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 민속 마을
* 역사
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墓制)의
하나인 석관묘(石棺墓)가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산 정사의 구릉지에 백여기가 있었다는 고
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
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
할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고문서 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
浩)가 이마을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柳氏) 류 복하(柳復河)가 처
가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月城 孫氏)공이 540여년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安德)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
을 상속받아 살다가 후에공신이 되어 고관의 방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
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경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 곳으로 옮여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東方五賢)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이 배출되면서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 마을의 규모와 자연환경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主山)인 설창산(雪蒼山) 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
려 네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에대해서는 전해
져 오는 이야기가 많다.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血자가 된다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쳤다고
한다.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 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이
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않는 집을 포함하여 500 여년의 전통의 향기를 품은 총160
여 호의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는 큰 마을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의 진입로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
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 음식
옛날에도 부잣집에서는 음식을 즐기며 먹을 수 있었다.
양동마을은 5백년동안 양반으로서 부를 누려온 풍요로운곳이므로 음식이 풍부하고 독특했다.
과거에는 안강평야의 농산물과 인접한 동해안의 풍부한 해산물을 재료로하여 만든 음식을 즐
겼고 손님을 접대할때는 격식을 갖춘 7첩반상을 차렸다고 한다. 복계탕(伏鷄湯), 문어챗국, 육
포, 독특한 칼국수, 다양한 종류의 지반찬(장아찌 종류와 유사한 반찬) 등 양반집의 가정마다
다양한 음식을 해먹었는데 상업화를 꺼려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못하고 사라져가고 있어서 안
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상차림에는 반찬의 종류, 그릇의 크기와 모양, 음식을 놓는 위치 등에 엄격한 기풍보다 정성어린 환대와 인정이 넘친다.아울러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는것이 마을
의 오랜 전통이어서 최근에 관광객이 급격히 늘어나 생활에 불편이 많음에도불구하고 여전히
반기며 예절에 벗어나지 않는다.또한 양동마을에는 예로부터 멋진 술이 전해오는데 양동청주
가 바로 그 술이다. 단맛과 함께 아련히 느껴지는 향이 일품이며 맛이 순하고 취하게 마셔도
두어시간 정도 지나면 깨끗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찹쌀로 빚으며 지금도 제삿술은 반드시 직
접 빚은 전통술만 쓴다.
* 전통식당
양반기풍이 아직도 아주 강한곳이라서 마을안에서 하는 상업활동을 마을 사람들이 매우 싫어
하므로 전통식당은 두 곳 뿐이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마을의 전통보존에는
옳은 일미며 우후죽순식으로 식당이 생겨난다면 마을의 전통과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 풍속
1. 줄당기기
과거에는 줄당기기를 매년 해왔으나 근래에는 동회의 결의로 격년 또는 격 3년제로 한다. 이
놀이는 특히 마을에 우환이 많을 때는 반드시 행하는 것인데 줄을 한번 당기면 마음이 편해진
다고 한다.날짜를 택하는 것은 그 해마다 정한다. 줄당기기는 마을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아
랫말과 웃말로 편을 가르고 전가구가 모이면 3~4 가구가 1조를 이루어 "종줄"을 1주일 전이나 10일 전부터 꼬기 시작한다. 이 종줄들이 모여 "큰줄"을 만드는데 대략 전날까지는 마친다. 그
동안 양편은 상대방줄에 대해 염탐을 계속한다. 행사 당일 오전에는 줄을 마지막으로 보수하
고 주민들을 동원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아랫말(관가정 밑의 은행나무)과
웃말(손씨 대종가 뒤쪽)에서는 각기 고사를 지낸다. 오후 2~3시가 되면 양편에서 남녀노소, 양반, 상민을 가릴 것없이 모두 모여 줄을 당기는데 우선 "고"를 끼우는 데만 서너시간 걸린다. 막상 줄당기기는 해가 넘어갈 저녁에 시작하여 닭이 울기전에 끝나는것으로 되어있는데 대략
밤 12시면 끝난다. 줄의 굵기는 60여년전에는 9, 10세 되는 아동의 키를 넘을 정도로 굵었으나
요즈음은 짚을 구하기 어려워 점점 가늘어지는 형편이다. 줄을 당기는 중 힘이 모자랄 때는 웃말은 안계리 (지금은 댐으로 수몰되었지만 옛날에는 양동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었음) 동
민들에게, 아랫말은 인근 인동, 오금리 등지에 가서 지원을 요청한다. 이렇게 밤이 지새도록 이긴 줄은 밤 12시경이면 결판이 난다. 그동안 양편 주민들은 줄만 당기는것이 아니라 잠깐 집
안에 볼일이 있으면 다녀오기도 한다. 부인들은 한창 어두워질 때는 집에 돌아간다. 줄당기기
의 결과 웃말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말이 이기면 마을이 편해진다고 한다. 전자가 부와 풍
요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암줄과 숫줄은 줄을 당
길 때마다 교대로 바꾸어 하는 것이 특징이다. 줄당기기가 끝난 뒤, 이긴 편의 줄은 승자거나
패자이거나간에 토막토막 끊어 각자의 지붕에 얹는데 이렇게하면 집안이 모두 평안하다는 속
신에 의한 것이다. 이긴 줄은 특히 행랑채에 던져지고, 행랑채가 없으면 정침에 얹었는데, 이
것은 예전에는 머슴들이 하는 일이었다. 진줄은 도끼로 목을 끊어 연료로 파는데, 좋은 땔감이 되며 그 대금은 마을 공동의 수입으로 한다.
한가지 재미난 것은 아랫말과 웃말 어느 쪽이 이기든지 마을에는 모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는 기대의 문제이다. 흔히 다른 지역의 줄당기기의 경우, 동.서부 또는 암.수를 구분하여 어느
한편이 이기도록 내약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곳의 경우는 물질적 부(풍년을 기원)와 정
신적 안정(주민의 안녕)중 어느 한쪽을 기대함으로써 물질과 정신이 대비되고 있다. 한마디로
줄당기기는 풍요와 무사를 기원하는 민속놀이이다.
2. 호미씻기
삼복이 지나고 세벌 논을 다 맨 뒤 마을의 머슴들을 위한 행사이다. 그동안 농사를 제일 잘 지
은 집의 머슴을 뽑아 황소의 등에 거꾸로 태우고 주인집에 농악을 치며 간다. 주인은 이에 응
답하여 떡과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주고 온 마을의 머슴들은 장소를 정해 하루를 즐긴다. 이때
대농가(지주)의 지신 밟기를 해주기도 하는데 동사 - 안골 - 물봉골 - 동사의 순으로 돌아온다. 지신밟기는 원해서 하는 수도 있으며, 주인은 적당한 음식이나 현금을 준다. 이것은 머슴들의
행사이지만 그동안의 어려움을 상호이해, 격려하며 주인과 머슴이 일체감을 갖는 기회이기도
하다.
* 오시는 길
1. 시내버스
- 승하차 : 경주역에서 승차-> 양동마을 입구 하차->마을입구에서 마을까지 1.2km 도보
- 버스번호 : 200, 201~208, 212, 217 버스
- 운행회사 : 천마교통(0561)776-8905
한일교통(0561)772-4885
2. 승용차
- 경주역에서 22.2km 소요시간 30분
3. 항공편
- 포항공항 19km
- 대한항공 (0562)72-2000
- 아시아나 (0562)77-4000