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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22,8-13; 23,1-3
그 무렵
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9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이렇게 보고하였다.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돈을 쏟아 내어, 주님의 집 공사 책임자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그런데 힐키야 사제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임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11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2 임금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23,1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를 소집하였다.
2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3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 7,15)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십니다.
곧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약에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세상이 원하는 열매를 맺고자 할 것입니다.
곧 세상의 평가와 명예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이루고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취와 자기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좋은 나무의 두 번째 특성은 잘 받아먹는 나무입니다.
곧 양분을 잘 받아먹는 일,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은총을 건네주는 타인을 위한 자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받아먹은 줄을 알아야 잘 베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명예나 자신의 성취일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열매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훼손시킬 수 있는, 곧 자신을 손해 볼 줄 아는 행동이요, 옳으면서도 질 줄 아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늘 아버지 앞에 겸손한 행동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달고 단 포도나무는 못되어도>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 7,15ㄱ)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걸까요?
아니면 ‘너희는 저들처럼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겉모양은 양 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실은 이리들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속지 말라고 하시는 거지만, 오늘 저는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가?
거짓 예언자는 아닌가?
열매를 보면 안다고 하시는데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 그전에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를 가르는 기준은 뭣인가?
우선 행실을 뜻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
이웃 사랑의 행실과 욕심 채우기 행실.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게는 두 가지가 다 있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참과 거짓 둘 다입니다.
그러니 저는 거짓 예언자이거나 위선자이고, 적어도 참 예언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음으로 열매란 주변 사람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주변 사람을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 주변에는 참 좋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잘 산 것이요 참 예언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제가 나쁜 짓, 제 욕심 채우는 짓만 했다면, 그래서 덕을 보게 하지는 않고 피해만 보게 했다면,
제 주변에 좋은 분들이 없을 것이고, 있다면 성인들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 주변엔 나쁜 분들이 하나도 없고, 저를 속여먹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든지 저를 도우려는 분들만 계시며, 그래서 오히려 제가 여러분을 이용해 먹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참 예언자는 못 됩니다.
그리고 제가 참 예언자가 못 된다는 것은 참 예언자가 되려고는 하나 못 되었다는 뜻이며,
의도와 의지는 참 되려고 하나 불순물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시나무는 아니고 포도나무입니다.
그러나 달고 단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는 못되고, 신 포도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저는 찔러서 아프게 하는 가시나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적 단맛을 오로지 느끼게는 못하는 신 포도나무이고,
반대로 저에게 여러분은 신 포도를 드시면서도 영적인 단맛을 가려서 취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시골 사제관 앞 텃밭에 토마토, 오이, 고추, 상치, 가지, 파를 심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농사짓는 형제님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알뜰하게 가꾸어 제법 식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정성이 있으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제때에 거름을 주고 잡풀을 뽑으며 가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되었습니다.
여러 새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 합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 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이비가 나쁜 나무임을 알기 위한 나쁜 열매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사람을 속이는 종교들,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이 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사이비에 빠져 인생과 영혼을 망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이들은 이단이나 사이비의 잘못된 성경 해석이나 교리가 그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이비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리를 공부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진실보다 거짓말이 더 논리적입니다.
보이스피싱을 생각해보십시오.
매우 논리적으로 다가옵니다.
속이기 위해서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말하는 경비병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여인들의 말 중에서 누구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들의 교리로는 그들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교리가 만들어내는 ‘행동’이 그들을 알게 합니다.
한국 사이비의 시초는 1930년대 김성도라는 여인이 만든 성주교입니다.
17살 때 평북 철산군의 돈 많은 관리 세 번째 첩으로 달려가다시피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내리 딸을 셋이 낳았습니다.
구박받았겠죠.
그러다 힘겹게 얻은 막내아들이 1년 만에 죽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왔어요.
근데 동네 어떤 교인이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해서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또 병이 들었어요.
매일 열심히 기도해서 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니까 소문이 난 거예요.
그렇게 유명해지자 이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계시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실패하였고 자신이 그것을 완성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창세기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 따먹은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적 타락으로 봅니다.
뱀과 하와가 성행위를 했으면 그 후손들은 사탄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면 깨끗한 피를 가진 이가 이 사탄의 피로 정결하게 해서 거룩한 피로 바꿔줘야 한다는 사상이 나옵니다.
이것이 성적인 타락으로 이뤄지고 뒤이어 나오는 모든 사이비 교주들은 이를 이용해 신도들을 자기 성적 착취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후에 나온 백백교라는 사이비는 여기서 더 나가서 돈과 폭력까지 사용합니다.
백백교가 일제히 경찰에 의해서 조사가 되고 재판이 진행되는데 1937년까지 무려 80여 차례에 걸쳐서 백백교 신도 350명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오대양 사건도 돈과 성과 폭력이 있었고 현재 허경영 씨도 똑같습니다.
이들의 교리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면 그 삶을 보증해주는 교리는 올바른 교리일 수 없습니다.
나무를 살피는 게 아니라 열매만 보면 됩니다.
나무를 보면 헛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교회에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없을까요?
그들의 논리보다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제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라고 알려진 바이든 대통령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려 하자 성체를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낙태를 찬성하는 이단이자 사이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톨릭 교리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비윤리적이면 사이비입니다.
윤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한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톨릭 정통신학을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사이비입니다.
열매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청빈하고 정결하고 온순하고 겸손한 이가 있다면 그가 어느 종교를 믿던 그는 정통입니다.
우리 열매가 무엇인지 살피고, 또 이론만 거창한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1)
이 말씀은 ‘종말 전의 재난’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마태 24,4-5)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아니,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마태 24,23-25)
오늘날에도 ‘재림 예수’ 라고, 또는 ‘메시아’ 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사도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
(2베드 2,1-3ㄱ)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코린 11,3-4.13-15)
거짓 예언자들도 자기는 진짜 예언자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자기 입으로 ‘나는 거짓 예언자다.’ 라고 말하는 거짓 예언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는 것인데, 속는 사람이 있으니까 속이는 자들이 계속 나타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은 범죄자들이고, ‘속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2)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라는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고, 그들이 거짓 예언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적극적으로 물리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 라는 말은 여기서는 ‘그들의 활동 결과’를 뜻합니다.
어떤 예언자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었다면 그 예언자는 진짜 예언자입니다.
반대로, 어떤 예언자 때문에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면 그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활동 결과를 보고 나서 거짓 예언자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너무 쉽게 속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 또는 사이비 종교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자들에게 속으면 그자들의 탐욕과 착취의 피해자가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그자들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 나무일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쁜 나무일 수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신자들이 처음부터 그를 사도로 믿어 준 것은 아니었는데(사도 9,26), 바르나바 사도가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증언하는 등의 중개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떻든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도라는 것을(좋은 나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즉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은 그의 선교활동입니다.
4)
‘열매’에 관한 말씀은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그 경우에, ‘열매’는 ‘구원’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무입니다.
그 열매를 완전히 맺을 때까지는 아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위대한 사도이고 선교사인데도, 자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은, 행복은 선택이다! - “참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시편 119,33-34)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이런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때 주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이르고 참사람의 자유인이 됩니다.
공부 중의 참 중요한 평생 공부가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
<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논어>
그러니 하루하루날마다 좋은 선택과 훈련 및 습관화가 참사람이 되는 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하루하루 좋은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운명도 바뀝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에서 저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고 받은 대화의 요지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과거의 아픈 추억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들이 악의 유혹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행복을 선택하여 좋은 추억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운명의 질곡에서, 악순환의 늪에서,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행복을 선택했음을 뜻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빛이자 희망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다!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늘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즉시, 늘 붙여놓고 보라고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말마디를 붓펜으로 A4용지에 선명하게 써드렸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주제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말을 바꾸어 “말과 글과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아주 강렬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전혀 자기 성찰이 없는, 자기 공부가 없는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오늘도 이와 유사한 사람들 참 많습니다.
적반하장, 내로남불, 후안무치,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거짓 예언자들로 진실과 겸손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언행을 보면 금방 거짓 예언자들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너무 자명하여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가 문제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듯이 사람이 좋으면 말과 글도 행실도 좋습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듯이, 사람이 나쁘면 말도 글도 행실도 나쁩니다.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비관적 말마디도 회자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참된 회개의 삶이, 참된 깨달음의 삶이, 참 좋은 선택과 훈련의 삶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나무는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은 바꿀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바로 이런 부단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의 은총입니다.
이런 노력이 주님을 감동시켜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변화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참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때 우리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되고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선택한 수행들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코 이런 사랑의 수행에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 예전 유다 임금 요시야요 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
(2열왕 22,2)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이런 임금은 희망의 표징이요 백성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바로 요시야 임금의 진면목이 오늘 독서 후반부에 잘 드러납니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이렇게 임금과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어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참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사느냐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이며, 게시판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의 선택보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선택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다음 좌우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갈 때 가면은 저절로 벗겨지고, ‘정직(integrity)’하고 ‘투명(transparency)’한 참 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의 나일 뿐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저절로 겉도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Take care of the inside and the outside will take care of itsself).
이런 경지라면 무슨 옷이든 잘 어울립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
(시편 119,36-3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복’을 주로 입고 다닙니다.
아침에 산보할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사제복을 입고 다닙니다.
산보할 때는 마주치는 사람들이 ‘Father'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본인도 가톨릭 신자인 경우에는 더욱 반갑게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식당에서도 주인이 신자인 경우는 반갑게 인사하고, 덤으로 반찬을 주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떡‘을 사는데 주인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본당신부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최근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동안 성당에 못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의 본명을 물으니 ’헬레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침에 저는 떡을 주로 먹는다고 말하니 이것저것 덤으로 싸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사제복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가지 말아야 할 곳은 알아서 안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닐지라도 나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Facebook'에 본당 가두선교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개신교회는 가두선교를 적극적으로 하지만, 성당은 가두선교를 자주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도 2번 정도 교우들과 가두선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3번에 걸쳐서 가두선교에 대한 교육을 마친 후에, 가두선교를 나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준비해간 선물도 나누어주고, 예비자 교리 신청서도 받았다고 합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쉬는 교우들도 인사하면서 다음부터 성당에 나가겠다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동체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새 신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했던 일의 결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마귀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19세기에 수십 명의 아기가 오늘날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는 증상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죽은 아기들을 부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슴샘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정상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이제까지 봤던 아기의 가슴샘은 가난한 가정의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부검할 수 있는 아기 시신은 모두 가난한 가정에서만 가능했고, 대부분 설사나 영양결핍으로 가슴샘이 이미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이제까지 위축된 가슴샘을 정상으로 생각했으니,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아이의 가슴샘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가슴샘 비대로 아이의 기관이 눌러져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집에서는 아기 때 가슴샘을 키우려고 조치했습니다.
가슴샘에 방사선을 쬐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기가 화상을 입거나 가슴샘이 위축되었고, 그 결과로 암까지 생겨 결국 1만 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과학 연구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이 세상에 큰 상처와 아픔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맞는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주님만이 진리 그 자체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다가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라고 하시지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들이 맺은 열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의 상태와 가치를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숨어있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할 때가 바로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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