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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 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4)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 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이 양식이다.’(요한 4,38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잔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곧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었습니다.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고, 그러고도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늘 주님 말씀은 당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면, 주님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가 있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못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을 생각해봤고, 그 이전의 단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듣는 단계와 듣기 이전의 두 단계가 있고, 그것을 더 작게 쪼개면 더 많은 단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듣기 이전 단계들을 보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와 교만해서 못 듣는 단계가 있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란 말씀의 가방끈이 짧은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며,
바오로 사도가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의 단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단계는 영적으로 무식한 이의 탓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교만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이며, 하느님 말씀을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냐며 무시하기에 듣지 못하는,
그래서 실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듣기 이전의 단계라면, 다음은 들었지만 무관심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 곧 다른 관심 때문에 무관심하여 주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신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유튜브에 떠도는 글이나 말은 종일토록 읽고 들어도 주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일절 읽지도 듣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주님 말씀을 즐겨 읽고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대개 이런 분들일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바쁜 일이 있으면 빠트리는 분들이 꽤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말씀은 빠트리지 않고 읽고 듣는, 더 나아가 무엇보다 먼저 주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저의 말씀 나누기를 즐겨 읽는 분들의 경향입니다.
주중에는 읽는 분이 많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읽는 분들이 반토막 납니다.
다음은 주님 말씀을 정말 충실히 듣기는 하는데 잘 듣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처럼 실천에 이르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음식을 먹긴 먹었는데 삼키지 않는 것입니다.
단것만 빼먹고 뱉어버렸다고나 할까요?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들었는데 원수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영 안에서 가난하면 행복하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가난하지 않습니다.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시는데 여전히 걱정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셔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아무리 주님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주님, 주님’하고 외쳐 불러도,
실제로는 천국에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반석 위에 지은 집>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7)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 23,2-3)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에페 6.6)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아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없는 로봇같은 신앙을 극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야트막하지만 산상에서 행하신 설교를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십시오.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 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지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 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 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 측의 응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은 생활입니다.>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 또는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즉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생활도 아니고, 생각만 하는 생활도 아니고, 온 삶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은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 구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39-40)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희망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사랑’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코린 13,2).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
그렇다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22절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언을 한 것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은 다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예언이니 ‘거짓 예언’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니, 그 일들은 모두 ‘속임수’, 즉 ‘가짜’입니다.
23절의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라는 말씀은 그들이 행한 예언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기적을 일으킨 일이 모두 ‘불법’이라는 뜻인데, 그 일들은 ‘가짜’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예언과 거짓 기적을 행하면서 감히 ‘주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4)
뒤에 이어지는 24절-27절에서는 ‘실행’이 건물의 기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표현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뿌리’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태 13,20-21)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건강하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을 무너뜨리는 비, 강물, 바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말하는 ‘환난과 박해’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미련 없이 금방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과 삶이 하나인 사람, 즉 ‘신앙이 생활인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를 잘 참고 견디고, 결국 그것을 극복합니다.
여기서 각자 자기 자신이 자기 집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생이라는 집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짓고, 내가 삽니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은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시지 않고, 내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 반석 위에 인생집 짓기 - “기본에 충실한,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
성서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은 시편에 이어 요즘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로서 산상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 집짓는 자들의 비유, 청중의 반응 세 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짓는 자들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내용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어느쪽입니까?
완성형 인생 집은 없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미완성성형 인생 집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쓰는 강론 역시 저에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자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일에 속합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인생 집 짓기에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대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에 도움이 될 예화를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 오늘 우리 믿는 이들이 특히 경청해야 할 내용입니다.
“미루게 될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은 부지런함의 기본이다.
부지런함이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다산>
“나는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지금 수준의 정신적 정서적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식생활을 절제하고 근력운동을 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글 쓰기를 놓지 않으려 한다.
기력이 달릴 때는 남은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다는 말을 되뇐다.
함께 나이 먹어가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이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믿지 말자고.
어리석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고.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자고.”
<유시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서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최하위였다.
독서율을 보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에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는다는 것.
이건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까지 불교,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도, 몽골과 이슬람의 정복전쟁 등 거의 모든 문명이 ‘칼과 피’로 점철될 때 한반도에선 문치가 대세였다.
수천년동안 이 땅에서 삶의 최고가치는 독서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야 한다.
대화와 토론, 즉 로고스의 향연이 도처에 흘러넘쳐야 한다.
그것은 에로스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먹방과 노래, 춤과 피지컬의 시대다.
연애 자체를 포기한 청춘이 수두룩하다.
단군 이래 청춘의 연애가 이토록 힘겨웠던 시절이 있을까?
사랑은 하룻밤의 열기가 아니라 창조와 교감의 열정에서 비롯한다.
출산은 그 절정에 속한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푸르른 청춘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청춘의 특권, 즉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포기한 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건 너무 서글픈 일아닌가?
청춘이 쇠락한 시대를 중년과 노년은 또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그야말로 난세다.
특히 청년들에겐 가혹한 시절이다.
이 난세를 명랑하고 슬기롭게 건너가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곧 길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참으로 한결같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책임을 다하는, 반석 위의 인생 집을 짓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분이 얼마전 카톡 메시지로 보내준 감동적인 진솔한 고백을 나눕니다.
“불교신자였던 아오스팅씨를 세례성사를 통해 구원해달라고 만7년 묵주기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기도했던 제 삼십대가 떠오릅니다.
그후 요셉수도원에서 성령받고, 통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아오스팅씨입니다.
집에 못 하나도 칠 수 없었던 남편 아오스팅씨로 거듭나면서 집을 짓는 은사를 받아 세례받고 만10년 만에 요셉수도원 성전을 지은 기적이 기도의 힘입니다.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서 사랑해 주시고 믿어주셔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집짓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이 보내주신 강론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묵상하며 콩나물이 자라듯이 아오스팅씨가 성숙해졌습니다.
우리 부부는 필히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리고 보답을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분들 나름대로 성실히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온전한 인생집 짓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단한 하느님 말씀의 실천과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없이는 불완전합니다.
참 좋은 의견에 완벽한 삶에 이론인데 하느님과 기도가 빠진 삶을 보노라면 참 허전한 생각이 듭니다.
궁극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해 답이 없습니다.
지난 24일 화성에서의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삼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같은 위태한 가정은, 사회는, 나라는 아닌지 매사 깊이 성찰하며 점검하고 보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주님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간청하며, 나라의 실질적 배려와 도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인재와 같은 대형사고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님,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이 짝을 이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착각의 피상적 헛된 짝사랑일뿐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름대로 잘 살았다 자부하는데 이와같은 주님의 반응이라면 얼마나 충격적이겠는지요!
완전히 착각이요,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내 뜻대로 지은 인생 집이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슬기롭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리석게도 모래 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 임금 여호야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니 그대로 모래 위에 나라집을 세웠던 것이며, 하느님 응징의 도구였던 바빌론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침공으로 유린되어 박살난 유다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 집을 짓는데 참 유익한 반면교사가 되는 유다 임금 여호아킨입니다.
위기 시 인생 집의 실상이 다음 복음 말씀을 통해 그대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모래 위에 인생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 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말씀 실행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이들이 정말 슬기로운 이들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경청-묵상-기도-관상-실행”의 렉시오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그리스도 예수님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마음으로 온힘과 온마음과 온정성을 다해 강론을 썼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 인생 집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미완성 상태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지침이 없이, 한결같은 열정과 정성으로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계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 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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