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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2,1-11
그 무렵
1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2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3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4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5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6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7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8 천사가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 하고 이르니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다.
천사가 또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따라 나가면서도, 천사가 일으키는 그 일이 실제인 줄 모르고 환시를 보는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10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11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 4,6-8.17-18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7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직무를 맡기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는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셨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2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바오로를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마태 16,17)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이는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토록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곧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의 문을 열어 천국의 문도 여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ㄱㄷ)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십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것이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손수 세우신 교회이니 교회에 이런 권한을 주심은 당연하지요.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교회에 이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관건은 이런 권한이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 권한을 제대로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대로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늘나라의 문을 닫는 것일까요? 여는 것일까요?
이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당연히 열라고 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우리 교회가 열기보다 닫는 짓을 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크게 나무라신 것이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그러면 어떤 것이 막는 것이고 어떻게 막습니까?
얼마 전 동성 간에 결혼하는 분들을 교회가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문제로 매우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님을 강하게 비난했지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교회가 합법화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성 결혼을 성사혼으로 교회가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과 교회의 축복을 청하는 이들을 교회가 물리치지 않고 축복을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선언문은 이렇게 분명히 얘기하고 있지요.
“축복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그 누구도 이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오신다면 이들에게 어떻게 하실까요?
너희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쫓아내시고, 너희는 저주나 받으라고 하실까요?
당시 죄인들과 세리들과 식사를 같이하시자 비난하는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의사는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하다며, 당신은 이들을 위해 오셨다며 그들을 나무라셨고,
흩어진 양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려고 오셨다고 하셨지요.
베드로 사도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은 것 때문에 할례받은 이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습니까?”
(사도 11,17)
베드로와 후임 교황들은 교회 열쇠지기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든 교회가 문을 열 때 그것은 단지 교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천국 문을 여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여는 사람이고 여는 교회입니까?
닫는 사람이고 닫는 교회입니까?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 나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고
이웃도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세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 사제 수품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께 주님의 충만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모두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본받고 복음 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에 처형되었고 바오로는 참수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각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예수님께서 맡기신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그들을 다그치신 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들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오늘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반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 14,29) 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하셨습니다.
세 번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베드로를 당신의 도구로 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시몬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주님의 안배로 베드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으뜸 제자로서의 몫을 다했습니다.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2티모 4,6-8)
주님을 만난 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천상의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삶의 쇄신을 통해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 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 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면서 이불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 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 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 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대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반석이 될 것인가? 걸림돌이 될 것인가?>
1)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대해서,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사도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표현이 다르게 되고, 부각시키는 점이 다르게 되고, 그 일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는 베드로 사도의 잘못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그의 부족했던 점만 부각시킨 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만 말하고 그친다면, 그는 전체 교회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그럴 정도였으니...”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사도들이 맞서기에는 십자가 수난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부각시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하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연결시키면, 베드로 사도의 잘못은 그의 자격을 문제삼을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2)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 받은 일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에 연결할 일이 아니라, ‘걸림돌’이라고 혼난 일에 연결해서 생각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1-23)
여기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리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는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는 말씀은 그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뒤따라가면 ‘반석’이 되고, 앞에서 가로막으면 ‘걸림돌’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슨 사심을 품고 예수님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고,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원사업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감정만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면 반석이 되고, 인간적인 감정만 앞세우면 걸림돌이 됩니다.
3)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런 박해자를 사도로 삼으셨을까?”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박해자를 위대한 사도로 변화시키다니, 놀라운 일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였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외면하는 일이 되고, 그가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의 섭리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4)
베드로 사도가 처음부터 완벽한 반석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과 바오로 사도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면서 동시에 큰 위안을 주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반석이었는데, 잠깐 걸림돌이 되었다가, 다시 반석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반석과 같이 단단하고 강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언제 추락해서 걸림돌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반대로 지금 걸림돌처럼 살고 있어도 회개해서 반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반석인지, 나쁜 걸림돌인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이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마태 5,44)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박해자도 회개하면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두 기둥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 34,6)
위 화답송 시편도 좋고,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화답송 후렴도 참 경쾌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교회의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니 기쁨이 저절로 샘솟는 느낌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맛’으로 살아갑니다.
감사의 응답이 바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사람으로,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겸손한 삶이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91장도 두 사도의 교회를 위한 보완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와 선교의 주보, 성 바오로는
신앙을 위해 순교하시고 승리의 관을 받으셨도다”
사실 두 사도 모두 67년경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두 사도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들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두 사도와 주님과의 만남은 필연적 섭리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습니다.
두 사도에게서 예수님을 빼버린다면 남는 것은 제로, 허무일 것이듯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습니다.
새삼 예수님은 사도들은 물론 우리의 전부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제 은경축 상본 성구 바오로 사도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필립1,21ㄱ)
예수님은 사도들은 물론 참으로 믿는 자들의 운명이자 사랑임을, 모두임을 절감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명을 환히 밝혀 비교해 주는 감사송 내용도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참 아름다운 보완관계의 사도요, 하느님께서 교회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읽은 주석 내용 역시 두 분의 관계를 명쾌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는 일치와 연속성의 위대한 상징인 교황에 의해 대표됩니다.
그의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가 분열되고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중앙 조직에서 분리된 교회의 일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비가톨릭 그리스도교 교회는 베드로의 중심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분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바오로는 또 다른 핵심 역할인 예언적이고 선교적인 역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장자리에서 일하고, 지리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교회의 관심을 소외된 사회적 관심 분야로 밀어넣고, 교회의 경계를 더욱 확장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하는’(semper reformanda) 교회입니다.”
두 사도의 보완으로 비로소 가톨릭 교회는 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 늘 한결같이 빛나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 있는 삶입니다.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특징이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말마디는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를 포함한 모든 성인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성현들이 말하는 어른도 이런 분입니다.
“어른이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바른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날마다 몸부림치는 존재다.”
<다산>
바로 안주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 노력하는 다산의 피나는 내적고투를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어른은 말을 할 때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고, 행할 때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오직 의만 따를 뿐이다.”
의로움을 추구하며 진리에 활짝 열려 있는 유연한 겸손한 이가 참으로 어른이자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똑같은 성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의 역할이 있고 바오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닮을 필요도 없고, 바오로를 닮을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나 고유의 성인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보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고유의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두 사도는 우리가 배울 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극찬과 더불어 무한한 축복을 받아낸 베드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을 정도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이런 고백이요, 역시 베드로를 꿰뚫어 알아본 주님의 감격에 벅찬 감동적 고백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런 신앙고백의 베드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얼마후 주님을 곡해함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이 주님의 극찬과 축복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늘 평생 새롭게 자신을 쇄신하는 기회로 삼게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추억이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 삶을 살게 함을 봅니다.
다음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바오로의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우리의 유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역시 사도와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일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사도의 삶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얼마나 힘찬 고무적인 고백인지요!
참으로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로 영적승리로 삶을 마감한 바오로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방심할 수 없는 영적전쟁입니다.
혼자서의 싸움이, 영적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전투요, 교회의 도움, 주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베드로가, 바오로가 장엄한 순교로 영적승리의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음도 교회가, 주님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천사의 보호아래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공동체의 열렬하고 한결같은 기도 덕분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사도행전 중심부에,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는 이 구절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배경이신 주님과 그분의 교회공동체가 함께 하기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내 삶의 현장에서 천하무적 일당백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시편 34,9)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스핀오프(Spin-Off)>
트렌드 코리아 2024의 내용 중에 ‘스핀오프(Spin-Off)'를 읽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스핀오프는 기존의 브랜드에 새로운 콘텐츠를 끼워 넣는 겁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쥐 한 마리로 그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디즈니는 영화, 음악, 놀이공원, 장난감, 생활용품, 식당과 같이 디즈니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디즈니 월드에서 꿈을 꾸고, 디즈니 월드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고객의 가족은 물론, 고객의 자녀들까지 대를 이어 디즈니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기존의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품종을 심는 것이 아니라, 밭 주변에 콩도 심고, 깻잎도 심고, 호박도 심는 겁니다.
저도 용문 수련장에서 있을 때 비슷한 흉내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구역장, 반장들이 피정이나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오면 양평 읍과 연계해서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습니다.
수련장에 오신 분들은 피정도 하고, 시장도 보니 시간도 절약되고, 따로 장을 보러가지 않아도 되니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예전에는 ‘가요톱텐이나 가요무대’가 있었습니다.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조금 단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래를 듣는 프로그램도 다양해지고, 전문화 되고 있습니다.
‘팬텀싱어, 복면가왕, 나는 가수다, 전설의 무대, 히든싱어, 슈퍼스타 K'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영화의 줄거리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무대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극중에서 사랑받았던 조연 배우를 주연 배우로 삼아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영화는 ‘스타워즈, 어벤저스’ 시리즈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브랜드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도요타는 중저가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타에서 도요타라는 브랜드를 빼고 ‘렉서스’라는 차를 출시했습니다.
사람들은 렉서스가 도요타에서 만든 차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렉서스에 만족한 사람들은 나중에 도요타에서 출시한 다른 차에도 구매력을 느꼈습니다.
렉서스에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도 비슷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제네시스는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었지만 현대 자동차의 로고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네시스를 좋아하는 고객들은 나중에 현대 자동차에도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네시스가 현대 자동차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스핀오프(Spin-Off)'의 원조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교회가 있습니다.
그 브랜드 위에 동방 가톨릭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스, 러시아 정교회가 생겼습니다.
성공회가 생겼습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회가 생겼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때로는 경쟁하기도 했고,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새로 백인 교사 부임했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시험 본다고 하면 가방을 세워놓고 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시험 감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 평가만 중요했고, 공동 평가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아이의 말처럼, 어려울 때는 함께 상의해서 푸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요?
공동체보다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보다 공동체의 힘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개인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주의가 더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당신께 필요 없음에도 굳이 제자단을 형성하셨습니다.
그냥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될 것 같은데,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통해 큰 힘을 받았다는 분은 더 많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아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 제자단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단의 으뜸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제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고 또 부족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성장 발전시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 고백의 모범을 세우셨고, 바오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종종 공동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자기의 죄 많음 때문에 차마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또 다른 죄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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