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계보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논란도 많습니다. 그 당대에 인위적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정확한 사정은 밝혀지기 어렵고, 아무리 합당한 주장을 내놓아도 결국 가설에 그칠 것입니다.
어쨌든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광개토대왕릉비입니다. 비문의 17세손이 삼국사기와 비교하여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특히 세손의 의미가 혈연관계에 의한 17세손인지 아니면 17대왕인지 문제가 됩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양자 모두의 근거를 제시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세손이라는 용어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17대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어떤 이유에선지 스스로 계보를 정리했었고, 태왕비도 자부심을 높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혈연에 의한 17세손이라는 의미로 비문을 작성했다면 스스로 계보를 조작했다는 점을 시인하는 꼴입니다. 따라서 비문은 대무신왕 이래로 17대왕이 광개토태왕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최소한 그 사이에는 누락된 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태조대왕과 차대왕 및 신대왕의 관계입니다. 이들의 나이차가 형제라고 보기에는 크고 기록마다 형제라는 경우도 있고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는 만큼, 이 부분에서는 분명 조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가설 하나를 세운다면,
고구려왕의 계보는 이상하다 싶을 만큼 외관상 매우 깔끔합니다. 왕위 계승이 직계(여기서는 형제까지 포함시킨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 친척은 물론 가까운 친척 중에서도 방계혈통이 왕위 계승에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습니다. 오히려 깔끔하게 직계로만 흐르는 왕권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따라서 재사부터 시작해서 태조대왕과 차대왕 및 신대황의 관계가 방계가 아닐까 추정해 봤습니다. 재사가 삼국사기대로 유리왕의 아들이라면, 태조대왕 즉위시 나이가 많아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추모왕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이 재사라면, 설득력 있는 연령범위가 형성될 수 있고 또한 유리왕의 직계와는 전혀 별개의 세력으로써 정치세력이 비류부에서 계루부로 넘어오는 이유 및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는 사정이 수월하게 설명이 됩니다.
한편 태조왕과 차대왕의 관계가 부자관계라는 기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록이 다음 왕을 아들로 기록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형제라는 기록에 신뢰를 두되 사촌형제라고 설정해 보았습니다. 사촌관계라면 항렬이 같더라도 나이차가 크게 날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한 이 당시에 정치세력들도 계루부와 연나부는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편에, 환나부와 비류나부 및 관나부는 차대왕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렇게 정치세력이 갈리는 것은 왕들이 부자관계인 경우 보다는 같은 항렬의 관계에 있는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추모왕에게 A라는 子가 있었고 그에게 재사 등의 子가 있었다는 가정입니다. 유리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다가 추모왕의 직계인 재사 등의 형제가 왕위를 탈환하여 고씨의 나라로 돌려 놓았고, 재사 아들인 궁이 왕위에 올랐는데 다시 그 안에서 정치세력들의 권력다툼이 있어 사촌간인 수성 - 백고에게 왕위가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모왕과 유리왕의 관계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유리왕이 추모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꾸미더라도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왔다는 사실 자체는 진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떠한 문제로 도망온 유리가 추모왕에게 중용되었으나(추정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마치 위만과 같은 모양새이군요...) 송양과 결탁하여 추모왕과 계루부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본래 이 지역 출신인 소서노 등은 떠나고 멀지 않은 모둔곡 출신인 무골 등도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본래 유리와 같은 부여출신인 부위염, 오이, 마리 등만이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왕위 계승과정은 복잡하지만 고구려는 유리왕을 추모왕 직계로, 재사 이하를 유리왕 직계로 '밀어넣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설을 세워본 것이지만 깔끔한 계보정리를 위하여 최대한 직계로 밀어넣기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줄을 그어보면 거의 펜을 떼지 않고 한번에 연결될 정도입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한 왕조의 계보가 이렇게 깔끔한 경우가 있을까요.
고구려가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갖고 있었던것 같은데, 왜 굳이 조작을 가했는지는 참 의문입니다.
첫댓글 태조왕의 즉위를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추모왕의 아버지나 아들이나 그 자손들(태조왕 전까지..) 모두 해씨입니다..근데 추모왕이 고씨라는 게 이상합니다..태조왕이 정변으로 즉위한 후 시조의 성을 자신의 성인 고씨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그리고 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재사가 아닌 어머니 쪽이기에 아버지는 권력에서 배제되고 그 어머니가 섭정을 하지 않았을까요..그리고 차대왕의 경우 태조왕과 24세의 차이로 조금 무리수는 있지만 배다른 동생이거나 또 친형제인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신대왕의 경우는 동생의 아들 혹은 손자가 아닐까 뭐 이런 생각도..뭐 결국은 제 생각도 가설이지요..
추모왕이 고씨라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버지 성이 해씨라서 추모도 절대적으로 해씨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가창립을 했든 어쨌든 고구려 건국 후에 스스로 고씨라고 했으니 추모왕은 고씨인 것입니다. 다만 유리왕 직계는 해씨이기 때문에 추모왕과 유리직계 및 재사의 관계를 위에서 서술한 것입니다. 한편 궁과 수성을 아버지를 같이 하는 형제로 볼 경우에 재사가 문제되기 때문에 부자설이 유력한 것입니다. 따라서 재사와의 관계 및 형제관계라는 기록을 최대한 고려하여 사촌관계에서 찾은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아버지는 다른 동복형제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