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1995년) 2월 16일은 조선의 시인 尹東柱의 기일이었다. 1945년 이 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 순수하고 고고한 시인이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그것을 듣는 간수는 조선말을 몰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 필시 원통하고 절통한 가슴의 소리였을 것이다.) 숨진 그 날로부터 오십 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 서울 시내에 있는 尹東柱의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는 약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저항시인· 尹東柱를 그리는 모임'이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朝日新聞). 그 추도식의 모습은 그 후, 한·일 공동제작의 텔레비젼 프로그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尹東柱·일본치하의 청춘과 죽음' NHK스페셜로 방영되었는데 시비 앞에서 서시(序詩)를 낭독하던 젊은 여대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2월 16일 尹東柱가 재적해 있던 교토(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에서 '尹東柱詩碑완성 기념예배'와 그 제막식이 있었는데 한·일 양국에서 2백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고 있다. 제막식이 끝나고 니이지마회관에서 한·일 다섯명의 패널리스트에 의한 심포지움이 열려서 尹東柱작품의 번역을 둘러싼 열띤 공방전이 있었다고 한다.
또 2월 18일 토쿄 東京의 敎文館에서는 일본기독교詩人會의 후원으로 '尹東柱를 생각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에 地緣的 연고가 있는 시인 두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는데 나도 십여 명의 발기인 명단에 끼어 참석을 했다. 오후 두 시 발기인 대표의 인사와 尹東柱가 살던 시대상황에 자신의 체험을 통한 '식민지 통치' 해설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기조강연자인 宇治鄕毅씨가 '尹東柱의 생과 그 의미'라는 연제로 尹시인의 대표작인 <序詩>를 채택하여 어휘 분석에 의한 작품론을 전개해 나갔다.(우지씨는 尹東柱의 同志社大 후배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한 달 전인 1941년 11월 20일자에 쓰여있는 <序詩>에 담긴 죽음, 하늘, 부끄럼, 바람, 고통, 별, 사랑, 길, 오늘밤… 등의 어휘가 尹東柱의 모든 작품에 이어지는 키워드이고 그때까지의 삶을 총괄하여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 시는 쓰여졌을 거라는 해석에는 크게 배울 점이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은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의 소상한 내역이었다.
다음에 몇 사람의 발표가 있었는데 종군위안부 문제 고발詩를 썼고 한국인 피폭자 문제 등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나타내는 이시카와(石川逸子) 시인이 등단하여 尹東柱 작품의 순수성과 그 시법의 특성을 (눈이 오는 지도)를 낭독하여 시사하고 나서 尹東柱에게 바치는 자작시를 읽었다.
다음엔 재일한국시인 최화국 씨가 "尹東柱는 나보다 세 살 연하입니다…"로 시작, 동시대를 살던 尹東柱의 너무나도 순수, 무방비로 인했던 불행을, 또 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시절의 '特高'와의 교제술에 관해서 자신의 체험을 술회하였고 한글시의 일본어 번역에 대해서도 엄한 지적이 있었다. 올해 여든 한 살인 이 현역시인의 진솔한 언변도 이 날의 큰 수확이었고 특히 원문대로 낭독된 <序詩>의 여운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실 나는 자신이 조선반도에서 성장했다는 것 외에는 尹東柱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므로 양해를 구해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먼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에 찍었다는 준수하고 단정한 사진의 인상을 말한 다음, 긴 세월 재판소라는 특수직장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써 '우리 말'을 사랑한 이 시인에게 그 작품의 일본어 번역을 강요한 관헌의 잔혹성과 시인 尹東柱가 받은 굴욕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그 모임을 주관했던 시인으로부터 보내온 '대학통신' 속에 고당요(高堂要)라는 사람이 쓴 '모순의 사람 尹東柱'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尹東柱와 모국어, 그리고 일본어와 윤동주에 관해서의 '언어'와 '시인'의 관계가 단도직입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인용을 해보려고 한다.
"尹東柱에 관해 일본어로 쓰는 것은 매우 적당치 않다. 일본어는 尹東柱에게 있어 어거지로 배워야 했던 이국의 언어이고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당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하여 반일적, 항일적 행위로서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자신이 쓴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는 자신의 시적 세계, 문학적 세계를 심화, 추구, 연마하기 위해서 일본어로 문학을 배워야 했다. 좋아하는 시인 릴케와 프랑시스 잼을 읽은 것도 주로 일본어였다……"
高堂씨의 문장의 일부분이지만 예리한 필치로 尹東柱에게 접근하여 "내가 그에게 끌리는 것은 '모순의 사랑', 안으로 찟긴 혼의 상처를 별 수 없이 껴안고 있는 사람, 고뇌뿐이 아니라 허무에 시달리면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모순의 사람' 尹東柱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尹東柱 이해를 돕는 큰 길잡이이고 새삼 그 시점에서 尹東柱의 사람과 작품에 다가가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尹東柱는 일본 통치하의 가혹한 상황에서 '치안유지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에 의해 체포 구류되었다. 그리고 '옥사'라는 비극적 최후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악업과 잔학성을 상징하는 '순교의 사랑'을 '저항의 사랑'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 접해 가면 그 어디에도 노골적인 저항의 자세나 정치적인 문구는 없다. 오직 내성적인 우수에 찬 서정시인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사상성을 지니는 의지의 시인이다. 여기서도 현대에 있어서의 尹東柱 평가에 큰 모순을 보는 것이다.
나는 길지 않은 발언의 마지막을 尹東柱 작품 <자화상>의 낭독으로 맺었지만 이 시는 그의 전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尹東柱의 이름이 일본의 시단이나 매스컴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십수년 남짓이지만 한국에선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필적되는 '국민시인'으로서 일찍이 그 작품과 사람이 크게 평가되어 있다.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윤동주시집을 입수해 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내 한글 실력으로 읽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후 입수한 尹東柱全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伊吹鄕역)>와 평론 <尹東柱·그의 기독교性(森田進저)>, 또 尹棟柱詩篇의 일본어역 등을 실마리로 해서 나 나름의 '尹東柱메모'를 시도해 보고싶다. 이 작업은 나의 본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조선반도에의 뜨거운 그리움과 이국땅에서 옥사한 애절한 시인에게 깊은 애도로서 보내는 나의 頌歌이며 鎭魂歌이다.
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동북부의 북간도 明東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현재도 조선족의 자치구로 알려져 있지만 증조부 尹在玉시대에 이주했다고 한다. 부친은 尹永錫, 모친은 金龍, 여동생 惠媛과 역시 시인인 남동생 一柱, 光柱가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조부 尹夏鉉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東柱는 조신하고 차분한 성격, 그 안에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학교부터 중학으로 이어지는 친구에 한국의 간디로 불린 목사 文益煥이 있다.
1932년 東柱는 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부터 그의 문예활동은 시작되었다. 그 후 崇實중학, 다시 光明학원중학부로 전전하고 있으나 이미 延吉에서 발행된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의 지도> 등의 동화를 발표해 온 尹東柱는 이 숭실시절에 학우회지 <崇實活泉>의 편집을 맡았었고 詩 <空想>을 발표하고 있다.
空想-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空想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自由로이 헤엄친다
황금 知慾의 수평선을 向하여
尹東柱가 다닌 恩眞, 崇實 이 두 중학교는 反日色이 짙은 학교였다. 총독부가 각지에서 신사를 건립하고 국민정신총동원이라는 구호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尹東柱의 모교인 崇實은 '참배냐, 폐교냐…'를 협박하는 총독부를 향해 'NO'를 고집하여 1938년 폐교되었다. 이 사건은 필시 尹東柱의 다감한 청춘기 정신형성 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光明학원중학부 편입 후에 4학년, 5학년을 통틀어서 '일본어의 성적이 가장 나빴다'고 하는 尹東柱였다.
그가 의식적으로 문학에 뜻을 세운 것은 중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문제에서 의과대학에 가라는 부친과 대립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택한 그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는 사촌이며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친구 宋夢奎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이미 중학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콩쿨 꽁트부문에 당선되었을 정도로 조숙한 文才인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는 등 과격한 사상과 행동력의 소유자였다.
윤동주가 입학한 1938년 당시의 연희전문은 민족주의의 기풍으로 꽉 찬 학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시기에 그가 가장 신뢰하던 국어학자 최현배가 어떤 사건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강제사직을 당했다. 그러나 이 연희에서의 4년간이 윤동주로서는 가장 여유롭고 가장 자유롭게 삶을 구가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라고들 말한다.(송우혜 지음<청춘의 시인>에서).
이 시기에 그는 정병욱(후에 서울대학의 고전문학교수)이라는 생애의 지기와 만나고 존경하는 선배 시인 정지용과도 교류하고 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을 졸업(학제단축으로)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도일, 입교대학 영문과에, 그 두 달 후에는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연희 재학시부터 일본 유학 무렵(23∼24세)의 것이고 이 시기에 이미 自選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간행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西日本新聞의 井手俊作기자의 신문연재를 '빼앗긴 시혼-발굴·尹東柱의 옥사'에서 이 박행한 시인의 생애와 비참한 죽음의 사실, 그 슬프도록 투명하고 고고한 詩정신에 접할 수가 있었는데, 그 '빼앗긴 詩魂'이 말하듯이 우리말의 소멸 위기감을 안고 있던 국어학자 최현배에게 강렬히 기울고 있던 윤동주는 단연코 한글로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內鮮一體 정책하에서의 한글교육 폐지(1938년) 강행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그러나 창씨개명 실시라는 일제통치 하에서 어쩔 수 없이 平沼東柱가 된다. 그것이 일본 유학에의 渡航증명서를 얻어낼 수 있는 필수 요건이어서였다.
최현배에 의해 우리말에 눈을 뜬 윤동주에게 있어 한글에 의한 詩행위는 글자 그대로 죽음을 건 선택이었다. 그의 작품으로서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다음의 작품이다.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독자 개인의 감수성에 맡겨질 일이지만 나는 프롤로그로서의 그것이기보단 오히려 에필로그로서의 죽음을 예감한 終詩(유서)로도 생각되어진다. 24세에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버린 요절시인의 천재성과 비극성을 거기서 보며 마음이 아파온다. 尹東柱의 작품에는 거의 삶의 정의와 생활의 추구에 괴로움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尹東柱 이해를 위해서는 그 작품들 저변에 깔려있는 기독교적 윤리관과 유교적 정신의 자세, 그리고 조선어가 갖는 표현의 깊이에 관해서의 학습과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봄의 京都·同志社大 심포지움에서도 尹東柱작품의 번역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한다. 그 一例로서 序詩의 첫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 관해서 번역자인 伊吹鄕씨와 주최측과의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듣는다.
伊吹씨 번역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라고 되어있는 하늘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지식으로선 하늘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휘이지만 어원적으로는 이 나라의 고유 數詞인 '하나'에 유래하고 있어 空, 天, 神 또는 天國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죽는 날까지 天을 우러러'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森田進씨 번역에는 '天을 우러러'로 되어 있으며 이 두 줄에 대해 森田씨는 '동남아세아적 윤리관인 恥…는 여기선 수직적인 天上에의 視線과 이어져 있다. 이 청렬하기까지 한 의지야말로 조선의 기독인이 터득한 순절의 의지이다'라고 尹東柱를 찬양하고 있다.
윤동주가 체포된 것은 1942년 7월 14일이었다. 완전한 기습체포였으니 그의 경악과 실망은 어떠했으랴 상상이 간다. 그의 구체적인 용의사실이 밝혀진 것은 1970년이 한참 지나서 윤동주 연구가인 宇治鄕毅씨에 의한 '特高月報' 복각본의 열람에 의해서였다. 윤동주의 수난의 계기는 사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성장해 온 宋夢奎의 사상과 행동을 눈여겨오던 '特高'의 먹이로 말려들은 불행이었다.
그 부분의 사정을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었던 高熙旭(당시 三高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송몽규씨가 경찰의 要觀察人이었기 때문에 생긴 거지요. 宋을 경찰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함께 '우리 민족의 장래' 또는 '독립운동' 등을 주거니받거니 한 거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경찰이 깡그리 엿듣고 미행해서 사건을 만든 거였어요…"
그리고 高熙旭은 尹東柱의 인품을 "체격은 마른 편이고 흰 얼굴에 목소리는 좀 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온화하고 침착한 면이 있으면서 반면 정열적이었지요. 무척 공부를 잘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창백한 인텔리라는 인상이었구요. 항상 우리 민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색조가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산 동지의 증언인 만큼 현실감이 있다. (宋友惠 지음 <尹東柱-청춘의 시인>에서)
그러나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어 숨졌다고도 말해지는 尹東柱 옥사의 진상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