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2년 다해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오 6,1-6.16-18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면 개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선행이나 단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개는 훌륭하다’에서 모든 가족을 다 물어 재끼는 데도 개를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는 한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개에게 많이 물리는 보호자의 특징이 뭐냐면 자책이 많아요. 누가 물려도 개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개에게 지배당하게 돼요.”
강 훈련사는 온 가족을 다 물고 다니는 개를 정신 나간 개라고 하지만,
엄마는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강 훈련사는 말합니다.
“뭐가 죄인 줄 알아요? 사랑만 한 게 죄인 거예요.”
사랑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에게 영광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물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대상은 내가 섬기는 대상이고
그러면 그 대상에게 지배당합니다. 그러면 그 대상처럼 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이려고 하자 매우 불쌍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안쓰러워할수록 봄이는 더 엇나간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일 때 눈물까지 흘립니다. 이는 개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개의 수준으로 내려가려는 행위입니다.
나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 개에게 물리는 자기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에게 영광을 구걸해서는 안 됩니다. 개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대소변도 싸고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립니다.
강 훈련사는 개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를 교육합니다. 개에게 영광을 구하지 말고 가족에게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가 피를 흘리더라도 자기 가족을 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강 훈련사처럼 개를 길들이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개에게 영광을 구하는 어머니일까요?
개를 길들이려면 어느 정도는 개에게 미움과 분노를 감수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게도 해야 하고 똥을 싸게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에게나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가 됩니다.
이 어머니는 왜 개의 감정에 그렇게 집착할까요? 아마 어렸을 때 자신이 이 개처럼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어렸을 때 받지 못한 사랑을 대신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진짜 가족들을 물리게 만드는데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개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무엇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을까요?
바로 짐승입니다. 사람이 동물을 보면 길들이려고 하지만, 같은 동물은 동물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동물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따라서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애벌레에서 나비로 새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나비가 애벌레에게 영광을 구해야 할까요?
그러면 아직 애벌레란 뜻입니다. 개에게 자란 옥사나 말라야에게 잘 보이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그런 수준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옥사나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안타깝습니다.
사람인데 짐승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길들이려 노력합니다. 길들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영광을 올리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을 왕직이라 합니다.
위와 비슷한 라오라는 개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훈련하다 이빨이 부러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개 앞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잊을 때 개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러면 진짜 개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을 끌어올려 주는 사람이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라오도 이름을 듣고 주인에게 반응하지 않는 개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개입니다.
주인에게 영광을 올릴 줄 모르는 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합니다.
힘으로 하다 안 되니까 불쌍한 척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필요하고 나에게 순종하게 될 때까지 훈련을 멈추면 안 됩니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된 이들은 이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한 줄 압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서도 아픔을 줄 줄 압니다.
강 훈련사는 좁은 우리에 개를 가둬놓고 함께 머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넌 지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거야. 제일 싫은 사람하고!”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안의 공격성을 꺾어놓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개의 수준으로 끌어내림이 아니라 개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개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수준이 되었다면 인간이라고 믿는 이들을 이렇게 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영광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과 함께 작은 풀장에서 개를 빠뜨리고 주인이 아니면 자신을 구해줄 대상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야 주인에게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오는 벽이 아니라 보호자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합시다.
하느님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미 하느님이 된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 사람들이 영광을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본성을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영광을 받으려면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애벌레를 나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나비밖에 없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만드는 법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들일 수 있습니다.
왕직을 수행해야 할 대상에게 마치 신하처럼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사랑합니다 나의예수님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