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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지층을 뚫고 떠오르는 최초에 기억의 사진은 굴껍데기 처럼 따닥 따닥 모여사는 가난한 섬마을 산꾸지라는 외딴집에 서 너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낮잠을 잔다. 이룰때없이 적막한곳 난데없이 웬비행물체 (비행기인지 헬리곱터인지)가 큰소리로 굉음을 내며 집위에서 맴돈다. 깜짝놀라 잠에서깬 아이는 방에서 토방(마루)을 통해 뛰쳐나와 정지(부엌)과 모방(작은방)을 살펴본다. 집안에 그 누구도없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공포증과 겁에질린체 집 뒤의 논사밭(작은텃밭) 으로달려든다. 그곳에도 엄마는없다. 아무도없는 텃밭으로 또다시 집으로 달리기를 몇번이고 반복하면서 그렇게 소리내어 한없이 울었던아이... 그무렵비가 몹시내리던 어느날 한마을 살던 사촌언니 결혼식날 엄마를 따라간 아이를 만삭인 엄마는 살코기가 몇 가닥 붙어있는 돼지뼈다귀 한토막을 손에쥐여 며 아이를 안고서 비니루를 몸에휘감고 바쁜걸음으로 물이 넘치는 도랑을 건너서 집에 두고간다. 아이는 몆가닥붙어있는 살코기를 다발라먹고 맹숭 맹숨한 돼지뼈다귀를 손에서 놓지않고 엄마가 집에 돌아올때까지 물고다니던 기억들 이...그땐뭔지도 모르고 먹었지만 모든가축의 생태계를 알게된 이후부터는 어떤육고기도 나는 먹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한후 몇일이 지난 어느날 오전수업 맡치고 작은길 잔등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세찬칼바람은 여린살갖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 고통을 참지못해 터진울음은 집에 들어가 엄마를 본순간 복받친 서러움에 또 다시눈물이 났다. 그러나 등신같이 맨날울고 다닌다며. 호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지레겁먹고 울음 조차도 소리내지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3월은 음력2월이다. 1월바람에 대나무잎이 마르고 2윌바람에 장독이 터진다 는 말을 엄마는 자주했다. 겨을옷이라 해봐야 옳은 내의 한 벌없이 물들인 옥양목에 듬성 듬성 솜을놓아 만든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솜을놓아 만든 버선이 유일한 겨울채비다. 밥술이나 먹고 산다는 집 아이들은 당시 신비루처럼 등장한 빨간 액스란 내의와 편물로짠 스웨터를 입기는 했으나 난 그림에 떡이다. 여름 장마는 두대를 (마루 끝에 비들치는 것을막기위해 쳐놓은 밀대로 엮어서 만든가리게) 하루종일 가려놓아야 했으며 당시 흙집은 손가락으로 벽을 꾹 누르면 물이 뭍어 나올정도가 되었다. 장마가 지속되던 어느날 초등학교 2학년이된 나는 아버지 가 만들어준 비료포대 (논.밭에 뿌리는 밑거름이 담긴 두꺼운 비닐자루.를 거꾸로 해서 얼굴만 나오게함) 그 속으로 허리에 멘 책보자기와 함께 거름대신 들어간다. 포대속에 들어간 난 손발도 제몸이 아닌것처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으니 묶여있는듯 하다. 자루의 폭대로 보폭을 맟춘 나는 총총 걸음으로 4학년 언니의 손을잡고 길을 나선다 .등교길 중간쯤 가면 작은길 산등성이 가기전에 조그만 도랑이 있다. 그곳에는 소량의 비만와도 물이고이는데 많은비가 내리는 장마에는 물이 도랑을 넘쳐 길가까지 범람 한다. 나는 언니의 손을 꼬옥쥐고 껑충 뛰었으나 보폭이 좁아 도랑복판에 빠져 언덕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끝까지 내손을 놓지않고 있었던 언니도 함께 굴러 떨어져서 울고 있는자매를 중학교 오빠들이 언덕위로 올려준다. 다행이 언덕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집을 나설때부터 난 비닐자루는 입지 않겠다고 때를 써봤지만 아버지의 위엄에 억눌려 별도리없이 써야만 했다. 흙탕물에 빠지고 눈물범벅이 된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집에 들어간 자매를 보자 엄마는 “워메 워메 내새끼들아 이것이 뭔일이냐”? 연거푸 쯔쯔쯧 하며. 젓은옷 벗겨 추스르느라 바쁜데 아버지는 성화를 내며 “등신같이 넘들은 암시랑토(아무일)없이 잘가는디 느그들은 또랑 (도랑)하나도 지대로 못건네냐”? 하며. 호통치는 바람에 서러웠던 마음마져 움츠려든다.
독수리처럼 검고 단단한 아버지의 등을보며 한없이 원망하면서 어느날부턴가 나는 속으로 우는 아이가 된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의 학구열 때문에 초등학교 들어 가기전부터 난 글읽기와 쓰기를 다 떼고 들어간다. 그당시에 섬마을에는 흔한 학원도 없고 과외 수업도 흔치 않은터라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야 글을 배우는 아이들은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성격은 태어나면서 부터 가지고 나온것도 있지만 자라온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받지못하고 항상 미운오리 새끼가 된 나는 키도작고 몸짓도 작은데다 머리는 돼지털 머리카락 숫기가없고 소심하여 다른 사람뒤에 숨어있기를 좋아한다. 친구들과 잘어을리지 못한나는 책읽기를 퍽 좋아해서 학교 독서실에 자주갔는데 작은길 잔등넘는 길이 혼자 다니기 무서워 늣게까지 있지는 못했다. 상급생들 마칠시간에 독서실을 빠져 나오거나 든든한 순심이 와 같이 간다. 순심이는 동생들이 많아서인지 또래에 비해 마음이 성숙했다. 다른 아이들 보다 키도크고 힘도세어 웬만한 남자아이들도 제압을 할 수 있을 만큼 한덩치 했다. 숫기없는 나에게 항상 힘을 보태주고 언니처럼 배려를 해주어 반아이들 누구한테도 내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었지만 오직 키도작고 힘이약한 내가 유일하게 이겨낼수 있는 아이는 힘이센 순심이 뿐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별은 외로울 수 록 더밝게 빛난다고....., 우리집은 책이라 해봐야 교과서 말고는 아버지가 읽고있는 누런종이에 세로줄로 써내려간 소설책이 전부다. 읽을거리가 없는 나는 또래에 맞지않은 소설책을 제법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런영향 때문일까 가끔 교내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선생님은 내가 쓴글이 동급생글과 비교가 되었는지 내이름을 불러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칭찬과 반아이들에게 박수를 치게 했으며 반아이들은 “정말네가 쓴글이 맞냐”? 하며. 묻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나는 글짓기 하나는 반공에 대한 글짓기 었는데 북한은 우리 남한의 높은빌딩을 보면.....이러쿵 저러쿵 썻는데 반친구들이 내게 빌딩이 무슨뜻이냐며 묻기도 했다. 그때는 새학년이 되면 선생님은 가정 방문 기간동안 오전수업을 하고 오후부터는 선생님이 가가 호 맡은반 학생들의 가정방문을 한다. 각 가정의 환경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다. 4학년 (고) 최진호 선생님이 시서리 우리동네 방문 하던날 나는 엄마에게 선생님이 우리집 방문 할테니 몸빼바지는 입지말고 치마를 입고 있으라며 당부를 했다. 내간곡한 부탁에 얼굴에는 딱히 바를것이 없었지만 치마도 입고 비녀머리는 곱게빗고 엄마나름으로 단장을 해서난 기분이 좋았다. 방문한 선생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은뒤 엄마는 곡간에 소중히 모아둔 날계란 3개를 선생님 손에 쥐여주며. “선상님 우리 집에는 드릴것이 없승께 이달걀 이라도 좀가져가 잡수시 랑께요”. 하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던 선생님은 결국받아서 동행한 김영숙 손에 넘겨줬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엄마도 우리엄마처럼 그런종류의 선물공세를 했다면 선생님과 동행한 누군가는 자루를 메고 다녀야 했을것 같다. 가장 잊지못할 기억은 당시 안좌국민학교 최초로 우리가 4학년 되던해에 (고)최진호 선생님은 밴드부를 결성했고. 우리반은 거의다 밴드부에 소속된다. (고) 최진호 선생님이 1년동안 우리들을 지도하고 목포로 전근후 5ㅡ6학년때는 최경수 선생님이 연임지도 했는데 최경수 선생님은 대학졸업후 우리학교에 첫부임 해왔다. 우리가 6학년이 되던해 목포에서 밴드부 초등부분 경진대회가 열렸다. 그 당시에는 섬과 목포 사이를 왕래하는 배가 오전 오후 두차례 뿐이라 목포에서 잠시볼일을 보더라도 하루는 숙박을 해야 했다. 우리는 어떤여관에 숙박하게 되고 점심메뉴로 국수가 나왔는데 하얀 국수발위에 새까만 액체의 무언가를 뿌려놓아 냄새를 맡아보니 냄새도 이상하고 비위에 거슬렸다. 먹는 음식이다 라는 느낌이 전혀들지 않아 우리모두는 먹기를 거부했는데 그중 몇 명만 먹었다. 숙소에서는 우리의 입맞에 맞는 김밥을 다시제공해 주었는데 나는 또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김밥속에 노란색 뭔가 들어있어 맛도 향도 이상해서 도저히 먹을 수 가 없었다. 그것은 손으로 빼내고 먹었는데 그래도 그향은 남아 있어서 그날 김밥도 기분좋게 먹지는 못했다. 그날 우리가 먹기를 거부했던 새까만 국수가 그 유명한 짜장면이 었다는 것을 내가 먹지못해 빼내어 버린것은 단무지라는 것도 훗날에 알았다. 요즘김밥은 한 입크기로 먹기 좋고 보기 에도 예쁘게 썰어서 먹지만 그때의 김밥은 길다랗게 해서 썰지않고 통째로 들고 먹었다. 그날 우리벤드부는 참여한 수많은 육지학교를 제치고 섬에 위치한 우리학교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이후 밴드부는 당시 안좌초등학교에서 최고의 꽃이 되었다. 3학년 때까지는 더운 여름이면 읍동 고개넘어 저수지에 단체로 멱 감으러 가기도 했는데 해를 거듭하여 상급생이 되니 학교생활은 물론집에 서도 저학년 때와 판이하게 다르다. 도시락도 싸가야 하며 교실중축 하는 공사장에 동원되어 산에가서 책보자기에 돌도담아서 운반해야하고 봄이면 모내기가 끝이 난근교 일대의 논둑에 콩도 심으로 다녀야 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해야할일이 늘었다. 언니와 나는 아침에 아버지가 소메어 놓은곳에 가서 물도 먹여야 하고 풀이 많은 장소 찾아 옮겨줘야 하고 풀이 좋은곳에 끌고 다니면서 소의들어간 배를 불록하게 체워주기도 해야 한다. 소의 배가 부르지 않은 날이면 아버지는 소를 게으르게 먹여서 배가 홀쭉하다고 호통을 치니 물이라도 먹여서 배를 체워야 했다. 먹기 싫은 물을 억지로 먹이려 하니 소는 계속머리를 돌리며 얼굴반을 차지한 소의 둥그런 두눈은 원망스러운듯 자매를 바라본다. 소에게 미안한 짓이지만 자매는 평화를 갈망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 소먹여서 집에오면 거의 해가 지고 곧어두워져서 저녁먹을 시간에는 등불을 켜야 한다. 우리집은 마을과 좀 떨어져 작은동산을 끼고 올라와 단 세 집만사는 외딴집 이다. 당시 큰오빠가 군대에 입대했을 초기에 엄마는 밤 9시가 되면 통샘의 깊은 우물에 정화수를 떠다 마당중심에 놓고 오빠가 무사 귀환 하기를 손모아 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대신 언니와 내가 정화수 뜨러 마을로 내려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달이뜨지 않은 밤은 천지가 암흑 세상이 되어 나는등불 (나무틀의 사각통을 짜서 기둥과 기둥사이에 유리를끼워 호롱불을 사각통안 으로 넣음) 를 들고 언니는 정화수를 떠서 온다. 정화수 뜨기전 먼져 한 두레박 퍼올려서 세수부터 하는데 한여름의 세숫물은 시원해서 좋다. 봄가을은 그런대로 할만하고 한겨울밤의 찬물 세수는 온몸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보다더 힘든것은 늘상 다니는 길이지만 밤길에 동산의 묘앞을 지날때마다 온몸은 긴장이 되어 심장의 박동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민감해지고 무서워 발걸음도 빨라진다. 어느날 정화수를 떠서 동산근처에 다다르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성난아기 울음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울려 퍼진다. 소심한 나였지만 순간 놀람에 비명소리는 언니 비명소리까지 합해져 성이난 아기 울음소리의 배가 되어 밤의 적막을 뚫고 엄마까지도 집밖으로 나오게한다. 그날밤 신성한 정화수를 떠오면서 그갓고양이 우는것 같고 그렇게 방정스럽게 소동을쳐서 공들지 않은다며 아버지에게 또크게 혼줄이 났다. 내 나름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시험공부 기타 내가 좋아하는 그림그리기 등 해야 할일이 많아 앉은 뱅이 책상에 호롱불를 켜놓고 늦은시간까지 앉아 있다. 불을켜놓고 있으면 잠을 못잔다며 아버지의 성화는 “파죽지세”로 나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른들의 하루일과는 모든일을 힘으로서 해냈기 때문에 고달픈 삶은 극치에 다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일손이 항상부족한 탓에 자기또래에 맞춰서 누구든 주어진 몫에 일은 해야 했다. 요즘은 농기계나 제초제를 사용한 농가들이 많아 시간을 단축하고 편리하게 농삿일을 할 수 있지만 70년 초 영농법 이전까지는 재래식 농법으로 많은 수확을 내지 못해 큰소득은 없었는 데도 쉴세없이 바쁘다. 겨울 농한기 에는 초가에 새로이 단장할 이엉을 엮거나 새끼줄을 꼬며 꽁꽁얼어 붙어있는 보리밭이나 유체밭에 잡초도 뽑아줘야 한다. 사계절 바쁘게만 살아왔던 우리부모 세대는 여가생활이 익숙하지 않은탓에 놀이 문화를 따로 갖지는 않았지만 당시초등 학교 봄가을 소풍을 가거나 가을운동회가 열리는날은 각마을 뉘집없이 먹거리 준비며 하루 농삿일 손을 놓게 되었으니 대체일 하느라고 바쁘다. 초등생이 많은 집은보통 서너명 된다. 연례행사로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나서면 온집안 식구가 대이동을 하게되고 먹거리는 지게에 지고 가는 사람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이고 지는 짐보따리는 많은 식구가 먹을 만큼 충분하다. 점심시간 이전 이후는 저학년 부터 시작하여 상급생까지 장기자랑등이 끝나고 나면모두가 희망을 안고 보물찾기에 몰입하게 마지으로 학생들의 놀이 시간은 끝이 난다. 남은 시간은 어른들의 여흥의 시간으로 이어지는데 가락에 취하고 흥에겨워 한바탕 마당놀이에서 어른들은 애닳고 힘든삶에서의 맺힌한을 끝없이 풀어낸듯 하다 가을 걷이가 될즈음 운동회는 어느 계절보다 풍요롭다. 높은 가을하늘의 만국기는 몇몇일 넓은운동장을 체우고 모두의 가슴은 부풀어 있다. 운동회 행사는 저학년 장기자랑부터 시작하여 상급생 순으로 진행된다. 만물을 수확하는 계절인 만큼 점심시간은 우리들의 입맛을 한층더 즐겁게 해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시간은 6학년 달리면서 손님찾기 학부모 달리기대회 국민체조를 마지막으로 가을운동회는 끝이 난다. 뒷사장 (공동으로 사용 하는넓은 터)은 추석이 되면 마을에 대선배 언니오빠들의 빼놓을 수 없는 강강술래의 장이된다. 지금도 기억나는 후렴 은 "으샤으샤"와 "껑자 껑자 고사리 껑자 제주 한라산 고사리 껑자" 등, 등, 휘영청달이 밝아 그 달이 져서 거의새벽으로 갈때까지 땅이 꺼지도록 욱신욱신 뛴다 강강술래는 추석대명절을 대표하는 놀이 문화중의 하나로 연례행사가 되었다.
현대우리는 산업시대에서 더나아가 최첨단의 아이템으로 글러벌시대를 열어가고 있지만 당시새마을 운동은 잘살기 위한 운동으로 〈새마을 노래〉와 함께 우리 선배님들은 동네 어귀에 4--H 클럽이란 이름을 내걸고 새마을 운동이나 각종 마을행사에 주체가 되기도 했다 70년 산업사회 이전의 농경사회 에서는 농토를 많이 가진농가들이 부를 축적하고 농토가 많지않은 농가는 겨우식솔들 세 끼 끼니정도 나 해결하며 아끼고 아껴서 남는 곡물을 팔아 자녀들 학비나 생필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농지가 없는 농가들은 남의집에 품팔이나 산에 나무를 해서 팔거나 바다에 나가 낙지도 잡고 굴도 깨다가 생계를 유지 한다. 우리집도 예외없이 농토가 많지않아 겨우 겨우 살아갔다. 내가 4학년이 되면서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큰텃밭을 사게된다. 그 텃밭을 사기위한 결정적 배경은 우리외할니와 큰언니덕 그리고 구두쇠 작전을 돌입한 아버지 역할이 큰몫을 했다. 아버지는 항상이름옆에 따라다니는 명칭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고집보 또 하나는 구두쇠로 동네에서 소문이 났다. 그땐농가의 상황이 특수 농작물은 없었기 때문에 가을농사나 가둬들여야 곡물을 팔아돈을 쥐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뉘집이나 잘인고비를 해야했다. 그러나 특히 우리아버지는 한번손에 쥐여진 돈은 잘내놓지 않았다. 모든 가용돈은 아버지가 관리하기 때문에 우리형제는 용돈이 필요하면 능력도없는 엄마만 졸라된다. 엄마도 돈이 궁색한것은 매 한 가지다. 자식들에게 마음약해진 엄마는 가을철 거두어 들인 참깨나 잡곡을 아버지 몰래 뒷사장에서 상점하는 미숙이네 엄마에게 조금씩팔아 그돈을 우리에게 몇원씩 나눠주고 나머지는 군에간오빠 용돈으로 부치기도 했다. 당시 미숙이네 엄마는 내또래 아이들은 거의다 잡곡등을 가져와서 돈으로 바꾸거나 먹을거리를 사는데 나는 그런적이 없다고 했다며 엄마는 내게 칭찬을 해주었지만 나는 사실 그런데는 별관심이 없었다. 추수철이 지나고 농가는 메마르고 돈이 궁색해진 엄마도 가끔바다에 나가 깨어온 굴을 주전자에 담아서 읍동에 하숙집이나 각 점포를 다니 면서 팔아오면 그 돈이 없어질때까지 우리는 엄마를 졸라댄다. 엄마는 “느그들은 내손에 한 푼 이라도 있는 꼴을 못보냐“? 하며 다 털어낸 빈주머니를 뒤집혀서 보여준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 빛깔고운 옷 한 가지 흔한 영양크림 하나 손발이 갈라졌어도 안티프라민 하나 사바르지 못하며 갈라진 손을 무명실로 꽁꽁 메고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았던 내엄마도 나처럼 꿈틀거리는 열정은 있었을 것이다.알싸하고 아픈, 한 줄기 시린바람이 내가슴 한복판을 스쳐 지나간다. 농가에서는 흔히 많든 적든 닭을 양계하는데 우리집도 몇마리 마당에 놔먹였다. 그중 두 세 마리가 날자를 거슬러서 알을 낳았는데 계란이 모이면 아버지는 10개씩 짚으로 엮어서 팔거나 학용품이 필요 할때 엄마는 돈대신 한개에 6ᆞ7원 하는 계란을 두 세 개씩 주기도 했다. 집을 출발 하여 문구점에 들어가 계 란을 놓을때까지 혹시누구와 부딧힐까 넘어질까 마음은 조바심이 된다. 겨우가져간 계란은 꼭필요한 학용품과 바꾸면 여유도없이 딱맞아 떨어진다. 크레파스는 항상언니가 쓰던헐벗고 구색도 맞지않는 토막난 크레파스를 썻으며 초등학교 내도록 새로산 크레파스는 한 번도 못쓰고 졸업한다. 크파스에 대한 아픈기억 또하나는 2-3 학년쯤 되었을 무렵내뒤에 앉은 최영순이 학교오는 길에 크레파스를 사왔는데 미술시간에 쓰려고 보니 크레파스가 없어졌다고 울며 선생님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전원이 눈감고 두손을 깍지껴서 머리에 올린체로 제자리에 앉아 있으라 한 다음 반장을 통해 각자의 소지품을 조사하게 한다. 다들 선생님 지시대로 앉아있는데 내자리 뒤에앉는 영순이 짝지가 내발바닥 밑을 밀어붙이는 느낌을 받았다. 소지품조사가 끝나자 내뒤에 앉았던 영순이 짝지가 나를 가르키며 내발밑에 크레파스가 있었다며 선생님과 영순이에게 말을하며 영순이에게 건네줬다. 나는내가 절대아니고 “네가 내발밑으로 밀어내지 않았느냐”?며 반박을 했지만 목소리크고 힘이센 영순이 짝지는 내발밑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한짓이라고 억지를 부려 힘없이 나는 도둑으로 몰렸으며 아이들은 나를 도둑이 라고 수근거렸던 일은 어린가슴에 잊지못할 상처가된다. 그당시 1원이면 국화빵 한 개를 살 수 있었고 10원 이면 가게에 들어가 쟁반에 담아놓고 앉아서 먹을 수 있었다. 학교앞의 빵집을 지나칠때면 구수한 냄새는 끝없이 나를 유혹하고 집을향해 걷는 걸음은 구수한 내음에 취해 마음은 계속 빵집에 머물러 있다.“언감 생시” 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어느날 기회는 왔다. 4학년이 되던해 군에간 큰오빠가 휴가와서 입대하던날 아버지는 오빠에게 목포 가는 길에 나를 데리고 가서 가마니를 사서배에 올려주면 아버지가 마중 나오겠노라 하고 나는 오빠를 따라 테어나서 처음으로 섬에서 육지로 이동해봤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섬과는 다른 세상이다. 책에서만 보고 듣던 높은건물. 정신없이 빵빵 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자동차 거리에는 수많은 상점과 분주히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자동차가 무서워눈을 어디에 두며 발은 어디를 딛어야 할지 금방차가 나를 덮칠것 같아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못하고 현실을 직시하는데는 시간이 지났다. 오빠는 내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풀빵(국화빵)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내가 소망했던 일이 한가지 이루어지는 날이다. 목포 빵집에서는 우리학교 앞 빵집과는 다르게 걸죽한 팥앙금 국물에 국화빵 조각과 설탕을 넣고 수저로 떠먹었는데 쫄깃 쫄깃하고 달콤한 그맛도 테어나서 처음먹어본 맛이었다. 4학년 어느날은 명자 따라가서 심부름 해주면 맛있는거 사주겠다고 한다. 솔직히 나도 부끄러워서 남앞에 나서면 말도못하는데 명자가 맛있는거 사준다는 바람에 감당 할 수 없는 무리를 하고 말았다. 겁에 질려 들어간곳은 학교부근에 있는 농협으로 기억된다. 후들 후들 떨며 들어간 나를 보고 왜왔느 냐고 묻듯이 쳐다보는 아저씨에게 “저-음-친구 아부지가 아퍼서 도열병약 사러 왔지요 잉“ 하고 순간 나도모르게 모기소리로 중얼중얼 .....목소리가 뱃속으로 다시들어온 느낌이다. 아저씨는 호되게 야단을 치며 빨리나가란다. 자기네들 끼리나를 쳐다보면서 히주 히죽 거리며 웃느라 정신없다. 그떄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의 웃음이 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부끄러워 어쩔줄몰라 그냥도망 나오듯이 나와서 명자에게 “야! 도열병 그 약이 느그 아버지 약 아니냐” ? ... 명자는 벽을 잡고 웃으면서 자기아버지가 먹을약이 아니라 벼논에 뿌리는 약이란다. 맛있는것에 너무 집착하다가 삽시간에 작은 나는더작아 졌다. 그 당시 명자 아버지 의 항상 아픈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내짐작대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다른약은 몰라도 농약이름 “도열병” 약 만큼은 내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맴돈다. 누구나 한참을 먹어야할 시기에 먹거리에 대한집착의 동경심은 흔하게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학교에서 가까운거리에 양조장이 있었는데 막걸리를 만들기위해 찐보리쌀을 양조장 마당에 멍석을 깔고 펼쳐 말리는 것을 본 몇몇남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그곳에가서 주인몰래슬쩍 들어가 신고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 한가득 담아와서 볼이 터지도록 입에 넣고 다닌다. 도시락이라 해봐야 변변찮은 반찬만으로는 허기진 배를 체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이 보리밥에 깍두김치 또는 배추김치 드물게는 계란후라이정도 나에게 계란반찬은 기억이 거의없다. 상황이 그러니 먹거리는 항상 부실할 수 밖에없다. 학교에서는 날자를 정해놓고 옥수수가루와 미국산 우유가루, 비스켓크기 정도의 건빵을 베급해 주다가 언제부터인지 큰두부 한 모 정도의 옥수수 빵으로 대체하여 급식시간이면 나누어준다. 구수한 냄새 가 코를 자극하고 군침이 돌았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을 생각하면 그빵을 차마먹을 수 가 없었다. 엄마나이 48세에 낳은 늣둥이 동생은 6ᆞ7 세 까지 밭에가서 일하는 엄마를 제발로 찾아가 엄마젖을 먹는다. 큰언니는 늦게까지 모유를 먹으면 머리가 나빠져 공부도 못한다며 강하게 말렸지만 동생은 엄마의 변함없는 배려에 늦도록 모유를 먹었다. 그런 탓인지 막내동생은 입문계는 승부력이 없어 공업학교를 지원하여 전자쪽 엔지니어가 된다. 봄이되면 해는길어지고 겨우내 많은식솔이 먹고사느라 곡간에 식량도 동이난다. 식량이 부족한 집에서는 봄쑥을 케다가 밀가루에 묻혀서 쑥죽을 끓여 먹거나 보리쌀이 없어 새먹이로 쓰이는 노란 좁쌀밥을 먹었는데. 우리집도 매한가지 었다. 3ᆞ4 월이면 온산에는 색종이를 찢어놓은듯 울긋불긋한 진달래. 새순에서 돋아난 탐스런개밥 (송화)물이잔뜩 오른 부드러운 속살의 소나무껍질 (송쿠) 아침에 눈뜨이면 제일먼져 달려드는 감나무밑의 감똥(감꽃) 봄이면 온산이 제땅인듯 자리잡고 뻗쳐가는 칡나무 칡뿌리. 억새풀과에 속한(삐비) 길섶에 납죽엎드려 하얀 뿌리를 양껏내리는 풀뿌리(띠뿌리 )진달래,개밥,송쿠,감똥, 칡뿌리,삐비,띠뿌리, 등은 봄철에 먹을 수 있는 우리들의 간식거리가 된다. 5ᆞ6 월쯤되면 누렇게 익어 알이 꽉찬보리이삭도 놓칠 수 없는 간식거리다. 몇가닥씩 꺽어 낱낱이 알을 떼서 손바닥으로 슥슥비비면 껍데기는 다벗겨지고 알멩이만 남는다. 말랑 말랑하고 부드러운 보리알멩이는 구워먹으면 더 구수하다. 7, 8 월이면 아쉬운데로 풋감, 산딸기, (냉감)망개 (파리똥)나무열매 (꽁애밥)숲풀속에서 자란열매 등 ,등 .방과후 산길을 먹이 찾아 종횡무진 한다. 9ᆞ10 월이면 학교 등 하교길 근처에 있는 밭들은 수난을 겪는다 하교길에 의례적으로 시선은 무우, 당근, 고구마,등, 밭을 주시하며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목표물이 포착되면 다람쥐처럼 재바르게 뽑아 와서 흙을 털어내어 이로 껍질을 갉아내고 한입씩 돌려가며 먹기도 한다. 밭주인은 우리하교 시간에 자주나와 지나가는 우리를 항해 곱지않은 시선과 원망의 탄성을 보내오지만 앞바퀴빠진 자리 둿바퀴 도 빠진 겪이 된다. 11ᆞ12월 우리부모님 시대는 많은 식솔들이 긴겨울 동안먹고 지낼 수 있는 식량과 먹거리 준비가 충분해 질때 그것이 작은 행복이었다. 집집마다 식솔들 월동준비로 가을에 거둬들인 고구마를 방모 서리에 두대통(밀대로엮어서 만든발종류)을 설치하고 한가득넣어두면 아침등교시간에 한 개 씩들고 가 산고개넘어 각자나름의 표적을 해 눈속에 뭍어두고 하교 길에 꺼내놓은 고구마는 아이스케키 처럼달고 맛있다. 거의가 초가지붕 이었던 시절처마끝에 메달린고드름도 간식거리삼아 한 입씩 머금고 다닌다. 긴 겨울의 폭설은 허벅지 까지 쌓인다. 산도 들도 매마르고 하얀 색으로 천지를 펼쳐놓은 세상은 흰 도화지 위에 파란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산마루 위에 목화솜처럼 소담 스럽게 피워있는설화, 솔가지위의 부체살눈 소나무는 초가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어울려 한편의 동양화를 이룬다. 산성비 때문에 어릴때 입을 벌려가며 받아먹던 그달콤한 빗물맛도 오존 층을 위협하는 대기오염탓에 하얗게 쏟아지는 첫눈의 맛도 볼수없는 현대의 동심들....지금은 문명의 뒤로 밀려 시멘트 포장에 새로 단장한 주택이 즐비하다. 석양이 질때면 허공위에 이름모 를 새가 날개를 펼치고 갯뻘구멍엔 손가락을 넣으면 조개와 게가 한없이 걸려 나오고 갯뻘 바닥에는 갈고시(고동)과 파래 등은 손바닥으로 휘져으면 한웅큼씩 잡힌다. 봄이면 한아름 넘은 감나무 아래 서 둥굴고 잔돌멩이로 공기 놀이하고 감꽃이 떨어지면 투박한 무명실에 꿰어목걸이도 하고 결국 한개두개 먹다보면 다먹기도했다. 모래뚝이 갈라지고 멘발로 땅을 걸으면 발바닥에 불이 팍팍 내리쬐이는 여름 밤이면 집앞 저수지 멱 감으러 가기도 했다. 문명에 해택은 받지 못했지만 자연의 모든 생태계가 오염되지 않아서 좋았았던 시절 그야말로 우리일상에 먹는 음식이 다 보약이 되었던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