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볼 땐 한국 응원하느라 경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몰랐는데, 재방송으로 다시 본 한국-스페인전은 역시 질 놈은 어떻게 해도 진다는 스포츠세계의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 준 경기였다.
역시 스페인은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현란한 개인기, 정밀한 송곳패스 등등....모리엔테스의 개발만 아니었어도, 최소한 2골 이상 실점할 수 있었던 경기였다. 라울의 부상이 스페인에겐 두고두고 한이 될 것 같다. 막판 모리엔테스의 감각적인 슛이 골대를 맞고 나온 것 부터 시작하여 그렇게 몰아붙였는데 한 골도 못 넣었다는 건, 정말 신의 선택이 한국쪽에 와 있었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우리 선수들도 정말 잘 뛰었다. 이탈리아 전 때 연장 뛰고 4일만에 나온 거라 왠지 헉헉대는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드러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뛰어서 막강 스페인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은 뭐라고 칭찬해도 모자랄 것이다. 이같은 우리 선수들의 불굴의 투지, 체력, 열정과 더불어 약간의 운까지 더해져 또 한번 대어를 낚았다. 특히 월드컵 같은 큰 경기에서 승부차기 경험이 전무한 우리 선수들이 모두 성공하여 승리를 이끈 것은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로써, 스페인은 1950년 4강이 후, 52년간 단 한 번도 4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징크스를 이어가게 됐다. 특히 이번엔 번번히 스페인의 발목을 잡던 이탈리아마저 탈락한 아주 좋은 상황이었고, 한국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음에도 다시 한 번 4강 진출에 실패함으로써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그리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비록 경기에선 졌지만, 앞으로 스페인 축구를 최소한 10년을 이끌어갈 신예를 찾았으니 말이다. 바로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여 패배의 역적이 되어버린 오른쪽 윙 호아킨이다. 비록 그는 승부차기에서 실축했지만, 한국전을 포함하여 이번 월드컵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이 날 한국은 오른쪽을 파고드는 호아킨에게 대책없이 돌파를 허용했고, 수많은 실점위기를 맞았다. 뛰어난 체력, 현란한 개인기, 과감성으로 빠른 돌파에 의한 측면 센터링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호아킨의 이러한 눈부신 활약에도 득점을 못했다는 건 모리엔테스, 발레론 등의 개발에 힘입은 바 크다. 호아킨......이 친구 정말 대단한 재목이다. 비록 승부차기 실축으로 좌절을 맛보겠지만, 페널티킥 실축의 아픔을 딛고 오늘날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우뚝 선 라울을 볼 때 향후 스페인 축구의 대들보가 될 것임이 확실하다. 라울이 훨씬 더 성숙한 기량을 갖추고, 호아킨이 절정의 기량을 선보일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스페인은 반세기간의 4강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독일..........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한국이 4강에 올라 독일과의 일전이 확정되자, 쓰레기 언론들의 독일죽이기가 시작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차군단의 부활'이니 떠들던 놈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녹슨전차'가 어떻다느니 하며 마치 한국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하다. 도무지 우리나라 쓰레기 언론에 따르면 허접하지 않은 팀이 없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최강이다.
그러나, 독일은 그렇게 만만한 팀이 아니다. 월드컵 우승3회, 준우승 3회, 4강 10회(이번대회포함), 15회 진출에 단 한 번도 8강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강호중의 강호이다. 역대 월드컵 랭킹 2위로 사실상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에서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유럽선수권에서도 우승3회, 준우승3회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메이저 대회 성적으론 감히 적수가 없는 20세기 최고의 팀이다.
독일축구는 우직할 정도로 단순하다. 큰 키와 체격을 이용한 고공플레이가 사실상 공격전술의 전부다. 확실히 마테우스, 클린스만이 뛰던 전성기때보단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아무도 독일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누구나 독일 축구를 잘 안다. 그러나 아무도 독일을 이기진 못한다.'
독일은 우리가 그동안 승리했던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남유럽축구와는 다르다. 개인기와 정교한 패스를 위주로 하는 남유럽팀에게 우리의 체력과 스피드를 앞세운 압박축구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그러나 독일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강철같은 체력으로 미드필드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펴고, 롱 패스위주의 선굵은 축구를 한다. 우리의 압박이 통할 여지가 별로 없다. 게다가 독일은 노이빌레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선수가 180대 후반이상의 신장을 가진 이번 대회 출전국 중 최장신 팀이다.
같은 체력과 압박으로 승부를 건다면 체격조건이 월등한 독일이 우세하리란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두 차례의 연장승부를 거쳤고 3일을 쉬고 경기한다. 이에 비해 독일은 모두 정규시간내 경기를 끝냈고, 4일을 쉬고 우리와 붙는다. 스페인 전에서 스페인 선수들에게 세트플레이시 대책없이 헤딩을 허용한 것을 볼 때, 독일의 타점높은 고공플레이는 우리에게 치명적이 위협이 될 전망이다. 180대 후반의 거인들이 문전으로 쇄도하여 점프하는 모습은 상대 수비수와 골기퍼에겐 공포 그 자체다. 아울러, 독일은 지금까지 아시아국가와 싸워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아시아팀 킬러다. 이것 역시 심리적으로 우리 선수들에게 부담이 되는 요소다.
따라서, 쓰레기 언론의 거만한 독일 죽이기와는 달리, 개인적인 예상으론 무척 힘든 경기가 될 것 같다. 워낙 이변이 많은 대회라 승패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하자면 독일의 승리가 더 유력해 보인다.
사실 4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패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4강전에서 독일을 꺾을 수 있는 팀은 지구상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솔직히 그 동안 우리가 4강에 올라온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축구에 투자 안 하고, 축구열기 없는 국가가 좋은 성적을 낸 건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이건 대표선수들의 개인적인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오히려 한국축구발전에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이 세상에서 젤 무서운게 노력없이 얻는 대가이다. 투자가 있고 그에 비례하는 결과가 나올 때, 지속적인 투자가 있을 수 있고 진정한 발전도 있을 수 있다. 세리에와 프리메라 라는 세계적인 리그를 갖고 있고, 축구장마다 사람이 미어터지는 국가를 경기장엔 파리만 날리는 국가가 이겼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불공평한 결과다. 대표팀의 각고의 노력에 따른 결과이겠지만, 이것이 벌써부터 쓰레기 언론을 중심으로 조장되는 거만함과 오만함으로 이어져 한 단께 도약을 하지 못하고, 일회성 잔치로 끝날까 두렵다. 사실상 체계적인 축구기반이 없는 월드컵에서의 선전은 말 그대로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번 기회를 한국축구발전의 기회로 쓰지 않고, 그저 월드컵 4강이라는 결과에 만족한다면, 히딩크감독과 홈어드벤티지가 사라진 2006년 독일월드컵에선 단 1승도 거두기 힘들지도 모른다. 불가리아를 보라. 그들은 94년 미국월드컵에서 독일등을 격파하며 4강신화를 일구어냈으나, 98년엔 참담하게 패배했고, 이번엔 월드컵에 나오지도 못했다.
이제는 한심하게 독일죽이기에 나서는 쓰레기 언론의 오버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질 때다. 이번에도 월드컵에 따른 축구열풍이 일회성에 그치고 열악한 국내축구기반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4강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로만 머물 것이다. 결과는 투자에 비례한다. 그게 바로 세상이치이고 정의다. 신은 두 번 기적을 허용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