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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금계포란형에 있는 봉화3경 청암정..........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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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금계포란형에 있는 봉화3경 청암정..........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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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8경중 3경에 올라있는 닭실마을 안동권씨 집성촌에 자리잡은 청암정(靑巖亭)찾아간다. 거북모양을 한 자
연 상태의 거대한 자연석 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은 유곡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을 대표하는 정자로서 주변의 송
림(松林)과 맑은 계류(溪流)와 아름다운 수석(水石)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는 것으로 유명한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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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은 처음 입향한 충재 권벌이 은거한 이후 후손들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충재 권벌은
안동에서 태어나 1507년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 당하였다가 복직하나 을사사화 연장
으로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귀양,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후 선조 때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영의
정에 추증되었다. 하여 닭실 마을과 석천계곡 변에는 그의 유적들이 남아 있고 많은 유물이 충재유물관에 보관
되어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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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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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 들만의 집성촌인 닭실(酉谷)마을은 석천계곡과 어울려 울창한 소나무 숲, 넓은 바위와 깨끗한 물이
어우러진 곳으로 실학자 이중환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 경주 양동마을, 풍산 하회마을, 안동 내앞마을과
함께 삼남(三南·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4대 길지(吉地) 중 하나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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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다 암탉 형태의 나지막한 산이 알을 품듯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계포
란(金鷄抱卵)형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경승지로 칭송한 곳이기도 하다. 닭실의 본래 이름은 달실이다.
달실은 경상도 방언으로 ‘닭 모양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는 ‘닭’을 ‘달’이라고 부른다. 닭실
역시 수백 년 동안 달실로 불렸고 마을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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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은 닭실마을의 중심이자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지은 정자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己
卯士禍)에 연루돼 파직된 뒤 닭실마을로 내려와 큰아들 권동보와 함께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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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담한 공간이 나타난다. 건물은 청암정과 충재 선생의 숙소이자 서재로 쓰이던 별채 ‘충재’가 전부다. 바위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주춧돌과 기둥의 높낮이를 조정해 지었다. 바위주변에는 거북이 좋아하는 물을 담기 위해 인공연못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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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龜巖井(구암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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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로 표기하게 된 것은 국어표준어법을 적용하면서 부터였다. 지금도 닭실마을 자체에서 만드는 안내서나 홈
페이지는 달실로 표기하고 있다. 유랑자는 청암정을 생각 하면서 달실마을 입구에 들어선다. 닭실마을은 오늘
날 행정명칭으로 유곡리(酉谷里)다. 유곡(酉谷)은 닭실이란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명칭으로, ‘금계
포란金鷄抱卵’의 풍수형국으로부터 유래한 마을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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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마을 건너편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면 전형적인 여느 농촌마을처럼 평화스럽고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겨
운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런데 다시한번 크게보면 닭실 마을은 동북쪽은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서남으
로는 백운령이 뻗어 내려,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고 남쪽은 신선이 옥통소를 불렀다는 옥적봉이 있어, 흡사 수
탉이 날게짓을 치는 형국이라고는 하는데 유랑자가 보기에는 그 산이 그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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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沖齋) 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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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亭(청암정)으로 건너가기 위해 설치한 石橋(석교).장식하나 없는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이 더 눈길을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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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정자까지는 돌다리를 걸쳐놓았다. 많이 밟고 다닌 돌은 닳고 달아 시간이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정자 훼손을 막기위해 막
아 놓았다. 유랑자는 관리인을 20여분 설득끝에 겨우 울타리를 넘어 들어갈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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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랗고 널찍한 거북바위 주위로 실개천이 유유히 흐르는 듯한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바위 위로 6칸 트임 마루와 작은 문간방
을 둔 비교적 규모 있는 정자가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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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이 어떻고 수닭이 훼를 치는지 송아지가 알을 까는지.....ㅋ 유랑자는 본시 풍수지리는 잘 모른다. 그냥 풍수
쟁이 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아~ 그렇구나. 음~~그런데 이거는 알겠다. 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지바른 곳
에 자리 잡은 마을, 제 아무리 눈 많이 와도 금방 녹아버릴 것 같은 온화함, 그리고 평화스럽고도 푸근한 마을이
라는 것쯤은 그냥 봐도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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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유랑자의 눈으로 보아도 과연 명당이구나 싶을 정도로..... 험하지 않은 산이 폭 하니 마을을 감싸
안고 그 마을은 앞으로 너른 들과, 실개천을, 그리고 마을 뒤로 험하지 않은 산자락을 두고 있다. 산도 마을을
가리지 않고 마을도 산을 헤치지 않는다. 딱 여기까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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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주위에는 수령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수목이 어우러져 마치 숲 속 바위에 올라앉은 정자와 마주하는 기분이다. 이 광경이
놀랍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해 유랑자는 한참을 둘러보고 올라보고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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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살았음직한 왕버들은 세월의 무게를 지고 반쯤 누웠다. 우거진 녹음과 정자 옆 바위 위에 핀 이끼들이 청암정의 풍경을 돋우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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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닭실은 전통한옥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어, 영남지방 반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닭실
마을은 안동 권 씨 가문에서도 닭실 권 씨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던 마을이고, 종가인 충재 권벌(權,1478
~1548)의 고택을 중심으로 다수의 한옥이 마을 전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반촌의 기품 어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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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잠깐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충재 권벌이란 사람은, 조선의 역사를 보면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
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
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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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종택 서쪽에 자리한 이 정자를 마주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벌리고 만다. 집 안에 어찌 이런 광경이 있으리라 아마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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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水石(청암수석)....청암정 처마 밑의 이 "전서체의 현판"은 당대 명필로 전서체의 대가인 "眉?(미수) 許穆(허목)"이 쓴 글씨로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청암수석(靑巖水石)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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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岩亭者 權忠定公 山水舊庄(청암정자 권충정공 산수구장)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있는 옛집이다.
洞壑水石 最佳稱絶景(동학수석 최가칭절경)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복년노로원 부득일유기간)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懷想常在 高壁淸溪 (회상상재 고벽청계)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特書 靑岩水石 四大字 (특서 청암수석 사대자)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亦慕 賢之心也 識之 (역모 현지심야 지지)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인 사실을 적어 둔다
八年 孟夏上浣 台嶺老人書 (8년 맹하상완 태령노인서)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이 쓰다 미수(眉수)가 이 편
제(扁題)를 숙종8년 임술
(壬戌)(1682) 사월 상순에 썼는데, 당시 나이 88세였다. 곧이어 병들어 별세했으니, 이것이 곧 그의 마지막 절필(絶筆)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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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亭(청암정)현판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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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 중종 조의 문신
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온건 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하자 이곳으로 내려와 집을 지어 닭실마을의 터를 닦았다. 충재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
활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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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다시 파직 당
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
작한 역모사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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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敬次(경차),공경히 차운함
履險能全帝降衷(이험능전제강충) 험난한 시기에 온전히 절개지킴은 타고난 성품인데
如今往事轉頭空(여금왕사전두공) 지나간 자취를 더듬으니 잠깐 사이에 흘러갔네.
氷霜高義雷霆下(빙상고의뢰정하) 서릿발 같은 높은 의리 우레 번개에도 꺾이지 않았고
雲水孤亭宇宙中(운수고정우주중) 구름과 물위의 정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서있네.
柳影滿簾春得雨(유영만렴춘득우) 버드나무 그림자 주렴에 가득한데 봄비 내렸고
荷香撲枕夜多風(하향박침야다풍) 연꽃 향기 베개를 감싸고 밤바람이 멎지 않네.
年年物色渾如舊(년년물색혼여구) 세월이 지나도 정자 모습 예와 다름없으니
至樂相傳矢未窮(지락상전시미궁) 지극한 즐거움 길이 전해져 끊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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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巖居日日野懷寬(암거일일야회관 )숨어 지내는 세월 그윽한 취미는 참으로 너그러운데
玉峽屛開錦水環(옥협병개금수환)옥 돌풍은열렸고 비단결 연못 물 둘러있네.
鑿谷幾敎山鬼泣(착곡기교산귀읍)이 좋은 터전을 개척하자 산 귀신은 몇 번이나 울었을까
披雲方遣地仙看(피운방견지선간)구름을 헤지고 열려진 땅은 신선의 별장이어라.
憐池閣道要須闢(연지각도요수벽)정자 따라 만든 돌길은 보기에도 어여쁘고
喜客山扃不許關(희객산경부허관)산 밑의 사립문은 길손 위해 닫지 않았네.
風欖斜陽陪勝賞(풍람사양배승상)바람 부는 석양의 정자 경치는 더욱 고운데
松醪溪簌薦金盤(송료계속천금반)솔잎 술 나물 안주가 금반에 담겨오네.
栢巖백암 金玏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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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번 시문
습재 관벽(習齋 灌擘(1520~1593)
欲賦詩篇感我衷(욕부시편감아충) 시를 읊고자 하니 내 마음엔 느낌도 많아
大賢心跡已成空(대현심적이성공) 대현의 마음과 높은 뜻 이미 비어버렸네.
更無消息聞泉下(경무소식문천하) 저 세상으로 떠난 공의 소식은 들을 길 없어도
猶覺聲名滿域中(유각성명만역중) 이 땅엔 공을 기리는 높은 명성만 가득해.
古宅煙霞如昨日(고택연하여작일) 옛 집을 감싼 연기 노을은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
淸池菡萏又秋風(청지함담우추풍) 맑은 못의 만발한 연꽃은 다시 가을을 맞았네.
承家尙有事亭孝(승가상유사정효) 가문을 이어 조상 추모하는 정자가 우뚝하니
悵望難堪眼力窮(창망난감안력궁) 아득한 광경을 눈이 시리도록 우러러 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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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
翠亭曾是碩人寬(취정증시석인관) 이 푸른 정자는 원래 큰 인물이 세운 것
人去巖空歲幾環(인거암공세기환) 사람은 가버리고 바위만 텅 빈 지 오래 되었다네.
事業已從靑史識(사업이종청사식) 공명과 사업은 푸른 역사책에 실렸는데
風流還向白眉間(풍류환향백미간) 뛰어난 풍치를 모두 우뚝하게 쳐다보네
亭臨古沼憑虛搆(정임고소빙어구) 정자는 옛 못의 빈 곳을 의지해 세워졌고
門對秋山盡日關(문대추산진일관) 문은 가을 을 향해 종일 닫혀있네.
早賦歸來專一壑(조부귀래전일학) 일찍 글 읊으며 돌아와 이런 강산을 차지했으니
誰爭子所谷名盤(수쟁자소곡명반) 반곡 같은 좋은 대현의 터를 누가 감히 넘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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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記文)형식의 청암정에 대한 설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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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선생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한참 후에, 청암정을 방문한 퇴계 이황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다.
*사진 2수중 전 1수
*청암정제영시, 퇴계 이황선생이 지으신 시를 적은 현판이다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청암정을 주제로한 시 '기제유곡청암정(寄題酉谷靑巖亭)
我公平昔抱深衷(아공평석포심충)충재공께서는 예전부터 깊은 뜻을 품었는데
依杖茫茫一電空(의장망망일전공)끊임없이 화와 복은 순간의 번개같이 공허하구나
至今亭在奇巖上(지금정재기엄상)지금껏 정자는 기이한 암석위에 있고
依舊荷生古沼中(의구하생고소중)의구한 연꽃은 오래된 연못속에 있구나
滿目煙雲懷表樂(만목연운회표락)눈에 가득한 구름에서 본래의 즐거움을 품고
一庭蘭玉見遺風(일정란옥견유풍)뜰 한쪽에서 자라는 난에서 남겨진 풍취를 보네
取生幾誤蒙知奬(취생기오몽지장)못난 나는 공의 거두어줌에 힘입었는데
白首吟詩意不窮(백수음시의부궁)늙은 몸으로 읊은 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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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중 전 2수
酉谷先公卜宅寬(유곡선공변택관)충재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
雲山回復水灣環(운산회복수만환)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정개절서횡교입)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하영청지활화간)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가포자능비가학)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헌상무모불상관)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이 없었네
更憐巖穴矮松在(경인암혈왜송재)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激勵風霜老勢盤(격려풍상노세반)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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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영조가 궁으로 가져온 충재선생의 책 '수신근사록' 을 돌려보내며 정조가 쓴 '어제충정공권벌수진근사록서' 다. 임금의 교서를
받고 후손들이 청암정의 지위를 근사재로 높여 현판을 또 달았다. 원본은 충재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이 편액을 사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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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
을 받게 된다. 충재 선생은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격조를 몸으로 보여준 충절의 사표(師表)였다. 오늘 유랑자가
방문한 청암정靑巖亭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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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중종 21)에 종택에 붙여 지은 정자로,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너럭바위 주변에 못을
파고 냇물을 끌어 들여 못물을 채워 놓았으며, 장대석을 걸쳐 놓아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모습 그대로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건물로써, 주초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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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이 10 여개나 걸려 있다. 보통 정자는 문인이나 학자들의 교류의 장소였다. 정자의 빼어남은 기본적으로 주변 풍경이나, 자리 앉음
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누가 그 장소에 와서 서로 교류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권벌은 이현보, 손중돈, 이언적 등과 교유하고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과도 학문적인 공감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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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관포 박계현(灌圃 朴啓賢)의 시문도 걸려있다.
靑巖亭扁起余衷 청암정의 현판이 나의 충심을 일으켜
人去高名不落空 그분은 떠났지만 이름은 길이 남았네.
形勝莫求三島外 빼어난 경치는 삼 선산 섬을 구할 것도 없고
煙霞自足一區中 연기와 노을은 스스로 한곳에 만족하네.
陶漁耕稼皆前業 질그릇 굽고 고기잡이와 농사를 지음은 초년의 일이었고
節義文章是素風 높은 절개와 빛나는 학문은 닦아온 풍채일세.
幾欲停車終未遂 몇 번 찾으려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至今遺恨更無窮 지금까지 서린 한은 끝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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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글씨는 청암공이 썼다)
境逢塵外自平寬 티끌세상 밖에 있어 절로 평탄하고 너그러워
孤嶼淸池碧玉環 외로운 섬 맑은 연못은 푸른 옥빛으로 둘러있네.
大老國將龜筮視 공과 같은 조정의 대신을 모두 시귀처럼 여겼으니
小亭人作畫圖看 정자에 앉은 사람들 모두 그림처럼 보이네.
瓊林瑤草春長在 아름다운 숲 상서로운 풀은 영원한 봄빛이요
竹屋松扉夜不關 대나무 집 소나무 문은 밤에도 닫지 않았네.
莫道九原埋直氣 구원에 충직한 기운을 묻었다고 말하지 말지니
保邦餘烈帖如盤 공이 나라에 세운 큰 공훈은 반석과 같다네.
(此扁 靑巖公所書.차편 청암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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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든 거북으로 비유된다. 마치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으로
풀이된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다. 청암정을 이 바위 위에 처음 지을 때, 이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졌으며, 바위 둘레에는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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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또한 자연암
반을 이용하여 청암정을 짓고, 암반 주위에 연못을 만든 정원조성수법은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이라 할 수 있다.
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든 거북으로 비유된다. 마치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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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다. 그러나 청암정을 이 바위 위에 처음 지을 때,
이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졌으며, 바위 둘레에는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
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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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를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었다 한다.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느껴오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스님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 했다. 정자의 방에다가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격이니, 거북이
가 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아 연못을 만들었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거북이에
게 물을 주어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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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栢潭백담 具鳳齡구복영(1526~1586)
詩句吟來激寸衷 시를 읊으려니 가슴이 격동하는데
蒼巖依舊野亭空 푸른 바위 옛날 같은데 높은 정자는 비어 있네.
洞天明月寒窓裏 하늘의 밝은 달은 차가운 창을 비추고
世事浮雲昨夢中 세상일은 뜬 구름 같아 지나간 꿈일세.
千古森嚴遺士則 천고에 변함없는 법칙은 현인이 지은 것
百年淳朴見家風 대대로 내려온 순박한 전통은 이곳의 가풍일세.
丘山華屋羊曇淚 언덕과 산에 의지한 집의 양담루를
灑向林塘恨不窮 숲의 연못 향해 뿌리니 내 회포는 끝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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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作荷池一鑑寬 고운 연꽃 핀 연못은 거울처럼 아름답고
小橋橫截碧波環 돌다리 가로 놓였고 푸른 물결 둘러있네.
芳華不逐當時盡 꽃답고 빛나는 자취는 당년을 따라 다하지 않았고
勝賞長留後世看 아름다운 경치 오래 남아 후인들 감상케 하네.
危骨矗雲巖跨壑 위태로운 바위는 뾰쪽한 구름처럼 구렁에 걸려 있고
勁心衝雪竹圍關 굳센 기상은 눈과 싸웠고 대나무 문은 둘러있네.
尋常物色俱驚俗 평범한 물색이 모두 세속보다 뛰어나니
寥落名區只似盤 조용한 명성의 이곳은 이원의 반곡같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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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그 설경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기에 다가오는 계절을 또 한 번 기다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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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느껴오던 차에 어느날 한 고승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고승은 이 바위를 가리켜 거
북바위라고 했다. 정자의 방에다가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
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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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함으로써 거북이에게 물을 주어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었다는 것이
다. 거북바위에 지어진 청암정을 바라보면 날아갈듯 날렵한 모습으로 바위 위에 가볍게 올라 앉아 있으며, 정자
내에는 ‘청암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고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전서체로 쓴 편액
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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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선생이 공부하시던 별채 忠齋(충재) 書齋(서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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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亭(청암정)으로 오르는 石階(석계)역시 자연암반을 다듬어서 계단을 만들었다. 못 주변을 돌아가면서 쌓아놓은 石築(석축).石橋
(석교)와 石階(석계) 이 모두가 靑巖亭(청암정)을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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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유랑자는 여기에서 허목의 글씨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許稷(허목)은 과거에 급제를 하지 않고서도
정승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미수 허목의 전서체의 현판은 청암정의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허
목은 숙종때 남인의 영수로 전서체에 능해 그 글씨를 얻고 싶어 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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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부사 재직시 쓴 '척주동해비'는 지금도 가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며 음식점 등에 탁본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척주동해비'는 삼척 여행시 유랑자가 포스팅했던 그 비다. 암튼 청암정(靑巖亭)과 석천
계곡(石泉溪谷)은 2009년에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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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주변에 빽빽하게 우거진 노거수들 역시 靑巖亭(청암정)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조연들의
겸손함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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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亭(청암정)은 중종 21년인 1526년에 충재 권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담양 소쇄원은 그보다 4년후인 중종 25년인 1530년에
양산보에 의해 만들어 졌다. 이 아름다운 풍경의 청암정과 함께 석천정사와 석천계곡이 명승 제 6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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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알리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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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계곡은 닭실마을 동쪽과 서쪽을 흐르는 창평천과 동막천이 마을 앞에서 합류하여 하나가 된 후에, 물이 빠
지는 수구가 안 보이도록 감추듯이 돌아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계곡이다. 수구가 열리지 않고 닫혀있어 마
을의 상서로운 지기地氣가 유실되지 않고 응축되는 곳이므로, 닭실마을이 명당지세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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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닭실마을을 상징하는 인물은 충재 권벌(1478∼1548)이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었고, 낙향과 복
직을 거듭하는 등 질곡의 삶을 살았으나 적어도 이곳 닭실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던 듯하
다. 이를 짐작케 하는 곳이 그가 즐겨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곤 했다는 오늘의 청암정(靑巖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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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은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한과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권씨 일가와 며느리 등이 한데 모여 한과를 만드는데, 그 유명세는 전국
에 걸쳐 있을 정도이다. 봉화군이 자랑하는 특산물 가운데 한과가 빠지지 않는 것도 이 고풍스럽고 우아한 마을의 옛 솜씨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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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 이라꼬??. 그렇게 보이나요??. 닭 머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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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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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
(지번)봉화읍 유곡리 931
소개 :사적 및 명승 제3호, 기묘사화때 충재 권벌이 장자 권동보와 함께 구암상에 건립한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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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비가 오긴 하지만
멋진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