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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6U2V5BP1K1E?si=YuadLWFe5_nuQWQ
선행의 이유 2:11~17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순종의 이유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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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성도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인간의 제도에 순종하고, 자신이 가진 자유로 하나님 종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고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도를 위해 고난받으셔서 그분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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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의 이유 2:11~17
성도는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비록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갈지라도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취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 합니다. 세상은 때로 성도의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비방하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선한 일을 계속 추구해 결국 세상마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12절). 또한 성도는 국가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매사에 선택 기준을 ‘주를 위하여’로 삼고(13절), 주님이 원하시는 선행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종’답게 행동해야 합니다(15~16절). 성도의 선행은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세상이 비방할지라도 성도가 선한 행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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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이유 2:18~25
베드로는 사환(종)의 상태에서 부름받은 성도에게 권면합니다. 범사에 두려움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되, 자신에게 유익한 사람에게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에게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억울하게 고난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며 성도로서 합당하게 행동하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 아름다운 일입니다(19~20절). 베드로는 부르심의 상태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성도를 위해 고난당하시며 친히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입니다(21절).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25절) 하나님께 나아와 새로운 존재가 된 성도는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드로는 사환들에게 왜 자유나 해방이 아닌 ‘순종’을 권면했을까요?
윗사람이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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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위한 부르심
우리는 일터에서 크든 작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일들을 만난다. 어쩌면 당신은 승진, 임금 인상 등의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자신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도 아프지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회삿돈으로 사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일들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회사를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은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 2:20). 심지어 크리스천들은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우리는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나그네로 부르심을 받은 대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내야 한다.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요한계시록 / TOW 프로젝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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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베드로전서 2장 16절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 뜻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믿는 자를 사망의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도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인생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내 뜻과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세상이 말하는 자유로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는 진정한 자유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누리는 참된 자유는 하나님 영 광을 드러냅니다.
신앙과 불신앙이 가장 크게 갈리는 곳은 십자가를 감당하라는 요구에 대한 각각의 태도에서다. - 존 스토트
오늘의 기도
주님, 보잘것없는 제 삶을 십자가 은혜로 구속하셔서 존귀한 인생으로 바꾸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안락함과 멀어지고, 억울한 고난이 겹쳐 와도 주님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따르게 하소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한 일에 힘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종으로 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54 주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은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면서, 땅의 질서를 존중할 줄도 알고,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선하게응대하는 거류민과 같은, 나그네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본문의 정리: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고, 국가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라고 권고합니다.
* 본문의 명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 산다는 것은 거룩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세상 속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행식을 더욱 더 바르게 하면서, 믿지 않는 이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고, 나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자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땅에서 자유함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서도록 노력하자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고 인내하고, 주님 안에서 더욱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도록 최선을 다하자
(앞 뒤 문맥 살펴보기)
사도 베드로는 수신자에게 이미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1:1)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2:11에서는 수신자를 향해 ‘거류민’,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소아시아에 사는 자들이 고난(시험, 1:6)을 받는 가운데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이 머무는 곳이 영원한 곳이 아니며 영원한 곳은 바로 산 소망은 하늘(1:4)에 있음을 상기 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지금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 속에 머무는 이들은 나그네일뿐 잠시 머무는 사람일뿐 영원한 안식처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정말 하늘나라를 향한 산 소망을 가지고 계신가요? 이 세상에 수많은 부귀영화,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동안 물질을 관리하는 관리인(청지기)일 뿐임을 명심합시다.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은 지금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고 고난과 어려움에 닥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들이 악과 거짓과 미움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양분인 신령한 젖(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서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살아있는 돌(주춧돌)인 예수님을 따라서 함께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나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로 여겨서 버렸듯이 교인들도 세상에 무시당하고 소외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교인들을 빛으로 불러 내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백성으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세우십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지만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에서 죄의 모습은 끊어내어야 합니다. 습관적이고 삶에 익숙해진 죄악 된 행동을 벗어버리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 때로는 착한 일을 하고도 희생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보다 더 양보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논리와 설득보다는 선한 행동으로 다가서기를 원하고 나도 예수님처럼 희생과 양보를 하며 한 사람을 더 얻기 위해 져주는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3줄 요약
①사도 베드로는 로마가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 차라리 져주고 희생하며 착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②소아시아 지역 교회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되 진정한 고향은 하늘나라(천국)고 말합니다.
③로마 사람들에 의해 손해도 보고, 부당함을 당할 수 있을지라도 묵묵히 참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향을 소망하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면합니다.
내 안의 정욕(2:11), 생활 속 성도의 도리(2:18-3:12), 세상 속 고난(3:13-4:19)까지 지키고 극복해야 할 문제를 다룹니다.
*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1절 하나님이 어두운 데서 우리를 불러내신 것은 ‘선교’(9절) 때문만이 아닙니다. ‘성결’, 즉 사욕(1:14)을 버리고 내 안의 어둠인 ‘정욕’을 제어하기 위함입니다.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삶을 살아가려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본향을 향한 여정을 가로막고 거듭난 속사람을 위협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거세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순례도 성실한 순종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12절 성도는 이방인 가운데 살지만 그들처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이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거룩하고 선한 행실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그렇게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합니다. 말보다 행실로 믿는 바를 드러내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성도라는 이름은 무색해지고, 우리의 복음 전도도 그만큼 무력해질 것입니다.
13-15절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모든 제도에 순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선’입니다. 거류민(11절)이라고 해서 사회의 권위와 질서, 제도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행을 막고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도와 통치자들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정당한 공무를 공동체의 이익이나 그릇된 신념 때문에 반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주를 위한’(13절) 순종이 되어야 합니다.
16,17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선을 드러내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 자유가 부정하고 무분별한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권위를 존중하라고 주신 자유이니, 선(善)을 도모하기 위해 사용해야겠습니다.
18-25절 잔혹해도 순복하고, 부당해도 참으라 하십니다. ‘선’을 위한 고난이고, ‘의’를 이루기 위한 인내라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당한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일상과 일터 가운데 사람들을 상대하는 나의 방식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고향을 둔 이 땅의 나그네들입니다"(벧전2:11/현대어) 그렇다면 왜 이 세상을 외국이라 할까요? 우리의 본향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사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아버지 계시는 본향은 영을 따라 사는 곳이고, 이 세상은 정욕을 따라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의 방식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을 제어하며 대적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그래서 세상의 삶의 방식에 동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하늘의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6)
그래서 하늘의 삶의 방식의 선행으로 세상의 무식한 비방을 막는 것입니다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2:15)
오히려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중에 억울한 고난을 당해도 참으며 감사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이런 삶의 방식은 세상에는 없는 하늘의 삶의 방식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늘 고향에서 이 땅에 하늘의 삶의 방식, 곧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오라 하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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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11~25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내는 삶❞
하나님의 자녀답게 육체의 정욕을 버리고 일상의 삶에서 선한 행실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
✔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 세상 속에서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 합니다(11~12절).
우리는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에 방해가 되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치열한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행실을 나타냄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까지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들 앞에서 선한 행실을 도모하므로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거울삼아 내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지만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지 내 신앙 전체를 뒤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상황에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의 틈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내 자신의 나태한 생활에 대해 깊이 반성해 봅니다.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답게 불신자들과의 생활 속에서 선한 행실을 나타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코로나 확진자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언론들의 보도로 인해 불신자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사회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선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주를 위하여 사회 제도를 존중해야 합니다(13~17절).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이 땅의 시민권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의 사회 제도와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바탕에는 ‘주를 위하여’(13절) 즉,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선을 행함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17절,쉬운성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 자신의 모든 삶은 ‘주를 위하여’라는 전제하에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으로 사회의 제도에 순응하며, 기본적 질서를 지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성경적인 진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갈 때 저항할 필요가 있지만 무작정 사회 제도와 지도자들에게 대해 반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위정자들이 바르게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과 우리 교회의 눈을 세상 속으로 돌려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매너와 성실함으로 모범을 보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주님 때문에 고난 받음을 인정해야 합니다(18~25절).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선하고 친절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악하고 나쁜 주인에게도 복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때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죄 때문에 매를 맞을 때 참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 참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생각한다면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믿는 우리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24절)...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자들인데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제는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25절,쉬운성경)...
직장이라고 공동체 안에는 관용적인 윗 상사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상사도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윤리적이거나 비신앙적인 일을 요구받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고난을 당할 때, 내 자신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면서 견뎌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그리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선한 행실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 때문에 당하는 억울함과 고난을 참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벧전 2:11~25절)...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7~8)“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상적으로는 종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 자들이라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견뎌내고, 믿는 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처럼 자신의 주장을 함부로 할 수 없고, 권세 아래 순복하며 종과 같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고뇌와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곳곳에서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핍박과 배척의 대상으로 곳곳에서 왕따를 당하는 또다른 이방인 취급을 받았으므로, 그 믿음이 흔들리고, 신앙을 굳게 지켜내기에 늘 힘겨웠을 것입니다.
이집트로부터 자유함을 받아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아다니다 약속의 땅을 소유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금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잠시 고난과 모욕을 당하고, 세상적으로는 종의 위치에 눌려 있다 할지라도, 그분의 대속을 믿고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산, 영혼의 자유함을 입은 자들은 참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날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제자로 담대하게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환들을 포함한 이 땅에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자취를 따라가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행동의 배후에 하나님의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깨끗한 양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선한 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마십시오. 가면을 쓰고 외식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열두 군단의 천사를 동원해서 세상을 둘러 엎을 힘이 없어서 매를 맞고 채찍질 당하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께서 입이 없어서 그들에게 항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섬김과 낮아짐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할 때 강함되는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그것이 답답해 보이고 때로 그것이 무능력해 보여도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오늘도 잘 살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잠시 겪는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미 얻은 승리를 이 땅 가운데 누리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이지 않는 큰 벽 앞에서도 하늘의 창을 여시고
주님의 지혜를 부어 주시기 원하시는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여,
소금과 빛은 이 땅 가운데 받은 사명을 넉넉히 이어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도 일반 곳곳에서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사역위에 기름 부어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아버지께서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와 회복의 빛을 비춰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금까지 허락하신 그 은혜를 날마다 깊이 돌아보며,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사명 감당하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