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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카트는 파티마 가문 출신으로, 1066년에 31세의 나이로 그라나다 지방의 에미르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은 밝혀진바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없었으며, 어디에선가 나타나 실력으로 에미르 자리를 획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라카트의 영토인 그라나다 지방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여러 이슬람 에미리트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덕분에 레콩키스타를 꿈꾸는 카톨릭 세력의 직접공격을 받지 않았기에, 바라카트는 차분히, 그리고 끈기있게 힘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13년의 세월동안 바라카트는 여섯 명의 부인을 맞이하였으며, 그들에게서 열 명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원래 정실부인은 이슬람인이었지만, 그의 백인여성선호 때문에 첩들은 대부분 백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실부인이 병으로 사망하자 백인 첩이 정실부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무술실력 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지만, 10여 년의 세월동안 에미리트를 통치하면서 음모력이 상승하였고, 원래 꽤 괜찮았던 무술실력도 더 늘어났습니다.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용병술도 쌓을 수 있었으며, 인근의 작은 에미리트를 흡수합병하여 영토도 두 배 가까이 늘렸습니다.
영토가 넓어질수록 바라카트의 군사력도 증강되었으며, 경제상황도 점점 나아졌습니다.
이 시기에 파티마 에미리트에게 위협이 될만한 것은 레온 왕국과 둔눈 에미리트, 압바드 에미리트 정도였으며, 아미리 에미리트는 이내 흡수될 예정이었습니다.
아미리 에미리트의 아르멘사 셰이크덤을 정복한 바라카트는 연속된 정복활동으로 소모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이슬람 세력을 연속적으로 공격한 그에게 칼리프가 직접 경고를 해올 정도로, 그의 신앙심이 의심받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슬람 세계에는 좋지 못한 영향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라카트에게 아르멘사 셰이크덤을 빼앗겨 데니야 셰이크덤만을 차지하고 있는 아미리 에미리트는,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제노바 공화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었습니다. 마침 바라카트에게 공격당해 약해진 아미리 에미리트는 제노바 공화국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바라카트가 신앙심에 대한 의심을 받느라 아미리 에미리트에 손을 떼고 있는 틈에, 제노바 공화국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대량의 병력을 수송하여 아미리 에미리트를 장악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군의 병력은 2700여 명으로, 파티마 에미리트 전역에서 긁어모은 병력으로 겨우 물리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제노바 공화국은 추가병력을 파병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바라카트로서는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신속한 공격으로 아미리 에미리트가 장악당한 탓에, 다른 이슬람 세력들도 미처 도움을 주지 못한 상황에서 데니야 셰이크덤이 제노바에게 넘어가버렸습니다.
결국 아미리 에미리트는 멸망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 카톨릭 세력이 점점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 파티마 에미리트의 병력이 충분히 회복되었을 때, 바라카트에게 한 무리의 카톨릭교도가 접근해왔습니다. 그들은 피사 공화국의 사절로, 파티마 에미리트에 은밀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은 흡수한 데니야 셰이크덤을 바탕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업항구가 파티마 에미리트에도 세워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피사 공화국은 제노바 공화국을 견제하고자, 바라카트에게 파티마 에미리트에 자리잡은 제노바 공화국의 상업항구를 파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대가로 금전을 제공하고, 지원군과 패배 시의 배상금을 제공하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
제노바 공화국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바라카트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피사 공화국의 지원군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규모였으며, 바라카트는 전쟁 초기에 파티마 에미리트 전역에서 긁어모은 병력으로 데니야 백작령을 점령한 이후에는, 계속해서 쳐들어오는 제노바 공화국군을 격퇴하느라 지쳐갔습니다.
결국 피사 공화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자금에 더해 국고에 들어있던 자금까지 더해 용병단을 고용하였으며, 이후 속전속결로 제노바 공화국군을 격퇴시켜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가 셰이크덤에서 제노바 공화국군을 공격하던 바라카트가 타고 있던 말이 눈 먼 화살에 맞아 날뛰었으며, 최선봉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는 이내 적군 병사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 바라카트 1세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바라카트의 아들 사이드가 에미르 자리를 이어받아 군대를 이끌었으며, 마침내 제노바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국토는 피폐해지고, 병사들도 대부분 소모되었으며, 자금사정도 딱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기에, 결과적으로는 피사의 손에 놀아나 무의미한 전쟁을 치른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새로 에미르가 된 바라카트의 아들 사이드는 곧바로 형제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에미르가 되었을 때는 전쟁 도중이었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형제들의 불만이 급격히 커져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전부 체포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 명만이 해외로 도피할 수 있었습니다. 체포된 형제들 중 성인이 된 형제들은 전부 처형되었고, 그에게 불만을 품은 여동생들도 모두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명의 어린 남동생과 한 명의 어린 여동생이 감옥에 갇히고, 한 명의 동생은 해외로 도피하였으며, 한 명의 여동생은 큰 불만을 갖지 않았기에 숙청의 겁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이드는 부모의 뛰어난 무력을 이어받았으며, 무술실력이 뛰어난 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보다 뛰어난 전사로 성장했습니다.
사이드는 아버지의 선례를 이어서 무술실력이 뛰어난 부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도록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힘썼습니다.
그러는 상황에서 사이드는 여러차례 골머리를 썩혀야했는데, 그것은 아버지 바라카트의 성적 취향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카트는 실력이 뛰어난 백인 여성이라면 사족을 못썼기에, 궁정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백인 첩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종교도 달랐기에 끝까지 개종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며, 그녀들의 영향으로 인해 사이드의 형제들 중에서 몇 명은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잘못된 믿음의 길을 걸은 형제들은 이미 숙청하였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정작 문제는 그녀들 그 자체였습니다. 바라카트는 그녀들을 첩으로 들이기 위해 유럽 각지의 영주와 동맹을 맺었는데, 바라카트 사후가 되어서야 그 동맹을 이유로 여러 영주들이 봉토계승전쟁에 병력파견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사이드는 그들의 요구를 겉으로는 수락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명의 병력도 파병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이베리아의 상황이 불안정한데다, 거리까지 멀었기에 병사들이 제대로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중소규모의 영주들이라 돌아오는 것도 없었기에, 그는 동맹을 단호히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정실부인인 후마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치사량의 복어독을 먹고 온 몸이 굳어가, 결국 숨을 쉬지 못해 질식사한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내 범인이 드러났습니다. 범인은 이전에 그의 정실부인이었던 첩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이드의 정실부인 자리를 되찾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이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믿고서, 범행을 은폐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이드는 잔혹했습니다. 그는 그의 앞에 무릎꿇린 그녀의 목을 손수 내리쳐버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후마는 비록 다른 형제의 아내였지만, 사이드 자신보다도 더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서 태어날 자식들과, 그녀에게 교육시킬 자식들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런 가능성을 사랑에 눈이 멀어 말아먹어버렸으니 사이드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이름도 남겨지지 않은 이전의 정실부인은 사이드 자신이 원해서 아내로 맞이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의 사이드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배신당했습니다.
사이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후 자신이 직접 고른 또다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무사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사이드는 무사를 후계자로 점찍고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 열 명 중에서 아들은 둘 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딸이었기에, 장남인 또다른 아들도 제대로 교육시켜두어야 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무사를 잃게 된다면, 그의 뒤를 이을 것은 장남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사이드는 후계자 교육에 신경쓰면서도, 바로 북쪽에 인접한 둔눈 에미리트와, 서쪽의 압바드 에미리트를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둔눈 에미리트로부터는 라 만차 셰이크덤을, 압바드 에미리트로부터는 세비야 셰이크덤을 빼앗은 그는, 휴전협정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세계정세를 살폈습니다.
상황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십자군이 성공하여 스코틀랜드가 근동지방의 땅을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가까운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도 좋지 않게 돌아갔습니다. 다른 이슬람 에미리트들이 카톨릭 왕국의 군대에 점차 정복되어갔고, 이전에 파니마 에미리트를 부처겨 제노바 공화국을 공격시켰던 피사까지 세비야 지방을 차지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피사는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가지면서 선물을 보내오곤 했고, 아라곤 왕국은 내분으로 갈가리 찢어진 상황이었지만, 갈리시아 왕국은 크게 영토를 개척했고, 카스티야 왕국은 파티마 에미리트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1105년 들어서, 사이드는 둔눈 에미리트와의 정전협약이 끝나자마자 칼라트라바 셰이크덤을 공격했습니다. 칼라트라바 셰이크덤만 정복한다면, 옛날에 멸망한 안달루시아 왕국의 왕위를 계승할 명분이 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라트라바 셰이크덤을 정복하는 1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에서 선전포고를 걸어왔습니다. 그라나다 셰이크덤을 노린 카스티야 왕국의 군대가 순식간에 밀려들어왔습니다.
사이드는 아직 카스티야 왕국을 상대하기에는 힘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는 바짝 긴장하며 신중하게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군사력은 사이드가 예상했던 것만큼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소수 부대만이 밀고내려왔기에, 둔눈 에미리트를 공격하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는 카스티야 왕국군의 본대가 세 개의 루트로 밀려내려왔지만, 다급히 둔눈 에미리트의 정복을 마치고 정전협정을 이끌어낸 사이드의 공격이 몰아치자 카스티야 왕국군은 각개격파되어 사분오열되어 쫓기가 바빴습니다.
다급해진 카스티야 왕국이 갈리사아 왕국까지 끌어들여 1만 여명의 대군을 편성하였으나, 사이드 또한 그동안 내치를 통해 얻은 자금으로 네 개의 용병단을 고용하여 거기에 버금가는 대군을 꾸려 대항했습니다.
결국 파티마 에미리트는 모든 카스티야 왕국군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까지 처들어가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카스티야 왕국과의 3년간의 전쟁동안 고용한 용병단 때문에 재정이 휘청거렸지만, 결국 안달루시아 왕국 파티마 왕조를 건립하였으며, 다른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왕국과의 전쟁에도 뒤지지 않는 국력을 다졌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동방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다시 단합하여 십자군 세력을 몰아내었으며, 잃었던 영토를 탈환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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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플레이가 재밌죠ㅋ 설정잡고 이리저리 뜯고 맛보고 즐기는..
ㄷㄷㄷ
으으 그 파티마가 이 파티마가 아니라니!
시아파 이베리아를 원했는데
파티마가 흔한 이름이라서 이집트쪽 파티마 왕조하곤 상관이 없슴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