘길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는 다 들어 주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갈수록 응답되는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가 바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복음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구원 섭리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 형제들 하나하나만 봐도 그대로 증명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들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아폴로는 결코 ‘우연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바오로와 그 일행의 ‘기도의 선물膳物’임이 분명합니다. 바오로의 참 좋은 협력자이자 동반자인 아폴로입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랑하여 닮아 하나되어 갈수록 그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이며 우리의 모든 기도는 때가 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 기도마다 말미에 KS 마크처럼 붙는 예수님 이름입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과 하나되어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 모두이옵니다.
저희 생명, 저희 사랑,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당신께 대한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아버지께 청하라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을 코앞에 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놔두고 내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이제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게 될 것이니 뭐 청할 것이 있으면 이제 아버지께 직접 청하되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을 위해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시는 점입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이 제자들 대신 청해주지 않으실 거면서 왜 당신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대신 청해달라는 뜻, 다시 말해서 전구해달라는 뜻인데 주님께는 이런 뜻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뜻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일종의 격려입니다. 감히 아버지께 청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용기를 내어 직접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용기를 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입니다.
첫째로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니 그 사랑을 믿고 용기 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두렵고 그래서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으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분인데 그 하느님이 실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이 있으니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형제요 친구가 되었으니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당신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라고 오늘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히 부를 수 없는 하느님을 용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격려하면서 그래도 용기가 생기지 않으면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께 청하되 당신을 건너뛰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건너뛰고 아버지께 직접 청하는 것이 아니라, 또 성인들이나 성도들을 제쳐놓고 혼자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이나 성도들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통하여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구轉求의 뜻도 우리의 기도를 대신 전해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성인들도 우리와 함께 기도해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청하면서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가 주님을 건너뛰지 말아야 함은 물론 성인들과 성도들과 같이 기도하고 청해야 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어릴 때는 세발자전거를 사주셔야만 부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느냐에 따라 부모님의 사랑을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기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오늘 우리 존재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근심과 걱정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겪는 일이라 당황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헤맬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부닥친 순간에, 자신의 심리적인 불안함과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거나, 우리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헤매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기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고 함께 풀어나가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따로 아버지께 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직접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렇게 이루어져서 우리가 기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어느 정도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교육을 받고 양성된 지금에는 제자들이 쉽게 풀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직접 사실 그대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25절)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지 않아도, 우리는 직접 청하게 될 것이며, 또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26절)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27절)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서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께 다가오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 다다라 우리의 현존과 사랑을 드러내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도록 합시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순간에 얻게 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갑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도끼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그걸로 장작 패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끼가 꽤나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맘대로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낑낑대며 휘둘러봐도 도끼날을 엉뚱한 곳에 내리꽂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게 도끼질을 몇 번 하다보면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손바닥에는 금새 물집이 잡혀 도끼 손잡이를 잡고만 있어도 손이 아픕니다. 하지만 도끼질에 잔뼈가 굵은 고수들의 모습은 다릅니다. 고수들은 도끼를 자기 맘대로 휘두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도끼질을 하는 동선에 장작을 놓아두고 도끼날이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내리꽂히도록 손잡이를 붙잡고만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장작은 도끼가 패고 자신은 거들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렇게 하면 수고를 덜 들이고 장작을 두동강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에 물집이 잡히거나 어깨 근육이 뭉칠 일도 없습니다.
그런 점은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기 삶을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 휘둘러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무리할수록 예상치 못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로 인해 내 삶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지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계속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우리는 금새 실망하고 좌절하며 나중엔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내 고집과 욕심대로 하려는 완고한 마음이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나는 거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니 나는 그분의 뜻을 묵묵히 따르겠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내 욕심대로 안된다고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드린 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공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과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는데 집중하며 충실히 살아가다보면, 결과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분의 이름으로 청한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버튼을 누르는대로 제품이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나를 위해 준비해두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일치되어 기도하는 그 과정에서 이미 평화와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됩니다. 또한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요한 16/23-26> 5/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역사 안에 당신의 뜻을 예언자나 선지자나 당신의 대리인을 시켜 말씀하시고 이스라앨 민족을 선택하어 말씀을 전해주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 들려주신 말씀을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기에 힘이들지만 한마디도 바로들으면 모든 것을 실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하느님 말씀이 날아 움직이든지 아니면 좋은 말씀이 사장되어 빛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림을 감상해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보느냐에 따라 이해가 되고 이해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자세는 한 사람을 보고 듣는 데도 같은 반응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자세의 기본은 귀가 있고 눈이 있고 듣는 사람의 몸이 있고 이세가지가 어떤 자세로 듣고 보고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끝으로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르고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달르게 나타납니다.
귀의 자세, 큰 강연장에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큰 소리도 갈망이나 기대심 없으면 소리 나는 징과 같은 소리입니다. 들어도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마음에 색여 지지 않습니다.
눈의 자세, 눈을 감고 들으면 어느 새 짐을 자게 되어 소리가 있아도 듣지 못하듯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 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고 개인적 대화이면 눈과 눈이 마주쳐야 합니다. 사랑이 시작 할 때 눈과 눈의 일치로 이루어집니다. 말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바로 “마리아는 제일 좋은 자리를 찾이 하였다. 덕 밑에 앉아 듣는 자세입니다.
몸의 자세, 우리는 몸은 여기 있으면 서 몸이 여기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설명 법은 몸은 여기 있으면서 몸이 과거나 미래에 가있으면 지금 들어야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몸은 여기 현재에 있어야 합니다. 현존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부인을 놓고 어제 애인였던 사람을 생각 한다면 지금 사랑은 거짓입니다. 하늘의 말을 들으면서 땅에 있으면 말의 의미가 다르게 들립니다. 간첩은 몸은 이 나라에 있으면서 몸은 자기나라에 있는 것 같이 몸은 현재 여기 없는 것입니다.
침묵의 자세, 성경에 “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내 입을 막아라.” 하였습니다. 잠언에 “ 죽음과 삶은 혀에 달려있다.” 긍정적 사고로 받아 들이고 부정적 말이라도 긍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대화적 관계로 듣는 자세입니다. 마리아와 가부리엘 천사의 대화를 보면 진리에 입각한 대화입니다. 진실도 없고 거짓으로 자기 주장을 세우려고 대화하면 진정한 소리를 못알아 듣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바로 말이 성립됩니다.
마지막 듣는 자세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선입관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뒷 담아나, 말을 듣고 아니야 하고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침 소리을 듣지 못합니다. 즉 가난한 마음이 있으면 바로 알다 듣고 마음깊이 색어 집니다.
하루는 저에게 익명으로 온갖 비난과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하는 글을 받았습니다. 나이 80에 무슨 수도원장이냐? 지금 이라도 내려오라. 원장 되드만 교만해졌다. 또 만일 그만 두고 나면 당신 같은 늙은이를 누가 상대할까? 하는 소리를 듣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소리를 청해듣고자 하여 기도하는 중 “그 사람의 말을 가난한 마음으로 들어라,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어 읽어라." 하여 다시 글을 보니 비난이 아니라 원장하는 동안 겸손하게 하세요 교만이 자라지 않도록 하세요 모든 사람에게 가난한 마음인 겸손과 온유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보니 글을 보낸 사람에게 감사하고 3년가 겸손하게 살다보니 지금은 편하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어떤 이가 책망하는 말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죽으라.“ 이 말은 ”그렇게 살면 죽은다.”라는 말입니다. 죽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요한 16,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카시아
꽃향기
사랑처럼
지극하다.
참된 사랑이
절실한
우리들 삶이다.
사랑이
구원이다.
삶의 본질은
분명 하느님
이시다.
사랑의
처음과
사랑의
끝도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으로
사랑은
끊어지지
않았다.
사랑은
끝이 없다.
사랑으로
이어져있다.
사랑을
건너면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란
사랑을 만나는
여정이다.
하느님이 없는
방향이란 없다.
사랑과
하느님은
하나이다.
사랑을
먹고사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을
알게되면
삶은
달라진다.
삶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사랑이다.
사랑의 여정
그 시작점과
끝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맛보게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우리를
살게하는
사랑을 청한다.
사랑은
내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것이다.
삶이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방식이다.
사랑을
청하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기쁜 날이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을
오늘도
일깨워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