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벽두에 제8기 동양증권배 본선 토너먼트가 열렸다. 여느 국제기전처럼 삼국의 강자들이 모두 출전했으나 초반부터 파란이 일어났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한국의 김영환 4단이 중국의 류 사오광(劉小光) 9단과 일본기원의 류시훈 7단을 누르고 4강에 진입한 것. 이창호는 다른 시드에서 가토 9단과 마 샤오춘(馬曉春) 9단을 꺾었고 조훈현은 왕 리청(王立誠) 9단과 왕 레이(王磊) 9단을 물리치며 각각 4강에 올랐다. 마지막 한 자리는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9단의 몫이었다.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은 중국의 조 다위안(曹大元)과 일본의 조치훈을 제압하고 올라왔는데 비록 일본에서 무관이지만 두터운 바둑으로 한때 서열 제1위 기성위를 차지한 적 있는 강자였다.
3월 9일 준결승전. 조훈현은 겁 없는 신예 김영환 4단의 돌풍을 잠재우고 결승에 올랐다. 이날 그는 통산 1,100승으로 세계 최다승 기록을 갱신했다. 그런데 당연히 이길 줄로만 알았던 이창호가 고바야시 사토루에게 일격을 당하고 패퇴했다. 초반 포석부터 유연하고 두텁게 판을 짠 고바야시는 최강 이창호의 존재에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바둑을 선보이며 녹록치 않은 힘을 과시했다.
조훈현 VS 고바야시 사토루.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의 예상은 5:5로 팽팽했으나 전문가들은 체력상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조훈현보다 고바야시 쪽이 유리하다는 진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둘 간의 전적은 딱 한 차례, 1995년 후지쯔배 본선 2회전에서 만나 고바야시가 이겼었다. 한 차례의 전적을 참고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 때 조훈현은 고바야시의 두터움에 꽤나 시달리다 그대로 밀리고 말았었다. 기풍 상 어려운 상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삼년 전 동양증권배에서 조훈현은 까다로운 요다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3:1로 승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요다는 한국기사 킬러로 악명을 떨치지 않았던가. 도끼를 휘둘러 장작을 패듯 반상에 돌을 내리찍는 요다에 맞서 조훈현은 시종일관 중얼거리며 엄살을 부리고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엄살과 달리 반상에서 그는 조폭처럼 거칠게 덤벼들었다. 멱살을 쥐고 관절을 비틀고 태클을 감행하는 난폭자. 마치 하수 다루듯 무리수와 독수(毒手)를 남발하는 조훈현의 도발에 질려 요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 3:1로 무릎을 꿇고 말았었다.
사무라이 기질의 요다와 달리 이번에 정면승부를 펼치게 될 고바야시 사토루는 호방한 인상을 풍기는 신사이며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애주가에 대인관계도 기풍처럼 넉넉한 기사였다. 과연 그에게도 요다에게 써먹었던 우격다짐이 통할 것인가? 견고한 실리바둑에 기초가 탄탄한 요다는 웬만해서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수비형이지만 몸싸움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상급의 기사인지라 전투력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조훈현은 요다의 기보를 통해 직감으로 해법을 찾아냈었다. 상대가 싫어하는 길로 유도하는 것. 그렇다면 고바야시 사토루가 싫어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조훈현은 큰 대국을 앞두고 특별히 대비책을 세운다거나 공부를 하진 않는다. 눈만 뜨면 큰 시합이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그 많은 대국에 앞서 일일이 준비를 할 순 없는 노릇. 그 대신 그는 일상 아무 때나 공부를 한다. 식사를 할 때,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잠들기 전의 휴식 때….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신(神)의 한 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바둑판 한 조가 비치되어 있어 언제 어느 때나 혼자서 스파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대회에서나 국제대회에서나 그는 휴식시간에 어슬렁거리며 다른 기사들의 대국을 즐겨 훔쳐본다. 그리고 복기할 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한다.
과거에는 각국 기원에서 발행하는 바둑 잡지를 읽어보고 해외 주요대국의 기보는 팩스를 통해 입수하곤 했지만 요즘은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들을 검색한다. 각 기전의 전적과 기사들의 동정, 그리고 기보 등을 한 눈에 주르륵 훑어본다. 자판에는 서툴지만 마우스 클릭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조훈현의 바둑공부는 그렇게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헐렁헐렁한 것처럼 보여도 광범위한 정보를 포착하는 고성능 레이다가 365일 24시간 가동되고 그 중 필요한 정보만 골라 두뇌의 집적회로에 저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전.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꺾고 올라온 고바야시 사토루는 컨디션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포석에서 천하제일이라는 조훈현을 압도하고 당당하게 진군했다. 중반까지 진행됐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조훈현의 패배를 단정했었다. 이제 돌을 던지는 시점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조훈현은 끝까지 던지지 않고 실낱같은 역전의 가능성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대국은 TV로 중계방송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조훈현의 종반 흔들기 초식은 절망적이고 자폭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보였었다.
‘무슨 수가 있는 것인가?’ 관전자들은 이미 판이 끝났음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정작 고바야시 사토루는 시간이 흐를수록 미혹(迷惑)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 미혹이 불안을 잉태하고 불안감은 과잉투지를 불러일으켰다. 탄탄하게 판을 짜오던 고바야시 사토루가 갑자기 조훈현의 저돌에 맞불을 놓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딱 한 번의 오버페이스. 바로 그 순간 밑바닥에 눌려 아득바득 기회를 노리던 조훈현의 카운터블로가 작렬했다. 통렬한 자반뒤집기였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역전승.
‘심했다!’ 관전자들의 국후 촌평은 한 마디로 집약됐다. 아무리 우리 편이라지만 너무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 상대의 실수를 유도한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고바야시 사토루도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하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했던 바둑이었으므로 조훈현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2국에서의 설욕을 장담했었다. 이 당시 고바야시 사토루의 바둑은 신록의 숲처럼 물이 올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큰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고 수많은 일본기사들 중 요다와 함께 국제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 해 연말에 삼성화재배 결승에도 진출해 이창호와 3번기를 가졌다.)
하지만 2국, 3국 모두 그는 조훈현에게 지고 말았다. 세 판 모두 기보를 보면 사토루의 승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벽한 우세를 점했다가 허망하게 역전패를 당한 거였다.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 3번기를 통해 고바야시 사토루는 한국 팬들과 세계 바둑 팬들에게 강자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주었었다. 그러나 우승컵과 거액의 상금은 조훈현의 몫이었다. “내용과 관계없이 이기는 자가 강자다. 패자가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사토루는 시상식에서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1997년 하반기 고바야시 사토루는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이창호에게 3:0으로 영봉을 당하면서 한국의 사제 콤비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