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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Yuri: 오마 샤리프 분)는 그로메코가(家)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그는 1912년 어느 겨울 밤, 크렘린 궁성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일 이후 그는 사회의 여러 뒷면들을 접하게 되고, 의학을 공부해 빈곤한 사람들을 돕고자 꿈꾼다. 그는 그로메코가의 고명딸 토냐(Tonya: 제랄린 채플린 분)와 장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의학실습에 몰두하는데 운명의 여인 라라(Lara: 줄리 크리스티 분)와 마주친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Komarovsky: 로드 스테이거 분)에게 정조를 빼앗기자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상을 입힌다. 유리는 다시 한번 이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혁명가 파샤(Pasha/Strelnikov: 톰 카우트네이 분)라는 연인이 있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우연히 종군간호부로 변신한 라라와 반갑게 해후한다. 1917년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유리와 같은 지식인은 제일 먼저 숙청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랄 산맥의 오지 바리끼노로 숨어든다.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 생활을 보내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시내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그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유리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한다. 그뒤 빨치산에 잡혀 강제 입산을 당한 유리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전차에서 내리는 라라를 보고 황급히 뛰어가다 심장마비로 절명한다. 이것도 모르는 라라는 내란 통에 잃어버린 유리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배우
작가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2.10~1960.5.30]
국적 | 러시아 | |
활동분야 | 문학 | |
출생지 | 러시아 모스크바 | |
주요수상 | 노벨문학상(1958) 거부 | |
주요저서 | 《의사 지바고 Doktor Zhivago》(1957) |
18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톨스토이의 《부활(復活)》의 삽화 등으로 유명한 화가를 아버지로,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유대계 예술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A.N.스크랴빈에게 사사하며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09년 모스크바대학교의 역사·철학부에 들어갔고, 1912년 독일의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유학하여 신칸트파 철학을 공부하였다. 1914년 처녀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를 출간한 후, N.N.아세예프 등과 함께 미래파계의 시 그룹 ‘원심력(遠心力)’에 참가하였다. 초기의 시작에는 A.A.블로크와 R.M.릴케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또 동시대의 시인 V.V.마야콥스키의 존재가 항상 의식되었다. 1917년 여름에 쓴 시집 《나의 여동생―인생》(1992년 발표)은 자연과 현실세계와의 교감(交感)·융합(融合) 속에서 시의 본질을 찾으려 하였다. 상징주의(象徵主義)를 극복한 ‘연상(聯想)’의 방법으로 그 본질을 표현하려 한 그의 독특한 시작법(詩作法)이 명확하게 나타난 작품이며, 난해(難解)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사시(敍事詩)의 장르로 기울었고, 《1905년》(1926) 《슈미트 대위》(1927) 등에서는 혁명과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시인의 사색(思索)을 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운문체(韻文體) 소설인 《스펙토르스키》(1931)에 계승되었는데, 거기에는 후년에 발표한 《의사 지바고 Doktor Zhivago》에 나오는 주인공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서정시에서는 1932년의 《제2의 탄생》에서 1943년의 《1번 열차에서》로 고전적인 명석함이 더해가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그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격화되어,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그루지야 시인집》(1946) 《파우스트》(1953) 《셰익스피어 희곡집》(1953) 등은 명역(名譯)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이 죽은 후, 그는 창작의욕을 되찾아 1957년 유일한 장편 《의사 지바고》를 완성하였으나 소련 내에서의 발표가 허락되지 않자 이탈리아에서 출판하였다. 이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놓고, 또다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러시아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처분되었다. 그는 당시의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러시아를 떠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부디 엄한 조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탄원하여 국외추방을 면하고, 노벨문학상을 거부하였다. 1년 반 후 모스크바 교외 작가촌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 외에 시집 《마음이 밝아질 때》(1959), 자서전 《안전통행증》(1931) 《사람과 상황, 자전적 에세이》(1958) 등이 있다.
1922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품 활동을 중지당하다시피 했던 그는 생애 마지막 창작열(1945-1955)과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그가 직접 겪었던 혁명과 내전 전후 20여 년의 역사와 시대 상황, 역사와 개인의 운명적 갈등, 남의 여자를 사랑했던 경험, 우랄 지방에 채류했던 경험, 인물들의 세계관으로 표현되는 깊이 있는 철학이 담겼다.
감독
데이빗 린(David Lean)
데이비드 린 | |
1908. 3. 25 | |
1991. 4. 16 | |
영국 잉글랜드 서리크로이던 | |
제4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장대한 드라마를, 거대한 스케일과 빈틈없이 구성된 작가술로 능숙하게 펼쳐보이는 대감독이며, 특히 풍경 묘사에 있어서도 초일류급이었던 감독 데이빗 린. 그는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입지적인 인물로서, 83세에 열 여섯 작품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영화를 남겼으나 그의 작품은 모두 26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획득해, 영화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요즘의 오락 상업영화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장면이 바로 아주 멀리서 사물을 잡아내는 익스트림 롱 숏(extreme long shot)이다. 스피드한 클로즈업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어쩌면 지루하게 여겨 질 수도 있으나, 여기에 길들여지면 세상을 넓게 보는 시야를 갖추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닥터 지바고>의 하얀 설원, <아라비아 로렌스>의 뜨거운 열사(熱砂), <라이온의 딸>의 그 넓고 푸른 바다와 해변 등과 같이 익스트림 롱 숏을 즐겨 보여주었던 데이비드 린의 영상 세계는 요즘 같은 세상에 생각나는 장면이다. 1908년 3월 25일, 영국 크로이던의 엄격한 케이코 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런 가정 분위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극장 구경은 생각도 못하고 집안 일을 봐주는 어느 부인에게서 채플린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정도였다. 마침내 영화 구경을 허락받고 더글러스 펜크스 주연의 <조로>를 보고서야 현실과는 다른 놀랍고도 근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영화사에서도 가장 입지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레이턴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인 회계사였던 아버지를 도와서 사무보조원으로 런던의 사무실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책으로 가득찬 그의 서재를 본 숙모가 왜 영화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냐는 말에, 그는 곧장 TV 스튜디오로 달려간다.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차 심부름부터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주급 5파운드로 영화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촬영의 처음과 끝을 알리는 '딱딱이' 치는 사람, 즉 슬레이트(slate) 보이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편집 보조원, 카메라 보조원을 거친 뒤, 카메라 맨이 되고 뉴스 영화사로 옮겨 편집기사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무려 15년 동안을 영화 주변을 맴돌면서 실력을 쌓았다. 이후 편집자로서 인정을 받은 그는 1942년에 극작가 노엘 카워드(Noel Coward)와 공동으로 전쟁 홍보 영화 <토린호의 운명(In Which We Serve)>(42)으로 첫 감독에 데뷔한다. 2차 세계 대전 중 만든 이 영화는 토린이라는 구축함을 배경으로 이 구축함에 탄 군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영국 해군의 용기와 희생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다음 세 작품도 노엘 카워드의 원작이었는데, 1919년부터 1939년 사이의 런던의 한 가족 얘기를 그린 <깁슨 가족 연대기(This Happy Breed)>(44), 활기 넘치는 코미디 영화인 <즐거운 영혼(Blithe Spirit)>(45), 조용하지만 인상적인 영화 <밀회(Brief Encounter)>(45) 등이다. 세번째 작품 <밀회>는 그의 명성을 쌓게 하였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그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하고 어린 시절부터 심취해 애독해왔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영화화하는데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46),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48)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복잡한 소설을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후일에 스크린의 서사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명분은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이렇게 탄탄한 영화들을 연출한 린은 다음 영화들로 세미다큐멘터리 풍의 작품을 만들었다. 총 세 작품인데 그중 <소리의 장벽(Breaking the Sound Barrier)>(54)이 가장 유명하며 이 영화는 그가 데뷔작
시대적 배경
제1차 러시아혁명
러시아에서는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의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고조된 노동자의 반정부운동과 자유주의자의 입헌운동이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가풍 신부의 인솔 아래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발포하여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수도의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군대와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포↗킨호(號)의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동맹 파업은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여 혁명은 고조에 달하였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10일간이나 무장봉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 한편 10월선언은 입헌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세력을 만족시켰고, 10월선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혁명세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도시의 대규모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1906년 5월에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어 러시아 제1차 혁명은 실질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0월 혁명
2월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러시아의 임시 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4월 중순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병사·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9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9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러시아혁명으로 빵과 토지와 평화를 구호로 내걸고 노동자 ·농민 등 다수자에 의한 지배를 표방하는 공산정권이 후진국 러시아를 무대로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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