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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던 날이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감싸며 깊숙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만들어냈고, 그 소리는 고요한 공원의 정적 속에 천천히 퍼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는 주변의 정적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뭇잎 사이로 어렴풋이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시야를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동백꽃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 중에서도 동백꽃은 그 붉은빛이 단번에 눈에 띄었다. 가지마다 고요히 피어난 붉은 동백꽃들은 마치 겨울이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들은 살짝 흔들리며 부드럽게 춤을 추었고, 그 움직임 속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묵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동백나무 아래에 서서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는 꽃잎의 모습은 마치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품 속 동백꽃은 첫사랑의 설렘과 풋풋함을 상징한다. 주인공이 서투르게 내뱉는 “그래, 그래, 인젠 안 그럴 테야!”라는 대답은 어색하지만 진심 어린 다짐으로 가득 차 있다. 흔들리는 동백꽃을 바라보면 첫사랑의 추억은 아련해진다. 떨리고 설렜던 순간들이 서툴렀지만 진실했던 그날의 감정들이 마치 이 꽃 한 송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나 동백꽃은 단순히 첫사랑의 설렘만을 품고 있는 꽃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바람이 더 강하게 불어오자, 꽃잎 하나가 가지에서 풀려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꽃잎은 마치 춤을 추듯 바람결에 실려 천천히 내려왔다. 나는 그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꽃잎은 너무도 짧고 덧없었지만, 그 순간의 강렬함은 나의 마음 깊숙한 곳을 흔들었다. 유치환의 시 「동백꽃」에서는 “그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꽃 되어”라는 시구처럼 동백꽃은 사랑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희생과 아픔을 품고 있었다. 나는 땅에 떨어진 꽃잎을 조심스럽게 집어 손바닥 위에 올려보았다.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은 마치 사랑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공원의 길을 따라 걷자 작년 초봄에 방문했던 선운사의 기억이 새로워졌다. 그곳의 대웅전에서 마주했던 동백꽃들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 구절이 머릿속에 스쳤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어렵게 피어난 사랑도 끝은 언제나 빠르고 아쉬운 법이다. 선운사의 붉은 동백은 그 짧은 순간에도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하나조차 그 속에 깃든 희미한 슬픔을 느끼게 할 만큼 깊은 울림이 있었다.
동백꽃에는 오래된 전설도 깃들어 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한 여인의 영혼이 동백꽃으로 피어났다는 이야기가 줄거리 인데 그 전설 속 여인의 사랑과 헌신이 흔들리다 떨어지는 동백꽃잎의 처연한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난 후로는 동백꽃을 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슬픔과 희생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는 순간은 마치 여인의 기다림과 눈물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아련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걷는 동안 문득 장미와 동백을 비교하게 되었다. 장미는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시들어간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사랑이 점점 끝나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동백은 그렇지 않았다. 동백은 꽃잎을 단번에 떨군다. 그 순간은 짧지만 사랑의 덧없음을 강렬히 드러내며 ‘툭’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덧없음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동백은 사랑의 본질을 가장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금 흔들리는 동백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동백꽃을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꽃을 감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은 사랑과 고통, 그리고 희생이 담긴 흔적을 마주하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났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 속에 새기는 듯했다.
동백꽃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삶과 사랑은 덧없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고귀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라고 그래서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우리의 삶도 짧고 덧없을지라도 찬란히 빛날 수 있다.
길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동백꽃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바람이 꽃잎을 휘감아 흔드는 그 때 비록 꽃잎은 떨어져 사라질지라도 순간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긴다.
여러분의 삶에도 동백꽃 같은 순간이 있다면, 그 소중한 기억을 마음 깊이 간직하는 것은 어떨까요? 언젠가 떨어진 꽃잎조차도 따뜻하게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보다 더 나은 삶을 비춰줄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