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는 출세의 신작로가 상식적이었고 합리적이었고 전통적이었다. 개인의 능력과 품성, 국가관이 바로 그것이었다. 능력은 대체로 학력(學力 또는 學歷)에 비례했다. 세계의 경제 교과서를 새로 쓰게 만든 거지 나라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 국민 각자에게 맞춤한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명문고, 명문대 나온다고 꼭 출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경야독(晝耕夜讀)하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중고 자전거 한 대라도 끌고 일단 출세의 신작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개인의 품성은 효와 우애, 근면과 성실, 정직과 염치, 준법과 상부상조가 으뜸이었다.
개인의 국가관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에 무한한 애정과 긍지를 갖고 멸사봉공(滅私奉公)하겠다는 애국심, 기어코 일본을 따라잡고 말겠다는 극일(克日) 정신, 미국과 UN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되 일본보다 앞선 미국의 장점을 모조리 배우겠다는 과대망상적 각오, 300만 동족의 피를 흘리게 만들고도 뉘우칠 줄 모르고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한 공산 세력에 대한 단호한 반공정신 등이다. 이중에 애국심과 반공정신이 국가관의 핵심이었다. 6.25사변의 학습효과로 용공(容共)세력은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었다. 민주나 평화로 위장하면 모르되, 친북좌익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날로 아무리 위세가 당당하던 사람도 출세의 사다리에서 떨어져 패가망신했다. 사회주의나 진보라는 말도 감히 못 썼다. 김대중도 항상 보수우익을 자처했다. 다만 그 앞에 중도라는 수식어를 살짝 달았을 따름이었다.
김영삼 정부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이름 없는 중졸 고졸 출신도 노조에 가입하여 서슬 퍼렇던 대기업 회장에게 육탄돌격하면 그 날로 일개 작업반장에서 회사의 영웅으로 회사의 영웅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적이 있는 자들은 출세의 지름길에서 역주행하여 단숨에 선두로 치고 나갔다. 거기에 큰집에서 몇 년 산 후광(後光)이 있으면, 시민단체든 재야든 정계든 문화계든 언론계든 왕족이나 귀족으로 대접 받았다.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겸손하게 손사래 치면 다들 고개를 숙이고 실세나 원로로 대접해 주었다. 평범한 대학 교수도 민주의 진주(珍珠)로 입술에 피어싱(piercing)하고 문민대통령을 극구 찬양하면서 군부독재의 잔재 척결을 목 놓아 외치고,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워야 한다고 눈을 부라리면 바로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들도 공개적으로 전향할 필요가 없었다. 위대한 문민대통령 앞에서 머리 한 번 조아리면 바로 공천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지분을 갖고 있었던 민정계열은 호랑이 굴에 들어와서 이빨 빠진 호랑이를 잡은 사냥꾼에 의해 군사독재의 잔당으로 내몰려, 반공으로 재미 본 시대착오적인 부정부패 세력으로 내몰려 자의반 타의반 대부분 쫓겨났다. 한편 정신적 대통령 김대중의 위세는 스타 대통령 김영삼을 능가했다. 친북좌파들이 물밀 듯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친북좌파들일수록 북한처럼 계층이 엄격하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자유민주국가이므로 친북좌익의 성골(聖骨)은 어리석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복면을 쓰고 뒤에 숨어 있다. 좋은 예가 있다. 크메르 루지(붉은 크메르)의 폴 포트는 이름이 열 개도 넘었다.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가 크메르 루지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공산당 최상위 간부 30여 명이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폴 포트는 한쪽 귀퉁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서너 명에 불과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지가 프놈펜을 장악하고 동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이게 되는데, 정권을 잡은 지 1년 후에야 폴 포트는 정체를 드러냈다. 공산당 간부들이 속으로 제일 크게 놀랐다! ‘설마 저 사람이!’ ‘말 한 마디 없던 저 숙맥이!’
마찬가지다. 이석기니, 김재연이니, 이정희니, 임수경이니, 유시민이니, 이해찬이니, 정동영이니, 한명숙이니, 하는 자들 중에 누군지는 모르나 진골(眞骨)은 한두 명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6두품이나 5두품에 해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해진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원전은 모조리 북한에 있다. 내용은 똑같지만 국민을 호도하고 자기들끼리 은밀히 만나 히히거릴 수 있도록 표현만 살짝살짝 바꿀 뿐이다. 대신에 그들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돈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냥 쓰면 된다. 명예의 전당에는 이들의 이름이 즐비하다. 권력도 대통령 빼고는 골라잡는다. 더하여 법을 어겨도 떼법과 막말로 치외법권과 불체포특권을 누린다.
“감히 전직 국무총리를!”
“감히 전직 장관을!”
“감히 현직 국회의원을! 배신자가!”
성골과 진골이 손을 까딱하기도 전에 20년 문화권력 방송과 신문과 인터넷, 최근에는 트위터가 이들을 철통같이 보호한다. 평양에선 어김없이 엄호 사격한다.
대신에 김씨왕조에 조금이라도 누가 끼칠 것 같으면 그들은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 전가의 보도를 마구 휘두른다. 색깔론, 신매카시즘, 공안정국, 음모론으로 그들은 20여년 간 크게 재미 보았다. 대한민국에는 의무를 머리카락 한 올 지지 않고 오롯이 의무는 북한에게 바친다. 북한에 대해서는 일체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100억 달러를 갖다 바치고도 편지 한 통 주고받자는 친부인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민간인까리 전화 한 통 주고받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제의도 감히 못 꺼낸다. 그 날로 평양 만수대로부터 민족 반역자, 역적 패당, 변절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근로자들에게 주는 고작 한 달에 10만 원에 해당하는 월급을 노동당이 대부분 떼어먹는 천인공노할 노동착취를 제발 그만두라는 말은 아예 생각도 못한다. 그러면 개성공단 문을 닫겠다는 말은 꿈도 못 꾼다. 한국에서 어느 대통령 비서가 대통령의 뜻이라며 어떤 공장의 임금을 90% 이상 원천징수한 일이 단 한 건이라도 있다고 하면, 그들은 당장 벌떼같이 달려가서 대통령을 체포하여 동해의 돌고래 친구로 풍덩 갖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의 김씨왕조가 평등의 원칙에 따라 행사하는 약탈권이기 때문에, 개성공단은 남북화해의 상징이라며, 꽃이라며 자화자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집권 초기부터 남북이 합작하여 쌍욕의 대상으로 삼은 이명박 대통령도 단 한 번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하긴, 민노당이나 통진당과 한 통속인 자를 2인자로 삼았으니!
김대중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원조를 끊는 등 무한정 내정간섭을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 가문을 위해서라면 UN에서 10여년 북한인권 결의를 해도, 귀를 틀어막고 북한인권은 내정간섭이라며 눈에 쌍심지를 키고 길길이 뛴다. 대신에 인권 얘기만 나오면 북한이 국제법상 엄연히 딴 나라라고 우기다가도, 공산독재권력 유지하라고, 북한주민에게는 10%도 안 돌아갈 걸 뻔히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 민족화해한다며 퍼 줄 때는 간도 쓸개도 없다. 어린 나이에 도회지에 나가 공단에서 눈물겹게 돈을 번 딸이 명절에 고향의 부모님께 용돈과 선물을 드릴 때처럼, 마치 제가 벌어서 어버이에게 주는 것인 양, 효자동이와 충성동이가 되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다. 쌀이든 옥수수든 의약품이든 도로 건설이든 아무 조건 없이 퍼 준 것 빼고도,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빌려 준 것마저 상환기일이 와도 한 푼도 못 받는다. 상환조건도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는 모른 척한다. 아니, 도리어 저들의 전쟁 협박에 동조하여 그렇게 북한을 압박하면, 몰인정하게 굴면 전쟁 난다고 대놓고 국민을 상대로 협박한다. 쩨쩨하게 군다고, 가난한 사촌을 고리대금업자처럼 몰아세운다고 속으로 욕할 것이다. 불리하면 딴 나라, 유리하면 한 겨레!
인재는 대우해 주는 곳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그 동안 나름대로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자들도 대세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에서 친북좌익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자, 너도나도 아첨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말을 빌면, 좋은 대학 나온 출세한 사람이 시골의 힘없는 노인에게 찾아가는 격이었다. 경기고 서울대 출신 중에 이런 자들이 제일 많다. 새로운 출세의 지름길에서 기웃거리며 이들은 람보르기니급 아첨, 벤츠급 왜곡, BMW급 궤변으로 성골과 진골의 마음을 산다. 일단 출세의 새 지름길에 초대되면, 능숙한 운전 솜씨를 자랑하며 10년 된 소나타도 멋지게 튜닝해서 최신식 제네시스도 단숨에 제치고 날아가듯 질주한다. 진중권이니, 곽노현이니, 조국이니, 김제동이니, 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6두품에 오르기도 힘들다. 원래 신분이 하늘과 땅이기 때문이다.
자유통일이 되기 전까지 저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의무 없는 권리, 얼마나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인가. 그것이 구매력 기준(PPP)으로 일본을 턱 밑까지 따라간 부자 나라 대한민국에서 현실화되니, 얼마나 환상적일까. 대통령의 특별사면과 민주화보상법으로 신분세탁까지 되어 합법적 권리가 한층 커지니, 얼마나 통쾌할까. 북한에 바치는 의무도 그렇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내 명예 한 올 흠집 나지 않고 때로는 명예가 올라가고, 내 권력 한 자락 빼앗기지 않고 말로만 하면 되니, 세상에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201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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