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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25,1-12
1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
2 이렇게 도성은 치드키야 임금 제십일년까지 포위당하였다.
3 그달 초아흐렛날, 도성에 기근이 심해지고 나라 백성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4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칼데아인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임금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 대문을 통하여 아라바 쪽으로 갔다.
5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임금을 뒤쫓아 예리코의 들판에서 그를 따라잡자, 그의 모든 군대는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6 그들이 임금을 사로잡은 다음,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임금에게 데리고 올라가니, 바빌론 임금이 그에게 판결을 내렸다.
7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8 다섯째 달 초이렛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제십구년에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9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0 또한 친위대장이 이끄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가며 허물었다.
11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은 또 도성에 남아 있던 나머지 백성과 바빌론 임금에게 넘어간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남은 무리를 끌고 갔다.
12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이는 마치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암시해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신 바를 몸소 성취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산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2열왕 5,1-27),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레위기>(13,45-46)에 따르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림으로써 자기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야 했고,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민수 5,2-4).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자기에게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때문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기보다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이는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으며, 그 능력의 행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마치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라고 하신 것처럼, 나병환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 뜻에 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원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혼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레위 14,46).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결한 나병환자를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나병환자를 접촉하시지만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부정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고,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은 성모님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태 8,3)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이루소서.
오, 주님!
당신이 원하신 것을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다 나에게 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ㄴ)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얘기입니다.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지금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물론 여기서 치유란 병에 걸리기 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말하기에, 요즘도 병의 진행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치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는 더더욱 치유가 불가능한 병인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치유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이 주님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치유가 어려운 병일수록 치유 가능성은 믿음의 영역이고, 불치병의 치유는 더 많은 믿음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고, 아주 드문 믿음의 소유자이지요.
사실 그 당시 그 말고도 나병환자가 수많았을 텐데 그들은 치유를 불가능한 것으로 믿고 고치려고 들지 않았고,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치유를 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내용이지만 인간은 다 믿는 존재입니다.
가능을 믿는 존재와 불가능을 믿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이고,
전능하시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개가 있을 뿐이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로 인간은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선택한 인간은 나병을 운명 또는 숙명으로 알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나병은 운명(運命)도 숙명(宿命)도 아닌 하느님의 뜻 곧 신명(神命)이라고 믿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 곧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자기 나병을 맡길 것입니다.
나병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니
나병을 고쳐주실 분도 하느님이시며
고쳐주실지 말지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과 순종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시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나아만만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런 믿음으로 하느님 뜻 곧 처분에 자기를 맡깁니다.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나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며,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그리고 맡긴다는 오늘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도 배신하실 수 없으셔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태 8,3ㄴ)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다 나에게 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환자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며 깨끗이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무조건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죄인이라는 낙인으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나병환자는 격리되어 지내야 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록도, 안양 나자로 마을, 경북 칠곡 등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감염의 위험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결핵이 유행할 때 ‘폐병’이라고 해서 그의 곁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를 경계해야 했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 고쳐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낫게 할 수도 있었는데 손을 대시며 마음을 쏟아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거두어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종교적 단죄에서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 시켜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할 일도 생각합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나병환자의 믿음이 한몫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응답하시며 고쳐주셨으니, 나병환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주님께서는 그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외적인 나병을 치유 받아야 하지만 우리 영혼의 치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꼬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드러난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이고, 그래서 그 병을 깨끗이 치유 받아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쌓여만 가는 교만함과 나태함, 이기적인 습성들을 인정함으로써 새로 나야 합니다.
‘하고자 하시면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보통 의사는 병의 증세를 보고 그것을 다스리지만, 명의는 병의 뿌리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뿌리를 다스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죄의 용서를 통해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죄의식으로 말미암은 병은 죄의식을 없애서 고쳐야 하고, 잘못된 생활습성 때문에 생긴 병은 그것을 바로잡아서 고칠 일’(이현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도 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가 어떻게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주님 앞에까지 나아왔는지 묵상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치유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리스도께서도 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가 더는 로마에서 박해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통일 전쟁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임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위에서 십자가 표징을 보았고 꿈에 이 표시를 하면 승리할 것이란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희망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북돋아 주시는 희망에는 성취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이때 그러한 희망을 품는 이들은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린 농부 소녀였던 잔 다르크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에 의해 계시 받았다고 믿는 그녀에게 프랑스 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취될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들려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모아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그렇게 가난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설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취해있던 교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탁발수도회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교황은 꿈에 라떼라노 대성전을 성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회의 회칙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나중에야 예수님께서 하신 교회를 재건하라는 목소리는 작은 다미아노 성당이 아니라 물질주의로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넣어주는 꿈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꿈을 꾸는 이는 정말로 성취될 그 기대감에 취해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켈리 최는 10억이 넘는 빚을 진 노처녀였습니다.
이때 ‘시크릿’이란 책을 60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동안 성공한 모든 사람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때 켈리 최는 꿈을 정하되 가슴이 뛰는 꿈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27년간 옥살이하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온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견뎌낸 게 아니라 준비한 거라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늘에 준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하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게 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되어 그 꿈으로 벌써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가슴이 떨리는 꿈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이 오면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꼽자면,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은 바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나병 확진을 받는 순간, 그들은 성밖으로 강제 추방 당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만 해도 억울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정을 탄 사람이니만큼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라도 인기척이라도 나면 사람들에게 주의하라는 표시로 이렇게 큰 소리로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다는 그 자체가 위법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 환자라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멀쩡한 옷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산발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윗수염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치 성 밖 토굴 속이나 무덤가에서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그였습니다.
인생의 막장 앞에 선 그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든 법적 장벽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에는 율법이고 전통이고 필요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만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음으로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좀 나은 사제라면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겠죠.
“이러면 안 되지. 자네 이거 불법인 거 잘 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서로가 좋을 일 하나도 없네. 힘들겠지만 꾸준히 약 먹고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나중에 병이 진정되면 그때 한번 만나세.”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진물투성이인 그의 몸에 다정하게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위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납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납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린 한 사람이 만납니다.
빛과 어둠의 만납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1)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도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만 믿고 자비를 안 믿는다면, 예수님에게 복종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을 안 믿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이고, 그러면 그것 또한 믿음이 아닙니다.
2)
“내가 하고자 하니”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그 병자가 청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먼저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자비와 권능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권능은 있지만 자비가 없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자비는 있지만 권능이 없다면, 원한다는 말이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 5,21)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요한 17,10)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비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깁니다.
3)
누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2-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4,14)
4)
“예수님께서는 왜 병 자체를 없애시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만 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뀐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병자들에게 일시적인 진통제만 주시고 그친 일이 아니라,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고, 그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상의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 자체는 아직도 수수께끼, 즉 신비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중심 -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시편 23,1)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노라”로 고백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35년 동안 수도사제로 살아오면서 강론 주제 중 참 많이 이용했던 주제가 '삶의 중심, 그리스도 예수님'일 것이며 오늘 강론 주제도 똑같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삶의 중심인 주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릴 때, 안정과 평화요, 불안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베네딕도의 평화도 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믿음의 정주서원을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이란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다.
꾸미고 감추려는 마음을 덜어내야 진짜 어른이다.”
<다산>
“어른은 예가 아닌 예와 의가 아닌 의를 행하지 않는다.”
<맹자>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물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참으로 귀한 시대라 합니다.
보고 배울 어른이, 스승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른 중의 어른이, 스승 중의 스승이 주 예수님이요, 이런 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배우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보고 배울 스승이자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무리 바쳐도 늘 새롭게 와닿는 우리 삶의 중심이신 스승이자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행복과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영원한 참 어른을 닮아갈 때 진짜 어른이요, 고맙게도 우리 가톨릭교회는 무수한 진짜 어른들이 있으니 바로 성인들입니다.
오늘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그리스도인 일치주간 중인 1월21일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을 ‘일치의 학자’로 공식 선언함으로써 교회의 37번째 학자가 됩니다.
‘일치의 학자’, 참 멋진 호칭입니다.
문득 며칠전 주고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조의 여왕’이란 너무 멋진 호칭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 약 40여명 시댁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꽃바구니 상을 받았습니다.”
꽃바구니 사진을 확대해 보니 “내조의 여왕 제현주님”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시댁식구들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았기에 이런 칭호를 받았겠나 그 자매님이 존경스러웠고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아, 오래만에 반갑습니다.
40여명 시댁 가족들 모였다니 놀랍습니다.
‘내조의 여왕’, 참 멋진 호칭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이렇게 사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레네오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하는 교령에서 말합니다.
“위대한 스승의 교리를 통해 더욱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완전한 일치를 향해 걷는 여정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리옹의 이네네오는 동방에서 태어났고 서방에서 주교직무를 수행했으며,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됐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경 지금의 터키인 스미르나에서 태어났고, 요한 사도로부터 교육을 받은 성 폴리카포로 주교 순교자로부터 설교를 들은 뒤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가 리옹의 주교가 된 후 저술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나는 소년시절 소아시아에 있으면서 성 폴리카르포 선생님의 슬하에서 배운 일이 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께서 앉아계시던 곳, 그 가르치는 모습이나 가르치신 말씀, 그 걸어 다니던 모습이나 용모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성 요한과 기타 주님을 친히 뵌 이들과 교제하던 말씀이나 주님에 대해서 즉 주님의 성덕,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 등은 아직 나의 귀에 여전히 남아있다.”
사도교부들의 전통과 모범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성인은 170년경 현재의 프랑스 골 지역에 있는 리옹의 두 번째 주교가 된 이후 프랑스 지방에 만연된 영지주의 이단과 피나는 싸움을 전개했는데, 이때 쓴 저서가 <이단논박>에 이어 <사도적 선포의 논증>입니다.
성인은 이단사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동시에 초기교회의 정통신앙을 확립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로 불릴 정도로 2세기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특히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대표적인 자랑스러운 교부입니다.
말 그대로 이단들과 치열히 싸워 영적승리를 거둔 주님의 용사 성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오늘 성무일도 시 즈가르야의 노래 후렴이 성인의 삶을 요약합니다.
“성 이레네오는 평화라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에 평화를 확립하고, 그 평화를 위해 용감히 투쟁하였도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나는 제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어제로서 마태 5장-7장까지 산상설교는 끝나고, 오늘 8장부터 9장까지는 주님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말씀의 권위가 이제는 행위의 권위로 들어납니다.
산에서 내려오자 맨먼저 다가온 이가 나병환자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만나 치유 구원받은 복된 나병환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역시 ‘연민의 마음’, ‘권위있는 말씀’, ‘사랑의 스킨십’이 치유의 삼박자 원리임이 드러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이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예수님이 얼마나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고 준수한, 살아 있는 전통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겠습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철저했던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이나 오늘 기념하는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와 비교할 때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임금 치드키야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하느님을 중심한 지혜와 겸손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참화는 결코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 앞에 나오는 대목 둘입니다.
‘치드키야는 여호야킴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2열왕 24,19)
‘그런데 치드키아가 바빌론 임금에게 반역하였다.’
(2열왕 24,20ㄴ)
치드키야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화로 바빌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며 두 아들은 살해되고, 그는 두 눈이 뽑힌 채로 청동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니 비극의 절정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삶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시간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자 우리 인생집을 주님 반석위에 짓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마태 8,17참조)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
1998년 제기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칠갑산 청소년 수련장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둘째 날에 본당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캠프장으로 방문 왔습니다.
먼 길인데도 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사목위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간식을 준비해 왔고, 본당 신부님은 필요한 데 쓰라면서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1시간 정도 머물기 위해서 왕복 8시간을 걸려서 왔습니다.
신부님에게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당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4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학생들이 부주임 신부님의 인솔 하에 오스틴에 있는 피정의 집으로 여름 캠프를 갔습니다.
저도 사목위원들과 함께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정의 집으로 격려차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격려금을 주고, 1시간가량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적당히 구름이 낀 날이어서 운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제가 선글라스 케이스를 가져간다는 것이 서두르는 바람에 면도기 케이스를 가져갔습니다.
선글라스를 쓰려고 케이스를 열었는데 면도기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왕복 8시간을 길 위에 있으면서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들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길이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걷다 보니 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대관령도 미시령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 옛길은 차량 통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잊혀지는 걸 보았습니다.
산보할 때도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걷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덜 피곤하고, 덜 피곤하니 산보가 즐겁습니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가축을 길들였습니다.
‘개, 양, 소, 말, 낙타, 닭, 고양이, 돼지’는 인류가 길들여서 같이 지내는 가축입니다.
신발도 처음에는 발에 익숙하지 않지만 자꾸 신으면 길이 들어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사제복도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입으면 사제복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기능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해도 익숙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잘 키운 부부는 닮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맞추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눈빛이 비슷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가 비슷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님께서 격려 방문한 것을 배웠듯이, 부주임 신부님도 언젠가 그렇게 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자포자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습니다.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영혼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병환자는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나병환자가 된 것은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나병환자는 스스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 건강만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로 외면하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먼저 신앙의 길을 걸었던 성인, 성녀들의 삶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길들여진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갈망을 이야기했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을 치유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기도>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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