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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골수성 급성 백혈병) 투병 일천여든다섯(1085) 번째 날 편지,1(안부,소식)-2023년 8월 27일 주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8월 27일로, 2023년 8월의 마지막 주일이자 작전동 할아버지 원로 장로님 생신날이란다.
사랑하는 큰아들아
오늘 아침편지 배경음악은 사랑하는 엄마가 부른 ‘복 있는 사람은’을 올리니, 클릭해서 찬양을 들으면서 편지를 읽어보시게….^^
사랑하는 큰아들아
오늘이 아빠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전동 할아버지 원로 장로님 생신날인데,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작전동으로 가서 뵐 수도 없고, 대면해서 축하드릴 수도 없으니,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아리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회 사역으로 금, 토, 일이 가장 바쁜 사랑하는 엄마와 우리 작은아들 김 강도사 오늘 주일 오후 예배를 모두 마치고, 작전동 할아버지 집에 가서 축하드리고, 생신 축하금을 드리고 온다고 하니, 아빠의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지는구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말은 너무도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한 금언으로, 아빠가 육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돈도 잃고, 재산도 잃고, 성들도 잃는 등 모든 것을 잃었어도 작전동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을 이토록 오랫동안 떠나 본 적이 없었구나.
그런데, 2020년 9월 초에 혈액암 선고 이후 3년여간 혈액암 투병을 하면서는 면역력이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주 무능한 사람이 되었구나….
그러므로 건강이 곧 생명이고, 건강해야 살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지금 아빠의 몸과 건강 상태가 그러지 못하니, 연세가 많으셔서 연로하시고, 오랜 투병 생활로 병약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불효만 하고, 죄만 짓는 것 같아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사랑하는 엄마가 엊그제 돈이 생겼다고, 어제 낮에 마트에 가서 각종 부식물을 5만 원어치나 사 와서 콩나물 무침과 가지 나물 등 저녁 반찬들을 푸짐하게 만들어주었구나.
그리고, 다음 주에는 삼겹살과 닭고기를 사 와서 삼겹살을 구워주고, 닭으로 닭볶음탕과 닭죽과 백숙 등을 만들어준다고 하니, 기대되는구나….
사랑하는 큰아들아
오늘은 ‘눈물로 부탁드리오니’라는 기도문과 ‘우리 아버지 생신날에’라는 글을 기록해 본단다.
♡눈물로 부탁드리오니♡
글: 주시(主視) 김형중
주님!
오늘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김수기 원로 장로님의 생신날이라
두 분을 찾아뵙고, 축하드려야 하지만,
제가 혈액암 투병 중이라 제 한 몸
챙기기도 벅차고, 힘들기만 합니다.
주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병약하셔서 이제는 두 분이
생활하시기에는 벅찬 삶이 되었기에
그런 현실을 마주했으나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한없어서 한없이 죄송하고,
제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아파져 옵니다.
주님!
지금 당장 저나 제 아내가
필요를 채워드릴 수 없기에 형제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 나 자신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없으나
무슨 특별 조처하지 않으면
안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입니다.
주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우리 주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하고, 간곡하게
눈물로 부탁드리오니, 두 분의 건강을
붙들어 주시고, 병세가 더욱더
호전되게 하셔서 남은 생애를 평안하고,
복되게 살아가시도록 하시옵소서. -아멘-
(2023년 8월 27일 주일에)
♡우리 아버지 생신날에♡
글: 주시(主視) 김형중
오늘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
김수기 원로 장로님 생신날이라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축하드려만,
90세(만89세) 생신을 맞이하신
우리 아버지의 출생하심부터 오늘
현재까지 치열하게 살아오신 한 많은
고귀한 한평생을 족보와 가첩(家牒)과
가족사를 참고해 나를 중심으로
되돌아보면서 아래에 기록해본다….
(2023년 8월 27일 주일에)
사랑하는 큰아들아
우리 집안은 광산김씨(光山金氏) 5대파(五大派) 중의 양간공파(良簡公派/14世:연/璉) 6중파(六中派) 중의 밀직부사공파계(密直副使公派系/17世:천리/天利) 3중파(三中派) 중의 전직공파(殿直公派/19世:숭지/崇之), 예안파계(禮安派系/21世:효로/孝盧) 팔소파(八小派) 중의 산남공파(山南公派/23世:부인/富仁) 집안이다.
할아버지(우리 자녀들에게는 증조할아버지)는 그런 집안의 자손으로 출생하시어 소싯적부터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학문이 높고, 성품이 곧으며, 힘이 장사고, 기골이 장대하여 당시 구척장신(九尺長身 / 185CM 정도 / 1척은 한차로 30CM)이라 불리셨고, 11세 때 부친을 따라 기미년(1919.)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셨다.
17세(1925년) 보은군, 옥천군 장사씨름대회 참가하시어 1등 하므로 상으로 황소 1마리를 받으셨던 할아버지 김노일(魯一)과 밀양 박씨(密陽朴氏) 문신(文臣) 인석(仁錫)의 장녀(長女) 할머니 오봉(五峰)의 아들로 1934년 7월 16일 충북 보은군 삼승면 원남리 435-5호에서 출생하셨다.
할아버지는 충북 영동군 용산면에서 1877년 12월 20일(丁丑/정축, 高宗/고종)에 출생하시어 1984년 1월 10일, 18세 때에 동학란(‘빈부의 차와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애고, 양반과 유림을 타파’라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동학교 접주 전봉준, 김개남 등을 수괴로 하여 일어난 동학란)으로 인해 양반집이던 우리 집안에 불만을 품은 일부 폭도들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사시던 충북 영동군 용산면 동네를 떠나 충북 보은군 원남리 435번지 5호로 급하게 이사하셔서 거하시면서 동학난으로 모든 재산을 강탈당하고, 완전히 망해 어려운 집안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문수학(漢文修學)으로 학문이 높고, 서예(글씨)에 능하시어 보은군과 옥천군 내 많은 묘비를 써 주시기도 하셨다.
43세에 가족과 함께 기미년(1919.) 독립 만세운동 참여하셨거, 그 후 큰딸이신 룡금(龍金) 증조고모 할머니께서 일인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잡혀가시자(1919년~1923년/ 16세~20세 사이로 추정) 큰딸을 빼앗긴 아픔과 슬픔 속에서 더욱더 분노하셨다.
그 후 계속해서 일제의 압제와 만행을 규탄하고, 일제에 항거 하던 중 1936년 3월 26일 아들(노일)마저 28세의 나이로 일인들에 의해 요절하였다.
그로 인하여 급기야 아내(증조할머니)마저 1937년 2월 17일 57세로 돌아가시고, 1938년 7월 15일 30세의 자부와 여섯 살 난 손자만을 남겨 둔 채 일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네.
그러나, 일인들에 협조하지 않고, 항거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묘지에 안장하지도 못하고, 금적산 아래의 공동묘지 자좌(子坐)에 묻히셨다.
일제하에 증조모님께서도 일인들의 핍박과 폭정 아래 큰딸이신 룡금(龍金) 할머니께서 일인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잡혀가시자 딸을 빼앗긴 아픔과 슬픔 속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러시다가 1936년 3월 26일 아들마저 28세의 나이로 일인들에 의해 요절하자, 살아생전에 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신 채 부군보다 1년 이른 1937년 2월 17일 57세로 돌아가셨다.
증조할머니 역시 가족들이 일인들에 협조하지 않고, 온 집안과 가족들과 함께 항거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묘지에 안장하지 못하고, 버려져 동네 옆 보은군 삼승면 공동묘지(금적산 아래) 자좌(子坐)에 매장되었다.
그랬던 두 분을 1984년 10월 27일 손자 수기(아버지)가 생전에 거하시던 집(생전에 사시던 곳은 충북 보은군 삼승면이나 충북 옥천군 안내면과 경계가 붙은 지역으로 동네 한가운데로 지역 경계선이 지나가는 곳임) 앞쪽 밭인 충북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 319-2의 전(田) 373평과 322 전(田) 225평 등 총 598평(산소 위 달은 별도로 50여평-총 648평 정도)을 구입하여 1984년 11월 13일에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아버지(수기)가 세 살 되던 해인 1936년 3월 26일(丙子병자/28세)에 할아버지(노일/魯一)를 일인(日人)들에 의해 잃으셨고, 네 살 되던 해인 1937년 2월 17일에 증조할머니께서 별세(57세)하셨고, 다섯 살 되던 해인 1938년 07월 15일에 일인들에 의해 증조할아버지(법상/法相/62세)를 비참하게 잃으셨다.
동학란과 일인들에 의해 너무도 처참하고, 비참한 집안사를 경험하며, 홀로되신 할머니와 함께 1938년애 고향인 충북 보은군에서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다섯살된 아이가 엄마 손을잡고, 맨몸으로 며칠간을 걸어서 피신하셨다.
타지(자녀들의 고향-충북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에서 어렵게 사시다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942년 6월 12일(음, 34세), 해방을 1년여 앞두고, 어머니마저 잃으셔서 의지할이 없는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셨다.
이후 아홉 살인 어린아이인 우리 아버지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힘들고, 외롭게 성장하시다 마침 한 동리에 사시던 정씨 집안의 수양아들로 들어가셔서 인품이 좋으신 수양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셨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니 고맙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수양아들이지만, 집안의 다른 자녀들은 다 학교에 다녔으나, 우리 아버지는 학교도 가지 못하시고, 온갖 잡안 일을 도맡아 하면서 성장하셨다.
우리 아버지가 12세 때인 1945년 12월 8월 15일, 해방을 맞으셨고, 17세 때인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 6. 25로 인하여 전란을 겪으셨고, 그 후 1956년부터 1958년 8월 25일까지 3년여간 육군으로 군 복무를 하셨다.
그러면서 외할아버지 원주김씨(原州金氏) 무신(武臣) 행훈(행원)과 외할머니 김난이의 자녀로 출생한 우리 어머니 정희(貞姬)님과 1955년 12월 8일(목)에 결혼(結婚)하시고, 독립하셨다.
결혼 후에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 180번지(바듬말) 집을 구입하셔서 사시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하셨고, 그러다 자녀들의 교육 등 큰 뜻이 있으셔서. 서울로 올라와서 우리가 살 집을 두번이나 지으며, 자리를 잡고, 살아오셨다.
충북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 고향에 있을 때 의용소방대 대장(1958.-1969.)으로 활동하시고, 소방경연대화에 나가서 1등 상을 받기도 하시며 활동하시다가, 충북 광혜원에 있는 논밭과 집 등의 모든 가계를 정리하시고, 서울시 구로구 천황동으로 이사를 하셨다.
서울시 구로구 천황동 옆동네인 경기도 옥길리고 하는 곳에 제일기업이라는 스테인리스로 문고리 손잡이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해 대표이사(1969.-1973.)를 하시며 공장을 운영 하셨다.
하지만,. 공장 관리자 (중간 관리자-친척-가 수익으로 들어온 돈을 모두 다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채운 후 캐나다로 도주하는 바람에)를 잘못 만나 공장 재정에 큰 손실을 입고, 결국 하는 수없이 공장문을 닫았다.,
우리 아버지는 운영하시던 공장이 문을 닫은 후 일용직과 여러 공장을 다니시는 등 엄청나게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사시다가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호남금속 공장장(1986.-1993)으로 가셔서 근무하시기도 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우리 교회(서울반석교회) 개척 설립 맵버이시며, 시무장로님으로 사역을 하신 후 은퇴 연령이 되셔서 원로장로님이 되신 후 오늘날까지 원로 장로님으로 큰 힘이 되어 주시고 있다.
우리 아버지께서 회갑을 맞이해 1994년 8월 15일(광복절), 사울시 강서구 화곡 본동에 있는 뷔페식당에서 일가 친척과 지인 등 수백 명을 모시고 회갑 잔치를 하셨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께서 회갑을 맞이하셔서 큰아들인 아빠와 사랑하는 엄마가 준비한 회갑 선물로 할머니와 큰고모부과 큰고모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셨고, 2013년 8월 4일(일) 오후 4시에 팔순 감사예배를 우리 교회에 모여 드리며, 축하했었다.
IMF가 터진 해인 1997년 3월 5일(수), 64세 때에 직장(동아건설 염창동출장소 염창동 재건축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근무 중에 오후 3시 15분경 뇌졸증(뇌출혈)으로 의식을 잃으셔서 현장 주변에 있는 유영상한의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상태가 위중해 급히 수술해야 할 것 같아서 이대목동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대목동병원에서 검사 결과 ‘당장 수술을 해야 하지만, 지금 병원에 수술을 대기 중인 환자가 1명이 있어서 자기 병원에서는 바로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하며, 다른 병원에 가서 수술받을 것을 권유한다.
그래서 의사의 추천을 받아 앰브블런스를 타고, 오후 5시 20분에 안양천 건너편에 있는 영등포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수술 준비를 하고, 오후 6시 신경외과 전문의 옥영철 과장의 집도로 수술 후 입원 치료하였다.
1년 후인 1998년 2월 11일(수) 오전 10시 30분에 신경외과 전문의 2과장인 서정기 과장의 집도로 2차 수술(머리 봉합수술)을 했다.
1998년 03월 24일 인천 산재 중앙한방병원으로 전원하여 윤정환 과장의 담당 아래 821호에 입원 치료하였고, 1999년 3월 인천 양방인 산재중앙병원으로 전원하시어 신경외과 치료하셨다.
1997년 7월 서울시 강서구 화곡본동에서 장애 2급 판정을 받으셨고, 2005년 12월 31일 중앙병원 퇴원하셨고(자택 요양), 2006년 04월 20일 폐질 등급 2급 5호를 받으셨다.
2016년 1월 28일~2월 3일까지 인천병원 입원(몇 가지 이유로 일주일간/ 피검사, 엑스레이,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 등)하셨고, 2018년 10월 22일-인천병원 물리치료 특진(CT, 엑스레이,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 물리치료 검사 등)을 받으셨다.
2019년 01월 25일에 환자용 침대를 설치해 드렸고, 2019년 3월 2일, 새벽 2시 숨이 멎는 응급상황 발생으로 인천병원 응급실로 가셔서 응급치료하신 후 411호 병실로 가셔서 입원하셨으나 상태가 위중해져 인천성모병원 129 이송 응급실에 가셔서 응급 치료를 하신 후 503호 병실 입원 하셨다.
그런 후 어느 정도 좋아지셔서 129로 인천병원으로 이송하셔서 인천병원 510호 입원하셔서 치료하시다가 2019년 7월 10일에 아버지께서 퇴원하셔서 집에서 요양 치료 중이시며, 내가 2020년 9월 7일 혈액암으로 병간호할 수 없어서 2021년부터 방문간호사 제도를 이용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큰아들아
아무튼, 오늘 오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8월 27일 주일 오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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