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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6일 성토요일
성토요일에 교회는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물러
주님의 수난과 죽음, 저승에 가심을 묵상한다.
그리고 기도와 단식을 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린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 금요일에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 길을 함께 걷고 그분을 무덤으로 배웅했습니다.
성 토요일에는 밤에 드리는 파스카 성야 예식 전까지 낮동안 공식 전례가 없지요.
하지만 갑자기 부활 성야 독서로 건너뛰어 말씀을 묵상하기에는
성 토요일의 의미와 영성이 너무 귀해,
주님의 무덤 곁에 머무르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자고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성 금요일에 봉독된 수난 복음 마지막 부분(요한 19,38-12)에 함께 머물러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40)
예수님 주변 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역할로 그분과 함께합니다.
공생활기간 동안 동반했던 제자들도 있고,
'자기들 재산과 시중을 들던 여인들'(루카 8,3 참조)도 있습니다.
장례를 준비하며 그분께 값비싼 향유를 발라 드린 여인들도 있고,
또 그분 죽음의 길에 결정적 역할을 한
원로, 사제,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니코데모는
예수님의 육신께 마지막 지상 예우를 다하는 충직함을 보여줍니다.
드러내놓고 따르지는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과 달리 제도권 안의 인물들로
부와 학식과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춘 이들이어서
이와 같은 장례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존재는 성경 안에서 그다지 비중 있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환경과 능력으로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정성껏 봉사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소명을 진정으로 사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형장인 해골 터에 정원이 있었고 마침 거기에 새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있던 것이 아니라 "마련되어" 있었다고 믿습니다.
성자께서 이 세상에 육화하실 때
'아무도 머무른 적이 없는 동정녀의 태'를 거처로 삼으셨듯이,
지상 삶의 마지막 거처가 "새 무덤"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이는 창조주와 한 분이시고, 창조 때부터 계셨던 주님께
피조물인 땅이 드릴 수 있는 가장 당연하면서 아름다운 예우일 겁니다.
그분의 피를 받은 땅은 이제 품을 활짝 열어 그분을 품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곧 비게 되겠지만,
오늘 구세주를 잃은 우리에게 이 무덤이 있다는 것,
그리고 향료와 아마포로 주님께 사랑을 표현한
두 남성이 있다는 건 참으로 큰 위안입니다.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요한 19,41)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가
"새 무덤"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님의 가장 처절하고 처참한 순간
그분의 핏기 가신 몰골을 받아 안기 위해
둥그렇게 품을 여는 이름 없는 "새 무덤"이고 싶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그 모든 신비를 바위의 깎인 틈새마다,
거친 표면마다 깊이 각인한 채 영원히 침묵할 "새 무덤"이면 좋겠습니다.
성당 안의 치워진 제대와 텅 빈 감실, 가려진 성상이,
예수님을 잃은 우리를 더 공허하게 합니다.
더 이상 그분을 경배하러, 사랑을 속삭이러 갈 곳이 없다는 상실감이
성 토요일을 견디기 힘든 날이 되게 합니다.
이제 공허와 그리움을 가득 채워줄 주님 부활을 기다리며,
아드님을 잃으신 성모님의 마음도 헤아리며,
고요히 무덤 곁에, 무덤 안에 머무르며
주님의 현존을 찾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님의 침묵)
만해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오늘입니다.
그분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제 밤새 불던 돌풍도 잦아들고 잔잔한 침묵만이 감돕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인간과 신의 처절한 싸움은
결국 사악한 인간의 승리(?)로 끝난 듯 보입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神은 죽었습니다."
신을 죽인 인간은 의기양양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죽음과 고통, 미움과 아귀다툼만 남았습니다.
이제 곧 조금만 있으면 진실이 밝혀집니다.
결국 인간이 지고 신이 이겼음을 보게 됩니다. 그게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復活)은 신의 나라가 결국 승리함을 고백하고 경축하는 사건이요,
"알렐루야!"는 그 축제의 주제가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인간이 제아무리 잘 나도 결국은 하느님 손아귀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내 나라를 구축하려 신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지 마시고,
신이 우리에게 무상(無償)으로 거저 베푸시는 하느님 나라를 누리십시오.
그래야 벗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신과 더불어 참으로 부활할 테니까요.
오늘은 조용히 침묵합시다!
하느님과 화해합시다!
부질없는 나의 욕심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오늘 밤에 참으로 기쁘게 "알렐루야!" 를 노래합시다.
그분이 부활하셨고 벗님도 부활하였기에 맘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십시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합니다.
벗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힘들어했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어느 역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버스가 고장 났나?’ 싶어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니,
운전기사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마스크 쓰세요. 마스크 쓰지 않으면 버스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어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험악한 모습을 지으면서 욕을 하며 말합니다.
“마스크 안 써! 나 코로나 걸리지 않았다고!”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운전기사는 마스크를 쓰라고 소리 지르고,
승객은 안 쓴다며 욕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위기를 조성해서 이 승객을 버스에서 내리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무력을 써서 강제로 버스에서 쫓아낼까요?
이것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고생이 그 승객 앞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마스크가 없으신가 봐요. 이거 쓰세요.”
이 여고생이 내민 것은 마스크였습니다.
그런데 이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여고생의 손을 보았다고 합니다.
벌벌 떨면서 내미는 가냘픈 손을 말이지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혹시 이 험악한 아저씨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고생은 두려운 상황이지만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기의 변화보다 남의 변화를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더 옳게 살 것을 생각하기보다, 남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짜 변화해야 할 것은 자기의 변화이고,
이 변화를 통해서 더욱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할 ‘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토요일을 보냅니다.
어제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죽음 뒤에 곧바로 부활이라는 영광을 보여주지 않고,
예수님 부재의 빈공간을 마련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더 깊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 뜸을 들이는 것처럼,
부활의 큰 기쁨을 얻기 위해 뜸 들이는 시간이 바로 오늘 성토요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특히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성야 미사 예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리로 되돌아가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 이전에 그분이 알려주신 가르침이
모조리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임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으며,
그분이 베푸신 기적들도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 표징이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 부활이 아니라면, 제자들의 믿음이 생겨날 수도 없었고,
사도가 된 제자들의 믿음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도 세워질 수 없었으며,
우리의 믿음도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2. 이렇듯 믿음을 굳게 지니게 된 제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의지가 생겨났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자신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발현 체험이 숨어 있었습니다.
발현 체험이 부활 신앙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수난과 죽음 이전에 당신을 알아보고 믿었던
제자들과 소수의 아나빔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박해한 자들과 예수님을 멀리한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그 부르심을 들은 인간의 응답과 노력도 필수적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부르심과 응답이 오고 간 후에라야 발현 체험이 가능해지고
그 체험 위에서 부활 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으로 거듭 태어난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맞부딛친 현실은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유다인이었고 예수님께서 율법적 유다교에 의해
박해를 받아 돌아가셨기에 자신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이기는 하지만
‘참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새 이스라엘’이라고는 여기지 않았고
따라서 ‘옛 이스라엘’에 속했던 유다인들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3.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도, 유다인들을 향한 복음 선포 활동도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는 매우 놀라운 선교 성과를 가져와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한 번에 삼천명 가량이 세례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사도 2,41).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제자 시절의 비겁한 처신과 얄팍한 믿음 대신에
용감한 처신과 담대한 믿음으로 여전히 박해를 가하려 하던
유다교 최고의회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각오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처신이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처신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도
돌려세워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삼으신 덕분에,
그리스도 신앙과 예수 부활 믿음은
당시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지중해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다교를 고집하던 해외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참 이스라엘로 자부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시기 질투하였고,
로마 당국에 고발하기도 하였고
이 옛 이스라엘에 속한 유다인들의 고발이 로마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에서 다신교 풍습을 물려받았는데,
이들 다신교의 신들은 사람으로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여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여긴 존재들이었기에
황제도 선정을 베풀면 죽은 후에 신이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는 이미 살아있는 시점에서
신으로 자처하는 황제숭배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제국이 된 로마는 이민족들과 벌인 숱한 정복 전쟁을 통해
종교와 사상과 문화가 제각기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진 대제국을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하여 도처에 황제의 흉상을 세워 놓고 이 상에 경배하도록 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한낱 사람에 불과한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라는 우상숭배 정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4. 눈에 보이는 자연과 사물을 인간 이성으로 추리하고 분석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합리주의적 가치관이 그리스적 사유방식입니다.
이를 물려받아 실용적으로 적용해서 지중해 세계를 한 제국으로 통합시켜 다스리려 했던
로마인들이 보기에 한낱 사람에 불과한 나자렛 예수가 정치적 반란을 일으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실을 가지고, 그가 부활했다고 입증될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미신을 퍼뜨리고 심지어 그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로마 박해 250년 동안 사도들과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희생되었으며 치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자들은 더욱 치열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였고,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자기비허의 신앙을 깨달았으며,
사기지은四奇之恩을 발휘하시어 성령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기에,
그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늘어났고 공동체들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이에 대한 산물이 네 복음서요, 사도행전이며, 사도들의 편지들이고, 묵시록 등 신약성경입니다.
5. 그래서 신구약성경의 핵심만을 발췌하여 말씀으로 선포하는 부활 성야 미사는
일년 중 교회가 거행하는 미사 중에서 가장 장엄하고 성대한 전례입니다.
창세기가 진술하는 창조 신앙에서부터, 탈출기가 증언하는 해방 신앙을 거쳐서,
여러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대망 사상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꼭지의 성경 말씀이 봉독 되었습니다.
그만큼 인류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선포함으로써
참된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고,
대단히 많은 구도자들이 일생동안 치열하게 사색을 거듭해 왔으며,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귀하고 어렵게 얻은 진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증거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편하고 기쁘게 예수 부활을 축하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네 육신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 생겨날 때 단세포 생명체 시절부터
인류가 진화해 온 자취를 압축해서 되풀이한다고 하듯이,
우리네 영혼의 생명을 드러내는 부활 신앙도 이 부활 성야 미사를 기점으로 되풀이합니다.
예수님을 생전에 잘 알고 그분의 가르침까지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좀처럼 믿음을 간직하기 어려웠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가톨릭교회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세례를 받고
숱하게 성경 말씀을 들었고 성찬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셨으면서도
기계적이고 자동화된 습관이 되어 버린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신앙이 미숙한 채 머물러 있게 됩니다.
6.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발현 체험을 시켜주신 덕분에 제자들은 믿음을 성숙시킬 수 있었고,
성령까지 받은 다음에는 사도가 되어 용감하게 신앙을 전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남겨주신 발현의 양식은 다섯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말씀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뜨거운 체험이 믿는 이들에게 첫 번째 부활 신앙의 기운을 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성찬으로 오십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 영혼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음식으로 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도 당신처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받기를 촉구하십니다.
세 번째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듯이 섬기고 특히 되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그렇게 섬기는 삶이 세속적인 눈으로는 어리석어 보일지언정
그것이야말로 최후 심판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귀한 기준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모든 세례 받은 신자에게는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므로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교회가 죽음도 물리치지 못하는 천국의 열쇠가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리하여 믿는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도직을 행할 때
서로를 존중해서 공동으로 합의하는 인격적이면서도 민주적인 구조를 입증할 때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빛이 되리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현존양식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발현 체험의 장입니다.
7. 매사에 합리적이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물려받은 로마인들이
지중해 세계의 다민족을 정복하여 다스리며 매사에 실용적이고자 했으면서도,
유독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해서만은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등
야만적으로 죽이며 박해를 했던 데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 신앙에 대한 몰이해와 조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양상이 겉으로 달라지기는 했을 뿐
이런 몰이해와 조소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하여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풍조와 행태가 모두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비인간적인 물신풍조와 자본숭배사상이 그러하고,
심지어 반인간적인 생명경시풍조와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키는
국제분쟁과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전쟁 행위 등이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는 이렇게 알아듣기 어려웠어도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사랑을 겸손 되이 실천하는 믿는 이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 그리스도 신앙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부활을 살아간 이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 되고 싶으셨던 존재인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힐지언정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물러서지 않으며 취소될 수도 없는 존재인 인간이,
그리하여 육신 생명 그 이상의 귀함을 갖춘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존재라는 진리도 사회적이고 법적으로 보장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진보가 예수 부활 신앙의 조각들입니다.
발현 체험이 부활 신앙의 비결이라는 신앙의 공리는
제자들에게나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나 여전히 유효한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현존양식에 충실하시기를 부탁드리면서,
그리하여 이룩될 우리의 부활과 함께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이 거룩한 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복음 말씀들은 아들과 성령과 함께 아버지께서 가지신 영원한 구원계획이 실현된
역사적, 예언적, 지혜의 말씀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것들을 보겠다.
안식일이 지났다.
이는 “하느님의 안식”(창세 2,4 참조), “일곱째 날”이다.
이제 “주간 첫날” 즉 “제8일”이 시작되었다. 안식일 다음 날로 표현된 이 8일은 상징적 숫자이다.
7은 충만을 의미하며, 1은 충만의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있다.
이날은 계시와 역사의 마지막 날이며, 새로운 날이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첫째 날 계시하시고 행하신다( 창세 1,1-3; 에제 1,1).
또한 이날은 종말론적인 날이며, 더는 그 후에는 있지 않을 날이다. 영원히.
주님께 유일하게 충실했던 여인들이 등장한다.
남자들, 특전을 받은 사람들, 선택되고 축복받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마르코 14,50은 상징적 문헌을 보고하고 있다.
여인들은 이 순간부터 공동체와 관련된 의미에서
항상 주님 부활의 표징에 대한 수탁자들이 된다.
부활 복음은 오늘 이 밤 그리고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충실한 여인들을 돌아보고 그다음 남자들을 돌아보게 된다.
사도들이 세상에 대해 홀로 전적인 증거자들이 되더라도 말이다(사도 1,1-4.21; 10,41).
그 기능에 있어서는 같다.
묵은 옛 어두움은 여명 앞에 사라져 가고,
약속된 우리의 정의의 태양(말라 4,2:불가타), 빛나는 아침의 샛별이(묵시 22,16) 떠오른다.
주검에 발라 시체가 천천히 썩도록 하는 묵은 향유가 준비되었으나, 더는 필요 없게 되었다.
여인들은 무덤을 보고, 향유를 바르려고 가고 있다.
그러나 돌은 이미 치워졌고, 무덤은 비었으며, 시체는 거기에 없었다.
여기서 여인들은 위대한 神現을 체험한다. 천사 혹은 부활의 천사들을 만나게 된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말한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5절)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수없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는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즉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계신 분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과거의 한 인물로, 성경에 나오는 분으로 묶어두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얻으신 영광된 부활을 우리가 잘 알아듣고
우리의 삶 전체가 부활하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인간 존재가 완전히 변모하는 것이다.
부활은 승리의 신비이며, 죽음과 모든 부패의 힘에 대한 완전한 승리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살아나다, 되살아나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를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했을 때,
사도들은 헛소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하여간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야 하며,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불 된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삶은 죄와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완전히 참여하는 삶이다.
그 삶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사랑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며 실천함으로써
더욱 완전한 삶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받아들여 살아야 한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부활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5절)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부활성야 -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입니까?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참조)
이 교환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 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 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빠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납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알렐루야!
빠스카 성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을 열고 3일 만에 다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도 절망과 두려움으로 닫힌 문을 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감’입니다.
그 지나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체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른 모든 집의 맏배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죽음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마치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코로나가 지나가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재난이 지나갔습니다.
10번째 재앙이 지나간 뒤로 파라오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나감의 두 번째 체험은 오늘 3번째 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10번째 재앙을 겪었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주었지만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뒤에는 이집트 군사들의 전차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바다에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바로 그 바다가 갈라지면서 생명의 길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넜던 체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며 ‘과월절(파스카)’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파스카 만찬을 나누면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유다인 파스카 축제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부활절과 겹치는데
이는 예수께서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신 수난 사건이
바로 파스카 축제 기간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던 파스카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전례인
성주간의 3일인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을
파스카 성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원죄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악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들 또한 죽음이라는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바다를 건넌 사건입니다.
악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우리들 또한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2022년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건너야 하는 ‘파스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건너야 하는 파스카를 모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부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월절을 축제로 지내듯이,
부활절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제가 될 뿐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서
희망과 용기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과 욕망의 바다를 건너서
겸손과 온유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바다를 건너서
성실과 충실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과 의혹의 바다를 건너서
믿음과 사랑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는
오늘을 사는 나의 파스카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